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나는 돌봄의 걸음마를 배운다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어머니, 온실 화분들에 물을 주어야겠는데요?”
“.......”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화분이 말라가는데 그냥 그렇게 둔다. 하루 종일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TV만 본다. 아니, 거의 주무신다. 식사는 항상 많다고 덜어 낸다. 말씀도 거의 안한다.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은 뒤로 말씀이 매우 짧다. 얼마 전만 해도 당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두어 시간 동안, 내용의 반절은 매번 다르게 창작하며 말씀하시던 분이었다. 치매가 더 진행된 듯이 보인다.
혼자 사는 게 좋아
고기동 집은 1층에 장인·장모님을 모시려고 설계하였다. 두 분이 살아 계실 때부터 졸랐지만, “내가 밥해 먹을 수 있는데 뭐 하러 딸네 집에 가서 산다냐!” 하시며, 결국 당신들도 마곡동에 집을 지었다. 집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화분핑계, 친구들 핑계 등등을 대면서 혼자 사시겠다고 했다. 하기야 변호사를 불러서 상속문제 등의 행정 처리도 스스로 하고, 우리 가족 ‘톡’에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정확하게 하며 글을 올리는 것은 물론, 블루투스 스피커를 핸드폰에 연결해서 들으실 수 있으시니 충분히 혼자 사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장인이 계시지 않으니 우울하실 것 같았다. 고맙게도 마포에 직장 있는 딸내미가 할머니와 함께 살겠다고 나섰다. 딸애가 결혼하여 독립하자 대학교에 다니는 아들놈이 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2년 반을 보냈다. 그런데, 아들 놈 스트레스가 심했다. 할머니의 잔소리가 이만 저만이 아니란다. 귓등으로 흘렸다. 이번엔 장모님이 “내가 이 나이에 애들 밥해주랴!” 한다. 사실, 아이들은 마곡동에서 잠만 잔다. 결국, 장모님 혼자 지내게 되었다.
은퇴 전 내 마지막 업무는 수원과 일산에 있는 두 OO센터를 관장하는 일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일산 센터로 출근하였고, 용인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곡동 장모님 집을 들렀다. 대부분 나가서 맛난 것을 사 먹지만, 가끔은 일부러 저녁을 차려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음식을 잘하던 분이었는데 기본 반찬이 형편없다. 평상시에 이렇게 드시는 것일 게다. 그래도 고기동으로 가시지 않겠단다. 한사코 NO!다. 그것참!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3남 2녀를 낳으셨는데, 66세에 돌아 가셨다. 시골에서 고생하시며 아이들 다 키워내고, 막내인 나까지 대학을 졸업하여 이제 호강할 일만 남았는데, 덜컥 암 선고를 받았다. 췌장암이었다. 8시간의 대수술을 견뎠지만. 의사는 6개월 정도를 예상하였다. 큰 형님 집과 시골집을 왔다 갔다 하다가, 내가 결혼한 후로는 나의 신혼집으로 모셨다. 2년을 더 사셨지만, 내게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고 하늘과 땅, 누군지 모를 이들이 원망스러웠다.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생각지 않은 것이 분할 따름이었다.
3년 뒤에 처갓집에 큰 변고가 생겼다. 장모님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손위 처남이 세상을 떠나는 사고가 난 것이다. 4살짜리 아들을 남기고서...... 두 분은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우리집이 방화동이고 처갓집은 차로 십분 거리인 공항동이어서, 항상 그랬던 것처럼 주말마다 들를 수는 있었지만, 두 분만 둘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고 날부터 우리는 세 살짜리 딸애를 데리고 처갓집에 들어가서 1년을 살았다.
사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처럼 나는 장모님의 이쁨(!)을 많이 받았다. 결혼 전, 8년을 사귀고 있는 데에도 장인어른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얼굴은 미끈한 것이 술 한 잔도 못하고, (전라)남도 말로 ‘맺힌 데가 없는 놈’이라는 것이다.(그저 그런, 큰 인물은 못 된다는 뜻) 그런데, 장모님 생각은 달랐다. 권한은 쥐꼬리인데 의무만 살아있는 종손(宗孫)집에 시집와서(제사가 일 년에 열두 번), 형광등도 바꾸지 못하는 장인과 사느라고 고생하신 것 때문에, 사위는 ‘가난한 집에 막내아들’이 좋았다. 바로 나다. 난 형광등이 문제가 아니라 웬만한 전기공사도 할 줄 안다. 무엇보다도 나보다 한 살 많은 처남, 형님이 좋았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그를 따랐다. 운동권인 그는 대학 때에는 야학으로, 졸업 후에는 노동현장으로 뛰어 다녔다.
방화동 아파트만 해도 그렇다. 나의 신혼집은 신림동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아프신 어머니에게는 오르내리기 힘든 곳이었다. 장인어른은 가끔 오실 때마다 “너무 꼭대기”라며 안타까워 하셨다. 결국, 당신이 살고 있는 방화동 집을 어머니를 모시던 내게 준다고 했을 때, 한 마디로 “그래야지요.”하셨던 형님이다. 그런 형님이 안 계신다는 것은 나에게도 힘든 일이었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형님의 장례식 날, 두 분 친형님들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우리 집은 아들이 셋이니, 나 하나쯤은 이제 처갓집에서 ‘사위’가 아니라 ‘아들’노릇을 하며 살겠다고. 이제는 장모님이 아니라, 어머니로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가 이상하다
아이들도 모두 마곡동 집을 나간 뒤 한 2년쯤 지났다. 어느 날, 어머니 집에 들렀는데, 어머니가 항상 그런 것처럼 소파에서 일어나신다. 그런데, 나를 보고도 “누구세요?”하고 묻는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기분이 오싹했다. 답답한 마음에 옥상에 올라갔다. 그곳에 있는 화분들이 1/3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애지중지 하던 분재들인데, 이렇게 상태가 좋지 않다니...... 아프신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모셔 와야 했다. 화분을 지렛대 삼아 움직이게 할 작전을 짰다. 고기동에 온실을 지어서 화분을 옮기기로 하였다. 마곡동 옥상의 온실에서 화분들이 겨울을 지내지만 그 온실보다 더욱 따뜻한 온실을 만들었다. 만족하신다. 화분들을 모두 옮겼다. 겨울을 우리와 함께 지내시기로 하고, 그 화분들을 따라서 고기동으로 건너 오셨다. 옥상을 가득 채웠던 커다란 철재 화분과 흙을 모두 제거하였다. 흙을 내리는 데에는 마대 자루 400개가 필요하였고, 부서진 철재화분의 잔해들은 처리하는데 4톤짜리 폐기물 트럭이 필요했다. 인부 네 명과 함께 꼬박 이틀을 작업하였다.
고기동에 오신 지 한 달 정도가 지났다. 몸무게가 3Kg 정도 늘었단다. 그 동안 잘 드시지 못하신 것이다. 큰 병원에 갔다. 동네병원에서 파킨슨 진단을 받아 약을 드시고 계셨는데, 상태를 정밀하게 검사하여 알고 싶었다. 우려한대로 진행이 꽤 되었고, 그로 인한 인지장애(치매)가 상당부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기간을 뺀 오롯이 혼자 계신 2년여 기간 동안 급격히 나빠진 듯하다. 그러니 무슨 이유인지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매사에 “NO!” 하신 것이다. 치매에서 오는 우울증과 겹친 것이다. 알아보지 못한 내가 무심한, 아니 무식한 놈이다.
어머니의 세계
11시 40분쯤 되었다. 어머니가 1층 부엌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는 7시 아침, 12시 점심, 6시 반에 저녁을 드셔야 한다. 정년퇴직한 공무원의 식사시간에 지금도 맞춰있는 것이다. 점심식사 후, 당신이 설거지를 시작한다. 물을 아끼느라, 물을 조금 묻히기만 하고 힘없이 닦으시니, 잘 닦이지 않아서 다시 설거지를 해야 한다. 기다린다. 몇 개 안되는 그릇을 30여분을 닦으신다. 다시 꺼내서 씻고 정리한다. 사실 식사 때마다 항상 “그냥 두시라”고 말하지만 소용이 없다. 항상 당신의 그릇을 손수 싱크대에 넣는다, 그리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여섯 식구 식사이니 다른 그릇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싱크대 앞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면 누구든 다른 일을 못한다. 그러니 그냥 두시라고 하건만, 항상 똑같이 되풀이 한다.
아까부터 어머니가 구부정한 자세로 서서 통장들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계신다. “뭐 하세요. 어머니?” “으응, 세금이 안 나갔어......” 아이구야. 며칠 전부터 그 놈의 세금 때문에 골머리다. 용인 우리집에 고지서가 나올 때부터 당신의 마곡동 세금은 ‘왜 아직 안 나오냐’고 한 일주일을 발을 동동 구르셨다. 국세청으로, 마포구청으로 전화한다. 불쌍한 상담직원은 어머니의 분명하지 않는 요구사항에 친절히 응대해야 한다. 고지서가 나오면, 그 뒤에는 세금 납입이 문제가 된다. 마곡동에 계실 때, 은행 직원의 권유로 세금을 카드로 자동 지불되게 하였다. 아마 은행직원의 카드 발급 실적을 어머니가 채우신 것일 게다. 세금은 카드로 나갔지만(10일) 아직 카드 결재일(31일)이 아니니, 세금을 냈다는 카드 결재금액이 통장에 찍히지 않는다. 그러면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카드 구매, 즉 세금 납부는 이미 실행되었다고 컴퓨터로 보여 드려도 믿지 않으신다. 왜? 내 통장에 금액이 찍히지 않았으니까. 그림을 그려가면서 시간 흐름을 설명해본다. “오! 그래.” 하셨다가 다음 날 또 선채로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또 설명을 드린다. 급기야 어떤 날은 그 은행까지 가서(주차장이 매우 부족!) 창구 직원의 설명을 듣고 나오신다. 통장 결재가 되는 31일까지...... 처음에는 미치고 팔짝 뛰었다. 나를 못 믿으시나? 섭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신뢰문제가 아니라, 치매가 당신을 당신의 세계에 가두어 놓은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멍청한 놈.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여도 가끔은 집안이 뒤집어지는 사건이 터지기도 한다.
미국에 사는 삼촌(어머니의 동생)이 매달 300달러를 어머니 용돈으로 보낸다. 이 분도 옛날 분이신지 꼭 국제우편 수표로 보낸다. 그 수표를 처리할 수 있는 은행에 매월 입금하고 통장에 찍힌 금액을 확인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잠자리에 드실 시간이 지났는데에도 매우 화난 모습으로 거실에 앉아 계신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 대답이 없다. 10시 반쯤, 마눌님이 들어온다. 현관으로 마중 나가는 어머니 손에 우편물이 들려 있다. “내 돈, 니가 다 가져갔지!” 갑자기 홍두깨를 맞은 마눌님이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우편물을 보았다. 다른 은행에서 마눌님 이름으로 온 것이었다. 내용은 마눌님 외환 통장의 현황을 보여 주는 것인데, 지금 환율이 좋으니 해지를 추천하는 안내문이었다. 아들 녀석이 병역의무를 마치고 유학을 계획하고 있어서, 그 때 쓰려고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사놓았던 달러였다. “엄마! 왜 그래? 응? 내가 엄마 돈이나 가져가는 그런 딸인가요!” 온 집안에 폭풍이 한판 지나간 뒤에 소파에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니, 어머니 돈 그대로 있어요. 내일 나랑 같이 통장 찍으러 갑시다. 그리고 그건 에미 우편물이잖아요. 그걸 뜯어서 에미한테 니가 그랬지? 하시면 에미가 많이 섭섭하죠. 그렇죠?” 바로 “내가 잘못했어.“ 하신다. 코가 찡해온다. 당신도 답답할 듯싶다. 왜 괜한 의심이 생겨서 참지 못하고 뜯고 나서, 자신의 상상으로 이런 상처를 주었는지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에게 돈, 시간, 관공서에 대한 강박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치매가 감춰진 당신의 삶의 흔적을 지금 내게 보여 주는 것인데, 당신은 전혀 모르시고 우리도 가끔씩 잊는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법
그랬다. 고기동 집에 미리 마련한 공간도 있고, 나도 은퇴하여 시간도 많으니 당신이 좋아하는 화분이며, 마당에 빙 둘러 앉은 나무들 돌보며 이런 저런 옛날이야기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공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이미 내가 상상하고 있는 어머니가 아니었고, 나도 관절이 삐걱 거리는 환갑이 넘은 다른 존재로 변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려면, 이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지했다. 치매를 알아보지 못하고 ‘왜 그러시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를 믿네 안믿네 하는 판단을 시작으로, 잘 모시려고 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서운하기까지 하였다. 치매로 판정 받은 다음부터는 ‘치매니까’하고, 병을 먼저 내세우며 판단하는 나를 발견하곤 하였다. 치매니까 치매인 취급(?)을 하는 것이다. 당신의 뜻대로 말이 되지 않으니, 어머니도 답답했을 것이다. 때때로 말씀을 이어가지 않는다. 단절과 외로움이 커지는 형국이다.
일단 큰 그림을 그려야겠다. 먼저 관계의 그림이다. 첫째는 주보호자로서 당신의 엄마가 변하는 모습에서 만감이 수시로 교차하는 마눌님이 있다. 나름의 방식으로 뭔가 해결해가기는 하는 것 같지만 엄마를 보는 딸의 복잡한 감정을 완전히 다스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회가 되는대로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둘째는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는 것이다.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병자를 보고 보호하려는 관점이 아니라, 어머니의 시각에서 생각하며 가능한 그의 세계에 들어가 상상해 보는 것이다.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그의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이해 부족이라는 시각 말이다. 한 살짜리 손주, 하빈이와 소통하기를 생각하면 된다. 아니, 하빈이 걸음마처럼 어머니와 함께 사는 법을 뒤뚱뒤뚱 배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그림이다. 가끔씩 ‘이렇게 내 60대를 보내나. 은퇴 후 시간을 이렇게 메우나’하는 조바심이 일곤 한다. 그 전에는 시간에 대해서 특별하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은퇴 후에 유독 세월 가는 것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몸으로 느낀다. 움직임은 둔해지고, 관절은 삐걱거리고, 깜빡 깜빡하고...... 해서, 나의 생활이 어머니의 돌봄 때문에 무엇을 못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조바심이 들곤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은 어머니를 치매환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치매, 정확히는 경도성 인지장애다. 파킨슨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크게 보면 노화의 일종이 아닌가. 노화가 병이라면 누구든지 환자이다. 어제보다 늙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내가 환자가 아니라면, 은퇴 후 나의 생활을 예상치 못한 것은 나의 나이듦에 대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지 다른 요인이 이유가 아니다.
분명 점점 더 나빠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미리 걱정하지는 말자. 상황이 닥치면, 그때그때 해결책을 찾으면 된다. 내가 선택한, 내가 열어 가는 세계 아닌가. 오히려 누군가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함께 그려가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할 독특한 세계를 살아 볼 수도 있다. 어머니의 돌봄이 나의 돌봄이 되는 그런 세계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공부해야 한다. 다행히 주변에 ‘공부귀신’들이 많이 있다.
나는 오늘도 ‘문탁’에 간다.
덕분에 치매에 대한 공부를 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하나의 현상이 불러일으키는 각기 다른 관점의 이야기들, 감정들, 생각거리, 배움거리가 참 많네요~ 인디언샘의 이야기도, 가마솥샘의 이야기도 감사합니다
어머님께서 마음이 편히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선택한, 내가 열어 가는 세계 아닌가. 오히려 누군가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함께 그려가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할 독특한 세계를 살아 볼 수도 있다. 어머니의 돌봄이 나의 돌봄이 되는 그런 세계 말이다.'
정말 마음 깊이 와닿는 말씀입니다. 결코 쉽진 않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다함께 잘 지낼 수 있는 지혜 계속해서 부탁드려요.
고맙습니다!!!
평생 엄마와 불화한 나는 ‘어머니의 돌봄이 나의 돌봄이 되는 그런 세계‘ 가 나에게 가능할까? 생각됩니다. 지금 엄마와 가진 거리만큼 자유롭고 편안해졌는데~ 이런 날들도 얼마 안남았겠죠?
손위 처남님과 장모님 사진인가 보군요.
썸네일 사진보고는 박세리 선수? 싶어 피식 웃었는데,
글로 이렇게 사람 맴을 울리시다니......
잘 읽었습니다.
저는 사진 보면서 가마솥샘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생각했답니다.^^
어제 도라지 왈, "흥, 인디언샘이 인물 보시는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다 저의 사진이구요. 하나는 어머니와 저 다른 하나는 장모님과 저입니다. ㅎㅎㅎ
사진설명을 붙여야 할 듯^^
어이쿠;;;
못알아봐서 죄송합니닷.
저는 박세리선수를 너무 닮은 저분이 처형이신가했는데. ㅋ
아무튼 젊은 시절부터 가마솥샘은 훈남이었다! 인걸로.....ㅎㅎㅎ
그나저나
인디언샘은 어머니를 많이 닮으셨네요.
돌봄의 걸음마를 내딛는 가마솥님의 글을 읽으며 또 배웁니다, 샘도 공부귀신이실걸요 ㅋ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