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차이와반복>읽기 시즌2 2장2절 요약 모음

정군
2022-06-14 09:42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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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 2022-06-14 09:42

    196-199쪽

    '현재'는 어떤 기대-습관의 수축에 의해 정초된다. A 그 다음 B, A 그 다음 B, 다시 A가 나타날 때 B를 기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들뢰즈는 이로부터 시간의 첫번째 종합를 근거짓는 '두번째 종합'를 이끌어낸다. 그러니까 '현재'가 가능하려면 그 '현재'를 가능케 하는 '현재들'이 있어야만 한다. 달리 말해 '지금'은 '과거'들의 수축이다. '현재는 어떤 수축의 결실'(196쪽)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다. 이렇게 첫번째 종합은 '습관의 수축'으로, 두번째 종합은 '기억의 종합'으로 규정된다. 다만, 이렇게만 놓고보면 '현재'는 '과거의 수축'이라는 의미에서 어떻게해도 바뀌는 않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현재는 수축되고 있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다시 말해 현행적 현재의 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다시 말해 '침범'을 허용해야만 한다. '현재들이 서로 침범하면서 계속 이어진다'(197쪽). 이렇게 지나간 과거들 전체는 끊임없이 다시-수축된다. 물론 이 '수축'은 마치 일관성을 결여한 듯 보이기도 한다.(과거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까, 현재가 '과거의 수축'이라면 현재도 계속 바뀐다) 일관성이라고는 없이 닥쳐오는 '현재들(과거들의 수축들)'을 무어라 부를까? 운명이다. 이로써 '결정론'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왜냐하면 현재를 구축하는 것이 과거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미래(목적)에서부터 당기는 힘이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란 '합목적성'에서, '필연으로부터의 이탈'에서 끌려나오지 않는다. 자유는 수축의 역량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어떤 '절대적 평등'이 이끌려나온다. '과거'가 '지나가는 현재들'이라면, 과거 전체의 어딘가에서 온갖 삶들이 새롭게 수축될 것이다. 그렇게, 존재는 일의적인 한에서 최대치의 다양성을 낳는다.

    • 2022-06-16 13:27

      과거의 네 가지 역설 정리

       

      첫번째 역설,
      현재는 현재인 '동시에' 과거가 아니고서는 결코 지나갈 수 없다.
      과거는 먼저 한때 현재였던 '동시에' 미리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구성될 수 없다.

       

      두번째 역설(공존의 역설)
      만일 각각의 과거가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라면 사실 모든 과거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지금 거리를 둔 새로운 현재와 공존한다. 과거는 사라진 현재 '이후'에 있지 않은 것처럼 현행적 현재 '안'에도 있지 않다. 과거는 또 다른 현재가 생겨나도록 만들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의 현재를 지나가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 자체는 지나가지도 생겨나지도 않는다. 따라서 과거는 시간 전체의 종합이다. 이것이 이행의 최종적 근거다.

       

      세번째 역설(선재의 역설)
      각각의 과거는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고, 과거 전체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거리를 둔 현재와 공존하지만, 과거 일반의 순수 요소는 지나가는 현재에 선재한다. 따라서 시간의 실체적 요소로서 결코 현재였었던 적이 없는 본연의 과거가 있다. 이 '과거'가 근거의 역할을 맡는다. 이 요소는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네번째 역설
      과거는 자신이 과거이기 위해 거리를 둔 현재 안에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보존되며, 이때 현행적 현재는 단지 자신과 공존하는 과거 전체의 최대 수축일 뿐이다. 이에 따르자면, 이 과거 전체가 이완-수축의 정도에 따라 자기 자신과 공존해야 한다. 과거 자체는 무한하게 상이한 이완과 수축의 정도들에 따라, 무한히 많은 수준들에서 자기 자신과 공존한다. 따라서 '현재들이 서로를 침범하면서 계속 이어진다'.

  • 2022-06-14 16:20

    구판 193-195) [과거의 네가지 역설]

     <현행적 현재>가 있고 <한때의 현재>가 있으며 <지나가는(이행중인)현재>, 그리고 <과거>가 있다. 보통 과거는<한때의 현재>와 <현행적 현재>의 사이로 구성된다고 생각된다. 즉, 과거는 두 현재가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구성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정적이지 않다. 시간은 흘러가고, 지나가고, 이행한다. <현행적 현재>는 끊임없이 투입되고, <투입된 현재들>은 지나가며, <한때의 현재들>은 무한히 이어지고 운동하며 켜켜이 쌓여간다. 이 흐름 전체가 <과거>다. 역설들-- <한때의 현재>는 지나가며(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과거와 '동시간'적이고, 그러기 위해선 <현행적 현재>와 과거는 '공존'하고 있어야만 한다(따로 존재한다면 동시간일 수 없다. 혹은 또다른 과거가 있어야 한다). <지나가는 현재>는 그 자체 과거로써 수준에 따른 수동적 종합에 의해 수축되어, 능동적 종합의 현재를 재현하기에 '선재적'이다.

  • 2022-06-15 08:06

    (p.188~190)

    -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비록 그것이 시원을 이루는 종합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시간 내적이다. 이 종합은 시간을 현재로 구성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현재는 지나가버리는 현재이다. 그런데 왜 현재는 지나가고, 현재가 시간과 똑같은 외연을 공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들뢰즈는 ‘정초로서의 습관’과 ‘근거로서의 기억’으로 설명한다. 지나가는 현재에 의해 점유된 움직이는 땅인 ‘시간의 정초지점으로서의 습관, 그리고 현재를 지나가도록 만들고 현재와 시간을 전유(傳有)하는 ‘시간의 근거로서의 기억이다. 이러한 습관은 시간의 시원적 종합이며, 이 종합은 지나가는 현재의 삶을 구성한다. 아울러 기억은 시간을 근거 짓는 종합이며, 이는 과거의 존재(현재를 지나가게 하는 것)를 구성한다고 말이다.

  • 2022-06-15 20:56

    (200p-201p)

     과거의 즉자 존재를 과거가 구가했던 현재나 현행적 현재로 환원하지 않고 어떻게 침투해 들어갈 것인가(꿰뚫어 볼 것인가)? 어떻게 이를 '우리에 대해' 되살려 낼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인 플라톤적 의미의 '상기'는 기억의 수동적 종합/비자발적 기억을 말한다. 과거의 즉자 존재가 있다면, 상기는 여기서 본체를 담당하는 사유이다. 또한 상기로 인해 우리들은 단순히 현행적 현재에서 사라진 현재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통상적인 '상기'의 표상?). 이는 순수 과거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수 과거는 현재'들'을 이용하는 가운데 재현 아래에서 나타난다. 현재는 실존하지만 과거는 내속하며 그 안에서 현재'들'이 지나간다. 

    모든 상기는 에로스적이다. 우리가 즉자의 순수 과거(므네모시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이 에로스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순수 과거에 대한 탐색은 에로스적인 것일까? "우리가 아직 마지막 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면, 그리고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이 없다면..." 

  • 2022-06-15 22:07

    물질적 반복과 정신적 반복1(199~200)

     

    두 가지 반복이 있다. 하나는 물질적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반복이다. 물질적 반복은 서로 독립적인 요소들의 반복, 살아있는 현재 안으로 수축되는 반복이지만 서로 무관심한 순간들의 수축, 부분들의 반복인 헐벗은 반복이다. 반면 정신적 반복은 공존하는 전체의 반복, 그 자체로 이완이나 수축의 상태에 있는 전체 안에서 미분적 차이differentiation를 보이는 옷 입은 반복이다.

    현재들 자체의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놓인다. 하나의 반복은 요소적 순간들의 반복이며, 이때 차이는 이 순간들에서 훔쳐내는 그 무엇이다. 다른 하나의 반복은 전체가 지닌 수준들의 반복이며, 이때 차이는 이 수준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헐벗은 반복은 옷 입은 반복의 외투, 겉봉투에 불과하기에 물질적 반복은 정신적 반복의 수준들 중에서도 지극히 이완된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양자는 모두 재현 이전의 사태, 수동적 종합에 해당하고, 재현되자마자 동일성, 유사성에 종속된다.

  • 2022-06-15 22:43

    (위 재하님과 제 요약 파트가 같네요?)

     

    물질적 반복과 정신적 반복2(200~201)

     

    결국 물질적 반복과 정신적 반복은 모두 재현 이하의 사태이다. 그렇다면 기억의 수동적 종합은 어떻게 체험되는가? 들뢰즈는 플라톤적 의미의 ‘상기’, 마르셀의 ‘콩브레’가 그러한 체험, 침투라 말하고 있다. 상기는 능동적 종합과는 다른 “어떤 수동적 종합이나 비-자발적 기억”이다. 상기라는 본체에 의해 드러난 과거는 우리가 언젠가 구가했던 현재로도, 현행적 현재로도 환원할 수 없는(이중의 환원 불가능성) 순수 과거다. 순수 과거, 상기는 사라진 현재들, 지나가는 현재들로 돌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들에 힘입고 또 그 현재들을 이용하는 가운데 재현 아래에서 나타나 현재들을 충돌하도록(물음을 형성) 한다. “그 물음은 찾고 답하고 해결하라는 엄격한 명령 아래 재현 안에서 어떤 문제의 장으로서 전개된다.”

     

    *상기는 에로스의 성격을 띤다? 므네모시네와 에로스?

    • 2022-06-15 23:54

      <그리스-로마 신화 사전>, 피에르 그리말

      므네모시네

      : 므네모시네는 '기억'을 의인화한 것이다. 그녀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로, 티타니데스('티탄'의 여성형)에 속한다. 제우스는 피에리아에서 아흐레 밤 동안 잇달아 그녀와 결합했고, 1년 후에 그녀는 아홉명의 딸들인 무사이를 낳았다. 트로포니오스의 신탁소에는 '기억'(므네모시네)이라는 샘이 있었다.

       

      에로스

      : ....가장 오래된 신들의 계보에서 에로스는 대지의 여신과 동시에, 태초의 카오스로부터 직접 태어난 것으로 간주되며....

      : '알렉산드리아 시대'에도 에로스는 여전히 세계의 근원적 힘으로 여겨졌다. 인류의 연속성 뿐 아니라, 우주의 내적 응집력을 보장하는 것도 에로스였다.

  • 2022-06-16 00:44

    190~191

     

    과거는 사라진 현재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이 사라진 현재가 겨냥되는 요소이다. 또한 특수성도 겨냥된 것 안에, 복합과거 시제의 과거 안에 있다. 과거 일반은 그 안에서 각각의 사라진 현재를 특별하게 그리고 특수한 것으로서 겨냥하는 요소이다. 과거 일반이 그 안에서 각각의 사라진 현재를 겨냥할 수 있는 요소인 한에서, 그리고 사라진 현재가 과거 일반 안에 보존되고 있다면, 사라진 현재는 현행적 현재 안에 ‘재현전화’되어 있다. 사라진 현재가 재현되기 위해서는 현행적 현재와 유사해야 하고 인접해 있어야 한다.

     

  • 2022-06-16 07:23

    191~193

     

    사라진 현재가 현행적 현재 안에서 재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행적 현재 자체가 이런 재현 안에서 다시 재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는 시간의 일직선 위에서 계속 이어지는 두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현행적 현재는 또 하나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차원을 통해 현행적 현재는 사라진 현재를 재-현하고 그 차원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재현한다. 현행적 현재는 사라진 현재의 회상을 형성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반조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의식의 상태 전체로는 회상할 때 함축되는 차원 이상의 차원을 요구한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재현의 원리라 불릴 수 있으며 이런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습관의 수동적 종합 위에 정초한다. 사라진 현재가 재생될 수 있는 것은, 현행적 현재가 자신을 반조하는 것은 과거의 순수 요소에 의해서이다. 이 과거는 과거 일반, 또는 선험적 과거에 해당한다.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살아 있는 현재를 구성하고 과거와 미래를 그 현재의 비대칭적인 두 요소를 만든다. 반면 기억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순수 과거를 구성하고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를 그런 본래적 과거의 비대칭적인 요소로 만든다.

  • 2022-06-1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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