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관찰하는 힘이 지혜다
문탁
2023-02-10 08:18
481
요요
문탁에서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불교 공부도 철학 공부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10년은 불교세미나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불교를 공부하는데 철학공부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듦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존엄하게 늙는 길을 찾고 싶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풀어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명상일기를 쓰다
아침 명상 후에 명상 일기를 쓴다. 가끔씩 메모를 하다가 명상일기를 쓴 지 반년이 좀 넘었다. 명상일기와는 좀 다르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해서 기록하는 것도 있다. 하나는 아버지 돌봄 일지다. 2년 전 어머니 병상일지로 시작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돌봄 일지가 되었다. 간혹 몸이 아플 때마다 기록하는 몸상태 일지도 있다. 작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없었던 긴장성 두통과 어깨 통증, 눈 뻑뻑함, 수면 패턴의 변화가 생길 때마다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어떻게 대처했는지 써놓고 있다. 명상도, 아버지의 치매와 건강상태도, 내 몸의 컨디션도 기록을 들여다보면 변화추이를 알 수 있어서 나름 유용하다.
사실 나는 일기나 가계부 같은 사적인 비망록 남기기를 즐겨하는 기록형 인간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는 회고형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아이들 어릴 적 사진도 어쩌다 다른 사람이 찍어 준 사진 이외에는 거의 없다. 카메라나 캠코드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기록과 보관에 무심한 것은 정도가 지나쳐 친한 친구들과의 몇 번의 해외 여행 사진도 컴퓨터 바꾸면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고 산다. 그러던 내가 명상수행의 서원(誓願)을 세운 후 간간이 명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내 경험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상 초보자의 분투
명상을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난관을 만난다. 나 역시 그랬다.(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다.) 가부좌를 하고 앉으면 여러 부작용이 속출한다. 잠깐 앉아 있어도 다리가 저려오고, 호흡은 거칠어지고, 졸음이 쏟아지고, 마음은 엉뚱한 곳을 헤매기 일쑤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앉아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저릿저릿하며 아프던 다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안해지는 때가 찾아온다. 길었다 짧았다, 깊었다 얕았다, 거칠었다 차분했다, 제멋대로인 호흡도 집중과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안정되고 고요해진다. 여기저기 가렵기도 하고, 또 정신이 몽롱해지는 혼침(昏沈) 상태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그러다 정신이 맑아지기도 한다. 이럴 때는 무엇이 오든 그저 지켜만 보겠다고 의욕을 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지켜보다 어느 순간 드라마틱한 변화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한 번 두 번 반복하다 보면 호흡에 의지하며 몸과 마음을 지켜보는 것에 점점 재미가 붙는다.
오늘은 오전 중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오랜만의 결가부좌였다. 다리가 저려오자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30분 정도 명상을 했나 보다. 저녁에는 가부좌가 좀 부담스러워서 반가부좌를 했건만 역시 다리가 저려 오는 건 마찬가지다. 다리의 저림이 풀릴 때까지는 앉아 있으리라 의욕을 냈다.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순간 다리 저림이 스르르 풀려갔다. 여러 번 경험을 했음에도 참 신비롭다. 생겨난 것은 사라진다. 그 법칙을 알고 있음에도 가부좌를 풀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데 꽤 에너지를 써야 했다. 오후에는 45분 정도 좌선을 하고 15분 경행으로 마무리 했다.
며칠 명상을 해보니 호흡관찰이 정말 재미있다. 이전에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수행할 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새삼 발견했다. 호흡의 길이도, 깊이도, 지켜보는 동안 계속 변화한다. 호흡과 직결된 심박동도 그렇다. 가슴이 답답하다가 편안해지고 다시 답답해지기도 한다. 벽에 걸린 시계 소리 역시 커졌다 작아졌다 다르게 들려온다. 호흡에 깊이 집중하면 거의 시계 소리가 들리지 않다가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크게 쉬기 시작하면 시계 소리도 크게 들린다. 호흡이 편안해지면 편안해질수록 시계 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중간에 생각이 끼어들어 오기도 했지만 이름을 붙여주면 일어난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명상 열흘째, 2019년 2월 9일)
매일 아침 1시간 명상을 계속하면서 그 시간만큼 명상의 힘이 조금씩 쌓인 것 같다. 가부좌를 하는 게 점점 더 편안해지고, 앉아 있기 위해 힘을 덜 들이게 되었다. 생각이 불쑥 끼어드는 것을 아는 힘도 커졌다. 물론 앉아서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는 경우도 많다. 명상은 끊임없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초기에는 명상이 잘되기를 바라는 조급함과 헛된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 명상하는 동안의 과제이기도 했다.(명상 백일째, 2019년 4월 30일)
관찰로 알게 되는 것들
명상 중에 일어나는 집중과 통찰은 결코 신비로운 것도,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경험도 아니다. 명상은 지관(止觀), 곧 멈추어 관찰하는 수행이다. 멈춤[止, 사마타]은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관찰[觀, 위빠사나]은 몸과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지켜보며 알아차리는 것이다. 나는 명상을 호흡에 대한 관찰이든 몸에 대한 관찰이든 느낌이나 마음에 대한 관찰이든, ‘좋다 싫다’라든가, ‘옳다 그르다’라는 호오의 판단과 분별 없이 지켜보는 연습과 훈련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삶 속에서는 멈추어서 지켜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지면 평소 익숙한 습관에 따라 프로그래밍 된 대로 반응하곤 한다. 그래서 후회하고 이불킥을 하고, 혹은 그 결과를 감당하지 못해 남 탓으로 마음을 달래거나 상황으로부터 도망가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러나 명상을 할 때는 즉각적 반응을 멈추고 내 마음에 일어나는 것들을 슬로우 비디오 돌리듯이 관찰할 수 있다. 그렇게 마음에 일어나는 반응을 지켜보는 사이에 조금씩 관찰하는 힘이 길러진다. 관찰하는 힘이 바로 지혜이다.
일상생활에서는 다리가 저려오면 마사지를 하거나 다리를 뻗거나 발바닥에 힘을 주고 걸어서 가능한 빨리 저림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명상할 때는 다리를 움직이거나 뻗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다리 저림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 또한 어떤 조건과 인연이 화합하여 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때 우리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을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익힐 수 있다.
호흡을 지켜보는 것도 그렇다. 호흡이라는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키운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이기까지 한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어떻게 지혜를 키울 수 있을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호흡은 의지적인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호흡에 대해 우리의 소망과 기대를 투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만일 관찰 대상이 호흡이 아니라 자식이나 돈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쉽게 동요하여 관찰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흡은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투사하기 쉽지 않은 자발적 생명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보다도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자아의식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또 호흡은 분명 나의 호흡이지만, 다른 한편 나의 호흡이 아니다. 내 힘만으로는 호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기가 있어야 하고, 산소를 뿜어내는 식물이 있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길러내는 자연의 순환이 있어야 내 호흡이 가능하다. 내 몸과 우주가 만나서 만들어내는 리듬이 바로 호흡이다. 인드라망의 그물과 같은 만물의 상호 엮임 속에서만 우리는 호흡할 수 있다. 하여 들이쉬고 내쉬는 자신의 호흡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혜의 문을 여는 기쁨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때로 생각한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내려 놓는 지혜의 힘을 키울 수 있다니, 명상이란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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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은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투사하기 쉽지 않은 자발적 생명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보다도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자아의식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호흡을 이렇게 해석하니, 양생과 관련 호흡에 대한 글쓰기의 허술함이 콕 집어 드러납니다요~ㅋ 잘 읽었습니다~
요즘 사주강의를 하느라 한창 사주공부에 빠져있는데요,
호흡이 자연스럽게 일어남을 관찰한다고 하시는 부분을 읽으니, 오행 기운들의 자연스러운 드나듦을 관찰하는 것도 명상일수 있겠다 싶네요. 자연스러운 드나듦을 길흉으로 판단하는건 나의 생각이겠죠.
관상기도나 내관 수행이나 이런 것들은 적극적으로 사유를 통해 ‘관’을 하는 건데 호흡을 ‘관’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늘 궁금하더라구요. 요요샘 글을 보고 그 차이점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다른 수행의 목표처럼 호흡 관찰도 아상을 깨는 것 즉 나를 내려 놓는 것인데 ‘호흡’이 갖는 의미가 애초부터 아상을 투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중요한 지점이군요. 명상을 할 때마다 왜 호흡을 관찰하라는 건지 도통 몰랐었는데… 감사합니다! 알게 되니 뭔가 후련하네요..^^
좋다 싫다는 감정이 올라올 때 좋으면 계속 좋으려고 하고 싫으면 서둘러 피하려고 하다가 놓치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명상은 호흡을 관찰하듯 분별없이 지켜보는 연습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불편한 마음을 쫓으려고 맛에 탐닉했던 어제가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지는데.. 이 또한 분별없이 그저 지켜보아야 하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