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 걷다 보면 알게 된다

기린
2023-01-05 07:23
333

  해가 바뀌었다. 작년에는 일요일에 세미나를 하느라 둘레길 걷기를 거의 못했다. 약국 휴무인 월요일에 걸으면 되지 않냐 묻는 친구가 있었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부분의 둘레길은 북적이는 등산로 등과 연결된 지점을 지나면 일요일에도 한산한 편이다. 월요일이면 드물 것이다. 그래서 혼자 둘레길을 걷는다면 휴일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둘레길 안전 수칙에도 나와 있다. 가급적 2인 이상 동행하시오. 나는 가급적, 일요일에 걷기로 나만의 수칙을 정했다. 1월 1일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며칠 전부터 다시 둘레길을 걸을 수 있도록 몸 상태를 보살폈다.

 

 

 

 공동체에 온 후 걸어서 출근하게 되면서 탄천을 내내 걸었다. 그러다 휴일이면 집 주변에 연결된 탄천을 걷다가 ‘영남길’이라는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조선 시대 한양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총 6개의 간선 도로망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다시 복원해 ‘경기 옛길’이라 지정했고, 영남길은 한양에서 용인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진 영남대로의 일부를 복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나있던 길이라고? 십 세기 후반에서 이십 세기 초반이 단번에 연결되었다. 계절의 변화 정도밖에 보이지 않던 탄천 길에 낯선 이가 걷고 있었다. 괴나리봇짐에 패랭이를 쓴 모습이었다. 저 이는 어디를 향해 무슨 일을 보러 갈까, 나는 하릴없이 휴일을 어슬렁대는 중인데. 물론 상상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전환시키면서 나와 세계를 연결시켰다. 더 찾아보니 경기도에만도 옛길을 넘어 둘레길로 숲을, 갯가를, 물길을 연결시켜 조성되어 있었다. 그 길들에는 또 어떤 상상이 잠재해 있을까. 내 발로 그 길들을 걷고 싶어졌다.

 

 

 

 

  2021년에 그렇게 둘레길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주중에 검색을 통해 출발점까지 가기 위한 교통수단을 알아놓았다. 내가 살고 있는 용인의 둘레길은 물론 수원 팔색길이나 서울 둘레길의 코스별 출발점은 지하철역에서 시외버스 터미널, 낯선 마을 입구일 때도 있었다. 집을 나서서 버스나 지하철을 탔다. 출발지점까지 적게는 한 시간 많게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둘레길 종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더 걸리기도 했다. 그렇게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둘레길 출발점에 서면, 몸은 저절로 여행객 모드로 전환되었다. 낯선 길에서 어떤 우연과 맞닥뜨리게 될지 기대감이 부풀었다. 내딛는 발과 보는 눈 사이로 쉴 새 없이 낯선 것들이 출현해서 익숙했던 것들을 마구 헤집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출발점에서 품고 있었던 어떤 것들은 지나갔고, 또 어떤 것들은 변형되었다. 동시에 몸에는 나른한 피로감이 감돌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안심에 휩싸인다. 이 코스를 완주했다는 성취감은 덤이다. 기분 전환이나 새로운 결심 등을 위해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되는 여행, 둘레걷기는 그렇게 나에게 당일치기 여행이 되었다.

 

 

 

  2023년 1월 1일의 여행은 서울 둘레길 2코스 용마-아차산 코스였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출발해서 5호선 광나루역이 종점인 코스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역시 가보지 않는 동네였다. 화랑대역에서 출발하여 도심을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망우 역사 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말로만 들었던 망우리공동묘지가 역사공원으로 재단장 했단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에 조성된 공동묘지에는 애국지사를 비롯 널리 알려진 인사들이 많이 안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안창호 선생도 있었고(현재는 국립묘지로 이장했다고 함), 방정환, 이중섭 등의 묘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무덤들이 즐비하게 압도하는 공동묘지의 기운은 감춰진 채, 애국지사들의 사진이 프린트된 깃발들만이 역사 공원의 분위기를 풍겼다.

 

 새해 첫날인데도 공원길을 걷는 무리가 꽤 되었다. 등산차림의 두 노인이 어떤 묘지석 앞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아는 이름인지 그 양반이 어디 출신인데 어쩌구 하는 말이었다. 참배는 아닌 듯했는데, 말의 본새로는 연륜이 느껴졌다. 그분들을 지나쳐 경사가 있는 공원길을 좀 더 오르는데 젊은이 둘이 지나갔다. 레깅스에 잘록한 허리까지 오는 등산복 윗도리 차림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저렇게 몸을 차게 내놓다니 철딱서니가 없어 보였다. 헉,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걷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타인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평가질이 작렬한다. 말로 뱉지 않았을 뿐, 이미 떠올라버린 생각이다. 생각을 단속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 쩝.

 

 또 걸어 걸어 깔딱고개 쉼터를 지나고 아차산 능선에서 정상에 이르는 사이 고구려 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군사시설인 보루가 있던 유적지라는 표지판들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 코스는 서울 둘레길 중에서도 전망이 가장 뛰어난 코스라고 하더니, 보루가 있었다는 능선을 따라 곳곳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 전망대에 서 보니 미세먼지 사이로 한강 줄기가 보였다. 그 옆으로 서울 동부와 잠실 쪽으로 빽빽하게 도심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병사도 바라보았을 한강이겠지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겠지. 이번 둘레길을 걷는데 유난히 뻔한 잡생각들이 끼어드는 걸 보니, 인문약방 홈피 자기배려코너에 ‘기린의 걷다 보면’을 연재하기로 한 결정이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헐~.

 

 

  푸코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계율은 사실 고대 문화에서 항상 자기 배려의 계율과 연관되어 있었고 또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고 한다. 자기를 배려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나의 둘레길 걷기는 내 ‘꼬라지’를 점검하게 되는 과정이다. 지속해서 ‘낯선’ 길로 여행하면서 출현되는 또 다른 나를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길에서 만난 수많은 타자들(경치를 포함)을 통해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첫 글을 맺는다.

댓글 12
  • 2023-01-05 10:16

    오! 작년 한해 일요일마다 프로그램 하느라 뜸했던 포레스트 기린의 부활인가요?^^
    새해 첫날, 낯선 길 위에서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을 기린을 떠올리며 읽었습니다.
    2023년을 멋지게 시작했군요!!ㅎ
    (저의 일출 사진이 사랑받는 것도 즐겁습니다.ㅋㅋ)

  • 2023-01-05 10:17

    괴나리 봇짐을 메고 패랭이를 쓴 기린샘을 잠시 상상해보았습니다^^(넘 어울려!!) 저도 폐허 덕후인 편인데, 폐허가 된 공간들, 폐허로 만든 시간들이 서로 중첩되면서 막 상상력을 자극시키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기린의 걷다 보면>의 열렬한 독자가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곧 백수인 저로서는 기린샘과 곧 함께 걷게 될 것 같기도요.^^

  • 2023-01-05 11:23

    아차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정말 멋집니다~~
    포레스트 기린을 응원합니다~~~ 곧 함께할 친구들도요!!

  • 2023-01-05 16:09

    와, 새 해, 첫 날부터! 저도 등산보다 둘레길을 좋아해서 가끔 걷는데 용마-아차산 코스는 저도 몇 번 가봤어요! 아차산은 산도 나지막해서 가볍게 걷기 좋더라고요ㅎㅎ 올 한 해 기린샘의 발자취를 지도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아요~~ 기린샘의 자기배려의 걷기를 응원합니다:)

  • 2023-01-05 17:23

    기린의 첫날은 걷기로 시작되었군요
    사진과 글로 그 첫길을 짐작해봅니다
    올 한해 기린의 걷기에 함께 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해보면서요
    포레스트 기린 멋져부러!!!

  • 2023-01-05 20:31

    '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에 이은 '나는 일요일에 걷는다' 나오는 건가요?^^
    기린쌤의 '걷는 길'에
    물심양면 응원을 아끼지 아끼지 않겠습니다~~~ 멋지다!!!

  • 2023-01-09 10:11

    그 유명한 사람들의 맛집지도며, 빵지순례 지도며~ 그런거 있잖아요~
    기린의 둘레길 추천지도도 기대해볼게요~~^^
    새해 첫 출발을 걷기와 함께~~글만 봐도 기운찹니다(이거 어제 차사업 네이밍으로 제안하려했는데~ㅎㅎ 기운차)

    • 2023-01-10 21:03

      오~ '기운차' 좋은데요^^

      • 2023-01-11 08:39

        ㅋㅋㅋㅋ스피노차
        누가 답글단지 알겠네요 ㅋㅋ
        기승전 스피노자~ 그분~!!ㅎㅎ

  • 2023-01-14 21:20

    와~용마-아차산코스 속 저희 동네 망우역사공원도 다녀가셨군요! 저도 작년 가을에 매일 다녔던 망우산. 봄되면 다시 거닐어봐야겠어요~!
    함께 거니는 기분 느끼다 익숙한 코스와 장소 나와서 더 반갑게 읽었습니다!
    올해 기린님이 '길에서 만난 수많은 타자들(경치를 포함)을 통해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기를' 저도 응원합니다!

  • 2023-01-24 22:44

    기린샘의 책을 읽고 이 글을 보니 더 반갑네요^^ 이 글을 읽으면서 저도 올해는 '좀 많이 걸어보자'라는 생각이 훅 들었어요. 걷다보면 알게되는 그 무언가가 기대되어서 그런걸까요? ^^

  • 2023-01-30 17:50

    와~ 옛길걷기를 시작했군요!
    그길도 걷는 이들이 아주 드물게 있더라구요^^
    기린의 걷는 길 이야기...기대됩니다~♡
    언젠가 같이 걷고 싶기도 하구요.

('로봇이 아닙니다' 체크 필수)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현장 르뽀] 나는 임수가 오늘 아침에 한 일을 알고 있다.   2023.3.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예)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는 주로 서양철학을 공부하며,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여성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공부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려 한다.      "뻐국뻐국~~ 00하세요. 00~~ " 아침밥이 준비되었음을 뜻하는 기계음이 들려오자 임수가 놀라며 물었다. "오잉? 저 소리 뭐야? 어디서 들리는 거지?" "뭐? 저 소리 첨 들었어? 전기밥솥에서 밥 다 됐다고 알려주는 소리잖아. 나는 3년째 듣고 있는데..." "난 처음듣는 것 같오." "뭣이라 -.-"   2명만 같이 살아도 공동체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서 김하나, 황선우 작가는 "2명만 되어도 공동체다." 라고 말한다. 임수와 함께 생활하면서 이 말의 찐 의미를 점점 알아가고 있다. 나는 외동이다. 것두 성 감별 낙태가 공공연한 비밀이던 시절, 귀하디 귀했던 '무남독녀 외동'. 당연지사 자라오면서 먹는 것에 욕심낼 필요가 없었고 옆에서 부대끼는 사람 역시 없었다. 직장 초 특수했던 공동생활을 제외하면 죽~ '혼자' 살아온 셈이다. 그랬으니, 길게는 눈을 뜰 때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했다. 3년 전 함께 살 결심을 하고 합을 맞춰볼 요량으로 잠시 임수의 숙소에 거주한 적이 있었다.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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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00:30 조회 5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낮에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그 쪽’으로 가는 길       새벽이생추어리에 가면 새벽이와 잔디 뿐만 아니라 온갖 이질적인 존재들과 접촉한다. 식사를 준비하며 고구마, 비트, 호박, 보리, 서리태, 시금치 등의 식재료를 손질하고, 물그릇에 미강을 넣고 손으로 휘휘 저어 섞어준다. 새벽이와 잔디의 분비물이 묻은 밥그릇과 물그릇을 설거지하다 보면 물이 옷에 튀고, 덩굴 잎을 채취하느라 잎 사이를 헤집다 보면 씨앗이 옷에 달라붙고, 진흙 위를 걷다 보면 흙탕물이 바지에 묻어 얼룩이 진다. 돌봄을 마치고 나면 내 몸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은밀한 존재들이 우글거리는 작은 아지트가 된 기분이다. 그리고 귀가하는 길에 지하철에서 겪은 일이 떠올라 이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 더운 여름 날 돌봄활동을 하다 보면 많은 것들이 내 몸에 들러붙는다. 나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온갖 존재들과 긴밀해진다. 그 존재들이 땀샘을 통해 내 몸 밖으로 나온 노폐물과 섞이고 반응하면 특유의 냄새가 만들어진다. 돌봄 후 귀갓길 지하철에서 하차하려고 일어난 줄 알았던 내 옆자리 사람이, 나와 멀리 떨어진 좌석으로 이동(피신)해서 앉는 모습을 보았다. 혹시나 하고 땀으로 젖은 셔츠를 살짝 들어 코에 가져다 대었더니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때 나는 부끄러움보다는 어떤 사이-존재(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로서 새로운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었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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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 2023.03.20 조회 327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말하며 사는     혀가 기억하지 않는 언어를 배우는 기분   독일에 산지 네달이 되었다. 마냥 놀러 온 외국인이기엔 가본 데가 좀 많고, 로컬이라고 부르기엔 아직도 안 해본 게 많은 존재가 되었다. 그동안 지하철을 타면 간판에 있는 광고 문장 정도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고, 그 사실에 이따금씩 기뻐하며 지냈다. 인터네셔널 셰어하우스에 사느라 영어는 더 늘었다. 하지만 글을 쓰거나 한국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할 때, 어려운 한국어 단어들은 종종 까먹는다. 어느 날에는 내가 발을 걸치는 언어들 중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 슬퍼하다가, 번역가의 일이 얼마나 고단할지 생각해보며 지낸다.   모국어를 영어로 Mother tongue이라고 하듯이, 혀가 기억하지 않는 언어를 배우는 일은 고난하다. 바닥이 없는 땅에 집을 짓는 기분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한다. 틀리며 감각을 얻는 것이 불가피하다. 같은 뜻을 전하고 싶어도 나의 모국어로 문장이 이루어지는 방식과 이 언어로 문장을 이루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때는 문장을 읽고 이 말들이 각각 무슨 뜻인지는 알아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 코스가 끝날 때 쯤에는 반에 앉아있는 수강생 모두가 자신이 다음 단계로 가도 괜찮을지 의심에 가득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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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3.03.16 조회 267
기린의 걷다보면
은영들, 물소리길을 걷다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수에 나선 물소리길    대동강 물도 녹으며 봄이 온다는 우수(雨水)다. 물소리길의 강물도 다 녹았을까. 그래서 양평 물소리길을 골랐다. 양평 주변을 흐르는 강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인데 총 여섯 개의 코스로 조성되어 있고, 경의중앙선과 연결되어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재작년 1월에 걸었을 때는 혼자였는데 이번에는 동행을 찾았다. 인문약방 프로그램 <일욜엔양생>에서 함께 공부했던 조은영님, 나와 이름이 같다.   죽전역에서 수인선을 타고 왕십리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해서 아신역까지 두 시간, 검색은 그랬다. 하지만 실제 경의중앙선은 지나가는 기차를 보낸다고 5분씩 대기하는 역이 몇 개나 되었다. 30분 지각, 일찌감치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은영님을 만났다. 우수라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아신역을 나서니 부슬부슬 가는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오전에 잠깐 비오다 오후 맑음이란 일기예보에 우산은 챙겼다. 둘레길에 들어서니 우산을 든 손이 시렸다. 장갑은 안 챙겼다. 방수가 되는 등산점퍼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장갑을 낀 은영님은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같이 세미나를 했을 때도 누가 뭔가 필요해서 찾는가 하면 어느 새 챙겨 내놓던 은영님이었다. 그런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좀 신기했다.     <은영님도 나도 사진찍기를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멀리서...
은영들, 물소리길을 걷다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수에 나선 물소리길    대동강 물도 녹으며 봄이 온다는 우수(雨水)다. 물소리길의 강물도 다 녹았을까. 그래서 양평 물소리길을 골랐다. 양평 주변을 흐르는 강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인데 총 여섯 개의 코스로 조성되어 있고, 경의중앙선과 연결되어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재작년 1월에 걸었을 때는 혼자였는데 이번에는 동행을 찾았다. 인문약방 프로그램 <일욜엔양생>에서 함께 공부했던 조은영님, 나와 이름이 같다.   죽전역에서 수인선을 타고 왕십리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해서 아신역까지 두 시간, 검색은 그랬다. 하지만 실제 경의중앙선은 지나가는 기차를 보낸다고 5분씩 대기하는 역이 몇 개나 되었다. 30분 지각, 일찌감치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은영님을 만났다. 우수라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아신역을 나서니 부슬부슬 가는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오전에 잠깐 비오다 오후 맑음이란 일기예보에 우산은 챙겼다. 둘레길에 들어서니 우산을 든 손이 시렸다. 장갑은 안 챙겼다. 방수가 되는 등산점퍼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장갑을 낀 은영님은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같이 세미나를 했을 때도 누가 뭔가 필요해서 찾는가 하면 어느 새 챙겨 내놓던 은영님이었다. 그런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좀 신기했다.     <은영님도 나도 사진찍기를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멀리서...
기린 2023.03.05 조회 223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인트로   정임합목 양생하우스를 연지 3년이 되어간다. 무슨 일이든 3년을 잘 넘기면 그 다음 3년을 또 기약해볼 수 있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3년의 마디를 기점으로 순환하듯이 정임합목 양생하우스는 봄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뭐든 어설프고 시행착오도 많고 아옹다옹 다툼도 많지만 더불어 아직 고착화되지 않은 역동성도 있다. 이러한 시점에 연재를 시작한 건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 동안의 다양한 사건에 대해 정리하고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현장을 다독이며 봄의 마디를 잘 넘길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이름의 연원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입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네면 대부분의 분들은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한다. 하우스 빼고는 정임합목, 양생 모두 생소한 단어들이다. ‘양생’은 요즘 인문약방에서 미는 단어인데 생명력 넘치는 삶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정임합목’은 사주명리에서 말하는 자연의 이치 중 하나이다.   동양에서는 세상을 음양오행의 프레임으로 바라본다. 오행(五行)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다섯 성분이고 이들은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열 가지 하늘의 기운을 만들어낸다. 사람도 열 가지 기운 중 하나로 표현될 수 있는데, 무사는 음화(陰火)인 정화(丁)이고, 루틴은 양수(陽水)인 임수(壬)이다. 정화(丁)은 작지만 따뜻한 불이고 임수(壬)는 거침없이 흘러가는 큰물이다. 정화(丁)와 임수(壬)은 섞이지...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인트로   정임합목 양생하우스를 연지 3년이 되어간다. 무슨 일이든 3년을 잘 넘기면 그 다음 3년을 또 기약해볼 수 있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3년의 마디를 기점으로 순환하듯이 정임합목 양생하우스는 봄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뭐든 어설프고 시행착오도 많고 아옹다옹 다툼도 많지만 더불어 아직 고착화되지 않은 역동성도 있다. 이러한 시점에 연재를 시작한 건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 동안의 다양한 사건에 대해 정리하고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현장을 다독이며 봄의 마디를 잘 넘길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이름의 연원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입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네면 대부분의 분들은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한다. 하우스 빼고는 정임합목, 양생 모두 생소한 단어들이다. ‘양생’은 요즘 인문약방에서 미는 단어인데 생명력 넘치는 삶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정임합목’은 사주명리에서 말하는 자연의 이치 중 하나이다.   동양에서는 세상을 음양오행의 프레임으로 바라본다. 오행(五行)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다섯 성분이고 이들은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열 가지 하늘의 기운을 만들어낸다. 사람도 열 가지 기운 중 하나로 표현될 수 있는데, 무사는 음화(陰火)인 정화(丁)이고, 루틴은 양수(陽水)인 임수(壬)이다. 정화(丁)은 작지만 따뜻한 불이고 임수(壬)는 거침없이 흘러가는 큰물이다. 정화(丁)와 임수(壬)은 섞이지...
루틴 2023.02.28 조회 353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낮에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우다다, 우다다       잔디는 새벽이생추어리의 두번째 입주자다. 나는 잔디가 실험용 돼지로 키워지다가 새벽이생추어리에 입주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새생이(운영활동가)로 오래 활동해온 무모의 목소리를 통해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고은   새벽이는 2020년 여름 종돈장에서 오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잔디는 언제 <새벽이생추어리>에 오게 되었나요? 무모   잔디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2020년 가을이었어요. 새벽이가 다니던 병원이 있었는데 그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의약 회사에 있었던 실험 동물 돼지가 탈출하려다가 기구 같은 게 쓰러져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고요. 병원에서 잔디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아마 그 회사에 할당된 예산이 있었겠죠? 수술하고 나서도 빨리 회복이 안 되니까 병원에서 안락사시켜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데려가 줄 수 있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잔디가 <새벽이생추어리>에 함께 하게 되었어요. 잔디가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2020년 가을, 겨울 동안 실내 생활을 하다가 2021년 2월 에 <새벽이생추어리>에 왔어요. 그때는 잔디도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고 이빨도 더 많이 튼튼 해지고 그랬던 상황이었어요.   - 김고은, 『함께 살 수 있을까』 무모 인터뷰 중                   돼지와 돼지   작년 7월에 처음 만난, 무더운 여름 날의 잔디가 떠오른다. 하우스 문을...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낮에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우다다, 우다다       잔디는 새벽이생추어리의 두번째 입주자다. 나는 잔디가 실험용 돼지로 키워지다가 새벽이생추어리에 입주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새생이(운영활동가)로 오래 활동해온 무모의 목소리를 통해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고은   새벽이는 2020년 여름 종돈장에서 오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잔디는 언제 <새벽이생추어리>에 오게 되었나요? 무모   잔디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2020년 가을이었어요. 새벽이가 다니던 병원이 있었는데 그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의약 회사에 있었던 실험 동물 돼지가 탈출하려다가 기구 같은 게 쓰러져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고요. 병원에서 잔디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아마 그 회사에 할당된 예산이 있었겠죠? 수술하고 나서도 빨리 회복이 안 되니까 병원에서 안락사시켜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데려가 줄 수 있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잔디가 <새벽이생추어리>에 함께 하게 되었어요. 잔디가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2020년 가을, 겨울 동안 실내 생활을 하다가 2021년 2월 에 <새벽이생추어리>에 왔어요. 그때는 잔디도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고 이빨도 더 많이 튼튼 해지고 그랬던 상황이었어요.   - 김고은, 『함께 살 수 있을까』 무모 인터뷰 중                   돼지와 돼지   작년 7월에 처음 만난, 무더운 여름 날의 잔디가 떠오른다. 하우스 문을...
경덕 2023.02.20 조회 579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경계의 포용성     독일의 이모들   쿠키이모는 독일에 산다. 작년 나는 잠시 서점을 쉬고 여름을 쿠키이모 집에서 보냈다. 떠나고 싶었는데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서 머물러도 되는 곳에 갔던 것 같다. 이모와 첫 식사를 마친 후, 이모는 나에게 흡연 여부를 물었고 그렇게 우리는 맞담배를 피며 여름을 한 집에서 보냈다. 이모와 나는 술과 담배, 한국 음식과 강아지를 좋아했다. 그 여름 동안 나는 어떤 감각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스스로의 적당함을 알아가는 기분. 과하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느낌.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이모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곳에 오래 산 한국인 이모들을 종종 만났다. 그들은 대체로 내 나이를 묻고, 고향을 묻고, 국제결혼은 너무 힘들다고 하더니 곧 이어서 너도 독일인이랑 결혼하라는 말들을 했다. 그때는 음 그래서 결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어린데 결혼 얘기를 하시네... 라고 생각했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이모들은 모두 내 나이 때 결혼했고, 국제결혼이 그들 모두에게 삶의 큰 사건이었을 것 같다.   이모들은 한국어로 말했지만 표준 한국어와는 발음이 달랐다. 독일어 단어들도 자주 섞여 있었다. 한국어를 아예 잊어 독일어만 쓰는 이모도 있었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경계의 포용성     독일의 이모들   쿠키이모는 독일에 산다. 작년 나는 잠시 서점을 쉬고 여름을 쿠키이모 집에서 보냈다. 떠나고 싶었는데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서 머물러도 되는 곳에 갔던 것 같다. 이모와 첫 식사를 마친 후, 이모는 나에게 흡연 여부를 물었고 그렇게 우리는 맞담배를 피며 여름을 한 집에서 보냈다. 이모와 나는 술과 담배, 한국 음식과 강아지를 좋아했다. 그 여름 동안 나는 어떤 감각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스스로의 적당함을 알아가는 기분. 과하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느낌.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이모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곳에 오래 산 한국인 이모들을 종종 만났다. 그들은 대체로 내 나이를 묻고, 고향을 묻고, 국제결혼은 너무 힘들다고 하더니 곧 이어서 너도 독일인이랑 결혼하라는 말들을 했다. 그때는 음 그래서 결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어린데 결혼 얘기를 하시네... 라고 생각했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이모들은 모두 내 나이 때 결혼했고, 국제결혼이 그들 모두에게 삶의 큰 사건이었을 것 같다.   이모들은 한국어로 말했지만 표준 한국어와는 발음이 달랐다. 독일어 단어들도 자주 섞여 있었다. 한국어를 아예 잊어 독일어만 쓰는 이모도 있었다....
현민 2023.02.15 조회 282
요요의 월간명상
      요요 문탁에서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불교 공부도 철학 공부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10년은 불교세미나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불교를 공부하는데 철학공부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듦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존엄하게 늙는 길을 찾고 싶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풀어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명상일기를 쓰다   아침 명상 후에 명상 일기를 쓴다. 가끔씩 메모를 하다가 명상일기를 쓴 지 반년이 좀 넘었다. 명상일기와는 좀 다르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해서 기록하는 것도 있다. 하나는 아버지 돌봄 일지다. 2년 전 어머니 병상일지로 시작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돌봄 일지가 되었다. 간혹 몸이 아플 때마다 기록하는 몸상태 일지도 있다. 작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없었던 긴장성 두통과 어깨 통증, 눈 뻑뻑함, 수면 패턴의 변화가 생길 때마다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어떻게 대처했는지 써놓고 있다. 명상도, 아버지의 치매와 건강상태도, 내 몸의 컨디션도 기록을 들여다보면 변화추이를 알 수 있어서 나름 유용하다.             사실 나는 일기나 가계부 같은 사적인 비망록 남기기를 즐겨하는 기록형 인간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는 회고형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아이들 어릴 적 사진도 어쩌다 다른 사람이 찍어 준 사진 이외에는 거의 없다. 카메라나 캠코드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기록과 보관에 무심한 것은 정도가 지나쳐 친한 친구들과의 몇 번의 해외...
      요요 문탁에서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불교 공부도 철학 공부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10년은 불교세미나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불교를 공부하는데 철학공부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듦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존엄하게 늙는 길을 찾고 싶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풀어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명상일기를 쓰다   아침 명상 후에 명상 일기를 쓴다. 가끔씩 메모를 하다가 명상일기를 쓴 지 반년이 좀 넘었다. 명상일기와는 좀 다르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해서 기록하는 것도 있다. 하나는 아버지 돌봄 일지다. 2년 전 어머니 병상일지로 시작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돌봄 일지가 되었다. 간혹 몸이 아플 때마다 기록하는 몸상태 일지도 있다. 작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없었던 긴장성 두통과 어깨 통증, 눈 뻑뻑함, 수면 패턴의 변화가 생길 때마다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어떻게 대처했는지 써놓고 있다. 명상도, 아버지의 치매와 건강상태도, 내 몸의 컨디션도 기록을 들여다보면 변화추이를 알 수 있어서 나름 유용하다.             사실 나는 일기나 가계부 같은 사적인 비망록 남기기를 즐겨하는 기록형 인간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는 회고형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아이들 어릴 적 사진도 어쩌다 다른 사람이 찍어 준 사진 이외에는 거의 없다. 카메라나 캠코드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기록과 보관에 무심한 것은 정도가 지나쳐 친한 친구들과의 몇 번의 해외...
문탁 2023.02.10 조회 252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여곡절 무릎소동     무릎이 부어도    언제부턴가 한약 포장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쌍화탕을 한 팩씩 정렬하는 일을 즐겼다. 푸짐한 뱃살 때문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을 지나, 어쨌든 앉아지는 가능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뱃살들이 다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고 아주 약간 얇아졌을 뿐이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른쪽 무릎이 좀 더 삐걱댄 달까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 샤워를 하다가 왼쪽 무릎과 비교해서 현저히 부어있는 오른쪽 무릎을 발견했다. 당장 검색부터 했다. 무릎에 물이 찼다는 신호란다. 무릎의 염증이라는 진단과 물이 찼다는 표현 차이가 이해가 잘 안 되어 몇 번을 읽었다. 병원을 가야했다.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짓고 나니 12시쯤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슬그머니 약국을 나섰다. 침을 잘 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동네 한의원에 갔다. 정형외과를 가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고 침이 더 빨리 붓기를 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의사는 무릎 상태를 진단한 후 검색으로 읽었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퇴행성이냐고 물었더니 진단으로 봐서는...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여곡절 무릎소동     무릎이 부어도    언제부턴가 한약 포장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쌍화탕을 한 팩씩 정렬하는 일을 즐겼다. 푸짐한 뱃살 때문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을 지나, 어쨌든 앉아지는 가능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뱃살들이 다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고 아주 약간 얇아졌을 뿐이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른쪽 무릎이 좀 더 삐걱댄 달까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 샤워를 하다가 왼쪽 무릎과 비교해서 현저히 부어있는 오른쪽 무릎을 발견했다. 당장 검색부터 했다. 무릎에 물이 찼다는 신호란다. 무릎의 염증이라는 진단과 물이 찼다는 표현 차이가 이해가 잘 안 되어 몇 번을 읽었다. 병원을 가야했다.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짓고 나니 12시쯤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슬그머니 약국을 나섰다. 침을 잘 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동네 한의원에 갔다. 정형외과를 가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고 침이 더 빨리 붓기를 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의사는 무릎 상태를 진단한 후 검색으로 읽었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퇴행성이냐고 물었더니 진단으로 봐서는...
기린 2023.02.05 조회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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