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부는 힘이 세다 - 문탁네트워크

요산요수
2012-06-19 13:05
4995

격월간 잡지 민들레 지난 호에 요요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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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힘이 세다

- 어쩌다 우리는 ‘다른 삶을 꿈꾸기만 하던 사람들’에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김혜영

요산요수(문탁네트워크 회원), ta-tha-ta@hanmail.net

 

친구의 아파트 거실에서 작은 공부모임으로 시작한 문탁네트워크(이하 문탁)에서의 생활은 내 삶을 크게 바꾸었다. 문탁 터전을 찾아온 낯선 얼굴들과 함께 공부를 하며 친구가 되고, 매일 밥을 먹으며 식구가 되고, 1년에 한 번 인문학축제로 공부의 힘을 키우면서 2년 반을 지내고 나니, 어느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다른 삶’의 가능성이 펼쳐지는 현장이 되었다. 공부와 밥과 우정의 힘으로 매일 매일 차이를 만드는 장소! 어쩌다 우리는 ‘늘 다른 삶을 꿈꾸기만 하던 사람들’에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선물의 순환

2009년 가을, 함께 공부하며 삶의 비전을 찾아보자는 제안에 의기투합한 몇 사람이 ‘마을에서 만나는 인문학공간 문탁네트워크’를 시작했다. 몇 개월 공부하면서 공부가 점점 재미있어지자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모아졌다. 터전을 마련하고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방법은 간단했다.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두 사람이 천만 원씩 목돈을 선뜻 내어 전세비를 마련했고, 초기 시설비와 월세는 각자의 처지와 능력에 맞게 회비를 내어 충당하면서 서로에게 터전을 선물하고, 공부를 선물하자고 했다. 공부하고 활동하는 회원들이 늘어나는 만큼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운영회비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일리히와 선물 세미나를 통해 배웠다. 돈은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 선물은 선물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영적인 힘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을.

시장의 상품교환과 선물의 순환은 완전히 다른 원리로 작동된다. 문탁에서 ‘선물의 순환’은 비유가 아니라 다른 삶을 만드는 실재하는 원리다. 문탁 주방에서는 누군가가 가져온, 냉장고에서 오래 묵은 재료도 맛있는 음식으로 변신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기쁨이 배가되고 관계가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이런 걸 가져와도 되냐며 쭈뼛쭈뼛 망설이던 사람들도 선물이 주는 마법 같은 힘에 감응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자기 삶의 잉여를 덜어내고 순환의 장에 들어설 힘을 얻는다.

그러나 문탁이란 공간에서 선물이 저절로 비처럼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선물순환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누군가가 선물의 사이클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이미 화폐경제가 만든 가격의 논리와 등가교환의 논리가 너무 집요하고 강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사고 파는 상품으로 바꾸어 버리는 시장의 힘-물신주의와 맞장을 뜨면서 선물경제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은 무척 힘이 든다. 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애쓰지 않으면 어느새 선물순환은 교환의 장으로 건너 가버린다. 청소, 밥, 세미나가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이것을 개인적인 이해타산의 관점이 아니라 순환의 관점에서 연결 짓는 관계가 있을 때 가능하다. 문탁이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상과 공부의 힘 때문이다.

 

공통감각을 키우는 일상과 공부의 힘 

문탁 생활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공부-세미나다. 터전을 열 때 단 하나였던 세미나가 지금은 날마다 몇 개씩 진행되고 있다. 선물이 선물을 낳듯이 세미나는 세미나를 낳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문탁 홈페이지에는 우리가 선언한 공부의 윤리가 있다. 용맹정진, 사상마련, 지행합일. 참 거창하다. 지금 문탁에서 이루어지는 세미나에서 이 윤리가 모두에게 통하고 있는 걸까? 공부하러 오는 분들 중에는 멀리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집 가까이에서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참 좋다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세미나가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세미나에서 한 주제가 끝나고 에세이를 써야 한다고 말하면 기겁하기도 한다. 불편해 하고,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확실해 진 것이 하나 있다. 공부를 빡세게 하지 않으면 공부가 늘지도 않거니와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같이 세미나 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거나, 책을 읽어오지 않는다거나 발제가 성실하지 않다거나 하면 그 세미나는 금방 시시해진다. 읽는 책이 어려워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대충하면 망한다. 그래서 얻게 된 결론은 ‘마을에서 만나는 공부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더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세미나가 세미나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용맹정진, 지행합일, 사상마련은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방향이다.

문탁은 공부 뿐 아니라 일상을 중시한다. 아무리 멋진 생각과 거창한 이념을 갖고 있어도 삶에서 그것이 구현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공부를 통해 다른 삶을 살려면 수 십 년 간 익숙해져 온 습속을 객관화하고 바꾸어야 한다. 일상은 자본과 국가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는데, 인문학 책을 읽는 것만으로 저절로 다른 삶이 살아질 수는 없다.

문탁 터전이 생기고 나서 생긴 심각한 일은 돈이 아니라 밥당번과 청소, 공부의 윤리와 같은 일상의 문제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공간을 마련하면 대부분의 단체들은 기능적으로 사람과 일을 조직하고 공간 유지관리를 위해 실무자를 둔다. 그러나 문탁은 터전운영을 실무자가 아니라 밥당번^^으로 해결했다. 초기에 세미나가 몇 개 되지 않을 때 문탁회원들이 돌아가며 밥당번을 맡았다. 그러면서 서로 다르게 살아 온 사람들의 다른 습속들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서로 점잖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만나던 마을의 남녀들이 일상을 공유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밥을 같이 먹는 일은 간단치가 않다. 누군가는 장을 봐 와야 하고, 누군가는 밥을 해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 장을 보려면 어떤 재료가 남았는지 꼼꼼하게 챙기고, 물가도 신경 써야 하고, 건강한 식재료도 고려해야 한다. 선물을 가져다 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잘 먹어서 남은 걸 없애는 일까지 신경 써야 한다. 이런 일들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숱한 사건들이 생겨나고 희로애락이 펼쳐지며 문탁은 우리 모두의 공통의 장소가 되어갔다.

예로 먹던 음식이 아주 조금 남았을 때, 먹다 남은 밥이 굳어 버렸을 때 누구나 먹기 싫어한다. 나도 마찬가지. 그러나 문탁 주방에서 그런 음식들을 버릴 때는 점잖게 넘어가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공적인 살림이어서가 아니라 친구와 자연의 선물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함께 사는 공간의 일은 서로서로 참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성인들 사이에서 이런 참견 자체가 무지 곤혹스럽고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상에서 서로 부딪치는 사건을 만날 때, 바닥이 드러난다. 개성의 차이인지, 취향의 차이인지, 단순한 습관의 차이인지, 생각의 차이인지, 이념의 차이인지, 정치적 색깔의 차이인지, 문화의 차이인지, 건강의 차이인지…, 수많은 차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통해 배우며 공통감각을 키워갈 것인가가 핵심적인 일상공부다. 선가에서는 행주좌와어묵동정 모든 것이 공부라 했던가? 작은 차이에도 마음은 쉼 없이 흔들린다. 평상심이 곧 도라는 것이 허튼 소리가 아님을 나는 문탁에서 일상공부를 통해 배웠다.

게다가 이건 그냥 일상이 아니라 공부가 일상이 되고 일상이 공부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고 선언해버린 문탁 터전이 아닌가? 선언과 현실의 괴리! 그러나 이 괴리로 인해 절망감을 느낄 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 괴리는 내공 수련의 기회이기도 하다. 말이 아니라 일상이 보여주는 나와 친구의 바닥, 그 심연을 피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와 우리를 바꾸는 네트워크

밥과 공부 말고도 그야말로 날마다 순간순간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세미나와 마찬가지로 활동들도 다수결이나 만장일치제 같은 규칙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일이 직접적인 실천단위인 현장에서 논의하고 결정하는 방식이다.

문탁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활동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한 활동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사람이 나서면 지지하고, 돕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자극받고 우리 모두의 역량이 함께 커진다고 믿는다. 문탁에서는 누구나 이미 자기 활동의 중심이다. 그러나 그 중심은 다른 중심과 관계 맺을 때 의미를 갖는다. 고정된 점과 점, 고립된 개인들이 결합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움직이며 변이하는 선-관계들로 거듭 새롭게 재구성되는 우정의 네트워크가 되고자 하므로.

문탁 2년 활동의 결실이라 할 만한 마을작업장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마을과 경제 세미나를 하던 세미나 팀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고민하면서 마을경제사업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게시판을 통해 취지를 알리고 기금을 마련했고, 생활용품을 만들어 쓰면서 마을화폐를 도입하고, 하나 둘 사업단의 물품을 사용하는 회원들이 늘어나자 마을작업장을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문탁에서 이에 대한 찬반토론은 없었다. 오히려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서로 격려하며 마을작업장의 비전을 찾는 단기 세미나를 열어 같이 공부했고, 공부결과를 인문학 축제에서 발표했다. 그리고 곧 마을작업장이 만들어졌고 작업장이 있어서 우리의 일상은 더 풍부해졌다. 공부와 일상을 통해 마음을 모으는데 성공하면 일은 만들어진다. 그렇지 못하면? 공부거리를 남길 뿐이다.^^

농사작업장-텃밭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터전 근처에 텃밭을 구한 첫 해에는 겨우 겨우 텃밭일을 했다. 2년차 텃밭은 식물사랑이 지극한 ‘마음’(문탁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 맡았다. ‘마음’이 텃밭을 맡으면서 텃밭은 명실상부하게 농사작업장으로 변모했다. ‘마음’이 세미나 하는 날과 밥당번 하러 오는 날은 터전에 있는 사람 누구라도 꼬드겨 텃밭 가는 날이기도 했다. 진딧물이 꼬이면 인터넷을 뒤져 진딧물 퇴치제를 만들었고, 그 열심에 감화된 텃밭 일꾼들이 엮이기 시작했다. 튼실한 배추를 수확하여 ‘마음’이 존재감을 과시한 김장울력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며칠 전 봄농사를 알리는 텃밭울력을 선포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가족과 함께 주말농장을 할 때, 텃밭에 예쁜 꽃을 심어서 주위의 농사꾼들에게 핀잔을 들었다는 ‘마음’이 문탁과 접속하면서 도시농부를 꿈꾼다. 동시에 올해 새롭게 논어강독과 중국사상사 세미나에 도전한 ‘마음’에게 텃밭은 공자의 인을 묻는 현장이 될 것이다.

 

문탁생활 2년. 2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다른 삶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변화의 에너지가 우리 속에 꿈틀거린다. 그것은 공부의 힘이다. 지식을 쌓고 자격증을 따는 공부가 아니라 삶을 바꾸는 공부를 하려는 의지가 우리를 공부-수행자로 만들었다. 그것은 함께 먹는 밥의 힘이다. 내 가족을 넘어 친구를 위해 밥을 짓고 친구와 함께 먹는 밥이 우리를 키웠다. 그것은 선물의 힘이다. 공부도 밥도 돈도 활동도 선물로 바꾸어 버리는 강력한 공유지, 네트워크의 힘이 우리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어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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