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시즌3 5장 3-4절 후기

매실
2022-11-01 18:19
252

 

<차이와 반복> 강독이 후반부로 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으며,  텍스트의 쪼가리 하나를 붙잡고 질질 끌려가는 거 같고,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 같은데, 매번 새로워서 너무 괴롭다. 요즘 나는 어서 빨리 결론이나 들어갔으면 좋겠다, 85%의 분량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론에서라도 뭐라도 알아 먹고 싶다는 마음 뿐이다. 요약을 원한다. 아마도 이런 기대는 보나마나 배신 당하겠지만. 

5장의 3-4절에서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뭔지는 몰라도 자주 들어보았던 '강도'에 대해 상세하게 나왔다.  후기를 쓰려고 책을 다시 읽으려니 너무나 괴로워서 제임스 윌리엄스의 해설서를 읽어보았다. 해설서를 읽으니 행복해진다. 원전을 다른 분들처럼 꼭꼭 씹어먹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들뢰즈씨를 너무나 미워하게 되어서 차이와 반복 강독이 끝나면 쳐다도 안 보고 냅다 버려버릴 거 같아(나는 망각을 잘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절대 안 쳐다볼 자신 있다.)  애정을 남기기 위해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건 제임스 윌리엄스의 해설에 기댄 후기다. 질, 주름운동, 카르노 기관, 칸트의 표상...아, 모르겠다. 그냥 쉬운 말로 일단은 퉁쳐보자.  

(휴, 일단 징징거림으로 후기의 1/3을 채웠다) 

 

 

 

들뢰즈는 이전까지 내내 '문제'에 대해서 우린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말고 거기에서 사유를 끌어내야 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촉발하는,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강도 역시도 동일화나 재인이 가능한 것으로 사유하지 말고, "개별자에 의해 감각 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강도는 수치 가능한 거리, 깊이, 수와는 다르며, "변화의 과정 속에 포착되는 사태"라는 거다. 무엇이 개별자에게 의미있다면, 그건 왜 그런가? 강도가 있어서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깊이의 강도가 개별자들에게 연장을 '기호'로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특정 길이나 거리가 있어서 강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깊이'가 만들어지며 우리는 무언가를 감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맞나?) 그러기 위해 들뢰즈는 깊이의 표현으로 구성되는 '바탕'을 말한다. 이건 원근법과 같이 거리가 명확히 보이는 배경이 아니다. 오히려 '음영'에 가깝다. 정리해보자면 우리는 깊이나 거리를 판단할 때 대상의 크기보다는 그 깊이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그 깊이는 감각의 강도이다. 이걸로 우린 거리를 지각한다.

 

그래서 "강도는 감각 불가능한 것인 동시에 오로지 감각 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강도는 대상이나 연장에서는 감각 불가능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지각은 되어야(감각 밖에 될 수 없는) 하는 것이다. 강도는 대상에 따라 개별자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 정말 초단순하게 이해해서 <차이와 반복> 텍스트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읽는 '강도'도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 이렇게 정리해버려도 되는 것인가.ㅋㅋ) 

 

 

강도의 성질은 다음과 같다. 1)즉자적 비동등성을 포함한다. 숫자 예시는 정말 이해불가인데 제임스 윌리엄스는 자연수 계열에서 2는 실수 계열에서 2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한 것 정도로만 대충 이해했다. 2) 강도는 차이를 긍정한다. 규모가 아니다. 3)강도들은 동일한 순수 차이남으로 남지만 전체적 배치는 계속 변화한다. 강도는 측정가능 한 것이 아니다.

 

이 밖에 감성적, 감각적이라는 말의 차이도 세미나 시간에 정리를 해보았는데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경험적 : 외연적 / 감성적 존재자 -인식 대상 대상 / 감각될 수 없는 것 / 대립, 상반
초월적 : 강도적인 것 / 감성적인 것의 존재 - 포착 불가능한 존재 자체 / 감각 밖에 될 수 없는 것

 

영원회귀와 강도량들의 윤리학까지는 좀 정리가 안 되네요. 이 부분은 다른 분들의 댓글을 기대어봅니다....^^  

 

 

 

 

 

 

 

 

댓글 2
  • 2022-11-02 10:32

    지난 시간 1부에서는 세션님의 활약이 눈부셨어요.(그 부분을 녹화를 못해서 호수샘과 아렘샘에게 죄송한 마음이.. 흑흑) 열역학과 지질학 그리고 생물학을 종횡무진 횡단하며 들뢰즈의 논증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려는 세션님에게 감탄했고,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강도를 설명하는 핵심 용어인 '깊이'를 지질학으로 이해해 보자는 것이었어요. 침식, 침강, 융기와 같은 매번 차이나는 운동(함축하는 것)이 강도이고, 그것이 존재(지형)에 함축된 것이 깊이라고 이해하고 싶더라고요. 강도가 감각불가능한 동시에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이고, 깊이가 지각불가능한 동시에 지각밖에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강도와 깊이는 다른 것이지만 이 둘은 또한 분리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니까요.(불가능이 세 번이나 나오니 쓰면서도 허걱!합니다.^^) 또 이 운동들이 바로 안주름이고 안주름운동이라고 하면 뭔가 알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엔트로피와 관련해서는 카르노 기관 등에 대한 유투브 강의가 많다고 해서 찾아 보았습니다만, 아직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무튼 이와 관련해서 클라우지우스와 볼츠만의 엔트로피 공식이 있는데, 이 공식들은 기체분자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운동한다는 전제 하에 성립된 공식이라고 세션님이 말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전제 자체가 어떤 가상이라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군요. 막연히 생각컨대 실험과 수학으로 표현되는 과학적 법칙(자연법칙)도 어떤 '가상'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들뢰즈가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날 진리의 기준이 되는 과학조차 초월론적 가상 위에 서 있는 것이라면, 철학은 그것을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는 것 같군요. 바로 그것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 들뢰즈의 개념인 '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형상이 바탕으로부터 솟아오를 수 있는 것은 그 아래에 밑바탕, 깊이, 우글거리는 차이로서의 강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강도량은 외연량과 달리 동일한 척도가 없는 것입니다. 외연량은 분할되면서도 본성이 변하지 않지만(가령 연장의 크기와 연장을 뒤덮고 있는 질료의 성질), 강도량은 분할되지만 그 분할은 본성의 변화와 함께 일어납니다. 세미나에서는 체온 36.5도와 37.5도는 비록 숫자로 표시하지만, 그 차이는 기수로서의 1의 차이가 아니라 서수적 차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강도는 감각불가능하지만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으로, 차이의 차이로 존재한다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우리는 흔히 강도량의 존재를 외연량의 존재인 것처럼 퉁치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겠지요.(하지만, 들뢰즈는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골치아픈 논쟁과 거기에 등장하는 철학사와 과학사의 수많은 개념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들뢰즈를 읽으면 차이의 긍정이 아니라 읽기의 무능력에 대한 슬픔의 감정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또한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어떤 폭력이자 잔혹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늘 이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요.ㅠ)
    그렇다면 강도량의 윤리학이란 대체 뭔 말일까요? 지금까지 우리에게 윤리학은 언제나 주체의 윤리학이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강도량의 윤리라는 말이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이제 이념과 강도를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들뢰즈의 윤리학이 등장하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우리 세미나에서 정군샘과 아렘샘이 가열차게 문제제기해온 윤리의 문제 말입니다. 저는 강도량의 윤리학의 원리보다 오히려 강도량의 윤리학으로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에 꽂혔는데요. 그건 주체와 자아를 떠난 윤리학을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4장에서 말해온 이념과 5장의 강도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밝혀지지 않으면 강도의 윤리학을 말하는 것도 뭔가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5절과 6절을 읽어보니 뭔지 잘 모르긴 하지만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네요.
    코끼리 뒷다리 만지는 것처럼 읽고 있는 이 책도 이제 끝나가고 있네요. 매실샘이 얼른 결론을 읽고 싶다고 말한 것에 격하게 공감이 됩니다. 알든 모르든 일단 얼른 읽어 치우고 잊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같겠지만, 그래도 우리 각자가 감각밖에 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있겠지요? 하하하 그것이 어떻게 사유밖에 할 수 없는 그 무엇과 만나게 될지, 에휴.. 저 역시 푸념으로 이 댓글을 끝맺게 되네요.(대체, 제가 뭔 말을 이렇게 길게 썼는지, 왜 그랬는지, 그저 애매하고 혼잡하기만 합니다.ㅎ)

  • 2022-11-02 15:42

    요요샘도 결론 부분을 ?
    저도 희망을 가져봅니다. 설명도 없이 다른 사람을 데려오지 말고, 자기 얘기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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