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반복> 시즌2 일곱번째 후기

요요
2022-07-02 18:47
420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세미나 후에 지난 시간에 뭐 읽었더라 되돌아보는 시간이 저는 좋아요. 세미나 전에 후다닥 다음주 분량을 읽어야한다는 흥분이 일시적으로 해소되면서 좀 느긋해지는 시간이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세미나 후에 누리는 쾌락적 시간이라고 할 수도..^^ 아마 읽는 분량이 많지 않다 보니 이런 호사도 누릴 수 있는 것 같네요. 물론 그래도 세미나를 앞두고 에습할 때는 난생 처음 읽는 내용이다 보니 뭔 말이지? 정신 차리고 읽자! 그러면서 긴장감이 상승하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지난 세미나 말미에 시즌3과 4에서는 진행방식을 좀 바꾸어보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서 그런지 이 시간이 더 소중하고 아깝군요. ㅎㅎ 그래서 저는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후기 대신 욕먹을지도 모르는, 자기 만족적 복습으로 갑니다. 재미난 후기를 기다린 분들께는 죄송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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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장 4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2장의 1절~3절은 시간의 수동적 종합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요. 4절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들의 응용편 혹은 실전편이라고 이해하고 싶네요.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세가지 종합을 통해 들뢰즈 스타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공부한 것은 그 중에서도 첫번째 종합과 두번째 종합 일부 입니다. 두번째 종합은 일단 시작만 했고, 잠재적 대상과 과거를 연결해서 논하는 부분은 다음 주에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 같습니다. 

 

4절은 "생물 심리학적 삶은 어떤 개체화의 장을 함축한다"는 함축적인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개체화의 장을 함축하는 생물 심리학적 삶에 대해 시간의 세가지 종합을 이야기해보겠다, 뭐 이 정도로 읽어도 되겠지요? 여기서 문제적 개념은 개체화의 장입니다. 개체화란 개체 이전의 상태에서 개체로 나아가는 과정, 혹은 그런 것이 펼쳐지는 장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생물심리학적 삶을 첫번째 종합에서 두번째 종합을 거쳐 세번째 종합으로  풀어낼 것 같네요.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가지고 와서 어떻게 쾌락이 원칙이 되는가를 살펴보려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드, 자아, 초자아의 3항을 위상학적으로 구성하면서 이드는 쾌락원칙의 지배를, 자아는 현실원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로이트는 강한 흥분은 불쾌로, 흥분이 해소된 상태를 쾌로 정의합니다.  "불쾌는 에너지의 리비도 집중을 고조시키고, 쾌락은 이를 저하시킨다(프로이트, <자아와 이드>)" 뭐 이런 식으로도 표현합니다.(통념상의 쾌락과는 좀 다르네요.^^) 아무튼 이드는 흥분의 해소를 향해 달려가지만(쾌락원칙), 자아는 이드와 달리 자기보존을 위해 쾌락의 지연을 감수할 수도 있습니다.(현실원칙)

 

들뢰즈가 보기에 이드에는 두 개의 층이 있습니다. 첫번째 층은 자극이나 흥분이 일어나고 해소되는 여기저기(국소적 과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국소적 과정이 쾌락원칙으로 조직화되는 것일까요? 국소적 과정이 통합의 국면으로 옮겨가는 이행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묶기'=조직화의 첫 단계=습관의 조직화이고 이드의 두번째 층이라고 하는군요. 눈이 빛을 묶는다 뭐 그런 예시들을 통해서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응시-수축'을 '수축하는 종합'이라고 설명하네요. 이렇게 해서 애벌레 자아들의 살아있는 현실적 시간이 구성됩니다. 이 자아들은 나르키소스적인데요, 그것은 자기자신을 응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것을 응시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그러니 그 이미지에 대한 만족감은 환각적 만족감이 되겠네요. 그러니 습관이 쾌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쾌락이 습관을 만든다, 이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아, 물론 습관도 이미 획득된 쾌락을 반복합니다. 

 

하여 들뢰즈는 묶기의 수동적 종합(이드의 두번째 층이자 조직화의 첫단계)는 쾌락원칙의 조건이 되고,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넘어서'는 초월론적 감성론을 구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음.. 이 들뢰즈의 '넘어서'에서 표명되고 있는 초월론적 감성론은 칸트의 감성론에 빚지고 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칸트의 감성이 수용성에 의해 정의되고, 수동적 자아의 단일성을 전제하는 것과 달리 들뢰즈가 말하는 초월적 감성론은 수용성이 아니라 수동적 종합을, 단일한 수동적 자아가 아니라 애벌레 자아들과 관련됩니다.  이 수동적 종합으로부터 다음 단계의 두 가지 계열의 발전과정이 제시됩니다. 하나는 능동적 종합의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수동적 종합의 심화입니다. 이 심화가 두번째 종합, 과거와 연결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능동적 종합은 작은 자아들(국소적 적분)이 아니라 현실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큰 자아(총괄적 적분)를 구성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수동적 종합의 심화는 능동적 종합과 동시에 존속하고 전개하면서, 또 능동성과 수동성은 비대칭적이고 상호보충적 관계를 갖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미나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 현실적 대상의 계열과 잠재적 대상의 계열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향해 걸어가는 것과 동시적인 손빨기의 사태, 이것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 말이죠. 엄마에게 가 닿는 것은 현실적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동시에 주먹을 입에 집어넣고 손을 빨고 있는 아이, 이 아이에게 입에 들어간 손은 잠재적 초점이라는 것인데요, 여기서 잠재적이란, "수동적 종합을 심화하는 가운데 응시해야 할 어떤 잠재적 대상"이라고 합니다. 아이는 현실의 엄마를 향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여전히 아이에게는 수동적인 어떤 응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수동적 응시는 조직화 1단계의 애벌레 자아들의 응시-수축(이건 습관을 훔쳐내고, 하비투스를 구성)과는 약간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화'라고 했겠지요. 여기서도 수동적 자아가 등장하는데 이 수동적 자아는 그런 응시를 통해서 나르키소스적 이미지로 가득찬다고 합니다. 첫번째 종합에서도 수동적 자아들이 나르키소스적이라고 했는데, 그 설명은 거의 동일하네요. 수동적 종합이 심화되긴 했지만 역시 어떤 응시하는 나르키소스적 이미지들이 수동적 종합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아직 본격적으로 두번째 종합=과거와 관련된 논의가 도입부 수준에서 전개되고 있는 중인지라 뭔가 조금 애매하네요..)

 

유아들이 자기 밖에 모른다고 우리는 곧잘 이야기하곤 하는데.. 들뢰즈는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물심리학적 삶에서 유아단계는 이중의 중심을 갖는다는 거지요. 이중의 중심은 능동적 종합의 계열과 수동적 종합을 심화하는 계열. 그래서 이 이중성은 자기보존충동과 성적 충동의 분화와 상관관계를 갖습니다. 자기보존충동은 아마 현실원칙과 관련되고, 성적충동은 쾌락원칙과 관련되겠지요? 계속 말해온 잠재적 대상, 잠재적 초점은 성기기 이전의 성생활과 관련되고, 곧 손가락빨기 같은 것이 프로이트에 의하면 아이의 성생활인 걸로.(성생활과 생물심리학적 삶은 어떤 변별점을 가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잠재적 대상의 계열은 현실적 대상의 계열로부터 절취된 것이거나  현실적 대상의 계열에 편입된 것이라고 합니다. 절취되었다는 것은 부분대상이라고 하는데, 전체가 아니라 파편이고 허물이고, 고유한 동일성을 결여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능동적 종합이 자기동일적 대상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해 수동적 종합의 심화는 부분 대상을 응시합니다. 멜라니 클라인의 좋으면서 나쁜 대상, 위니코트의 과도기 대상, 라캉의 대상a 같은 것이 그것이라고 하네요. 

 

지난 세미나부분을 복습하다 보니 아직은.. 뭔가 시작하다 만 것 같은 느낌입니다.ㅎㅎ 중요한 건 다음 세미나에서... 

 

* 프로이트에게도 부분 대상 같은 개념이 있었던가, 그런 질문을 정군샘이 던진 기억이 납니다. 혹시 개념의 기원은 프로이트의  '대상 리비도 집중'에서 말하는 그 대상 아닐까요? 아이는 '원시적 구순기에 대상 리비도 집중과 동일시가 구별되지 않는다'.. 뭐 그런 말이 <자아와 이드>에 나오네요.

 

*쾌락원칙 이전에 묶기가 있고, 쾌락원칙은 첫번째 종합의 효과. 그러니 들뢰즈에게는 쾌락원칙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쾌락원칙을 넘어서의 '넘어서'가 중요한데.. 이렇게 프로이트를 슬쩍 비트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런 이야기에도 제법 머물렀습니다.  그걸 자유간접화법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스타일에 대한 호불호가 나뉘는 것 같습니다.ㅎ

 

*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를 설핏 들추어 보아서 그런지 들뢰즈의 능동/수동의 구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런 의문이 듭니다. 들뢰즈에게는 항상 수동이 일차적인데, 지금까지는 그냥 읽었지만, 수동적 종합이라는 반어, 혹은 역설이 조금씩 신경 쓰이기 시작합니다.

 

*3절 마지막 파트에서 영원회귀가 나왔는데요. 아렘샘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누구 이야기인지 잘 구분해서 읽자는 경계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무려 클로소프스키를 읽고 계시다니.. 앞으로 조금씩 저희에게도 빛을 내려주소서~

 

 

 

 

 

 

댓글 8
  • 2022-07-02 22:49

    오늘 지난 시간 부분을 다시 읽어봤어요. 그리고 샘께서 쓰신 후기를 읽으니 정리가 참 잘되는 느낌입니다. 

    이해를 하고 안하고는 별개의 문제지만요^^

    매주 자기만족적 복습 원한다고 하면 속으로 욕하시려나요? ㅎㅎ

    저 같은 사람은 강독방식이어서 겨우겨우 쫓아가는데, 다음 시즌에 혹시라도 방식이 바뀐다면 ㅠㅠ

  • 2022-07-02 23:21

    1. 극찬 또 극찬ㅡ 차반셈나하면서 요요샘께 늘 느끼는 건데요, 거의 기적의 독해력, 신기의 요약력(?) 등등.... 진정한 세미나계의 레전드로 등극시켜드려야 될듯. 메이저리그처럼 문탁에도 '셈나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첫번째로 보내드리고 싶어요^^ 

    2. 죄송했던 점 ㅡ 파일을 듣다 줌녹화에는 원칙적으론 회원분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아렘쌤 말씀을 듣고 많이 죄송했어요. 실은 지난 목욜에 곰배령에 갔었어요. 와이파이가 된다고 해서 저녁 먹고 들어가서 듣기만 하려고 했는데 폭우가 쏟아져서 그런지 와이파이가 계속 끊기더라구요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한테 걍 소리만 녹음 부탁했던 거고요. 암튼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못해서 죄송하고 기록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 발견한 새로운 사실들ㅡ 생각보다 다른 쌤들도 <쉬는 시간>과 <진도>에 나름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ㅎㅎㅎ, 쉬는 시간은 원래 9시라는 놀라운 팩트!

    4. 아쉬웠던 점ㅡ 아렘쌤 부분 너무 대충 넘어갔다는 것^^ 아렘쌤 이야기, 앞으로 좀더 듣고 싶네요. 영원회귀 관련

    5. 셈나 총평(건방지게도)ㅡ언제부턴가 느끼는거지만 쌤들께서 메모 발표하실 때 점점, 초창기보다 훨씬, 자세히 설명해주시고 계시다는 느낌. 사실 저같이 셈나시간에 막말 작렬하는 사람은 쌤들이 때때로 너무 젠틀하셔서 쫌 그런데.. 아무 질문이나 막 던지는 다같이 막나가는 셈나가 되길, 제발^^ 원한다는 점에서 뭔가! 점점 느낌이  좋습니다! 정작 셈나 내용은 제겐 공부가 좀 필요한지라 흠..

    아, 그래도 '현실 검사'의 원어 혹은 영어 번역은 뭘까 좀 궁금하네요.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시면~
    →the test of reality네요 도서관에 놀랍게도 영어본이 있어서 찾아보니.

    • 2022-07-04 13:53

      현실 검사는 요요샘이 설명하셨듯 프로이트가 이드는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고 자아는 현실원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을 때, 이드와 초자아의 상충하는 요구 사이에 낀 자아가 별 문제 없이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실과 소망 사이의 간극을 재어보는 시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찾아보면 Reality testing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는 것 같아요. <차이와 반복> 226~7을 보면 현실 검사=능동적 종합으로, "큰 자아"가 "현실 원칙에 따라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자신을 능동적으로 통일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하네요. 이 큰 자아는 수동적 종합을 하는 애벌레 자아들과 다른 재현적 사고를 하는 자아, 프로이트가 자아라고 부른 것과 비슷한 자아일 것 같아요.

      **
      음, reality testing으로 좀 더 보니 이건 자아의 현실-환상 구분에 더 방점이 있네요. (환자가 갖고 있는 이미지나 생각이 진짜 현실인지 본인의 '망상'인지 구분.) 엄밀히 따지면 다른 개념인 것 같기도 해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측면에서 상담자는 환자의 자아가 이 현실성 검증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북돋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 '현실 검증'이라고 쓴 부분은 이것과 같은 것인지 좀 다른 것인지.....머리가 좀 아프네요. ㅎ

  • 2022-07-03 23:15

    들뢰즈가 말하는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 클로소프스키의 '니체와 악순환'을 읽고 있다고 그리고 이 니체가 클로스프스키와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나온게 아닌가 하는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읽은 클로소프스키를 나누라는 요요샘 말씀에 그냥 제 생각을 좀 얹어보겠습니다. 

     

    들뢰즈의 니체 해석에 의문과 궁금함을 가졌던 점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1)동일한 자아는 없다라는 생각이 니체 저작에서 명시적으로 그것도 이리 중요하게 다룰만하게 나온게 있는가? 있다면 들뢰즈의 설명이 얼마나 정합적인가? 2) 들뢰즈의 영원회귀와 니체의 영원회귀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것 아닌가? 

     

    1번에 대한 제 생각 - 명시적으로 니체 저작에 나옵니다. 그것도 니체답지 않게 명시적으로, 논리적으로, 논증적으로 그러니까 되도않는 메타포를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합니다. 비록 그 출처가 제가 해석에 유보적인 유고지만, 이정도 명시적인 문장들이라면 수긍할 만 합니다. 클로소프스키 글에서 찾은 출처를 따라 니체 전집에서 옮겨 보겠습니다. 

     

    근본적 확실성 (니체전집 12권 580~582, 유고)

    “나는 표상한다. 고로 어떤 존재가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그것이 있다 cogito, ergo est. - 내가 이 표상하는 존재라는 사실, 표상한다는 것이 자아의 활동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다: 내가 표상하는 모든 것도 그리 확실하지 않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는 표상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제대로 기술한다면, 존재자의 술어들이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표상한다는 자체를 표상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때 그것은 표상의 법칙에 의해서 침투되거나 왜곡되거나 불확실해지지 않는가?) 표상에 고유한 것은 운동이 아니라 변화이다: 즉 소멸과 생성이다. 그러나 표상은 지속하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지속에 대해 믿는다. 즉 그것은 1) 어떤 자아의 지속에 대한 믿음, 2) 어떤 내용의 지속에 대한 믿음이다 : 지속하는 실체에 대한 믿음, 즉 같은 것은 스스로와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믿음은 표상 자체의 과정과 상반되는 것이다. (나는 비록 지금처럼 아주 일반적으로 표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지속적인 어떤 것을 이로부터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분명한 사실은 표상이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동일한 것이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유일하게 보장되어 있는 존재는 변화하고 있으며, 스스로와 비동일적인 것이며, 관계들을 가지고 있다(한정된 것, 즉 생각은 생각이기 위해 어떤 내용을 가져야 한다.) - 이것이 존재의 근본적 확실성이다. 이제 표상은 존재의 정반대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표상이 참된 것이 아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아마 이 반대 주장이 오히려 이런 종류의 존재가, 즉 표상하는 존재가 실존하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 생각이 존재의 본질을 철저히 오인하지 않았다면, 생각은 불가능할 것이다 : 생각은 실체와 동일자를 주장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유동적인 것을 인식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실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존재에 없는 속성들을 꾸며내야 한다. 표상이 가능하기 위해 주체나 객체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표상은 주체와 객체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 요약하면 : 생각이 현실적이라고 파악하는 것, 또는 파악해야 하는 것은 존재자와 반대되는 것일 수 있다.

     

    2번에 대한 제 생각- '니체와 악순환'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들뢰즈가 설명하는 영원회귀가 니체의 것이었냐에 대해서는 유보적입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는 물론 제가 클로소프스키를 깊이 읽지 못해서이기도 합니다. 한 번 읽은 것으로는 이해가 좀 어려웠습니다. 다만 들뢰즈가 말하는 영원회귀가 클로소프스키와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나온 것은 확실합니다. 아울러 그러한 영원회귀가 전제되고 있는 것이지, 진짜 니체의 영원회귀가 그러했느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유보적입니다. 그러니까 출처들이 1번항처럼 명시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영원회귀로 해석하려면 거대한 도약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긍정도 부정도 못하겠습니다. ) 삐딱한 제게 거대한 도약이 필요하다는 것은 거대한 헛소리와 한끗 차이입니다. 기회가 와서 다시 좀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된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제 생각을 올려보겠습니다. 

  • 2022-07-04 09:47

    와 감탄감탄! '진정한 후기'는 아니더라도 저는 이런 후기가 좋으네요. 세미나 시간의 자유연상기법(?)의 토론에선 저는 흐름을 놓치기가 일쑤인데  토용님 말대로 이해는 못해도 뭔 얘기가 있긴 했구나는 알 수 있는 거 같아요. ㅎㅎㅎ (매주 복습형...후기에 한표. 히히히)  

     

  • 2022-07-04 14:15

    머릿속이 따라서 정리되는 것 같은 후기 정말 감사합니다. 나중에 여러번 다시 읽고 싶어요. 

     

    부분 대상이 저도 궁금해져서 저는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를 좀 뒤져보았어요. 전에 정군샘이 알려주셨을 때 에잇! 하며 눈을 질끈 감고 열린책들의 프로이트 이북 전집을 질렀거든요.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는 1905년에 나온 초기작(맹정현의 구분에 따르면 성충동의 시대라는 두번째 패러다임에 해당)이네요. 

     

    당연히 들뢰즈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는 듯 하지만 부분 대상과 연관이 있어보이는 대목들이 있어요. (아무래도 기본적인 차이는 있겠지요. 예를 들어 손가락 빨기를 들뢰즈는 소자아들의 수동적 종합의 심화로 보지만 프로이트는 자아[들뢰즈의 '큰 자아'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겹치는 개념]의 전략적 행위로 보는 것으로 보는 것 같으니까요.) 프로이트는 "부분 충동"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빨기에서 음식물 섭취 행위를 대체한 성적 행동은 외부 대상을 포기하는 대신 자기 몸의 한 부위를 대상으로 삼는다."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45쪽  

     

    사실 '부분 충동'을 언급하는 문장이 많아요. 이어지는 내용을 살펴보면 프로이트는 이러한 "부분 충동들"은 통합해 생식기의 우위권 아래 종속시키는 것이 정상적인 발달이라고 보는 듯합니다.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을 만족시키고자 할 때 자아는 현실 검사를 통해 포기와 절충을 해야 할 테니까요. 그런데 들뢰즈는 이 부분 대상은 부차적인 대체물이 아니라 응시-수축-만족, 습관을 통한 쾌락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그 자체의 만족감이 있는 행위(수동적 종합의 심화 차원에서)로 보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면.. 단순하게 봤을 때요, 이렇게 보면 프로이트의 경우에는 부분 대상이 납득이 가는데, 들뢰즈 식으로 하면 성인이라고 손을 빨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드네요. 음......

     

     

    아래에 흥미로운 부분 발췌해둔 것 더 붙일 게요.

    <자아 리비도>, <대상 리비도>
    "우리는 <리비도> 개념을 성적 흥분의 과정과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양적으로 가변적인 힘으로 정의했다. ... 우리는 <리비도의 양>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냈고, 이것의 정신적 대표부를 <자아 리비도>라 불렀다. 아울러 자아 리비도의 생성, 증가와 감소, 분배와 치환으로 성 심리적 현상을 설명할 가능성이 생겨났다. 이 자아 리비도는 성 대상을 점령하기 위해 정신적인 힘을 사용할 때, 즉 <대상 리비도>가 될 때에만 분석적 접근이 용이해진다. 그럴 경우 우리는 리비도가 대상에 집중하고, 대상에 고착되고, 또는 대상을 떠나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가고,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성 행동을 성적 욕망의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해소로 나아가도록 조종하는 것을 본다" 55쪽

     

     

    "그래서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이 모든 사랑 관계의 전형이 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결국 대상 찾기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재발견의 성격을 띤다." 57쪽

     

     

     

     

     

    • 2022-07-04 14:59

      들뢰즈라면 '성인 손빨기'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일 겁니다. 계속 '개체화' 중이라는 점에서 유아와 성인 사이의 비가역적인 경계(발달)를 (그간의 말들에 비춰보면) 그을리가 없을테니까요. 프로이트라면 아마 이걸 '페티쉬즘'이라고 했을 것 같은데... 이를테면 손빨기를 하는 어른이 있을 수도 있고, 코를 파는 걸로, 머리를 긁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요.(어쩐지 다 제 이야기 같지만, 제 이야기 맞습니다)

  • 2022-07-04 15:21

    아니 이렇게... '후기'의 파고가 높아져 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다행히 이번 시즌이 두 번 밖에 안 남았군요 ㅎㅎㅎ

     

    도대체 '대상'은 왜 '잠재적 대상'과 '현실적 대상'으로 구분되는걸까요?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현실적 대상'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고, 한편으로는 '잠재적 대상'을 스스로 구성해 낸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그것은 '수동적 종합을 심화하는 가운데 응시해야 할 대상'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잠재적 대상의 계열'은 '수동적 종합의 상관항'이라고 하고요. '현실적 대상'은 당연하게도 '능동적 종합의 계열'의 상관항들입니다. 첫번째 종합(애벌레 자아들의 응시-수축)이 개별적 '묶기'를 말하는 것이었다면, 이 두번째 종합은 '계열들의 묶기'를 이야기 하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조금 이해가 되기도 하는게, 이때의 '잠재적 대상'은 이미 묶여진(기관화 된) 것들이고, 이것들은 안에는 이미 (순수)'과거들'이 항상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능동적 종합의 계열의 상관항인 현실적 대상 안에 '박혀진' 것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듯 하고요. 이것들이 있어야 한 '생물'이 구성되고, 그 생물 안의 '생물심리적 삶'이 작동할테니까요.  

    들뢰즈는 프로이트를 따라 내내 '유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저는 이게 모든 개체적 삶의 초월론적 원리(그 중에서도 두번째 원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종합을 보면 늘, 음악 듣기가 떠오르곤 합니다. 하나의 소리-하나의 음표, 지나가고 있는 화음들 속의 토닉 노트, 화음 아래에 감춰진 도미넌트 노트들, 한 소절로 묶여서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는 음악. 뭐 그런 식으로요. ㅎㅎㅎ(딱 맞는 예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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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순수이성비판 5주차 질문들 (9)
정군 | 2024.03.13 | 조회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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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1> 4주차 후기 (8)
세션 | 2024.03.10 | 조회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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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순수이성비판 4주차 질문들 (10)
정군 | 2024.03.06 | 조회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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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3주차 후기: 지성! (17)
덕영 | 2024.03.01 | 조회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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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순수이성비판 3주차 질문들 (9)
정군 | 2024.02.28 | 조회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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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2주차 후기: 칸트가 말합니다, 선험적 종합 명제는 이렇게 가능하지 (10)
호수 | 2024.02.25 | 조회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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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순수이성비판 2주차 질문들 (17)
아렘 | 2024.02.19 | 조회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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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철학에서 '트란스첸덴탈'의 번역에 대해-2 (2)
세븐 | 2024.02.19 | 조회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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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철학에서 '트란스첸덴탈'의 번역에 대해-1 (1)
세븐 | 2024.02.18 | 조회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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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철학학교 1회차 후기: 칸트, 내겐 너무 어려운 그에게 한 걸음... (6)
봄날 | 2024.02.16 | 조회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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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순수이성비판 1주차 질문들 (10)
정군 | 2024.02.14 | 조회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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