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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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아도를 따라 꼼꼼히 읽는 <명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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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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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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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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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9.14 | 79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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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아도를 따라 꼼꼼히 읽는 <명상록>- 2회차 메모/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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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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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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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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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10.07 |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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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아도를 따라 꼼꼼히 읽는 <명상록>- 1회차 메모/질문
(4)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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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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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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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30 |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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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 명상록을 읽고 <후기>
(1)
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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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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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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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은 | 2026.09.18 |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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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 명상록 마지막회차 메모
(5)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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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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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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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15 | 113 |
| 243 |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 명상록 1회차 메모
(4)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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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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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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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08 |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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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을 읽고 <후기>
(3)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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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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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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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04 | 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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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19~22권 메모
(5)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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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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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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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01 | 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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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15,16,17~18권 메모
(6)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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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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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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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8.26 |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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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9, 10, 14권 메모
(4)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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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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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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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8.18 | 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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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7, 8, 9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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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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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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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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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8.12 | 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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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4, 5, 6편 메모
(4)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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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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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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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8.04 | 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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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명상록>과 세네카의 편지글 1회차 (제1권 ~ 3권)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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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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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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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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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7.29 | 196 |

1. p.55 "우리는 우리 자신 앞에서만 가장 내밀한 것을 성찰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대신 타자에게 말하거나 구술할 때는 내적 담론이 진부하고 몰인격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 으레 그랬듯이 <명상록>도 자기 손으로 직접 썼을 공산이 크다."
왜 타자에게 말하거나 구술할 때는 내적 담론이 진부하고 몰인격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고 저자는 말하는 것일까? 고대에는 언어가 글쓰기보다 우선한 사유 방식으로 알고 있는데......
2. p.63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르스의 대립이 명상록에서도 보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에픽쿠로스 주의(원자론)와 스토아주의(자연과 섭리)를 대립적으로 파악하고 후자를 옹호하는 가르침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p.63)"고 한다.
에피쿠로스 원자론은 모든 물질이 원자라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 원자들의 운동과 결합으로 세상이 이루어지며, 원자의 '자의적인(클리나멘)' 운동을 상정한다. 따라서, 세계가 원자의 기계적 운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우연성(클리나멘)을 통해 세상의 다양성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물리적 세계관은 에피쿠로스의 윤리학,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는 삶과 마음의 평온함을 상징하는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는 쾌락주의와 연결된다고 하는데...... 이 사유와 자연과 섭리에 근거한 이성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스토아의 사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행복의 근원 차원에서 두 철학사조의 사유의 구조에 대해서 말입니다
3. p.63 스토아 철학은 보편 이성(Logos)이 우주를 지배하지만, 이 이성이 "유순한 질료에 형상과 에너지를 부여하나 힘이 없다. 그래서 매사에 원인이 되는 것(이성)과 질료를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질료와 형상을 왜 유순하다고 표현하며, 만약 우주의 모든 것이 이성의 합리적인 섭리에 따른다면, 이성이 '힘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4. p.68 피에르 아도의 설명에 따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단순히 철학적 사색을 담은 책이 아니라, 스토아 철학의 원리를 일상에 적용하기 위한 '자기 수련서'이자 '삶의 방식'이며 황제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다잡기 위해 그날 그날의 단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스토아 철학의 세 가지 규칙에 따라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철학적 원리(도그마)를 자신에게 상기하고 되풀이함으로써 올바른 사유와 행동의 기초를 다져 나가는 것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한다. p.68의 아우렐리우스의 세 가지 실천규칙과 연관지어 설명한 부분을 좀 더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18.
"따라서 고대 철학자들은 글을 쓸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설령 글을 썼다 하더라도, 새로운 이론을 창안하거나 어떤 체계의 특정한 부분을 발전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지지해 주는 학파의 근본 원리들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52.
죽음의 임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직 단 한 가지만이 중요하다. 그것은 인생의 본질적인 규칙들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려고 노력하고, 철학자의 기본 소양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다. 이 기본소양은 세 가지인데. 자신의 내면의 대화(내적담론)를 통제하는 것, 인류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일만 행하는 것(이타적 행위), 그리고 보편 자연(우주)의 과정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사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아모르 파티)이다.
58. 선한 사람은 타인을 위해 정직하게 행동하고, 자기에게 달리지 않은 일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엄정하고 진실되게 생각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삶의 세가지 원칙: 항상, 어디서나, 이 세가지는 너에게 달린것이다.
1. 현재의 사건에 경건하게 만족하기,
2. 어떤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기.
3. 니가 지금 품고 있는 표상에게 분별의법칙(적합한 표상)을 적용, 객관적이지 않은 어떤 것도 너에게 스며들지 못하게 하기.
59.
스토아주의자의 행동에 기초가 되는 근본 도그마 : 도덕적 선만이 선이요, 도덕적 악만이 악이다.
2권1장: 선은 도덕적 선 밖에 없고, 악은 도덕적 악 밖에 없다.
스토아주의에서 도덕적인 선은 곧 '이성에 따르는 삶(자연에 따르는 삶)'이자 '우주의 본성(로고스)에 순응하는 삶'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성(인간 본성)을 발휘해 우주의 질서(로고스,이성)에 순응하며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 선이라고 본다. 그래서, 선 과 악은 도덕적으로만 존재한다, 즉 이성에 따라 올바르게 행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한다.
61. 니가 지금 무언가 짜증난다면, 다음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섭리에 부합하게 일어난다.
일어나는 어떤 것도 너의 잘못이 아니다.
일어나는 일은 항상 그렇게 과거에 일어났고, 미래에도 그럴것이고, 지금 이순간에도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우리와 인류 전채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잊은 것이다. 우리 관계는 혈족의 관계라기 보다는 공통의 정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은 신성하고, 우리 정신은 저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온 것이다.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나의 아이, 나의 몸, 나의 영혼도 위에서 내려온것이다.
세상은 모두 판단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것은 지금 현재뿐(과거, 미래가 아닌)이다.
73. 한 궁정의 한세대가 사라졌다.
"예를 들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병에 걸리고, 죽고, 전쟁에 나가고, 축제를 즐기고, 사업을 하고, 밭을 일구는 등 온갖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아첨꾼, 오만하거나 의심 많은 사람, 음모를 꾸미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타인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연인들, 지독한 구두쇠들, 집정관이나 왕의 자리를 갈망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그 삶은, 이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 않는가?"
75.
"인간 자체를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겠는가?"
: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조건(죽음, 질병, 가난 등)은 나 자신을 해칠 수 없다. 외부 조건(사물)은 나에게 무해하다. 따라서 내 영혼과 인격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없는 외부의 불행(질병, 고통 등)은, 궁극적으로 나의 '진정한 삶'을 더 나쁘게 만들거나 망가뜨릴 수 없다. 그러니 외부 환경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 마음과 도덕성을 잃지 않는다면, 내 삶은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다.
76. 매사에 ‘원인인것’과 ‘질료인것’을 구분하라. 그 이유는?
1.질료인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구성하는 날 것의 재료, 외부적인 물질적인 조건을 말한다. 그 자체로 아무런 도덕적인 가치(선악)가 없으며 덧없는 물질세계 속성을 가진다. 육체, 질병, 가난, 비난 등.
2.원인적인 것은 형상적인것으로 그 사물에 형태와 본질을 부여하는 근본 원리이자, 사건에 작동하는 나의 내면의 판단, 의도이다. 인간의 이성, 도덕적 선택, 외부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판단, 우주의 질서 등이다.
그걸 구분하는 이유는 외부의 충격(질료)으로부터 나의 마음(원인)을 분리하여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을때(외부 사건), 이 현상을 분석한다. 질료적인것은 상대방 말소리의 파장, 단어들의 나열 등 물질적인 현상일 뿐이다. 원인적인것은 ‘그 말이 나를 모욕했다’라고 판단하는 나의 마음이다. 질료와 원인을 분리하면, 외적 충격은 껍데기에 불과함을 깨닫고 즉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너에게 일어나는 상황(질료)은 네가 바꿀 수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진짜 본질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스리는 너의 이성과 판단(원인)에 있으니, 오직 원인적인 것에만 집중하라”
77.
"따라서 에픽테토스의 연설은 청중의 '내적 담론(inner discourse)'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두 가지 치료법이 있다는데, 하나는 언어의 치료고 다른 치료법은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 치료'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이 치료는 에픽테토스가 진술한 교리(dogmas)와 행동 규칙들을 받아들이고 —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네면서 — 그것들을 내면화(assimilating)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그 교리들이 마르쿠스 자신의 내적 담론의 원칙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내면에서 '표상(phantasiai)', 즉 도그마를 공식화하여 표현하는 담론들(discourse)을 끊임없이 다시 불태워 살려내야(rekindle) 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철학은 단순히 머리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치료법.
1) 언어의 치료
원리: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외적인 사건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속의 잘못된 생각(내적 담론) 때문이다. 스승의 날카로운 언어적 지도는 청중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고, 생각의 흐름(내적 담론)을 바꾸는 기초가 된다.
2) 쓰기 치료 (자신을 위한 글쓰기 / 마르쿠스의 명상록)
원리: 스승에게 배운 훌륭한 철학적 규칙을 듣고, 끝나면 잊혀진다. 마르쿠스는 이를 글로 직접 쓰면서, 늘 자신에게 말을 건네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체화했다.
그래서 글쓰기를 통해 올바른 철학적 생각들을 머릿속에 계속해서 재활성화하고, 표상(Phantasiai)을 다시 불태운다는 것 (Rekindle)리프레시 해야 한다는 의미.
78.
"글쓰기 수련에서 도그마는 단 한번 배우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수학 공식이 아니다. 신비 체험이나 계시처럼 강렬한 의식, 직관, 감정, 도덕적 경험이 되는것이다. 이런 영적 정서적 영성은 금방 지나간다. 이를 깨우기 위해서는 쓴것을 다시 읽어보는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쓰여진 페이지는 이미 죽은것이다. 중요한것은 reformulation 재구성이다" : 글쓰려는 욕구가 있는 순간에 지금 당장 쓰고 말하는 행위이다. 문자 그자체는 어떤것도 붙잡지 못한다. 모든것은 글쓰기 행위 자체에 있다.
80.
스토아 전문용어; 마르쿠스가 전문 철학자이고 번역시에 주의할 용어.
hypolepsis ("value-judg ment")가치판단;
kataleptikos ("objective"; "adequate")객관적인 적합한 판단;
phantasia ("representation," not "imagination")상상이 아닌 표상,
hegemonikon ("directing principle")지배원리, 이성;
epakolouthesis ("necessary but nonessential consequence") 필연적 결과;
hypexaire sis ("reserve clause") 유보조항
1. 철인황제
17쪽)"고대 철학자는 철학하는 사람답게 사는 자, 철학적인 삶을 영위하는 자였다."
18쪽)"철학자는...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향을 하고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양식을 공언하는 자였다."
21쪽)철학자로 전향한다는 것, 삶의 양식의 전환. 그 모습은, "짧은 망토와 딱딱한 침상은 스토아주의자의 삶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생활양식=아고게
24쪽)아우렐리우스의 철학 개인교사이자 벗이자 정신적 지도자. 그의 덕분에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필사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27쪽)25살,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에로의 전향을 말할 때 언급되는 아리스톤. 그러나 저자는 그의 영향은 논쟁적(30쪽)이라고.
2. 명상록 개괄
책 제목에 대해서 '권고paraggelmata'(40), '비망록hypomnemata'(42), '자기 자신을 위한 윤리적 글ta eis heauton ethika'(43), 자기 자신과 관련된 글, 사적인 글 등등의 제목
45쪽)"자신의 생각을 짧은 단상으로 표현하는 문학적 장르", 자기 삶의 기강을 담은 글, '도덕론의 발췌eclogai', 좌우명 뭐 그런 것.
"명상록은 아우렐리우스가 자기를 주제로 삼아 자기와 나누는 대화다....자기 자신을 위한 지침...." 황제는 일기를 썼지만, 그것은 오늘날의 감정과 심리 상태의 토로와는 다른 양식의 글. "도덕적 인격에 건네는 권고."(50)
51쪽)"이제 더는 헤매지 마라. 너는 네가 쓴 비망록도, 고대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행적도, 노후를 위하여 남겨둔 그들의 저작 발췌본도 읽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3-14)" 이는 2-2-2의 "책을 내려놓아라"고 하는 책과 관련되는 부분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아도에 따르면, "도나우 전장에서 그를 짓누르는 임박한 죽음의 무게, 자신을 압도하는 전격적인 전향의 시급함, 그 결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학적 활동의 변화"와 관련해서 풀고 있다. 즉 더이상 다른 책을 읽고 자시고 할 시간도 상황도 아니라는 것. 그럴 때 자신이 일상에서 작성했던 '메모 카드'를 보면서, 마음의 평정을 꾀했던 것으로. 그래서 전적으로 공부함에 책을 읽지 마라는 것이 아니었음. 그리고 그가 썼다는 글은 '비망록'이라는 말, 도그마들의 메모, 좌우명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명상록은 고대에 비망록이라고 불렀던, 그날그날 적어두는 개인적 메모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글쓰기에 속한다.(53)
3. 정신 수련으로서의 <명상록>
58)"스토아주의자에게 철학은 무엇보다 삶의 방식이었다...실천적 규칙은 전반적 태도, 세계관, 내면의 근본적 선택을 나타낸다. 그 선택은 '담론'으로, 아우렐리우스가 에픽테토스를 본따서 도그마타라고 부르는 보편적 문장으로 표현된다. 도그마는 어떤 실천적 태도를 기초부터 다지고 정당화하는 보편적 원리로, 하나 혹은 여러 개의 명제로 제시될 수 있다." 이렇게 고난과 삶에 흔들릴 때, 그것을 잡아줄 명제 잊지 말아야 할 보편적 원리를 비망록의 형식으로 써두고 항상 '손 안에 두고' 읽어라, 외어라, 몸에 새겨라고 말하는 듯. 그리고 전쟁 상황이나 혹은 책이 없을 때는 그 메모를 읽거나 혹은 머리 속의 그 메모, 기억을 상기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아울렐리우스.
"앞으로 너에게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일어날 때 잊지 말고 이 '도그마'를 적용하라. "이것은 불행이 아니요, 오히려 이것을 용감하게 참고 견디는 것이 행복이다."(4-49-6) 이를 보여주는 다른 예시, 어떤 일상의 일에 혹은 표상을 판단한다고 해보자. 과연 행복은 무엇에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데 있다"는 명제를 기억해내라. 이어서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충동과 행동의 원칙이 되는 도그마가 있어야 한다. 그 도그마는 어떤 것인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하는 도그마다.".....그리고 <명상록>은 "행동의 3가지 규칙과 그 규칙의 기초가 되는 도그마"를 둘러싸고 반복적으로 나온다. 아도는 그 도그마 모음이 "각 장의 첫머리=케팔라이아' 모임"에 있다고 본다. 즉 "정신적 효과를 축적하고 증강하는 핵심 목록을 제시"한 것.(61)
61)케팔라이아 모음의 예로 아도는 12-26을 거론한다. "모든 일은 보편 자연에 맞게 일어난다. /잘못은 너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게다가 일어나는 일은 언제나 그렇게 일어났고, 언제나 그렇게 일어날 것이며, 지금도 도처에서 그렇게 일어나고 있다. / 개인과 인류 전체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잊은 것이다. 인류는 피와 씨의 공동체가 아니라 정신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흡사 밥 먹으면 배 부르다는 것처럼, 보편 원칙. 책을 읽을 때 그럴러니 하면서 그냥 넘어갔던 부분. "간결한 비망록 형식."(62)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의 보편적 원리이기에 일상의 사건에 있어서는 그것을 적용하는 것 등은 나에게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철학을 하는 것. 첫째가는 절대 원칙, 일반 원칙. 그리고 이것을 '씨앗문장'으로 삼아서 글을 쓰는 것, 그것에서 도출되는 또 다른 도그마들.
64)"그러므로 이 모든 '도그마'는 근본 도그마에서 도출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구별하는 삶의 세 가지 규칙 혹은 규율을 중심으로 굳어진다. 사유의 규율은 판단의 자유에 준거한 도그마를 전제하고, 행동의 규율은 이성적 존재들의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보는 도그마를 전제하며, 사건에 대한 동의의 규율은 우주의 섭리와 합리성이라는 도그마를 전제한다." 이러한 도그마들과 그것의 반복으로 이뤄진 <명상록>. 덧붙여 볼 것, 76쪽)"아우렐리우스는 그러한 구분을 스토아학파에서 배운 바를 복습하듯이 반복한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이 그에게는 실존적 의미를 지녔다. 원인이 되는 요소를 알아본다는 것은 자기 안에서 존재 전체를 이끄는 원칙(헤게모니콘), 우리를 육신에 의존하지 않게 하는 사유와 판단의 원칙,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과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의 경계를 설정하는 자유의 원칙을 알아본다는 뜻이다.....이렇게 반복되는 표현은 "어떤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 표현은 관념의 연합을 통해 표상과 실천 전체를 활성화하는 일종의 자극제다....도그마와 삶의 규칙을 언제나 염두에 두기 위해서 글을 썼을 뿐이다. 그는 에픽테토스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즉 "철학자들이 명상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매일 글로 쓰고 수련의 주제로 삼아야 할 것이 이것이다.(<담화록>, 1-25)"
78)"도그마는 의식의 고취, 직관, 감정, 신비 체험이나 계시처럼 강렬한 정신적 경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신적 정서적 강렬함은 금세 지나간다. 이것을 다시 일깨우려면 이미 쓰여 있는 것을 다시 읽어보는 걸로는 충분치 않다. 글이 쓰여 있는 페이지는 이미 죽은 것이다. <명상록>은 다시 읽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문자는 그 무엇도 붙잡아 놓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있다. /그래서 똑같은 말은 새롭게 표현하고 재탕하려는 시도, 동일한 주제에 대한 변주가 계속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언제라도 꺼지거나 고사할지 모르는 내적 상태를 다시 깨우고, 북돋우고, 다시 활성화하는 것이다. 판에 박힌 일상과 무의미 속에서 희미해지고 흐트러지는 내적 담론을 언제나 새롭게 가다듬는 것이 중요하다./ ... 자기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 해서 글스기라는 하나의 기술, 하나의 방법....내적 담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스토아주의의 도그마와 삶의 규칙을 명상한 것이다."
68)"도그마의 제시가 그렇듯 삶의 규칙에 대한 제시도 상당히 구조화." "삶의 세 규칙 혹은 세 규율은 판단, 욕망, 충동이라는 영혼의 세 활동에 해당하고, 개인의 판단력, 보편 자연, 인간 본성이라는 현실의 세 영역에도 해당한다." 표 참고.
(72쪽) 삶의 세 가지 규칙은 명상록의 진정한 열쇠다. 실제로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다양한 도그마는 이 규칙 하나하나를 중심으로 구체화되었다. 판단의 규율을 중심으로 판단의 자유, 인간이 비판적으로 자기 생각을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야기된다. 외부 사건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이끄는 규율에는 보편 자연의 인과성에 대한 모든 정리가 해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행동의 규율은 서로에게 끌리는 이성적 존재에 관한 이론적 명제가 뒷받침한다.
결국 질서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저작에 실은 극도로 엄정한 개념 체계가 있는 것이다. 그 체계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질문1)
삶의 세 가지 규칙은 앞장에서 언급한 판단·욕망·충동으로 볼 수 있을텐데요, 판단·욕망·충동을 삶의 세 가지 규칙으로 구분한다면 이 셋은 실제 삶에서 정말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느냐가 무엇을 욕망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이미 결정하기 때문에 결국 세 가지 규칙은 하나의 규칙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질문2)
우리는 흔히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선택할 수 있지만 무엇을 욕망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는 통제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판단·욕망·충동이 하나의 체계라면, 욕망과 행동까지도 판단의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인간에게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스토아가 지향하는 바가 이런 지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