<2023 철학학교 시즌1> 방법서설 후기

아렘
2023-03-10 01:12
631

   결석없이 모든 분이 참석한 가운데 두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 시간에는 김상환 교수의 briefing 을 거쳤지만 드디어 데카르트의 저작으로 직접 들어왔습니다.

   첫 시간에 이어 같은 층위에서 흔들거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대체로 두 측면에서 우리는 사정없이 흔들흔들 갈피를 못잡았습니다. 데카르트가 한 말에 치중하자는 세션파와 불가피하게 다른 필터를 들이대는 비세션파의 시선 충돌은 어김없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한 문장 한 문장 강독의 형식이 아닌 질문에서 질문으로 건너뛰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은 더더욱 불가피해 보입니다. 게다가  <방법서설>은 내용상 명증한 증명이나 논증이 따르지 않는 일방적인 정리 요약을 통한 일반인에 대한 안내서 형태를 띄고 있다보니 사정은 더 딱해졌습니다. 이 사정은 <방법서설>을 넘겨 <성찰>에 이르면 조금은 나아지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많이 나아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여깁니다.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압권은 ‘결단’이란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때문에 후기는 결단에 대한 제 일방적인 생각으로 갈음을 하고자 합니다. 두 시간 짜리 회의 하나 들어갔다 나오니 결단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 기억력 탓도 있으니 다들 댓글들로 저의 망각을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막판은 불꽃을 좀 피웠고 주인공은 여울아, 정군, 아렘이었습니다. 결단에 꽂혀 요지부동 주장을 굽히지 않은 여울아샘과 그거 너무 과한 생각이다로 일방 매도한 정군샘과 아렘의 설전은 사실 세미나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세미나 후 바삐 일을 준비중인 제게 여울아샘의 카톡 공세가 이어졌습니다. 인용과 주석을 들이대며, 저를 압박해 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단’이 짱이다, 어쩔래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에 저도 맞대응으로 그건 과하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단이 여러번 등장한다. 공부 열심히 하다가 공부 때려치우는 (실존적) 결단을 하고, 세상(그래봐야 유럽 몇 구석이지만)을 주유할 (실존적) 결단을 하고,  결국에는 은둔(네덜란드가 은둔인지는 논외로 치시지요)해서 철학을 할 (실존적)결단을 한다. 결단 많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그 결단들이 다 명석/판명이나 확실한 토대라는 근거로 정향되는 결단들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명석/판명이지 결단이라고 하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저는 이리 대답했습니다. 99.9% 틀렸다라는 제 주장을 굽히지 않은셈이지요. 실존 살리다 명석/판명 날리는 꼴은 못본다라는 주장인데, 저는 꼰대적 데카르트 해석에 머문셈입니다. 그런데 일 끝내고 카톡방을 쳐다보니 아마도 여울아샘은 정군샘에게도 도전을 감행하신 듯 하니 양쪽으로 전쟁을 치르느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셨던 모양입니다. 정군샘은 백기투항을 하신 모양입니다. 이쯤되면 이제 저 하나 남은 모양입니다. 음 조금은 외로워졌습니다. ㅎ

   첫 시간에 김상환교수의 초월론적 해석에 어리둥절도 했으니, 실존적 결단의 선구로 데카르트를 놓지 말란 법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유와 왜곡은 한끗 차이라는게 제 평소 소신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아마도 답은 결단과 명석판명의 중간쯤에서 날 수도 있겠지만, 궂이 제게 하나의 선택을 강요한다면 저는 정통적인 명석/판명 및 그가 천착했던 확실성쪽에 걸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그렇다는 것입니다.

   두 시간 했는데 지켜봐야 할 게 두 가지 생겼습니다. 데카르트를 초월론의 선구로 해석하는게 어느정도 개연성이 있는가라는 첫 번째 시간의 질문과 데카르트를 실존적 결단의 철학자로 자리매김하는게 어느정도 개연성이 있는가? 아직 저는 두 가지에 다 회의적입니다. 오픈으로 열어 놓은 그러니까 다루지 않은 문제를 자기 필터로 전유하는 후대 철학자들의 직업의식의 발로가 좀 과했단 생각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틀렸겠지요…. 경험상 맞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 같이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지요… 그러려고 아까운 시간 내서 같이 읽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시간까지는 <방법서설>로 몸을 풉니다. <성찰>까지는 계속 열어놓고 흔들거려 보시지요…. <성찰>이 낫다는 말은 아니지만,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젠 졸려서 후기 줄여야겠습니다.

댓글 24
  • 2023-03-10 08:53

    어제 그 세미나, 안 봐도 본 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들 고생하세유^^

  • 2023-03-10 09:36

    본격 댓글을 쓰기 전에 전 세션파라는 걸 미리 밝혀둡니다.

  • 2023-03-10 11:32

    때아닌 색깔론? ㅋㅋ 음… 데카르트는 대체로 별 드라마 없이 흘러갈 것 같았으나 두 번의 시간 모두 반전이 있어 무지 재미지군요. 게다가 후기 자체가 우리 세미나 시간에 대한 이토록 풍부한 조예 깊은 해석이라니… ㅎㅎ 양쪽 다 뜨겁게 응원합니다.

  • 2023-03-10 12:42

    제가 어제 뭔가 논의의 포인트가 살짝씩 빗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을 때 그게 셈나하다보면 점차 맞춰질 거라던 아렘샘 말씀이 카~ 맞았군요. 이제서야 데카르트의 핵심 문제인 확실성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드네요. 여울아샘의 '결단'을 계기로요. 자세한 건 모두들 참전하시면 본격적으로 뛰어들겠습니다^^

  • 2023-03-10 13:38

    으윽. 대전에 책도 노트북도 없이 와서...

    후기에 대해서만 말할게요.
    실존론적 결단?? 이게 뭔말인지 모르는데.. 제가 주장한 게 됐네요. 저는 수업시간에 남이 아니라, 관습과 선례가 아니라, "나로부터의 결단"이라는 뉘앙스가 1부/2부/3부를 넘길 때마다 글줄에서 발견됐다는 점을 얘기한 거구요.

    결단은 중요하지않다. 잘못 읽었다 하시기에, 주석들을 보내드렸어요. 역자도 확실하고 변함없는?? 결단이 중요한 테마라고 결단이 나올 때마다 주석을 달았던데.. 저같이 역자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저의 결단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생각하는)주체의 결단/주체적 결단이라고 불러주세요. 나로부터의 결단이란 의미에서요. ㅎㅎ

    "데카르트는 건조하다"고 누군가 세미나 시간에 말해줬던 것 같은데, 첫 시작부터 이성을 잘 사용해보겠다는 그의 결기에 찬 문장을 읽고 얼마나 놀랐던지... 철학사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잘 모르지만 또 그게 전부는 아닐 수 있겠다 싶습니다~

    • 2023-03-10 14:14

      그러니까 여울아샘 역시 '결단'이 확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는 말씀으로 읽혀요. 데카르트가 아니라 여울아샘의 의도에 대한 과한 해석이 된 셈인가요. ㅎ 여울아샘이 확실성보다도 결단이 중요하다는 말씀은 하신 것 같지 않으니까요. 사실 세미나 시간에는 저 역시 문제의 문장에서 '결단'이라는 말은 그저 판단에 대구를 이루는 말일 뿐 크게 중요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결단이라는 것조차 데카르트의 확실성에 대한 신념을 뒷받침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새롭습니다.

      아울러 도덕준칙 세 번쨰의 경우, (세션샘이 이 부분을 문제제기하신 내용을 제가 잘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는) 이것이 어쩌면 체념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인데 이것 역시 확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필연을 덕으로" 만들려면 필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테니까요. 역시 이 부분에서도 '확신'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네요.

      • 2023-03-10 14:17

        맞아요, 쌤. 어제부터 쌤이 저랑 의견이 계속 똑같습니다ㅋㅋㅋㅋ

      • 2023-03-10 15:04

        앗! 세션샘 질문에 대한 질문, 저도 방금 댓글로 올렸는데..ㅎㅎㅎ

  • 2023-03-10 13:59

    1601년작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투비오아낫투비.. 죽느냐 사느냐.. 로 해석되서 혹시 이런게 "실존적 결단"이란 걸까... 상상을 하게 되네요.
    신의 계시를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결단하는 초기 근대인의 자화상이 햄릿 아닐까.. 어쩌면 방법서설에서 결단이 중요하다고 주석을 달았던 역자 역시 17세기를 읽는 독법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햄릿이 아버지의 원수에게 복수를 결단하기까지 그는 샅샅이 살피고 또 확인(회의)하고 또 확인하고.. 나서야 드디어 "확신"에 찼을 때 엄마의 새 남편이자 자신의 숙부를 죽이는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그 결단에 이르기까지 햄릿이 결단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는 해설들을 읽을 때 좀 과한 해석이다 싶었거든요.

    지금 그게 제 모습인가요??

  • 2023-03-10 15:03

    아, 저는 쟁점이 뭔지 확실치 않아서 묻습니다. 데카르트에게 결단이 중요하냐, 확실성(명석판명)이 중요하냐가 쟁점인가요?

    각주 119의 결단은 "논리학을 구성하는 그 수많은 규정들 대신, 지키는 것에 단 한번도 소홀하지 않겠다는 확고하고 변함없는 결단만 한다면"의 결단이군요. 이 결단은 네가지 방법의 규칙을 지키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네 가지 방법을 어떤 경우에도 지키면서 진리를 탐구하겠다는 결단이지요. 저는 그 경우 결단은 일종의 철학하는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도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지식의 확실성을 지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난 진리가 아닌 건 절대 따르지 않겠어!" 이런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거든요.(이런건 직접 쓴 원전을 읽을 때만 알수있는 원전 읽기의 묘미인 것 같아요.)

    세미나에서 결단이 핫 이슈로 떠오르게 한 문제의 문장은 "이성이 내 판단들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동안, 내가 결코 내 행동들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에 있지 않도록,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가급적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입니다.
    첫번째 결단은 지식의 확실성을 확보했을 때만 이성은 결단할 수 있는데, 확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행동에서는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뭘 기준으로 결정하는게 가장 행복한가? 이런 거죠. 도덕 준칙은 그래서 가장 사려깊은 사람들의 선택을 따르고, 또 관습과 선례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결단은 이게 옳냐 저게 옳냐 따지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고 남들이 옳다고 하는 걸 따르겠노라는 것이죠.

    그런데 세션님이 세번째 준칙이 데카르트가 앞서 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냐고 한 질문이 저는 세미나때 잘 이해가 안 되었어요. 사실 전 후기가 올라오면 이걸 좀 생각해보고 세션님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셋째 준칙은 '운보다 나를 이기려고 하자'는 거잖아요. 그 이유를 데카르트는 '의지는 지성을 따른다'에서 찾아요. 지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세상을 내 맘대로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내 욕망을 바꾸는게 낫다고 말하는 거라고 저는 이해했어요. 그런 점에서 금욕주의의 결단과는 다른 것 같아 보여요. 이 말은 '의지는 지성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따른다'로 바꿀 수도 있겠지요. '의지는 지성을 따른다'는 '욕망은 지성을 따른다'로 말할 수 있고, 혹은 '실천적 결단은 지성을 따른다'로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저는 데카르트가 이성적 진리를 추구하되, 아직 뭐가 확실한지 잘 모르는 동안은 지성(사유)이 말하는대로 내 욕망을 조절하는게 낫다고 판단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보면 일관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 것이죠. 그점에서 데카르트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욕망이 아니라 섭리를 따르려 한 것을 상찬하고 있고요.

    • 2023-03-10 15:50

      네. 쌤 말씀이 맞아요. 어제 셈나 시간에 다시 보니까 상충되는게 아니라 일관되는 것 같더라고요ㅋ. 그래서 걍 넘어가자고 했죠. 은근슬쩍^^ 아마 스토아철학자의 '섭리를 따른다'를 '관습을 따른다'로 무의식 중에 생각한 듯 해요. 이현복쌤 논문에도 그렇게 나오죠. 방법의 규칙의 1원칙인 확실성으로부터 행동의 확신도 나온다고요. 다만 그렇다면 굳이 방법의 규칙과 도덕 준칙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지가 좀 헷갈리긴 하네요. 뭐 쨌든 전 대충 그리 정리했습니다. 어제 셈나 시간에 마저 다 이야기할 걸 그랬네요. 타자치려니 좀 힘들어요ㅠ 그리고 이 셈나를 안하시는 다른 문탁쌤들도 혹시 보신다면 좀 남사스럽네요ㅋ 세상 셈나는 철학학교 혼자 다 하는 듯

      • 2023-03-10 17:15

        이 철학학교 세미나의 묘미 중 하나는 밖에서 후기와 댓글만 읽고도 뭔지 알 것 같은 착각을 준다는..ㅋㅋㅋㅋ...
        그리고 그렇게 열띤 논쟁이 정말 중요한 거 맞나라는, 생각이 든다는...ㅎㅎㅎㅎ

  • 2023-03-10 15:56

    문제는 이게 '결단성'이라고 하면 보통은 '미래로 선구하는 결단' 같은 하이데거적인 의미가 실리곤 하기 때문에 아마 이와 같은 논란이 생긴 걸겁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아시다시피 '합리주의자'로서 이론적 명증성을 추구하는 분이다보니 '이런분이 결단을?' 같은 의문이 생기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검토를 완료한 상태의 '확실성'과 결부되면 데카르트도 충분히 '결단'할 수 있겠지요. (이성적) 확신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딱히 '쟁점'이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데카르트적 '결단'이 '실존적 결단'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테니말입니다.(그런데 또 여기에 '햄릿'이야기가 들어가면....)

    그건 그렇고 저는 어제 세미나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뭐 짐짓 데카르트 이야기를 처음 사람처럼,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었을 질문들을 했다고 생각하고요. 다만, 우리가 '질문'을 해결하는 식으로 진행을 하니, 복습은 필수일 겁니다. 세미나 과정 속에서 텍스트의 전체 상을 그려내지 않으니까요. 질문들과 답변들을 상기하면서 텍스트를 다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냥 <방법서설> 읽지 말걸 그랬어요. 성찰 1, 2권이나 읽을걸....

    • 2023-03-10 19:32

      햄릿 예로 든 건 확신과 결단이 결코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서 예로 든 거예요. 이걸 실존적 결단이라고 하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 2023-03-10 17:11

    음...죄송한데... 문제의 그 '결단'의 라틴어 원문이 뭔가요? 프랑스어 번역의 단어는? 또 영어 번역의 단어는?

    • 2023-03-10 17:19

      불어 resolution입니다. 방법서설은 애초에 불어로 쓴 글이고용

      • 2023-03-10 17:33

        아, 그렇구나. 난 너무나 당연히 라틴어로 썼을 거라구...내 맘대로 생각...ㅋㅋㅋ....
        난, 이제 불난집 부채질 그만하고 내 일 해야쥐^^

      • 2023-03-10 17:34

        불어를 보니 이게 좀 차이가 있네요. 하이데거 결단성의 결단은 Entschlossenheit여서 영어로는 determination이니까요. 이게 좀 애매한거 같은데 전자가 향동과 결부된 결의 같은거면 후자는 결정? 결심? 이 정도의 어감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 2023-03-10 19:18

    (밥당번하고 집에 와 한숨자고 일어나니 어제밤의 세미나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무서운 현장을 발견합니다! 댓글읽기도 벅찬ᆢ) 결단이란 단어가 일케 무서운 단어인지 첨 알았...

    방법규칙적 측면으로 데카르트적 결단을 생각해야하나 도덕준칙적으로 생각해야 하나 뭐ᆢ 그런 문제인가요? 또 긁적ᆢ ㅜ
    (나중에 공부방 최치열강쌤에게 일타강의 들어야겠어요)
    참고로, 저도 '세션파'로 결단! 결심?

  • 2023-03-11 11:54

    저도 방법서설을 읽었을 때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2부 둘째 준칙 - 결단적인 태도 부분(숲속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의 비유)이었습니다. 우유부단함을 경계하고
    이리저리 휩쓸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는 의미 정도로 읽었는데요. '결단' '자유'같은 단어는 언제나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 같습니다ㅎㅎ

    • 2023-03-11 12:27

      아! 재선샘 댓글을 보니, 데카르트가 (여울아샘 말씀처럼) 지속적으로 ‘결단’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데카르트적 윤리의 실현은 이성적 ‘확실성’이 확보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때의 ‘결단’은 무엇보다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일테고요. 이렇게 놓고 보면 김상환 샘 밀씀대로 데카르트가 칸트를 미리 선취한 느낌이 있네요.

  • 2023-03-12 09:28

    아...댓글을 읽다보니 세미나 번외편을 하는 듯 머리가 아파오네요 ㅎㅎ. 49쪽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우리 의지는 우리 지성이 그 의지에 좋은 것으로 혹은 나쁜 것으로 재현하는 것에 따라서만 어떤 것을 추구하지도 기피하지도 않기 마련이어서, 잘 행하기 위해서는 잘 판단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또 가장 잘 행하기 위해서도, 다시 말해 모든 덕들 그리고 동시에 획득가능한 다른 모든 선들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가장 잘 판단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전 사실 이 문장때문에 데카르트에게는 명석판명한 것이 제일 중요하고, 의지는 다만 거들 뿐이라고 해석했어요. 결단은 중요한 개념이지만, 결단의 90%는 명석판명이고 의지는 10% 느낌?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제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수업 후에도 아렘샘과 정군샘에게 카톡대전을 벌이신 여울아샘의 공부에 대한 열정입니다. 멋져요!

  • 2023-03-13 09:19

    휴~ 여기에 댓글을 다는데 결단이 필요하군요. 주말 내내 집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가끔 들어와보면 뭔가 대단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제가 책을 펴볼 엄두가 안나서, 댓글을 달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형은샘 댓글까지 달린 거 보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댓글 답니다.

  • 2023-03-14 10:28

    아.. 재밌네요. 다들 데카르트의 영향인가요? 뭔가 결단하고 있군요. resolution을 영영으로 찾아보면 to do or not to do의 문제이고, 설명 중에 after a vote, 선택한 후 결정하는 것이라고 나와요. 우리 한자로 결단은 결정적인 판단, 즉 사유에 의한 판단에 중점을 둔 용어인데, 영미권자들은 선택의 문제로 봤던 건가 싶기도 해요. 그래서 지금 뭔가 the vote해야 할 것 같은 건가요? ㅎㅎ
    그렇다면 저의 선택은 유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확신이 의지적으로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확신하고 나서 자연스럽게(의지없이) 결과론적으로 결정(혹은 선택) 당하는 것인지.. 데카르트의 결단에서 의지의 유무, 역할에 대해서 어떤 쪽인지 지난 주부터 아직 the vote를 못했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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