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차이와반복>읽기 시즌2 2장1절 요약 모음

정군
2022-05-31 23:51
343

드디어 2장에 접어듭니다.

 

"의식이 위치 이외의 것을 지각한다면 그것은 의식이 잇따르는 위치들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종합하기 때문이다. (중략) 눈을 감고 행하는 빠른 동작은, 지나간 공간을 생각하지 않는 한, 순수한 질적 감각의 형태로 의식에 나타날 것이다." -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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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 2022-06-01 13:01

    들뢰즈는 여기서 첫 번째 종합을 설명하기 위해 ‘살아있는 현재’라는 수동적 종합의 성격을 흄과 베르그손의 각각 ‘경우들의 반복AB AB AB A…’과 ‘요소들의 반복A A A A…’에서 나타나는 ‘차이’에 기대어 개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흄과 베르그손의 두 형식은 언제나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놓여있고, 첫 번째 종합은 늘 이 두 형식의 의존을 통해 이루어지는 수동적 종합 위에서만 펼쳐진다.

     

    이를 이해하기에 앞서 들뢰즈는 반복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세 층위, (1)즉자의 층위와 (2)대자의 층위, 그리고 (3)반성적 재현의 층위가 함축되어 있음을 제시(173)한다. 두 사람 견해의 차이는 즉자의 층위(차이)를 무엇이라 보고 어떤 형식으로 수축할 것인가의 문제다.

     

    반복을 요소들의 반복이라 여기는 베르그손은 즉자적 차이들을 요소들 일반 (하나의 일반성 A 혹은 1)으로 수축하므로 닫힌 반복이라 여겨진다. 반면 경우들의 반복이라 여기는 흄은 즉자적 차이들을 상대적으로 더 넓은 개념인 경우(AB위 반복)에, 그러니까 복수의 차이들이 반복되는 경우를 그 최소치로 환원하므로 열린 반복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흄의 반복 역시 ‘ 경우’라는 일종의 확대된 요소로 환원된다는 의미에서 닫힌 것이고, 베르그손의 ‘요소’ 또한 경우의 구조 없이는 반복될 수 없다는 점에서 열린 것일 수 있다. 즉 “경우들의 반복은 요소들의 반복을 가정하지만, 요소들의 반복은 필연적으로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서 경우들의 반복 안으로 들어선다.(175)”

  • 2022-06-01 17:09

    차이와 반복(p.175-p.177)_가마솥

     

    습관, 수동적 종합, 수축, 응시

        수동적 종합(對自的 층위)안에서 반복의 두 형식(경우의 반복, 요소의 반복)은 언제나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두 형식의 구별보다 그 수준들의 구별이 더 중요하다. 베르그손이나 흄의 예에 기댈 때 그렇다. 그러나 구성적 수동성의 질서 안에서 지각적 종합들의 배후에는 어떤 유기체적 종합들이 자리한다. 이는 마치 감관들의 감성이 우리의 존재에 해당하는 어떤 원초적 감성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수축된 물, 흙, 빛, 공기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식별하거나 표상하기 전에, 심지어 그것들을 느끼기 전에 이미 수축된 물, 흙, 빛, 공기이다.   모든 유기체는 수축, 파지(把持,Retention,지금-여기), 기대들이 어우러진 어떤 총합이다. 수용적이고 지각적인 요소들 안에서, 그리고 또한 내장(內臟)들 안에서 볼 때 유기체는 수축, 파지, 기대 안에 놓여 있다. 생명이 숨쉬는 이 원초적 감성의 수준에 주목해보라. 여기서는 체험된 현재가 이미 시간 안에서 어떤 과거와 미래를 구성하고 있다. 이 미래는 욕구 안에서 나타나며, 이 욕구는 기대의 유기체적 형식에 해당한다. 반면 파지의 과거는 세포의 유전에서 나타난다. 게다가 이런 유기체적 종합들은 자신을 발판으로 하는 지각적 종합들과 조합되며, 그런 가운데 스스로 심리-유기체적 기억과 지성의 능동적 종합안에서 다시 자신을 펼쳐간다(본능과 학습).

    따라서 수동적 종합과 관련하여 우리는 단지 반복의 형식들을 구별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수동적 종합들의 수준들, 이 수준들 사이의 조합들, 그리고 이 수준들과 능동적 종합들의 조합들을 구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유기체에까지 확장시켜야 했던 이 모든 영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흄은 그것이 정확히 습관의 문제임을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습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는 심리학이 자아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응시할 수 없다고 확정하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행동하는 가운데 습관들을 취득하게 되는지를 물었기(학습, Learning) 때문이다. 제대로 된 물음은 혹시 자아 자신이 어떤 응시가 아닌지, 혹시 자아의 본성이 어떤 응시에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신체적 행동을 배우거나 형성할 수 있다면, 또 자기 자신이 스스로 형성할 수 있다면, 그런 학습과 형성은 응시와는 다르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 2022-06-01 21:34
    1. 대자적 반복

    1절 반복 :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170-172)

     

    정신이 반복에서 훔쳐내는 변화의 본성은, 흄에 따르면, 상상력에 가깝다. 여기서 상상력이란 수축의 능력이라고 정의된다. 수축에 의해 기대가 만들어진다. 수축은 지성이나 기억과 같은 반성에 앞서는 것으로 시간의 종합을 이루어낸다. 이 수축은 수축이 일어나기 위하여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수동적인 것이다(정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억과 모든 반성에 앞서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 그래서 수동적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종합은 독립적이면서 계속 이어지는 순간들을 서로의 안으로 수축한다. 수축의 능력을 통해 과거의 순간들을 수축하여 현재로 끌어들이고, 기대를 통해 미래를 수축, 현재로 다시 끌어들인다. 그래서 순간들의 지속succession은 시간을 형성한다기보다 와해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있는 것은 응시하는 주체라는 수동적 주체의 주관성과 그의 수축에 의해 와해되고 현재로 불려오는 과거와 미래, 그래서 현재의 차원으로 소환되는 순간의 연속들이다. 살아있는 현재.

    수동적인 종합, 혹은 수축은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이다. 현재 안에서 과거에서 미래로, 따라서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시간의 화살에 방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 2022-06-01 23:30

    참고 인용문들

     

    인상 안에서 결합된 어떤 대상들이 관념에서 분리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대상들이 서로 다르다면 이 경우에 그 대상들이 분명히 따로따로 표상되는지 숙고해보기만 하면 된다. 앞서 설명된 공리에 따르면 서로 다른 것들은 모두 구별될 수 있고, 구별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분리될 수 있다. 반대로 그 대상들이 다르지 않다면 그것들은 구별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대상들이 구별될 수 없다면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번째 공리를 우리의 계기적 지각과 비교해 보면 이 공리는 시간의 경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른 인상들과 혼합되어 있으면서도, 그 인상들과 분명히 구별될 수 있는 개별적 인상에서 시간 관념이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상들이 그 수에 대한 인상을 만들지 않고 정신에 현상하는 방식에서 시간 관념이 발생한다. 플루트로 연주한 다섯음은 우리에게 시간의 인상과 관념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청각이나 다른 감관에 나타나는 여섯번째 인상이 아니다. 또한 시간은 정신이 반성함으로써 그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여섯번째 인상도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는 이 다섯 음들은 정신에 어떤 정서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어떤 종류의 감동을 낳는 것도 아니지만, 정신이 그 방식을 관찰함으로써 그 방식은 새로운 관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 방식은 새로운 반성 관념을 낳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언제나 감각에서 유래하는 정신의 모든 관념들을 수천 번씩 응시하는 데서 발생하는 어떤 새로운 근원적 인상을 느끼도록 자연이 정신의 직능을 짜맞추지 않았다면, 정신은 자신의 관념들을 두루 둘러보는 것을 통해서 그 관념들로부터 어떤 새로운 근원적 관ㄴ념을 결코 추출해 낼 수 없다.
    - [인간 본성론] 1권 <인간 오성론>, 58쪽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주위의 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친다. 그러나 다른 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내 귀는 종소리가 이미 여러 번 친 다음에야 그것을 알아차린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세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회고적 주의의 노력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이미 울린 네 번의 종소리를 계산하여 내가 들은 종소리의 수에 더할 수 있다. 내 자신을 회복하면서 이제 방금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주의 깊게 자문해 보면, 나는 처음 네 번의 종소리가 내 귀를 쳤고 나의 의식을 감동시키기까지 했으나 그 각각이 일으킨 감각이 병치되는 대신 서로가 서로에 녹아들어서 전체에 고유한 모습을 부여하고 그 전체를 일종의 음악적 소절로 만들었음을 알아차린다. (중략) 간단히 말해 울린 소리의 수는 질로서 지각되었지 양으로서 지각된 것이 아니었다. 지속은 이처럼 직접적 의식에 나타나며, 연장성으로부터 끌어낸 상징적 표상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한, 그런 형태를 보존한다.
    -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163-164쪽

    • 2022-06-02 08:06

      오~ 감사합니다.^^

  • 2022-06-02 00:05

    177~9

    습관은 반복에서 차이를 훔쳐내고, 습관의 본질은 수축에 있으며, 수축은 응시를 통해 이루어진다. 바꿔 말해 응시하며 수축하고, 수축을 통해 습관을 구성하며, 이 과정에서 차이를 훔쳐낸다.

     

    습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하나(틱)가 다른 요소(탁) 뒤에 따라올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이다. 그것은 한 순간적 행위(틱)이 다른 순간적 행위(탁)과 합쳐지는 또는 융합하는 것, 이렇듯 어떤 ‘경우’가 영속하리라는 확신이다. 융합하는 것이 수축이고, 이것은 수동적 종합이다. 이 일을 하는 것은 영혼, 응시하는 영혼이다. 그리고 이 일은 유기체의 모든 곳에서 벌어진다. 달리 말해 유기체의 모든 곳에 영혼이 있다.

     

    응시와 수축은 동시적으로 벌어지는 사태이며, 역시 동시적으로 상상이 벌어진다. 우리는 습관이며, 일반성이며, 지망(claim)이며, 만족이다. 우리가 응시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응시한다. 우리는 물, 달, 나무를 응시하고, 거기서 새로운 것을 훔쳐내어, 비로소 실존한다. 쾌락은 어떤 충만한 응시와 함께 일어나는 흥분일 뿐이다. 이 쾌락으로 우리는 나르키소스가 되지만, 응시로 인해 악타이온이 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악타이온은 달과 처녀성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수치심을 느낀 아르테미스는 달아나는 악타이온에게 물을 뿌리고 악타이온은 사슴으로 변한다. 악타이온의 사냥개들은 사슴으로 변한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 2022-06-02 09:08

    1절 첫단락

    '대자적 반복'이라는 제목은 어떤 의미일까? 1장의 제목이 '차이 그 자체'였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대자적 반복'은 '차이와 반복'의 다른 차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차이 그 자체'가 '즉자적 차이'에 관한 장으로, 있는 그대로의, 발생 중인 '차이', 들뢰즈의 용어로 '강도적 차이'에 관한 장이었다면, 2장 '대자적 반복'이라는 제목은 그러한 '즉자적 차이'가 어떻게 현실화-분화되는지 밝히는 장으로 보인다. 그런 것들을 감안하고 2장의 첫 단락을 살펴보면 몇가지 단서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흄을 인용하며 등장하는 '응시하는 정신'의 변화, '순간적 정신에 해당하는 물질의 상태', '정신 안에서의 어떤 차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복을 필연적으로 구성하고 있어야 하는 어떤 근원적 주관성'까지, 2장의 논의는 어떤 주체의 구성으로 향하는 듯 하다. 재미있는 것은 '반복의 역설'이다. '반복'은 응시하는 정신 안의 무언가를 바꾼다. 그런데 그 '변화'만이 '반복'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정신'은 '반복'에서 차이를 훔쳐낸다고 볼 수 있다!?

  • 2022-06-02 10:33

    앞 단락에서 습관의 본질은 수축에 있다고 했다.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반복의 융합이 일어나고, 유기적으로 형성된 수천의 수동적 종합이 있다. 우리는 응시하기 떄문에 실존하고, 우리가 수축하게 되는 건 응시를 통해서이다. 즉 우리는 있기 위해 먼저 있는 것을 응시하고 수축하며, 그런 가운데 실존한다. 그리고 충만한 응시의 흥분에서 쾌락이 발견된다.

    새뮤얼 버틀러는 우리는 수많은 습관의 연속성 말고 다른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습관은 우리 안에 많은 미신과 응시의 자아, 경쟁적 지망자와 만족을 형성한다. <생활과 습관>이라는 저서에서 흙과 습기의 수축, 응시하는 자기 만족과 영광을 노래한다. 모든 유기체는 응시되고 수축된 요소와경우로 이루어지고 모든 습관들은 서로 얽고 조여 매여 있다. 플로티누스의 <엔데아데스> 3권의 '모든 것은 응시이다'라는 말은 반어일지 모르지만 반어 또한 응시다.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응시하기 위해 자신의 유래를 향하여 뒤돌아설 때만 그 이미지를 규정하고 향유할 수 있다.

  • 2022-06-02 15:15

    주체 안에서 변화를 통해 우리는 반복의 이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넘어 '차이의 일반적 형식' 앞에 서게 된다. 또한 반복을 '대상 안에서 고찰하는 것'과 '주체 안에서 고찰하는 것'이라는 두 한계 사이에서 소급적인 운동이 있으며, 반복의 이념적 차원은 그 안에서 '짜여나간다'. 

    흄은 이러한 운동을 분석한다. 이를테면 그는 상상력에 의해 수축되는 경우들이 기억 안에서는 구별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이며, 기억이 고유한 '시간의 공간' 안에 특수한 경우들을 보존하고 이 경우들을 구별되는 경우들로 재구성함을 보인다. 따라서 과거는 반성되고 재생된 특수성에 불과하다. 미래 역시 지성에 의해 반성된 일반성일 뿐이다. 

    반복의 구성에는 세가지 층위가 있다. 첫째, 반복이 사유불가능해지는 즉자의 층위. 둘째, 수동적 종합에 따르는 대자의 층위. 마지막으로, 대자의 층위에 기초한 ('우리에 대한'이라는 형식을 띤)반성적 재현의 층위가 있다. 예를들어, 시계가 종을 울리며 네 시를 알린다고 하자. 각각의 종소리는 순간적인 정신인 다른 종소리에 대해 독립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을 내적이고 질적인 인상 안으로 '수축'한다. 이 수축은 '살아있는' 현재 안에서, 지속으로서의 수동적 종합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뒤 우리는 이 종소리들을 파생적인 시간 안에 다시 위치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들을 반성할 수 있다.

  • 2022-06-02 18:26

    요약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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