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차이와반복>읽기 시즌2 2장4절-2 요약 모음

정군
2022-07-05 11:15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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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7
  • 2022-07-05 11:16

    지난주 요약이 대단히 미진했던 관계로 다시 했습니다.


    부분대상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이론'에서 유아가 처음 관계 맺는 대상. 유아는 대상을 '전체'로서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부분'과 관계 맺음. 생후 4개월까지 그렇다고 함. 들뢰즈의 맥락에 따르면 그러한 '부분대상'들이 '허상들의 세계'와 관련이 있음. 그 이후, 전체로서 대상을 대면하면서 자신이 애착을 느끼는 전체 대상인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울적 상태'에 들어감. 이때, 그것을 잃게 만드는 대상에 대한 '환상'이 발생하는 데, 그게 '나쁜 대상'임. 이 과정 속에서도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이 '전체'로 결합되고, 그러므로써 '양가감정'이 발생함. 그렇게 '좋으면서도 나쁜 대상'이 생겨나는 것.

     

    부분대상의 '박혀있음'
    유아는 (잠재적 대상)인 엄지를 빠는 동안 엄마의 가슴을 '표상'하는 것이 아님. '표상'이 되려면 전체대상이 엄마로부터 가슴을 분리해 내야 하는 데 아직 '전체'를 구성할 수 없는 상태. 그런 의미에서 '부분대상'은 '현실적 대상'의 일부가 아님. 따라서 이때 엄마의 가슴, 손 등은 유아가 빠는 잠재적 대상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님. 차라리 그것은 유아의 운동-행위의 이미지라고 봐야 함. 유아는 아직 '전체 대상'의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자신을 만족시켰던 '행위'만을 떠올리는 것. 그렇게 습관-기억이 발달하기 시작함. 다시 말해 유아에게 있어서는 '인식'보다 '반복'이 생존에 유리함.
    손을 빠는 유아에게 '손-잠재적 대상'은 이 대상 안에 부재하는 반쪽(현실적 대상, 자기보존욕구의 상관항, 전체대상)이 있음을 증언함. 바로 그것들이 엄마의 몸에 '박혀'있는 것-합체. 성욕(손빨기를 통한 만족)이 현실적 대상의 계열(엄마의 몸에 박혀있는 잠재적 대상들)로, 외부로부터 현실원칙의 지배영역 안으로 통합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합체'는 그런 의미.

     

    베르그손의 도식-생물심리학적 개체화의 장-잠재성의 장
    이 도식은 두 극을 표현하는 데, 한쪽은 잠재적 대상(회상-이미지, 손빨기)의 계열을, 다른 한쪽은 현실적 대상(지각-이미지, 박혀있는 신체)의 계열을 보여준다. 각각의 계열은 반대쪽 계열을 조직한다. 만약 '순수 과거'가 고유한 현재에 동시간적이고, 지나가는 현재에 앞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재'가 지나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다시 말해, 잠재적인 것이 '현재'를 지나가게 해준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현실적 대상(지각-이미지)'에서 잘라낸 '잠재적 대상(회상-이미지)'는 전자에 대해서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다고 함. 다시 말해 이 말은 '잠재적 대상'이 포괄하는 범위*가 '현실적 대상'에 비해 넓다는 말임. 만약 이 '부재'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라면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함. 잠재적 대상이 그것을 지닌 자들(현실적 대상)에 소유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지니지 않은 자들에게 소유되어 있다는 것은 이것이 '현실'보다 훨씬 큰 범위에서 현실과 함께 공속-내속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결여'되어 있지만, '결여'를 지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넓은 것 아닐까?

     

    라캉의 포 <도둑맞은 편지> 분석
    이하에서 이어지는 라캉의 포 분석에 대한 논평이 의도하는 것은 앞서 도출된 '잠재성의 장-순수과거'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임. '현실원칙'에 적용을 받는 현실적 대상들은 '있거나/없음'의 규칙 아래 종속되어 있지만, 잠재적 대상은 '있으면서도 없는'(결여되지 않았으나, 결여되어 있고, 그 자체로 결여되어 있음) 속성을 갖는다. '제자리에 없음'은 제자리에 없을 뿐 있는 것이고, 그것은 자리바꿈 속에서 실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의 밑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은 현재 안에 있으면서 과거적이고(자리가 바뀌었네!), 과거적이면서 현재적(여기 있나?)이다.

    • 2022-07-06 15:07

      제가 찾아 보려고 메모해놓은것들을 쌤이 미리 다 정리해놓으셔서(감사하게도) 쌤 메모 보며 공부중임다.

      근데 보통 생물학에서 개체화는 배아에서 개체로의 발생과정을 의미하죠. 이 챕터에선 생물심리학적 삶이 개체화의 장을 함축한다고 했고요. 제 느낌과는 갭이 좀 있는데요. 심리학적 삶의 개체화 과정들이 (뒤에가서 나오는진 모르겠지만) 이를테면  뭐 연장, 앞에서 말씀드린 개체발생 같은 것에도 적용되는 걸까요? 물론 뒤에서 따로 연장과 질을 구별한 개체화를 설명하는 방식은 아마도 아닐 것 같긴 하지만요.

      • 2022-07-06 16:12

        저도 그 점이 궁금합니다. ㅎㅎ 가령 들뢰즈가 '옷입은 반복'을 '정신'에 대응시키고, '헐벗은 반복'을 '물질'에 대응시키는데(물질적 반복과 정신적 반복, 199쪽) 저는 이게 사실 납득이 가면서도 잘 납득이 가지 않았거든요. '납득이 가는 쪽'에서 보자면 '현행적 현재들' 그러니까, 물질적인 것들은 어차피 이미 '위장된 것'으로 드러나는 것들이고, 동시적인 '잠재적 대상들'과의 관계에 따라 새로운 현재로 옮겨가는 것이니 '헐벗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납득이 안 되는 쪽'에서 보면, 선생님 말씀처럼, '배아' 같은 건 그야말로 잠재적인 것으로 수축된 것인데 그건 이 도식에 따라 설명이 안 되잖아요? 심지어 그것은 '생물-물리적'인 것임에도요. 그렇게 놓고보면 여기서, 숨어있는 다른 구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관화된 유기체'와 '기관화 이전의 세포'로요. 말하자면 이미 기관 있게된 신체들 이전의 수준은 '생물학적 삶이 개체화의 장'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정신/연장의 구분 보다 개체/개체 이전이라는 구분이 들뢰즈 한테는 더 중요한 구분인 것 같아요. 애벌레 자아의 수준에서는 애초에 물질-정신의 구분이 없다는 것도 그걸 보여주는 것 같고요. '배아'가 <천개의 고원>(이었는지 <안티오이디푸스>였는지 여하간 무슨 '알'이야기 나오는 데가 있었는데....)에 등장할 때는 말 그대로 생명체의 '개체화'로 나오는 걸 보면, 들뢰즈의 문제설정이 정신-연장 이분법 속에 있지 않다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뭔소리를 하는 건지 뒤죽박죽이네요. ㅎㅎㅎ

  • 2022-07-05 18:23

    아..요약이 뒷부분이니 앞부분을 다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가 생기는군요. 요약 지각할 거 같아 미리 신고합니다.ㅠ_ ㅠ (4절 처음부터 다시 읽는 중..이에요.;;;) 

  • 2022-07-06 13:31

    라캉 용어 정리

     

    팔루스
    프로이트는 남근선망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라캉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남근을 팔루스로 해석한다. 라캉에게 팔루스란 주체의 결핍, 공허감을 채워준다고 가정되는 무엇의 상징이다. 팔루스와 남근은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남근이라는 생물학적 기관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남근과 무관한 개념은 아니지만 라캉은 그것을 좁은 의미의 남근, 즉 생물학적 의미의 남근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 팔루스는 주체의 결여를 매워준다고 가정되는 어떤 권능적인 무억의 상징, 즉 기표다.
    라캉의 기표이론이 말하듯이 모든 기표는 궁극적으로 무를 지시한다. 따라서 라캉에게 팔루스는 궁극적으로 결힙을 채워주는 것의 상징이 아니라 결핍 자체의 상징이다.

    팔루스-차이-결여 자체의 상징
    생물학적 남근이라기보다는 '상징으로서의 팔루스'

     

    욕구-욕망
    욕구 : 인간이 가진 자연적 생물학적 본능에 상응하는 개념.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

    욕망 : '타자의 욕망' 1)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 특히 타자의 '완벽한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 : 요구(예: 생물학적 필요의 대상으로서의 젖 이상의 것, 완벽한 보살핌과 사랑) 2)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속에서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욕망. 예 : 부모의 욕망이 아이에게 전이되는 경우. 이때 '주체'에게 '소외'가 일어남. 그러한 병리적 결과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함.

    라캉에게 '욕망'은 '요구'(완벽한 사랑)에서 '욕구'(생존본능)를 뺀 것으로 정의 됨.

  • 2022-07-06 20:16

    ** 앞부분 종합들의 요약 부분이고 세번째 종합 넘어가는 대목도 다음 단락이 더 중요하고 해서 이 부분은 걍 기계적으로 간단히 정리만 했습니다.

    구판p 246-248요약

    1.첫번째 종합과 두번째 종합의 요악

    첫번째는 하비투스의 종합이다. 이드의 첫번째 층위에서는 흥분과 자극의 국소적, 분산적 해소가 일어나고 두번째 층위에서는 묶기와 리비도 집중이 일어난다. 두번째 층위에서 통합으로서 수동적 종합이 발생한다. 하비투스의 종합은 상호 보충적인 두 방향에서 쾌락원칙의 '정초'를 보장한다. 하나는 이 종합에서 쾌락이 일반적 가치를 획득하고 이드 안의 심리적 삶의 최종 심급이 된다는 것, 다음은 각각의 수동적 자아가 나르키소스적 이미지로 가득 찬다는 것이다. 

    두번째 종합은 에로스-므네모시네의 종합이다. 이종합의 반복은 위장과 전치이며 쾌락원칙의 ‘근거’로서 기능한다. 이 종합에서의 수동적 종합은 두 방향에서 주어진다. 하나는 능동적 종합과 능동적 자아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현재의 종합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심화되어 다다르는 두번째 수동적 종합으로 나르키소스적 만족감의 강화와 함께 잠재적 대상들의 응시와 관계를 맺는 과거의 종합이다. 여기서 충동도 분화되는데 충동이 현실의 능동적 노선을 따를 때는 자기보존 충동으로, 새롭게 수동적 깊이를 획득할 때에는 성적 충동으로 나타난다. 두번째 수동적 종합에서는 그 자체로 반복의 요소인 전치를 통해 잠재적 대상이 상징적 변용을 겪고, 위장을 통해서 현실적 대상들이 상상적 변용을 겪는다.

     2. 프로이트와 들뢰즈에서 차이와 반복의 관계

    프로이트는 에로스의 관점에서 차이와 반복을 이야기할 때 한편으론 반복은 차이가 무화된 것이라고 하면서 차이와 반복을 대립시키고, 다른 한편으론 에로스가 새로운 차이를 생산한다고 하면서 차이와 반복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대립시키지 않고 반복이 차이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들뢰즈에서 에로스는 반복의 힘을 므네모시네의 차이의 역량에서 빌려온다. 이런 에로스적 반복은 잠재적 대상들을 변용시키고 그로인한 기억의 과다는 ‘본적 없음’을 ‘이미 본 상태’로 만든다. (자네의 예) 이렇게 계속되는 ‘반복’은 다시 친근한 낯섦의 ‘차이’를 남긴다. 차이-반복-다시 차이…

     

     

     

     

  • 2022-07-06 22:58

    239~43

     

    *잠재적 대상은 어떤 특정한 현재와 동시간적인 가운데 과거적이라는 면에서 순수 과거의 과거성을 띤다(235쪽). 들뢰즈는 이 점을 중심으로 프로이트의 개념들(억압, 전치, 위장 등)을 자신의 세 가지 종합에 적용해 다시 풀어낸다. 

     

    사라진 현재(이를테면 트라우마가 발생한 지나간 현재)는 현행적인 현재에 독립적인 원초적 항이 아니다. 이 둘은 <'또다른 본성'의 잠재적 대상과 관계하며 '공존'하는 두 현실적 계열>이다. 잠재적 대상은 두 계열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자리를 바꾼다. 반복은 그 사이에서 구성된다. 이 잠재적 대상의 자리바꿈, 즉 전치는 어떤 원리에 해당하는 위장이며, 이 원리를 통해 반복은 현실 안에서 비로소 위장된 반복으로 태어난다. 반복은 오로지 위장들과 더불어, 그리고 그 위장들 안에서만 구성되고 이 위장들은 현실적 계열들의 항과 관계들에 영향을 미친다.
    (프로이트는 위장이 억압의 과정에서 나왔다고 설명했겠지만) 위장이 억압에 앞선다. 반복은 전치라는 원리에 힘입어 필연적으로 위장된다. 억압은 위장의 과정에서 현재들의 표상과 관련해 산출된 것이다.
    궁극적이거나 근원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어떤 고정된 항은 없다. 사라진 현재나 현행적 현재나 원초적인 것도 아니고 파생적인 것도 아니다. 두 현재는 잠재적 대상을 중심으로 서로 공존하는 두 계열을 형성하고, 이 잠재적 대상은 이 계열들 안에서, 또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리를 바꾼다. 이 두 계열을 통해 상이한 항과 주체들은 복잡한 상호주관성(주관들의 사이)에서 유희 관계에 놓인다. 각 주체는 잠재적 대상과의 관계 안에서 차지하는 무시간적 위치에 따라 결정된 역할과 기능을 떠맡는다.
    잠재적 대상은 언제나 자기 자리에 없는 것이며, 본성적으로 자기동일성을 결여하고 표상에서 벗어난다. 엄마는 잠재적 대상이 위장한 모습, 즉 가면의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 2022-07-06 23:23

    237~239

    제대로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는 부분이다. 읽기 능력의 부족때문이기도 하지만, 헐벗은 반복과 참된 반복의 명쾌한(?) 이분법, 표상(은 표상하는 주체를 함축한다)만 들이대면 후져지는 한쪽들…그런 들뢰즈의 이분법이 슬슬 지겨워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거기다 프로이트/라캉만 나오면 미로를 헤멘다. 부족한대로 다른 샘들 의견을 들으며 그럭저럭 따라가보자.

     

    들뢰즈의 (참된) 반복은 두 현재 사이에서 즉, 현행적 현재에서 사라진 현재로 이행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237), 이 현재들이 잠재적 대상을 중심으로 형성하는 두 계열 사이에서 일어난다. (호수샘 부분, 240)

    그러니까 아렘의 반복 부분은 후진 반복이고 호수샘의 반복 부분은 참된 반복이다. 곳곳에 나오는 후진 이유를 요약해보면  이 반복은 현행적 현재와 사라진 현재 사이에서 구성되는, 같음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는 물질적이고 김빠지고 헐벗은 반복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다루는 반복강박을 예로 들어보자. 비록 사라진 현재와 새로운 현재가 구별되는 것처럼(차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위장과 전치들에 의해 우리가 혼란을 겪고 있을 따름이다. 차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 기형화는 반복에 덧붙여진(2차적인) 것일 뿐이고(238위), 없으면서 있는 것(팔루스같은것)으로 속기 쉬운 상상력이 개입한다고 해도 이런 것들은 다 위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238 아래) 반복강박으로 반복을 보여주는 듯한 정신분석학 이론들은 그래서 여전히 본질적으로 사실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이며 주관주의적이다. 사실주의적이라 함은 모든 것을 현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며, 유물론적이라 함은 고착, 퇴행에 의해 조건지어진 함은 김빠진(헐벗은) 반복이기 때문이며, 주관주의적이라 함은 반복의 항들이 주체의 표상들로 간주될 뿐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필살기가 또 등장한다. 정신 분석학 이론이 내세우는 반복도 표상의 한계에, 동일성 및 유사성의 규칙에 종속되어 있다. 그들이 현실적인 실제 사실들에 상상적인 것의 권리들을 대립시켰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어떤 궁극적인 혹은 원초적인 심리적 실재에 기댄다. (239 중간) 여전히 동일성이나 이것에서 파생된 유비에 의지하는 어떤 정신에 기대는 것이다. 이들의 정신(무의식)도 유아론적 주체의 표상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 2022-07-07 08:02

    (243~245p)무의식의 본성에 대한 귀결들: 무의식은 계열적이고 미분적이며 물음을 던진다

     

    들뢰즈에게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억압과 충동, 대립과 갈등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다. 전치와 위장이라는 미묘한 메커니즘의 결과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들(243p)은 244p에서 말하는 욕망들인 것 같다. 이런 힘들이 자연스럽게 어떤 대립 관계로 유입되는 과정은 미분적 요소들로부터 시작된다는 문장이 있는데, 여기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아무튼 욕망은 부정과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물음을 던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어떤 탐색의 힘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욕구와 욕망의 다른 점이다. 앞서 현실의 계열은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라는 두 계열을 의미하는데, 무의식은 이런 현실 계열들과의 관계에서 위장되고 전치되어 드러난다.(교감/교신) 들뢰즈에게 무의식은 충동이 아니라 문제와 물음의 근원지이다. 

  • 2022-07-07 08:57

    (구판 244쪽부터) 

     

    앞에서 물음은 잠재성과 욕망의 장이라고 했다. 이런 물음은 부정적인 것의 비-존재(A, notA 로 나누는 동일성)가 아니라 물음의 (비)-존재(물음은 답이 아니다)를 발견한다. 즉 궁극적인 대답이나 해답은 없다. 있다면 오로지 물음-문제만 있다. 어떤 답을 내기 전엔 물음-문제만 있다. 모든 가면들들 뒤엔 진짜 얼굴이 따로 있지 않고 여전히 가면이 있다.(241-가면들 뒤엔 여전히 가면이 있다.) 그리고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가면은 전치(자리바꿈)인데 이것 역시 장소 뒤에 진짜 장소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또 배후의 자리바꿈이다. 삶과 죽음, 사랑, 성차가 과학적 해답으로 나올 순 없다. 이걸 물음-문제로 봐야 한다.

    문제들은 영원한 위장(가면)이고, 이건 신경증 환자가 묻는 것이며, (보다 심층적으로) 물음은 영원한 전치(자리바꿈)이이며 이건 정신병 환자가 묻는 것이며 그들은 여기에서 유일한 답변과 대답을 얻으며 고통과 수난을 겪는다. 여기에서는 거짓이 위장이나 전치의 고유한 공간이 되는 어떤 조건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신경증 - 라캉이 보기엔 다 신경증.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잘 못 겪는 사람들
    *정신병 - 들뢰즈가 보기엔 더 근본적인 '물음'을 겪는 사람들

    사이비(프셰도/자리바꿈의 다른 표현?)는 해결되지 않는 바탕을 자유하고 목적론으로 표현되지 않다. 차이와 반복(!!)의 이상적 형식만 있다. 차이는 대답이라는 동일성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물음의 반복 이외에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앞서 나온 자리 자리에서 부재함으로서만 있는다는 말과 등치됨)

    문제와 물음은 무의식에 속하고 무의식이 문제와 물음을 제기한다. 여기에서 우린 또 쉽게 물을 수 있다. 무의식은 대립되는 표상이 아니라 분화된(미분적, 차이와 반복) 미세 지각들의 무의식인가? 이런 물음은 칸트, 라이프니츠적(미분, 전통 사이의 논쟁처럼 보인다.

    프로이트는 후기 만트주의-대립적 무의식에 있다면, 들뢰즈는 무의식도 그냥 무의식이 아니라 미분적이고 미세지각(라이프니치로부터 착안한 것)이라고 말한다. 들뢰즈는 무의식을 제한이나 대립의 비-존재로 보지 않고 물음이나 문제의 (비)-존재와 관계한다. 부정의 방식을 모두 거부한다. 무의식은 아니요를 모른다. 무의식은 대립이나 의식이 도출하는 총체적 효과들로 환원될 수 없다.

     

  • 2022-07-07 09:06

    매우 도식적이긴 하나...너무 헷갈려서 정리해보았는데 쪼끔은 낫더라고요. (이거 한다고 어제 5시간 밖에 못잤..) 

     

     

     

     

    • 2022-07-07 11:28

      세상에나, 넘 애쓰셨겠어요. 잘 볼게요~~

    • 2022-07-07 14:03

      매실님, 대단대단!

      저도 자세히 읽어봐야겠네요...

      • 2022-07-07 16:02

        뭔가 한땀한땀 장인정신의 강박이 느껴지는… ㅎ. 잘보겠습니다. 

    • 2022-07-07 16:57

      와.. 👏

  • 2022-07-07 12:51

    구판 235p

    "바로 이런 것이 에로스와 므네모시네의 연관 관계이다." 에로스는 순수과거에서 잠재적 대상들을 '탈취'하고 우리는 그 대상들을 체험한다. 잠재적/부분적 대상들 가운데 라캉은 상징적 기관인 '팔루스'를 발견한다. 만일 팔루스에 (모든 잠재적 대상을 포섭하는)외연을 부여할 수 있다면, 이는 이것이 앞에서 나온 특성들-자신의 고유한 부재를 증언하고, 자신에 대해 본질적으로 자리를 바꾸며 잃어버린 것으로만 발견되고, 분신 안에서 동일성을 잃은 단편적인 존재자로 발견되는 등-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팔루스는 엄마쪽에서만 탐색되고 발견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팔루스는 장소를 바꾼다는 역설적인, '페니스'를 가진 이들이 아닌 가지지 않은 이들에 의해 '소유'된다. 상징적 팔루스는 또한 순수과거의 에로스적 양태를 뜻한다. 상징은 언제나 자리를 바꾸며 결코 현재였던적 없는 어떤 과거, "대상=x에 대해 타당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잠재적 대상들이 그 자체로 상징적인 요소를 전재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2022-07-07 15:41

    요약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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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 | 2024.02.19 | 조회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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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철학에서 '트란스첸덴탈'의 번역에 대해-1 (1)
세븐 | 2024.02.18 | 조회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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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철학학교 1회차 후기: 칸트, 내겐 너무 어려운 그에게 한 걸음... (6)
봄날 | 2024.02.16 | 조회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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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순수이성비판 1주차 질문들 (10)
정군 | 2024.02.14 | 조회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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