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차이와반복>읽기 시즌2 1장5절 요약 모음

정군
2022-05-17 10:13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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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7 22:05

    차이와 반복(p.141-p.144)_가마솥

     

    부정적인 것의 배제와 영원회귀

     

    들뢰즈는 철학의 역사에서 나타난 ‘차이’ 개념을 비평한다. 즉 철학의 역사에서 차이는 어떻게 사유되고 있나? 모든 철학자가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고 할 때, 문제는 ‘차이’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개념적 차이를 말하는가 하는 것이었다고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라이프니츠를 거쳐 헤겔에 이르는 차이의 철학이 저지른 과오는, 차이(개념)를 개념적 차이(개념에 기입하는 것)와 혼동하는 것이다.”(p81)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상반성), 헤겔의 모순(변증법),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미분법), 플라톤의 이데아(나눔의 방법), 니체의 영원회귀(긍정)를 가지고 ‘차이의 철학’를 분석하고 있다.

     

    이 절에서는 제한의 부정성(라이프니츠)과 대립의 부정성(헤겔)(p.135)을 배제하고, 니체의 영원회귀에서 긍정성을 찾아서 차이를 분석한다. 이를 얼마나 이해하기 어렵게 썼는지 보자.

    부정은 차이다. 그러나 작은 쪽에서 본 차이, 낮은 곳에서 본 차이다. 이와 거꾸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다시 바로 세워놓고 보면, 차이는 긍정이다. 그 명제의 뜻은 차이는 긍정의 대상이다. 긍정 자체는 다양체의 성질을 띤다. 긍정은 창조이다. 긍정은 창조되어야 한다. 긍정은 차이를 긍정하는 긍정으로, 그 자체가 차이인 긍정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부정적인 것은 발동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실증적인 미분적 요소들이 있을 뿐이며, 바로 이것들이 긍정의 발생과 긍정된 차이의 발생을 동시에 규정한다.

    다음으로 재현에 대해서 운동성 측면에서 비판한다.-니체의 영원회귀(운동성)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가 유기적 재현에 속한다면, 헤겔의 모순과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은 망아적 재현에 속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가 유한한 재현에 속한다면, 헤겔의 모순과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은 무한한 재현에 속한다고 하였다.(p.128-p.130)

    재현은 하나의 중심, 단일하고 회피적인 원근법, 거짓된 깊이, 매개이라면, 운동은 다원적인 중심, 포개지는 원근법, 뒤얽히는 관점들, 재현을 기형화시키면서 공존하는 계기들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림이나 조각은 운동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재현들을 중복한다고 운동이 될 수 없다. 무한한 재현은 단일한 중심을 수호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재현을 가능케 하는 법칙은 동일성의 형식인 개념의 형식에 있다. 재현이라는 말에서 접두사 재(재, RE-)는 차이를 잡아먹는 이 동일자의 개념적 형식을 뜻한다고 비판하며, 주체의 동일성, 사물의 동일성 모두 차이 안에서 사분오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차이는 요소, 궁극적 단위가 되어야 한다. 차이는 배후의 다른 차이들과 관계하며, 이로 인해 차이는 동일성의 정체성에 빠지지 않고 다만 분화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차이가 차이지으면서 나아가는 차이임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2022-05-18 00:51

    133-134쪽 요약

    ‘투쟁 아래에는 차이들이 유희하는 공간이 있다. 부정적인 것은 차이의 이미지다’ 그러니까 ‘거꾸로 선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개체를 ‘특이한 것’으로 사유하고 ‘특이한 것’의 무한한 깊이를 사유한 라이프니츠가 헤겔에 비해 훨씬 멀리 갔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라이프니츠가 모종의 ‘원천적 깊이’를 보여준다고까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과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 역시 ‘차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는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발산(연속성의 원리)을 어떤 수렴(동일자의 원리)으로 ‘묶어’버렸다. 개체 안에 접혀있는 계열들, 그 중에서도 ‘공가능적인 것’으로 엮여있지 않은 것들을 ‘세계’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들뢰즈는 그것들이 이 세계 안에, 지금-여기에 속한다고 말한다. 아마 그것이 종종 등장하는 ‘바탕’이라는 말을 통해 들뢰즈가 보여주고 싶은 차이들이지 않을까?

    들뢰즈의 ‘차이’는 ‘대립을 가정’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그것 안에는 어떤 ‘부정성’도 없다고 말한다. 헤겔을 의식하며 ‘대립’의 무능함에 대한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대립’은 짐짓 ‘근거’ 속에서 ‘대립자’를 통일시키는 것처럼 꾸미지만, 통일된 것은 이미 ‘차이’가 아니게 된다. 왜곡과 변질에 기대서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왜곡과 변질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미리 전제된 ‘동일성’ 안으로 끌려들어감으로써, ‘독특한 것’이 사라진다. 헤겔이 『정신현상학』 1장에서 벌이는 ‘손장난’을 잠깐 보자.

    “그런 사례들은 저마다가 무수히 많은 차이를 드러내는데, 이런 가운데서도 어떤 경우에나 볼 수 있는 기본적인 구별은 확신으로 얻어진 순수한 ‘있음’으로부터 이미 얘기된 두 개의 이것, 곧 ‘이 사람’으로서의 자아와 ‘이것’으로서의 대상이 갈라져나오는 것이다. 이런 구별을 곰곰이 따져보면 감각적 확신 속에서는 그 어느 쪽도 홀로 직접 그렇게 있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매개를 거쳐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내가 확신을 갖는 것은 상대 쪽에 있는 타자로서의 사태, ‘사물’을 통해서이고 사태가 확신되는 것은 타자인 ‘나’를 통해서인 것이다.”

    여기서 ‘차이’는 오로지 ‘동일성’을 정립하기 위한 지렛대로만 쓰이고, 동시에 그것은 ‘동일성’ 이전의 극복되어야 할 ‘부정’으로만, 오로지 ‘매개’되어야 하는 것으로만 기능한다. 헤겔은 이런 도식을 통해 ‘정신’이 어떻게 ‘무규정적인 직접적인 것’에서 전체 안의 무수한 규정들을 ‘정립’해 가는지 보여준다(무한자의 (유한한) 운동). 들뢰즈는 이렇게 ‘정립’됨으로써 해소된 ‘차이’가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차이’는 타자와의 대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현되지 않는 독특성’은 언제나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의 운동은 어디까지든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차이가 남기고 간 흔적만을 종합할 뿐이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은 부대현상학이다’. 

    *훗날의 들뢰즈는 『맑스의 위대함』이라는 마지막 저작을 쓰려 했다고 한다. 그 점과 관련하여 ‘동일자’에 대한 ‘차이’의 선행성을 주장하는 들뢰즈에게서 ‘정신’에 대한 ‘물질’의 선행성으로 뒤집은 맑스의 흔적이 자꾸 보이는 것은 기분탓일까? 

  • 2022-05-18 09:15

    1.차이, 긍정, 부정 (구판 132쪽)

     

    차이는 어떤 결정적인 경험과 맞물려 있다. (/이 문장은 이 절의 선언 같은 것이고 결정적인 경험에 대해선 뒷부분에서 나온다) 

    제한이나 대립에 처할 때에도 그런 상황은 우글거리는 차이를  전제한다. (/라이프니치의 부차모순적 제한, 헤겔의 대립적 모순)그런 상황은 원천적인 시공간(결정적인 경험)을 전제하고 이는 제한(한계,형상적 제한)나 힘들의 대립이 초래하는 단순화를 이겨낸다.  이 환경은 부분적으로 겹처진 관점들, 거리들, 소통하는 발상과 불균등성(disparite), 다질적인 잠재력과 강도들 같은 다양체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긴장들을 동일자 안에서 해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다양체 안에 분배한다.

    들뢰즈는 4절에 대한 내용을 5절에서 정리해주는데, 대립의 경우부터 말한다. 그것은 이차원의 역량을 재현한다. 이차원은 사물이 펼쳐 놓아진 평면적 공간이고, 하나의 평면으로 환원된 분극화이다. 왜 들뢰즈는 대립적 모순을 평면을 이분화해서 그친다고 말하는 걸까.  대립에선 강도적 깊이를 놓친다. 이 깊이엔 차이들이 우글거리지만 대립에선 선형적 제한, 분극성, 묶인 다발과 그물방,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가는 방사, 입체경적인 이미지로만 나타난다.(/들뢰즈는 헤겔의 무한을 입체경 같은 방사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이런 이미지는 층을 이루며 상호 공존하는 변동적 평면들이나, 깊이 안에 불균등화를 지시하지만, 차이의 깊이는 일차적이다. 시간과 공간은 오로지 표면에서만 대립들(제한들)을 드러낸다.

    차이는 밋밋한 부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들뢰즈는 앞부분에서도 계속 부정에 의해 이해되는 차이를 비판했다. 이번 절에서 ’차이의 부정성’을 다시 한번 정리를 해줌.) 들뢰즈는 루이스캐롤 거울을 예로 들면서 표면에서는 반대로 보이지만 (단지 부정성으로만?) 두께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모든 공간이 이렇다. 차이를 단지 부정성이라는 납작한 이미지(2차원, 평면)로만 보지 말고 그 아래(두께, 깊이)에서 우글거리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 2022-05-18 15:40

    146~8

    라이프니츠(제한[극한], 분석, 무한한 실체)와 헤겔(대립, 종합, 유한한 자아)는 각각 칸트 이전과 칸트 이후를 대표하지만 이 두 철학 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두 철학에서 어차피 차이는 이미 부정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동일자에 종속되어 있다. 종합적인 유한한 자아와 분석적인 신적 실체는 어차피 같은 사태다. 니체는 자아가 와해될 때만이 신의 죽음이 현실적 의미를 지님을 일찍이 간파했다. 자아가 와해되고 신이 죽고 난 뒤 존재—있음—이 드러난다. 이 존재는 차이들을 통해 언명되지만 실체나 주체 안에 있지 않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주체의 일관성, 세계의 일관성, 이것을 보증할 신의 일관성을 모두 배제한다.

    칸트는 신학을 대체한(궁극적으로는 신학과 달라지지 않을?) 이성을 법정에 세울 때 “나는 생각한다”의 순수 자아를 뒤흔들었다. 이로써 주체는 스스로 자발성을 표상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고유한 일관성도, 세계의 일관성도, 신의 일관성도 없는 곳에는 오로지 어떤 신비한 일관성만이 남는다. 그것은 분열된 자아의 코기토이다. “나는 생각한다”의 '나'는 이미 타자이다. 칸트에 의해 우리는 순식간에 분열증에 빠져들었다. 이 분열증은 사유의 지고한 역량을 말해준다. 칸트는 (아마도 의도치 않게) 차이 위에 존재를 직접적으로 개방했다.

  • 2022-05-18 19:32

    144-148(인디언)

     

    재현의 영역을 떠나 감성론이 등장한다. 동일성의 철학에서와 달리 초월론적 경험론에서 감성론은 감성적인 것 안에서도 오로지 감각밖에 할 수 없는 것, 곧 감성적인 것의 존재 자체를 직접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감성적인 것의 존재는 차이, 누승적 잠재력을 띤 차이, 질적 잡다의 충족이유인 강도적 차이 등을 의미한다. 현상이 기호로서 섬광을 발하고 바깥으로 주름을 펼치는 것은 차이 안에서이다. 차이들로 가득한 강렬한 세계에서 감성적인 것은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동일성의 철학에서는 이성이 통일성을 부여하기 이전, 감성이 수용한 표상들을 ‘잡다’라고 부른다. 들뢰즈는 동일화되는 잡다로 이해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주목하고 잡다와 차이를 구별한다. 차이는 잡다가 아니며, 변화하는 현상들의 배후에 있는 충족이유이다. 그리고 현상은 두 개 이상의 다질적 계열들, 불균등한 질서들의 소통에 힘입어 나타나는 섬광이다. 다질적이고 불균등한 것의 계열들을 우리는 감각할 수밖에 없다(덥다-춥다). 차이는 하나의 동일한 척도로는 측정될 수도 포착될 수도 없는 것으로서의 무엇, 즉 ‘강도’이다. 순수 차이이자 차이의 불균등한 관계들을 형성하게 하며, 이를 감성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강도이다.)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고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차이는 모든 다른 차이들을 거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지하거나 재발견한다. 영원회귀가 관계하는 세계에서 차이들은 서로를 함축하고 있고 따라서 다른 차이들을 함축할 때 차이는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서로의 안으로 주름을 접어 넣고 있는 것이다. 온-주름운동에 놓여 있는 이 세계는 카오스이다.(들뢰즈에게 존재자는 현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배후의 어떤 강도적 체계를 일컫는다. 이 강도적 체계는 여러 구성 요소를 갖는다. 바탕이라 불리는 개체화의 장에는 ‘다질적 항들로 이루어진 계열들이 득실거린다.’ 이 기저의 계열들은 온-주름운동 속에 놓여있다.)

    이 세계는 동일성이 없고 재현 안에서처럼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완성되어 있고 무제약적이다. 영원회귀는 완성된 세계 자체의 무제약성이며 차이를 통해 언명되는 일의적 존재이다. 여기에서 카오스-유랑은 재현의 일관성에 대립하고, 재현 대상의 일관성, 재현 주체의 일관성을 배제한다. 즉, 반복(repetition)은 재현(representation)에 대립한다. 접두사 re의 의미가 바뀌었다.

    반복은 모든 차이들의 비형식적 존재이고 바탕의 비형식적 역량이다. 이 역량을 통해 각 사물은 자신의 재현이 허물어지는 극단적 형상에 까지 나아간다.(들뢰즈에게 개체화의 장인 ‘바탕’이란 ‘깊은 것’의 ‘투사’라고 일컬어진다. 바탕이나 형상은 이러한 깊이에 기반하고 있다. 이 깊이로부터 ‘주름이 펼쳐지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표현’된다.) 반복의 궁극적 요소는 계속되는 불일치에 있으며 재현의 동일성에 대립한다. 영원회귀의 원환, 차이와 반복의 원환은 일그러진 원환이며, 이것은 차이나는 것을 통해서만 같음을 언명한다. 같은 것은 되돌아오지만 차이나는 것을 실어 올 뿐이다.

     

  • 2022-05-19 11:32

    -부정적이 것의 배제와 영원회귀

     

    앞에서 들뢰즈는 ''필연적 파괴'를 불러들이는 두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며, 하나는 '차이 자체'를 긍정하며 부정이 일차적인 '시인의 방식',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차이나는 것을 부정하며 긍정을 일차적으로 여기는 '정치가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이 중 그는 두번째 방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에 따르면 긍정은 차이와 거리를 긍정하며 부정은 긍정의 환영만을 산출하며(구판 138p와는 반대) 부대현상이다. 또한 이는 차이나는 긍정의 효과이며 본연의 차이라는 두 국면을 지닌다. 

     

    니체는 당나귀의 '예'와 '아니요'를 디오니소스-차라투스트라의 그것과 대립시킨다. 이 두 관점, 즉 '아니요'에서 긍정의 환영을 끌어내는 노예의 관점과 '예'로 부터 부정적 귀결을 끌어내는 주인의 관점은 대립한다.

    확립된 가치들과 창조 간 구별을 역사적 상대주의에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이 둘 사이에는 본성적 차이가 있다. 가장 심층적인 본성상의 차이는 평균적 형상과 극단적 형상들(새로운 가치들) 간에 성립한다. '따라서' 평균적 형상들을 무한으로 끌고간다해도 극단적 형상이 되지는 못한다.

    니체에 따르면, 참된 선택은 대립이나 투쟁보다는, 영원회귀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월한 형상"을 끄집어냄으로서 된다. 

     

    극단성은 차이남의 일부고, 우얼한 형상은 영원회귀 자체의 비형상이다. 영원회귀는 차이를 "만든다". 이에 따르면 부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부정된다. 부정적인 평균적 긍정, "아니요"에서 비롯한 "예", 등은 이러한 '폭력적인 (영원회귀라는 바퀴의)원심 운동'에서 '축출된다'.

    "귀결로서의 부정은 긍정의 결과이고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소진시키며 그 스스로 영원회귀의 움직이는 중심에서 소진된다." 영원회귀에서는 본연의 차이가 중심, '같음'이 가장자리에 있으며, 이는 비동등성을 맴돌 뿐이다.

  • 2022-05-19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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