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난잡한’ 아니 ‘난장판’ 가족 돌봄

먼불빛
2023-05-1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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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88세의 늙고 병든 어머니

 

50대 후반 혹은 60대가 되면 누구나 부모님 돌봄 문제가 당장 눈앞의 현실로 닥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54세 되던 해 돌아가셨고, 이제 60이 된 나에게는 88세의 어머니가 남아계신다. 그리고 어머니는 10년 차 파킨슨병 환자로 심장의 가동률은 33%(의사 말로는 언제 심정지가 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함), 신장도 이미 한쪽은 기능을 잃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누구에겐가 의지해야만 하는 상태이다. 특히 작년 12월 또다시 심장이 안 좋은 데다 신부전이 재발하였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극적으로 회복하셨다. 현재는 엄마가 5년간 지속해서 다녔던 주간보호센터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입소 대기 중이며, 엄마를 보살필 요양보호사가 상주하는 주간보호센터에서 일시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계신다.

 

 

 

 

 

엄마는 원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2017년) 봄부터 동생과 함께 살았다.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사는 동안 엄마의 병원과 수많은 약 수발을 혼자 감당하면서 주 보호자 노릇을 했다. 그 6년 동안에도 엄마는 각종의 검사와 입원, 퇴원을 반복했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쓰러져 119에 실려 가기를 몇 번, 동생의 속을 꽤나 끓게 했다. 말이 쉽지 ‘6년간 엄마의 돌봄’이라는 이 간단한 단어 조합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과 노동과 고통이 퇴적층처럼 촘촘히 쌓여 압축되어 있다.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인지... 라고 나는 말 할 자격이 없다. 그 고된 6년간을 오로지 동생 혼자서 돌덩이처럼 무거운 ‘엄마의 돌봄’을 감당해 왔다. 나는 언제든 그 복잡하고 힘든 현장을 떠날 구실(생계와 직장)을 갖고 있었다. 이제 엄마의 돌봄 7년 차에 우리 가족(?)에게는 또 다른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엄마는 이전과 다른 의존적 몸으로 변했고, 우리의 손이 아닌 시설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엄마와 같이 살면서 사랑과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동생은 엄마 돌봄에서 나가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나는 작년 퇴직 후 7월경부터 엄마 돌봄에 합류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우리 각자에게 윤리적이든, 상황 논리적이든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해도 참담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이 돌봄의 난장판을 어떻게 통과할까.

 

 

여동생의 딜레마

 

 

동생이 엄마 돌봄에 슬슬 지쳐가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건 더 오래전이었겠지만, 겉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건 2021년 정도부터였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는 치명적이었다. 엄마는 센터를 나가지 못하면서 우울증이 심해졌고, 우리도 조심해야 하는 상황들이 자꾸 생기면서 한동안 엄마를 보러 가지 못했다. 동생은 세 남매의 단톡방에 ‘지쳤다’ ‘힘들다’ ‘엄마에게 자주 짜증 낸다’라는 문자를 올렸고 주말에 방문 당번을 정하고 벌금을 내자는 안까지 올렸다. 오빠는 언제나 짧게 ‘못가’라고 당당히 답하거나, 묵묵부답이었고, 나는 대체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은 했지만, 솔직히 엄마나 동생이 1순위가 되지는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안해하거나 변명이라도 했다는 점이 오빠와 다르다면 달랐을까 동생 입장에서 야속하기는 마찬가지였었을 것이다.

 

퇴직한 나는 동생에게 ‘노는 사람’이었다. 그 말은 동생 입장에서 나는 언제든 엄마가 필요로 할 때 달려가야 하고 바쁘다느니, 일이 있다느니 따위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 ‘언니가 시간이 많으니, 엄마를 가장 많이 돌봐야 하지 않겠어?’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동생은 이제 이전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동생의 마음속을 훔쳐볼 수 있다면 분명 이렇게 일갈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산 6년 동안 독박을 제대로 썼다. 엄마와 함께 사는 일이란 몸도 영혼도 모두 뺏기는 일이다. 엄마의 부정적인 기운이 너무 싫고 답답해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 집은 쉬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어디 갈 곳도 없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애탕 끌탕 하며 보살폈지만, 고맙다는 말보다는 늘 성에 차지 않아 했다. 물론 나도 엄마에게 잘해주지 못했다. 엄마에게 있는 대로 짜증을 냈는가 하면,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퍼부었고, 혼자 내버려 둘 때가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내가 할 줄은 몰랐다. 대체 얼마만큼 해야 효녀가 되는 걸까? 어디에 있든 늘 ‘엄마’라는 존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나를 짓눌렀다. 일을 하고 있어도 집중이 안 된다. 언제 엄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늘 불안하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를 것이다. 언니나 오빠는 그저 잠시 스쳐 가는 바람 같은 존재다. 결국은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 언니가 작년에 퇴직하고 집에 있을 때는 엄마를 많이 돌봐주었다. 그렇게 마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언니가 쉬는 동안엔 엄마를 돌봐야 하는 책임을 더 가져 가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일이 생길 때마다 일부러 언니를 더 호출했다. 언니는 어떤 설명 없이도 뭘 해야 하는지 알아서 일을 해주었다. 정말 의지가 되었다. 그러나 언니는 취직해 버렸다. 끝났다.

 

작년에 엄마가 중환자실에 들어가 계실 때는 정말 마음이 편했다. 엄마가 사경을 헤매는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집이 집 같았다. 그런데 최근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조금 회복하는 듯 보이자 언니는 엄마를 다시 집으로 모셔 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비쳤다. 물론 나도 언니 말대로 엄마를 집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두가 안 난다. 나는 엄마가 다니던 주간보호센터 원장님과 상의해 보았다. 원장님은 대기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센터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입소하기까지 센터에서 지내시도록 할 수는 있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센터로 모시자고 언니, 오빠에게 제안했다. 엄마도 원했고 낯선 요양원보다는 나은 선택 같았기 때문이다.

 

 

ⓒ이지영 그림 (<시사인>  2022.04.24 )

 

 

엄마는 지금 센터(공동생활가정)에 있으면서도 나에게 수시로 전화한다. 집에 오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다. 그러나 지난 주말에 잠깐 엄마가 집으로 왔을 때도 벌써 세 번이나 넘어지셨다. 현관 비밀번호도 까먹고 멍하니 서 있는 엄마를 어떻게 집으로 모실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엄마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 엄마가 있는 곳은 밤에도 돌봄을 받을 수 있어서 다른 시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시설이 다 똑같지 않을까? 그에 비하면 여기가 차라리 나는 낫다고 생각한다. 24시간 요양보호사를 구하기도 어렵지만, 구한다 해도 집도 좁고 엄마를 돌보는데 더 낫다는 보장을 못하겠다. 그런데도 정말 집으로 모시는 것만이 능사일까? 엄마를 집으로 모시는 순간 독박 돌봄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나 엄마가 거기 계시면 언니도, 오빠도 나도 비교적 공평하게 엄마를 돌볼 수 있다. 지금 그냥 엄마를 저대로 두면 나는 나쁜 자식일까? 그런데 왜 나만 나쁜년이 돼야 하는 거지? 왜, 왜? 억울하다.

 

 

나의 졸렬한 변명

 

 

엄마 돌봄이 막상 내게 닥치고 보니, 엄마도 엄마지만 동생이 더 심각해 보였다. 처음엔 동생에게 정말 진심으로 미안했고, 엄마보다는 동생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모든 행동이 다 이해가 됐고, 집에 들어오기 싫은 것, 엄마에 대해 끊임없이 욕을 하는 그 마음도 이해가 됐다. 그럴수록 빨리 엄마에게서 벗어나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를 돌보는 시간이 동생에게는 휴식이 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내가 합류하자 동생의 태도는 점차 달라졌다.  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엄마 돌봄에서  빠지려고 한다. 나를 돌려막기로 세워 놓고 엄마의 독박 돌봄에서 슬쩍 빠져나가자는 속셈이 아닐까? 엄마를 돌보는 일보다 동생과의 신경전이 나로서는 더 스트레스였다. 너무 화가 나는데 따지고 보면 엄마도 동생도 나도 그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다. 엄마의 돌봄은 내가 안 하면 동생이 해야 하고, 동생이 안 하면 내가 해야 하는 시소게임이다. 동생과 내가 엄마 돌봄을 놓고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해도 항상 찜찜하고 죄스럽고, 잘돼봐야 ‘찜찜한 홀가분함’ 밖에 남지 않았다.

 

오빠는 자기 일정에 어떤 피해도 볼 수 없다는 태도다. 거절도 너무 당당하고, 거침이 없어서 그 기세에 눌릴 판이다. 그도 마음 한구석에 우리처럼 ‘죄스러움’과 ‘찜찜한 홀가분함’이라는 게 있을까? 물론 오빠도 새언니 눈치 보랴 나름의 어려움이 있을 테지. 그러나 그런 것까지 내가 친절히 이해하고 싶지 않다. 나나 동생이 오빠를 타박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몹시 불편해하며 우리 삼 형제가 합심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길 원했다. 저럴 땐 나도 엄마가 혼자 되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싶다. 오빠는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권한은 가져가려고 한다. 지난번 엄마를 병원에서 퇴원시키려고 할 때도 엄마를 자기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나는 엄마의 옷이라던가, 기저귀 등 물품이 많이 필요할 텐데 자주 왔다 갔다 하고 사소한 심부름을 오빠가 다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흥! 결국 동생이 그 먼 데까지 잔심부름으로 왔다 갔다 할 게 뻔하니까). 그러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그럼 엄마 집 근처로 모시자고 했다. 매사에 저런 식이다. 오빠를 저렇게 만든 건 다 엄마, 아빠 잘못이다. 1남 2녀의 그 잘난 K-장남으로 키워진 탓이다. 동생이나 나나 오빠와 싸우자니 지치고, 그냥 넘어가자니 속이 끓는다. 결과적으로 오빠 몫까지 땜빵하고 있는 꼴을 보면 내 뼛속엔 가부장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몸서리쳐진다. 엄마 돌아가시면 안 보고 살 거다. 얼어 죽을 놈의 가족 따위는 해체야. The end라구.

 

 

 

 

 

엄마를 요양병원에 그냥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6년 전에 입소했던 요양병원은 모든 시설이 개방되어 있었고, 엄마가 어떻게 지내는지 다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코로나 때문인지 내부 통제가 철저해 대체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엄마의 말만으로 모든 상황을 짐작할 뿐이다. 엄마를 당장 집에 모실 수 없다면 적어도 병원보다는 익숙한 환경과 익숙한 사람들이 있는 센터(공동생활가정)가 훨씬 낫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대기 기간이 꽤 길 텐데 일시적이라면 모르지만, 계속 있게 된다면 엄마에게 괜찮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집’으로 모시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런데 오빠는 단칼에 ‘엄마가 괜찮다는 데 무슨 소리냐’고 했고, 동생은 내 말에 수긍하는 듯했지만 결국은 자신 없다며 피했다.

 

그래, 내가 엄마를 집으로 모시자고 얘기하는 건 주제넘은 소리다. 그건 또 동생에게 엄마에 대한 전적인 부담을 지우는 일이니까. 아무리 내 몫만큼 감당해 준다 한들 24시간 함께 사는 동생의 하중에 비할 수 있을까? 요양보호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데,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 엄마도 엄마지만 동생도 살려야 한다. 오죽하면 동생은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너무 마음이 가벼웠다고 했다. 그 맘을 내가 어찌 모를까. 엄마가 집으로 못 갈 바에야 지금 있는 곳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주말에라도 집에 모시고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세 남매에게 최선이 엄마에게도 최선일까?

 

답답하고 미치겠다던 엄마가 며칠 전 오빠를 만나고는 다시 거기 그냥 있겠다고 했다. 오빠 말 한마디가 엄마를 움직이는 꼴이라니. 그러나 안다 나는. 엄마는 우리가 힘들까 봐 참는 것이라는 것을. 엄마의 안전과 평안을 중심에 놓고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일이 돌봄일 텐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 돌봄에 동생과 내가 진 몫은 2분의 1이 아니라, 3분의 1이다. 나머지 1은 엄마의 셀프다. 자식들을 위해 불편해도, 집에 가고 싶어도 시설에서 지내며 견뎌보고자 하는 엄마 자신의 노력 말이다. 돌봄에 공평한 몫의 나눔이라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걸까? 엄마가 스스로 견디는 그 몫 덕분에 동생과 나는 그 더럽고 치사스러운 시소게임을 멈출 수 있다.

 

 

내가 빨리 죽어야 느그가 편할낀데..

 

 

결국 이 와중에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건 엄마다. 그런데도 엄마는 ‘엄마 거기 어때? 지낼만해?’하고 물으면 ‘마, 그저 글타.. 그냥 그렇게 지내는 거지’ 한다. 엄마는 혹시 아수라 백작인가? 센터에 있을 땐 답답하다며 집에 가고 싶다고 전화해서 마음을 들쑤셔 놓고, 만나서 얼굴 맞대고 물으면 대답이 달라진다. 늙고 병든 엄마의 의사는 믿을 만한 것인지, 그저 우리가 도리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식 된 도리라는 것은 무엇인지, 이 상황에서 맞게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알쏭달쏭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얼른 죽어야 느그들이 편할낀데...’ 하는 엄마의 그 말만은 진심일 것이다. 엄마 돌봄의 문제는 아무리 고민해도 누구에게도 흡족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데 그 누군가가 돌봄을 받아야 할 당사자가 되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엄마를 시설에 모시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시설이 좋다, 나쁘다도 아니다. 엄마를 놓고 우리 세 남매의 각기 다른 입장들과 어려움, ‘죄책감’과 이 ‘찜찜한 홀가분함’ 사이에서 결국 엄마의 희생을 담보로 얻어지는 각자의 평화는 유죄일까 무죄일까. ‘난잡한 돌봄’은 커녕 난장판처럼 혼란스럽고 진퇴양난인 이 사태 앞에서 나는 과연 ‘웰컴투 60’이라 말해도 되는 것일까? 이것은 그대로 곧 내게 닥쳐올 미래일 것인데….

 

 

댓글 7
  • 2023-05-11 10:27

    저 역시 모친 돌봄을 준비 중(우선 현재는 마음가짐만요.)인 1인입니다. 저는 혼자여서 형제끼리의 시소게임을 안해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2023-05-11 10:32

    주간보호센터, 공동생활가정......요양병원 말고도 알아야 할 것들이 많네요. 난장판에서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지만 이렇게 써주셔 도움이 많이 됩니다!! 알아야 할 것,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네요!!

  • 2023-05-11 12:17

    저는 이미 난장판 비스무리하게 스쳐간 1인입니다.
    글을 읽으니 저랑 오빠만이 돌봄을 한게 아니고 요양병원에 입소했던 엄마도 함께 돌봄의 몫을 나눈거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거친 돌봄의 현장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예전의 일들이 다시 구성되네요.

  • 2023-05-11 16:37

    남의 일 같지 않게 읽히는 1인, 음... 생각이 더더더 많아지는군요 ㅋㅋ

  • 2023-05-14 22:00

    저에게도 곧 닥칠 일들이겠죠…동생들과 부디 잘 헤쳐나가길 바라지만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참..어려운 문제입니다..

  • 2023-05-22 11:53

    무사님 진정 혼자가 오히려 다행이랍니다 ㅎㅎㅎ
    근데 그게 혼자는 아니라는게 또 쉽지가 않습니다
    다름 아닌 엄마가 계시죠
    돌봄은 일방적 서비스가 아닌 상호관계맺기라는 .....

    그나저나 모두들 화이팅!!! 입니다^^

  • 2023-06-04 07:39

    한 번도 겪어보지 못 한 이 시대의 난제. 노인돌봄.
    현재의 부모 돌봄은 가부장적 문화 아래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군요. 그렇게 키워진 건지, 환경이 그러한 건지, 아님 남자들이 원래 싸가지가 없는 건지. 언니도 없고 여동생도 없는 나는 그래도 울 오빠 정도면 괜찮지 하고 지냅니다. 수시로 집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ㅎㅎㅎ

인문약방 에세이
  수치로 되돌아가다   모퉁이       나는 사실 그 사람들과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227쪽)   나의 부모는 18세에 나를 낳았다. 나는 실수로 태어난 미운 오리 새끼였다. 아주 어려서부터도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서 우아하게 저들을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삼십 년도 더 걸렸다. 어려서 이미 그들이 얼마나 철없고 부모 역할에 부적합한지를 알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그들의 무지와 폭력으로부터 나와 동생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서른이 될 때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그들의 대책 없는 생활을 뒤치다꺼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혼을 하는 내가 수치스럽다고 했고(본인들도 이혼했다.) 아이를 줘버리라고 너무도 쉽게 충고했다. 그제야 그들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를 알게 됐고, 그 길로 그들을 떠나서 가족과 단절했다. 그렇게 폭력과 무지, 염치가 없고 수치도 모르는 그들을 경멸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내가 선택한 삶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모든 게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책감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나를 둘러싼 작은 사회에는 나처럼 단절 혹은 탈주를 감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에게 나는 별종이거나 독한 사람일 뿐. 그래서일까 염치가 없고, 수치를 모르는 그들을 정말 오랜 시간의 망설임과 주저함 끝에 힘겹게 떠나왔지만, 설거지를 하고, 운전을 하고, 샤워를 하는 동안 그들과 매일 무수히 맞닥뜨렸다. 그들은 맏딸로서 책임감을 저버린 나를 비난했고, 혼자만 살겠다고 뛰쳐나갔다면서 힐난했다. 내가 그들을 떠나서 얻어낸 평안함과 여유 뒤에는 항상 죄책감과 수치심이...
  수치로 되돌아가다   모퉁이       나는 사실 그 사람들과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227쪽)   나의 부모는 18세에 나를 낳았다. 나는 실수로 태어난 미운 오리 새끼였다. 아주 어려서부터도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서 우아하게 저들을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삼십 년도 더 걸렸다. 어려서 이미 그들이 얼마나 철없고 부모 역할에 부적합한지를 알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그들의 무지와 폭력으로부터 나와 동생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서른이 될 때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그들의 대책 없는 생활을 뒤치다꺼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혼을 하는 내가 수치스럽다고 했고(본인들도 이혼했다.) 아이를 줘버리라고 너무도 쉽게 충고했다. 그제야 그들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를 알게 됐고, 그 길로 그들을 떠나서 가족과 단절했다. 그렇게 폭력과 무지, 염치가 없고 수치도 모르는 그들을 경멸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내가 선택한 삶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모든 게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책감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나를 둘러싼 작은 사회에는 나처럼 단절 혹은 탈주를 감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에게 나는 별종이거나 독한 사람일 뿐. 그래서일까 염치가 없고, 수치를 모르는 그들을 정말 오랜 시간의 망설임과 주저함 끝에 힘겹게 떠나왔지만, 설거지를 하고, 운전을 하고, 샤워를 하는 동안 그들과 매일 무수히 맞닥뜨렸다. 그들은 맏딸로서 책임감을 저버린 나를 비난했고, 혼자만 살겠다고 뛰쳐나갔다면서 힐난했다. 내가 그들을 떠나서 얻어낸 평안함과 여유 뒤에는 항상 죄책감과 수치심이...
문탁 2023.09.19 조회 219
인문약방 에세이
        자기 삶의 연구자 되기 해야     “나이듦과 자기서사”에서 지금껏 네 편의 에세이를 썼다. 인생의 취약한 경험을 서사로 풀어내는 것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확인했다. 존경받는 영성가, 작가, 교육자인 파커 J. 파머는 그를 주기적으로 괴롭혔던 우울증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을 겪을 때마다 모든 걸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그 경험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숙고 끝에 파머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간 살펴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직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파머는 이 과정이 취약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일부로 통합시키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하는 파머는, 서사가 조언이나 요령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다. 또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훌륭한 서사에는 독자들이 저자를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여기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나는 파머가 바람직한 자기 서사의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고 느꼈다.      이러한 파머의 통찰과 들어맞는 두 편의 소수자 서사를 만났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푸코 전기의 작가로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이하 <<랭스>>)와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하 <<실격>>)이다. 나는 취약함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서사들에 공감했고 두 저자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두 책이 소수자 서사의  훌륭한 모델로 다가온 이유는 자기 기술지(autoethnography)라는 독특한 글쓰기 장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소수자로 정체화하는 사회 과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자기 기술지는 개인의 경험 (“auto”)에서 출발한다. 그 경험의 사회 정치적 배경 (“ethno”)을 탐구하고, 경험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에 기반하여 자기를 상세히 기술 (“graphy”)한다. 자기 기술지 연구자는 인생의 궤적이 사회 구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피고, 개념과 이론을 동원하여 서사를 해석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에 대한 앎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나는 두 저자가 자기 기술지라는 글쓰기 형식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어졌다.            자기 분석은 곧 수치 분석이다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탐구는 개인적인 배제와 차별의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모욕의 경험을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하지 않았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 그 경험을 문제화하였다. 노동자 아들이자 성소수자로서 일상적인 모욕을 겪으면 자란 에리봉은 자연스럽게 게이의 성적 주체화를 연구의 주요 의제로 삼게 되었다. 가족과 고향을 탈주하여 자유로운 게이이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으나, 성적 수치는 그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몸에 새겨진 인장과 같은 것이었다. 떨쳐내기 어려운 성적 수치와 수치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가 에리봉의 지적 탐구의 중심이 되었다.     에리봉은 폭력 가장이자 동성애 혐오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지금껏 외면해 왔던 가난한 노동자 아들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줄곧 본인의 동성애 성향과 아버지 및 노동 계급 문화의 동성애 혐오라는 “고상한” 이유를 들어, 가족과 노동 계급을 떠나야 했다고 설명해 왔었다.  노동자 도시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자란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그는 본인이 노동자들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 체계에 대해 경멸감과 수치심을 갖고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명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했음에도 에리봉은 상급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문학, 철학, 예술 등의 교육은 중산층이 전유하는 아비투스(학습된 문화적 성향 쳬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고등 학교 과정에서 접하게 된 부르주아의 언어, 교양있는 행동, 상류층 취향의 문화 등은 동급생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에리봉에겐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는 무지를 감추기 위해 아는 것처럼 위장하고, 소외감을 반항으로 표출하고, 떄로는 민중 계급의 남성성을 버리고 심미주의자 소년이 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중산층 아비투스에 대한 체화나 학업에 열중하기 위한 신체적 훈육이 없이 지식인 사회로의 편입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란 걸 체험했다. 프랑스의 상급 학교 교육은 상류층 아이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었기에, 에리봉과 같은 노동 계급의 아이들은 지적인 열망을 갖더라도 그 체계 안에서 배제와 수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치심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라는 에리봉의 분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 자본과 사회 관계 자본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는 구별짓기는 내가 고등 교육에 접근하고자 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한국 및 미국의 교육 체계에서도 목격할 수 있기 떄문이다. 에리봉은 문화 자본이란 개념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급적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들(아비 투스, 사회 관계 자본, 구조의 평행 이동 등)에 기반하여 본인이 경험한 계급과 불평등을 분석한다. 사회학적 개념들을 장착하여 서사를 해석함으로써 구조 속에 위치한 개인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회학적 자기 탐구는 사회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앎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에리봉이 계급적 수치에 중점을 두었다면,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을 갖고 태어난 김원영은 <<실격>>에서 몸의 수치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신체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법과 제도, 사회적 관습, 통념 등에 의해 ‘잘못된 삶’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철저히 논증한다.  에리봉과 구별되는 점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적극적 변론을 펼친 점이다.   저자는 ‘비정상적’ 몸으로 인해 겪는 수치를 자신이 어떻게 다루는지 상세히 기술한다. 모욕적인 언사나 상황에 직면할 때, 그는 좌절감에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하여 말을 더듬지 않는다. 자아를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바로 구분한다. 바라보는 나는 냉철하게 상황 분석을 하고, 보여지는 나는 그 분석에 기반하여 유머 또는 차가운 분노가 담긴 대응을 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자신을 보고 가여워 하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묻는 이에게 “장애인 할인을 받으려고요”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방어적 퍼포먼스가 자기 존중과 사회적 존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여기서 나아가 수치가 자기 수용이나 존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자신과 비슷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들과 연대하여 “수평적 정체성” 그룹을 구성한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휠체어를 탄 친구들과 함께 간지 나는 휠체어 운전법을 연습하였고, 그 작동 기술 자체가 그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 경험은 자신들을 정상성이 결여된 존재가 아닌 정상성과 다른 무엇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하여 지식인 또는 전문직 종사자로의 계층 이동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역경을 극복한 성공의 서사 구조에 딱 들어맞지만, 이들의 자기 기술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성공 서사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치의 경험을 드러내며 ‘벌거벗은’ 채 독자에게 다가선다.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 경험을 사회 구조 내에서 분석하고, 해석한다.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두 저자가 깊이 있는 자기 이헤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변호사       정체성의 교차가 핵심이다   이 두편의 자기 기술지는 개인적인 경험이 구조의 산물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각 개인에게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정체성의 다양성과 교차성으로 인해 소수자 개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기술지를 통해 에리봉과 김원영은 여러 정체성의 충돌과 교차를 탐구하였다.      <<랭스>>는 자기 탐구가 성적 주체화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기에,  계급적 주체화를 주로 다루었다. 그럼에도에리봉의 서사에는 자신의 계급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 지식인,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게이 지식인이 되기 위한 여정은 성적인 자아와 계급적 자아가 충돌 가운데 이뤄진 것이었다. 또 게이로서의 정체성은 동성애 혐오적 노동자 문화와 거리를 두면서 성적 주체화에 대한 탐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에리봉의 서사를 통해 교차된 정체성이 가족(노동자 남성, 노동자 여성 등)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중 나는 에리봉이 명시적으로 기술하지 않은 젠더와 계급의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어머니는 저자의 동성애 성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반면,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노동 계급 남성들의 외도나 성적인 유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여성들의 자유 연애와 낙태(외할머니의 경우)는 사회적 낙인과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계급적 배경과 젠더로 인해 남성들이 겪지 않은 성희롱과 성적 대상화를 겪어야 했다. 같은 계급 내에서도 젠더에 따라 특권과 배제가 다르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도 장애와 다른 정체성들의 교차가 개별 장애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계급과 장애가 교차할 때 겪게 되는 모욕적인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장애인들은 적은 액수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대신 정치인들의  PR을 위해 동원되고 “전시품”으로 취급 받는다. 수치심을 느끼지만 본인들의 위치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하다.  장애인의 정체성은 학력과도 밀접하게 교차한다. 이동이 불가능하고 교육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아, 장애인들은 초등 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배제로 인해 이들은 자기를 드러낼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자신을 설명할 언어 발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낮은 계급과 무학 또는 저학력의 정체성이 장애와 만날 때, 출발부터 실격당한 인생의 운명에 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리봉은 최근의 사회 과학 연구와 정치 담론이 특정 정체성의 사회적 인정에 집중함으로써 계급이 간과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정체성 정치에서 놓치기 쉬운 개인적 체험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존재를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우리의 복잡한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개인을 특정 정체성의 고정된 주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완전한 자기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반증해 주었다. 나는 성적인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집중한 나머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정체성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여 지금의 나를 구성하였는지 살펴보지 못했다. 내가 겪은 배제와 차별, 그리고 특권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표현되는 나의 독특하고 복잡한 위치성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살필 때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두 책이 보여주듯 자기 기술지는 개인 서사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교차성의 서사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힘 또한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에리봉과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지만  사회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등 교육에 접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게이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대도시로 탈출한 경험도 유사하다. 난 김원영처럼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란 걸 확신하고 확인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원영이 장애인 이외의 “매력 자원”이 부족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예를 들어, ‘못생겼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집단 괴롭힘을 당한 명문대 여힉셍)을 본인과 비슷하게 실격당한 처지에 있다고 얘기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맥락이 그 서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엮어게 되는 힘이 있다. 두 저자의 복잡한 서사에 나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음을 발견하면서 난 이들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 기술지는 ‘나’의 서사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서사로 해석되고 확장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 기술지를 쓸 수 있을까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기술지 작업은 밀도 있는 자기 반성(self-reflection)과 엄격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수치와 배제를 생산하는 구조와 사회적 질서의 작동 방식을 잘 드러내었다. 동시에 그 질서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결합과 충돌 가운데 구성된 나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지난한 자기 연구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역자는 에리봉의 자기 연구의 과정을 자기 발명이라고 불렀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계급이 본인 인생의 변곡점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고, 특히 계급적 수치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핀 것 자체가 그에겐 자기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김원영은 자신을 비롯한 실격당한 이들의 삶이 가치있고 존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변론을 끝까지 밀어 부쳤다. 그의 자기 변호는 논리와 이론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이뤄졌고, 독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논리, 설득력, 당당함을 갖춘 서사는 그가 <<실격>>을 자기 발명의 일환으로 삼았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두 소수자의 자기기술지에 공감했고 영감을 받았다. 이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용기, 자기 성찰 능력, 학문적 엄격함, 정교한 자기 기술 능력 등이 글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자와 작가로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춘 두 사람이 부러웠다. 나와 같이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 자기 기술지를 서사의 장르로 삼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회 과학이나 철학 등에 대한 지적인 토대가 약하다. 개념과 서사를 엮는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훈련도 부족하다. 이에 대한 장기간의 밀도 있는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엄격한 의미의 자기 기술지에 접근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두 텍스트로부터  서사를 구성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기준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 기준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구조와 결합되어 서술되었는가’, ‘학문적 개념과 이론이 경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가’, ‘개인의 고유한 교차적 정체성이 드러났는가’,  ‘고유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자기 삶의 연구자”라는 표현은 박노해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자기 기술지는 서사가 중심이기 때문에 이론과 개념어로 점철된 논문에 비하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이 비교적  쉽다. 단,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 집단의 이해와 권리에 집중하는 사회운동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매몰되어 타정체성 그룹과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극단적으로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기 삶의 연구자 되기 해야     “나이듦과 자기서사”에서 지금껏 네 편의 에세이를 썼다. 인생의 취약한 경험을 서사로 풀어내는 것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확인했다. 존경받는 영성가, 작가, 교육자인 파커 J. 파머는 그를 주기적으로 괴롭혔던 우울증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을 겪을 때마다 모든 걸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그 경험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숙고 끝에 파머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간 살펴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직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파머는 이 과정이 취약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일부로 통합시키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하는 파머는, 서사가 조언이나 요령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다. 또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훌륭한 서사에는 독자들이 저자를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여기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나는 파머가 바람직한 자기 서사의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고 느꼈다.      이러한 파머의 통찰과 들어맞는 두 편의 소수자 서사를 만났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푸코 전기의 작가로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이하 <<랭스>>)와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하 <<실격>>)이다. 나는 취약함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서사들에 공감했고 두 저자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두 책이 소수자 서사의  훌륭한 모델로 다가온 이유는 자기 기술지(autoethnography)라는 독특한 글쓰기 장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소수자로 정체화하는 사회 과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자기 기술지는 개인의 경험 (“auto”)에서 출발한다. 그 경험의 사회 정치적 배경 (“ethno”)을 탐구하고, 경험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에 기반하여 자기를 상세히 기술 (“graphy”)한다. 자기 기술지 연구자는 인생의 궤적이 사회 구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피고, 개념과 이론을 동원하여 서사를 해석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에 대한 앎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나는 두 저자가 자기 기술지라는 글쓰기 형식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어졌다.            자기 분석은 곧 수치 분석이다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탐구는 개인적인 배제와 차별의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모욕의 경험을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하지 않았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 그 경험을 문제화하였다. 노동자 아들이자 성소수자로서 일상적인 모욕을 겪으면 자란 에리봉은 자연스럽게 게이의 성적 주체화를 연구의 주요 의제로 삼게 되었다. 가족과 고향을 탈주하여 자유로운 게이이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으나, 성적 수치는 그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몸에 새겨진 인장과 같은 것이었다. 떨쳐내기 어려운 성적 수치와 수치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가 에리봉의 지적 탐구의 중심이 되었다.     에리봉은 폭력 가장이자 동성애 혐오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지금껏 외면해 왔던 가난한 노동자 아들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줄곧 본인의 동성애 성향과 아버지 및 노동 계급 문화의 동성애 혐오라는 “고상한” 이유를 들어, 가족과 노동 계급을 떠나야 했다고 설명해 왔었다.  노동자 도시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자란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그는 본인이 노동자들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 체계에 대해 경멸감과 수치심을 갖고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명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했음에도 에리봉은 상급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문학, 철학, 예술 등의 교육은 중산층이 전유하는 아비투스(학습된 문화적 성향 쳬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고등 학교 과정에서 접하게 된 부르주아의 언어, 교양있는 행동, 상류층 취향의 문화 등은 동급생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에리봉에겐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는 무지를 감추기 위해 아는 것처럼 위장하고, 소외감을 반항으로 표출하고, 떄로는 민중 계급의 남성성을 버리고 심미주의자 소년이 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중산층 아비투스에 대한 체화나 학업에 열중하기 위한 신체적 훈육이 없이 지식인 사회로의 편입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란 걸 체험했다. 프랑스의 상급 학교 교육은 상류층 아이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었기에, 에리봉과 같은 노동 계급의 아이들은 지적인 열망을 갖더라도 그 체계 안에서 배제와 수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치심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라는 에리봉의 분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 자본과 사회 관계 자본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는 구별짓기는 내가 고등 교육에 접근하고자 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한국 및 미국의 교육 체계에서도 목격할 수 있기 떄문이다. 에리봉은 문화 자본이란 개념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급적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들(아비 투스, 사회 관계 자본, 구조의 평행 이동 등)에 기반하여 본인이 경험한 계급과 불평등을 분석한다. 사회학적 개념들을 장착하여 서사를 해석함으로써 구조 속에 위치한 개인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회학적 자기 탐구는 사회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앎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에리봉이 계급적 수치에 중점을 두었다면,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을 갖고 태어난 김원영은 <<실격>>에서 몸의 수치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신체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법과 제도, 사회적 관습, 통념 등에 의해 ‘잘못된 삶’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철저히 논증한다.  에리봉과 구별되는 점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적극적 변론을 펼친 점이다.   저자는 ‘비정상적’ 몸으로 인해 겪는 수치를 자신이 어떻게 다루는지 상세히 기술한다. 모욕적인 언사나 상황에 직면할 때, 그는 좌절감에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하여 말을 더듬지 않는다. 자아를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바로 구분한다. 바라보는 나는 냉철하게 상황 분석을 하고, 보여지는 나는 그 분석에 기반하여 유머 또는 차가운 분노가 담긴 대응을 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자신을 보고 가여워 하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묻는 이에게 “장애인 할인을 받으려고요”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방어적 퍼포먼스가 자기 존중과 사회적 존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여기서 나아가 수치가 자기 수용이나 존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자신과 비슷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들과 연대하여 “수평적 정체성” 그룹을 구성한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휠체어를 탄 친구들과 함께 간지 나는 휠체어 운전법을 연습하였고, 그 작동 기술 자체가 그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 경험은 자신들을 정상성이 결여된 존재가 아닌 정상성과 다른 무엇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하여 지식인 또는 전문직 종사자로의 계층 이동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역경을 극복한 성공의 서사 구조에 딱 들어맞지만, 이들의 자기 기술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성공 서사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치의 경험을 드러내며 ‘벌거벗은’ 채 독자에게 다가선다.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 경험을 사회 구조 내에서 분석하고, 해석한다.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두 저자가 깊이 있는 자기 이헤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변호사       정체성의 교차가 핵심이다   이 두편의 자기 기술지는 개인적인 경험이 구조의 산물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각 개인에게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정체성의 다양성과 교차성으로 인해 소수자 개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기술지를 통해 에리봉과 김원영은 여러 정체성의 충돌과 교차를 탐구하였다.      <<랭스>>는 자기 탐구가 성적 주체화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기에,  계급적 주체화를 주로 다루었다. 그럼에도에리봉의 서사에는 자신의 계급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 지식인,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게이 지식인이 되기 위한 여정은 성적인 자아와 계급적 자아가 충돌 가운데 이뤄진 것이었다. 또 게이로서의 정체성은 동성애 혐오적 노동자 문화와 거리를 두면서 성적 주체화에 대한 탐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에리봉의 서사를 통해 교차된 정체성이 가족(노동자 남성, 노동자 여성 등)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중 나는 에리봉이 명시적으로 기술하지 않은 젠더와 계급의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어머니는 저자의 동성애 성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반면,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노동 계급 남성들의 외도나 성적인 유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여성들의 자유 연애와 낙태(외할머니의 경우)는 사회적 낙인과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계급적 배경과 젠더로 인해 남성들이 겪지 않은 성희롱과 성적 대상화를 겪어야 했다. 같은 계급 내에서도 젠더에 따라 특권과 배제가 다르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도 장애와 다른 정체성들의 교차가 개별 장애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계급과 장애가 교차할 때 겪게 되는 모욕적인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장애인들은 적은 액수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대신 정치인들의  PR을 위해 동원되고 “전시품”으로 취급 받는다. 수치심을 느끼지만 본인들의 위치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하다.  장애인의 정체성은 학력과도 밀접하게 교차한다. 이동이 불가능하고 교육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아, 장애인들은 초등 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배제로 인해 이들은 자기를 드러낼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자신을 설명할 언어 발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낮은 계급과 무학 또는 저학력의 정체성이 장애와 만날 때, 출발부터 실격당한 인생의 운명에 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리봉은 최근의 사회 과학 연구와 정치 담론이 특정 정체성의 사회적 인정에 집중함으로써 계급이 간과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정체성 정치에서 놓치기 쉬운 개인적 체험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존재를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우리의 복잡한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개인을 특정 정체성의 고정된 주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완전한 자기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반증해 주었다. 나는 성적인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집중한 나머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정체성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여 지금의 나를 구성하였는지 살펴보지 못했다. 내가 겪은 배제와 차별, 그리고 특권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표현되는 나의 독특하고 복잡한 위치성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살필 때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두 책이 보여주듯 자기 기술지는 개인 서사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교차성의 서사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힘 또한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에리봉과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지만  사회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등 교육에 접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게이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대도시로 탈출한 경험도 유사하다. 난 김원영처럼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란 걸 확신하고 확인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원영이 장애인 이외의 “매력 자원”이 부족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예를 들어, ‘못생겼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집단 괴롭힘을 당한 명문대 여힉셍)을 본인과 비슷하게 실격당한 처지에 있다고 얘기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맥락이 그 서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엮어게 되는 힘이 있다. 두 저자의 복잡한 서사에 나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음을 발견하면서 난 이들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 기술지는 ‘나’의 서사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서사로 해석되고 확장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 기술지를 쓸 수 있을까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기술지 작업은 밀도 있는 자기 반성(self-reflection)과 엄격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수치와 배제를 생산하는 구조와 사회적 질서의 작동 방식을 잘 드러내었다. 동시에 그 질서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결합과 충돌 가운데 구성된 나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지난한 자기 연구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역자는 에리봉의 자기 연구의 과정을 자기 발명이라고 불렀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계급이 본인 인생의 변곡점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고, 특히 계급적 수치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핀 것 자체가 그에겐 자기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김원영은 자신을 비롯한 실격당한 이들의 삶이 가치있고 존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변론을 끝까지 밀어 부쳤다. 그의 자기 변호는 논리와 이론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이뤄졌고, 독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논리, 설득력, 당당함을 갖춘 서사는 그가 <<실격>>을 자기 발명의 일환으로 삼았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두 소수자의 자기기술지에 공감했고 영감을 받았다. 이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용기, 자기 성찰 능력, 학문적 엄격함, 정교한 자기 기술 능력 등이 글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자와 작가로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춘 두 사람이 부러웠다. 나와 같이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 자기 기술지를 서사의 장르로 삼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회 과학이나 철학 등에 대한 지적인 토대가 약하다. 개념과 서사를 엮는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훈련도 부족하다. 이에 대한 장기간의 밀도 있는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엄격한 의미의 자기 기술지에 접근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두 텍스트로부터  서사를 구성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기준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 기준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구조와 결합되어 서술되었는가’, ‘학문적 개념과 이론이 경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가’, ‘개인의 고유한 교차적 정체성이 드러났는가’,  ‘고유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자기 삶의 연구자”라는 표현은 박노해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자기 기술지는 서사가 중심이기 때문에 이론과 개념어로 점철된 논문에 비하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이 비교적  쉽다. 단,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 집단의 이해와 권리에 집중하는 사회운동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매몰되어 타정체성 그룹과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극단적으로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문탁 2023.09.19 조회 73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 합격자 게시판에서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쁨, 설레임, 죄책감, 부담감 등의 감정이 교차했다. 두려움 자체였던 아버지에게서, 성소수자로서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시골 동네에서 벗어날 명분이 생겨 기뻤다. 거기에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내 처지과 인생이 달라질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건 우리집 형편에 무모한 일이었다. 다른 시골 친구들처럼 취업하여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 주질 못할망정 가난한 시골집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들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 켠에 늘 죄책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에도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과연 내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고 수업료에도 보탤 수 있을까, 내향적이고 자의식 많은 내가 고립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상경하게 되었다.     서울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구로공단 근처의 지하방에서 자취를 했다. 바퀴벌레와 같이 사는 건 일상이었고, 때론 쥐까지 출몰했다. 보안이라곤 자물쇠 하나가 전부였던지라 며칠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밤손님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방을 다 헤집어 놓고 가곤 했다. 집주인들은 이사를 할 때면 아직 나오지 않은 마지막 달의 전기세와 물세를 몇 배로 뻥튀기하여 받아냈다. 그런 다음에야 월세 보증금을 내주었다. 거기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수업료를 제때 내고 졸업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노순택 사진 (오마이 뉴스에서 가져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9822 )       처음엔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일머리가 별로 없는데다 멀티태스킹이 잘 안되어 힘들었다. 게다가 점주가 일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주지 않아 그 일은 오래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남이나 목동에서 대학생 과외 수요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외를 연결해 주는 학교 취업처를 자주 들락거리고 벼룩시장에 광고를 냈다. 처음에 구한 과외들은 단기로 끝났다. 언변도 없었고 의욕이 없는 학생을 독려할 카리스마도 부족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요령을 터득했다. 난 무조건 10분 일찍 도착하는 걸 룰로 정했다. 내가 공부했던 방식을 복기해보며 어려운 영어문법 개념을 정리해서 가르쳤다. 학부모의 신뢰를 얻었고 과외가 꾸준히 연결될 수 있었다. 만원권 지폐가 빼곡히 담긴 봉투를 매달 받게 되면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은 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정된 돈으로 살아야 했기에 짠테크는 필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의 자취로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가격이 싼 몇 가지 제철 야채와 계란만으로도 여러 반찬과 국을 뚝딱 만들어냈다. 또 얼마 안되는 수입이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불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매달 정해 놓은 금액을 단기 적금에 넣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불어난 원금을 수업료에 충당했다.    나는  출퇴근 시간의 1호선 열차가 좋았다. 마치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안도감이 느껴졌다. 실제적인 연결감이 아니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친밀한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단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방 출신의 노동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다. 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돈도 내세울 지위도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은 내가 쉽게 수용할 수 없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사는 고향 친구들을 가끔씩 보는 게 반가웠지만 갈수록 이들과의 공유 지점이 없어졌다. 술에 취해 마초적 기질을 드러내는 것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 가면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속한 학과는 강남 출신과 해외거주자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학회 활동이나 데모 등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의 정의감과 열정이 부러웠지만, 난 노동자 계층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었고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다.    나는 청년기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억누르며 살아왔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를 위해서 살았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마음 한 켠에 있다. 가난과 어수룩함으로 인해 온당한 대우와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상처도 있다. 또 고립되어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이처럼 자존감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절은 건드리지 않고 묻어두는 게 속편했다.  20대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죄책감을 곁으로 밀어 놓자 지금껏 주목하지 않은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내게는 당시 마주한 장애물의 무게만큼이나 이를 넘어설 에너지가 있었다.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천천히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때론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도 발휘했다. 내 안에 자신을 지키는 힘이 생각보다 많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청년기를 떠올릴 때 무심코 사용했던 ‘자립’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를 챙겨주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는 다른 과외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난 시골집에서, 누나에게서 가끔식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학과장님은 장학금을 챙겨주기도 했다. 과외 학생의 학부모는 명절 때마다 보너스를 주셨다. 쉽게 잊고 살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를 살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처지와 내향적 성격으로 인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 다가와준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을 털어 놓았다. 다른 친구는 가족 문제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난 이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나, 다음 학기 수업료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란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농촌 출신의 일하는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내 배경에 대한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거부당할 것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자의식과 외로움으로 힘들었고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대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난 연결되어 있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음 편에서는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가진 두려움이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 합격자 게시판에서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쁨, 설레임, 죄책감, 부담감 등의 감정이 교차했다. 두려움 자체였던 아버지에게서, 성소수자로서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시골 동네에서 벗어날 명분이 생겨 기뻤다. 거기에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내 처지과 인생이 달라질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건 우리집 형편에 무모한 일이었다. 다른 시골 친구들처럼 취업하여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 주질 못할망정 가난한 시골집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들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 켠에 늘 죄책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에도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과연 내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고 수업료에도 보탤 수 있을까, 내향적이고 자의식 많은 내가 고립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상경하게 되었다.     서울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구로공단 근처의 지하방에서 자취를 했다. 바퀴벌레와 같이 사는 건 일상이었고, 때론 쥐까지 출몰했다. 보안이라곤 자물쇠 하나가 전부였던지라 며칠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밤손님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방을 다 헤집어 놓고 가곤 했다. 집주인들은 이사를 할 때면 아직 나오지 않은 마지막 달의 전기세와 물세를 몇 배로 뻥튀기하여 받아냈다. 그런 다음에야 월세 보증금을 내주었다. 거기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수업료를 제때 내고 졸업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노순택 사진 (오마이 뉴스에서 가져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9822 )       처음엔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일머리가 별로 없는데다 멀티태스킹이 잘 안되어 힘들었다. 게다가 점주가 일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주지 않아 그 일은 오래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남이나 목동에서 대학생 과외 수요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외를 연결해 주는 학교 취업처를 자주 들락거리고 벼룩시장에 광고를 냈다. 처음에 구한 과외들은 단기로 끝났다. 언변도 없었고 의욕이 없는 학생을 독려할 카리스마도 부족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요령을 터득했다. 난 무조건 10분 일찍 도착하는 걸 룰로 정했다. 내가 공부했던 방식을 복기해보며 어려운 영어문법 개념을 정리해서 가르쳤다. 학부모의 신뢰를 얻었고 과외가 꾸준히 연결될 수 있었다. 만원권 지폐가 빼곡히 담긴 봉투를 매달 받게 되면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은 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정된 돈으로 살아야 했기에 짠테크는 필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의 자취로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가격이 싼 몇 가지 제철 야채와 계란만으로도 여러 반찬과 국을 뚝딱 만들어냈다. 또 얼마 안되는 수입이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불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매달 정해 놓은 금액을 단기 적금에 넣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불어난 원금을 수업료에 충당했다.    나는  출퇴근 시간의 1호선 열차가 좋았다. 마치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안도감이 느껴졌다. 실제적인 연결감이 아니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친밀한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단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방 출신의 노동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다. 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돈도 내세울 지위도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은 내가 쉽게 수용할 수 없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사는 고향 친구들을 가끔씩 보는 게 반가웠지만 갈수록 이들과의 공유 지점이 없어졌다. 술에 취해 마초적 기질을 드러내는 것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 가면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속한 학과는 강남 출신과 해외거주자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학회 활동이나 데모 등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의 정의감과 열정이 부러웠지만, 난 노동자 계층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었고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다.    나는 청년기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억누르며 살아왔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를 위해서 살았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마음 한 켠에 있다. 가난과 어수룩함으로 인해 온당한 대우와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상처도 있다. 또 고립되어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이처럼 자존감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절은 건드리지 않고 묻어두는 게 속편했다.  20대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죄책감을 곁으로 밀어 놓자 지금껏 주목하지 않은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내게는 당시 마주한 장애물의 무게만큼이나 이를 넘어설 에너지가 있었다.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천천히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때론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도 발휘했다. 내 안에 자신을 지키는 힘이 생각보다 많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청년기를 떠올릴 때 무심코 사용했던 ‘자립’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를 챙겨주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는 다른 과외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난 시골집에서, 누나에게서 가끔식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학과장님은 장학금을 챙겨주기도 했다. 과외 학생의 학부모는 명절 때마다 보너스를 주셨다. 쉽게 잊고 살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를 살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처지와 내향적 성격으로 인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 다가와준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을 털어 놓았다. 다른 친구는 가족 문제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난 이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나, 다음 학기 수업료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란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농촌 출신의 일하는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내 배경에 대한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거부당할 것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자의식과 외로움으로 힘들었고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대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난 연결되어 있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음 편에서는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가진 두려움이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문탁 2023.09.15 조회 133
인문약방 에세이
      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_ 고미숙     김은영         1. 『동의보감』은 삶의 비전서다   저자, 고미숙은 40대에 생긴 종양의 치료법이 수술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없이 스스로 종양을 감당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먼저, 병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체 병이 왜 생겨났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데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병일까 등등. 질문이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졌고, 병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병은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와 몸을 이어주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몸들’에 대한 탐구로 연결되었고, 『동의보감』과 접속하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앎’들이 재배치되어 연결되는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인식론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고, 몸을 치유하는 것은 삶을 치유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질병과 치료에 국한되는 의서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약이나 침으로 하는 치료 보다 수양을 우선시 하라는 특급 요청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며,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중국 의학사의 엑기스가 깔려있다.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생명과 자연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텍스트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경편]의 첫 장에 등장하는 ‘신형장부도’와 손진인의 멘트를 들 수 있다.   신형장부도란 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린...
      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_ 고미숙     김은영         1. 『동의보감』은 삶의 비전서다   저자, 고미숙은 40대에 생긴 종양의 치료법이 수술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없이 스스로 종양을 감당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먼저, 병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체 병이 왜 생겨났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데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병일까 등등. 질문이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졌고, 병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병은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와 몸을 이어주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몸들’에 대한 탐구로 연결되었고, 『동의보감』과 접속하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앎’들이 재배치되어 연결되는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인식론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고, 몸을 치유하는 것은 삶을 치유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질병과 치료에 국한되는 의서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약이나 침으로 하는 치료 보다 수양을 우선시 하라는 특급 요청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며,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중국 의학사의 엑기스가 깔려있다.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생명과 자연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텍스트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경편]의 첫 장에 등장하는 ‘신형장부도’와 손진인의 멘트를 들 수 있다.   신형장부도란 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린...
문탁 2023.09.11 조회 141
인문약방 에세이
      『동의보감』으로 새롭게 보는 질병과 양생   지현       1.앞만 보고 달리다가 고꾸라지다   나의 통증연대기는 서른일곱 살에 심각한 요통이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퇴사를 하고 정형외과와 한방병원 등을 전전한 끝에 통증은 경감됐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다양한 병증이 발현됐다. 술이나 커피는 물론 홍차, 녹차, 심지어 초콜릿을 먹어도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카페인에 민감해졌다. 고춧가루가 든 음식을 먹으면 밤에 잘 때 땀을 많이 흘리는 바람에(도한) 김치나 라면도 먹을 수가 없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피부에 뭐가 나거나 두통이 생기곤 했다. 햇볕을 많이 쬐거나 과로를 하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말을 좀 많이 하면 확 까부라졌다. 9 to 6의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렸다.   만일 40대 중후반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3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엔 아직 젊었다. 활동가로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더 많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전문가로 성장해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굴렀다. 한창 자기 분야에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친구들이나 옛 동료들을 보면 부러움과 질투심에 속이 시끄러웠다. 몸, 몸, 몸. 이놈의 몸이 원흉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이 ‘몸’이라는 녀석. 당시 나에게 ‘몸’은 내가 사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나는데 나에겐 그게 몸이었다. 지난...
      『동의보감』으로 새롭게 보는 질병과 양생   지현       1.앞만 보고 달리다가 고꾸라지다   나의 통증연대기는 서른일곱 살에 심각한 요통이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퇴사를 하고 정형외과와 한방병원 등을 전전한 끝에 통증은 경감됐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다양한 병증이 발현됐다. 술이나 커피는 물론 홍차, 녹차, 심지어 초콜릿을 먹어도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카페인에 민감해졌다. 고춧가루가 든 음식을 먹으면 밤에 잘 때 땀을 많이 흘리는 바람에(도한) 김치나 라면도 먹을 수가 없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피부에 뭐가 나거나 두통이 생기곤 했다. 햇볕을 많이 쬐거나 과로를 하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말을 좀 많이 하면 확 까부라졌다. 9 to 6의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렸다.   만일 40대 중후반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3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엔 아직 젊었다. 활동가로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더 많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전문가로 성장해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굴렀다. 한창 자기 분야에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친구들이나 옛 동료들을 보면 부러움과 질투심에 속이 시끄러웠다. 몸, 몸, 몸. 이놈의 몸이 원흉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이 ‘몸’이라는 녀석. 당시 나에게 ‘몸’은 내가 사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나는데 나에겐 그게 몸이었다. 지난...
문탁 2023.09.11 조회 39
인문약방 에세이
      몸 = 신체 + 정신 + 자연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읽고     김지영     1. 한의학, 친근하지만 관심은 없습니다   동의보감은 총 25권(번역본은 총 2,500쪽)에 달한다고 한다. 분량에서부터 엄청나게 방대한 의서라는 것을 알게 한다. 내 또래에서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99년 방영돼 국민드라마 반열에 오른 <허준>을 통해 애민정신이 넘치는 명의가 불굴의 의지로 완성시킨 한의학의 자랑스런 유산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 그 의서 아닌가. 그렇게 친근했지만 나는 동의보감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 등은 한번쯤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기록유산인 동의보감은 그렇지 않았다. 한의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의서를 본다한들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침술을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어디에 써먹는다고 그걸 읽겠나? 바탕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의서는 그렇다치고 한의원은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 한의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보약이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란 나는 성장기에 보약 한 첩 먹어본 기억이 없다. 어린 시절 한의원 이미지는 보약 짓는 곳, 부자들의 구역이었다. 내가 한의원 문턱을 처음 넘은 건 서른을 훌쩍 넘었을 때로 기억한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나도 이제 보약 한 재 지어 먹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으로 한의원에 갔다. 맥을 짚은 후 한의사는 내 체질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무슨 체질이라고 했는지 지금은 까먹었다. 그 때 먹은 보약이...
      몸 = 신체 + 정신 + 자연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읽고     김지영     1. 한의학, 친근하지만 관심은 없습니다   동의보감은 총 25권(번역본은 총 2,500쪽)에 달한다고 한다. 분량에서부터 엄청나게 방대한 의서라는 것을 알게 한다. 내 또래에서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99년 방영돼 국민드라마 반열에 오른 <허준>을 통해 애민정신이 넘치는 명의가 불굴의 의지로 완성시킨 한의학의 자랑스런 유산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 그 의서 아닌가. 그렇게 친근했지만 나는 동의보감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 등은 한번쯤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기록유산인 동의보감은 그렇지 않았다. 한의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의서를 본다한들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침술을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어디에 써먹는다고 그걸 읽겠나? 바탕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의서는 그렇다치고 한의원은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 한의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보약이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란 나는 성장기에 보약 한 첩 먹어본 기억이 없다. 어린 시절 한의원 이미지는 보약 짓는 곳, 부자들의 구역이었다. 내가 한의원 문턱을 처음 넘은 건 서른을 훌쩍 넘었을 때로 기억한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나도 이제 보약 한 재 지어 먹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으로 한의원에 갔다. 맥을 짚은 후 한의사는 내 체질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무슨 체질이라고 했는지 지금은 까먹었다. 그 때 먹은 보약이...
문탁 2023.09.11 조회 30
인문약방 에세이
    복직과 두려움, 떨쳐낼 수 있을까?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리뷰       박정은       1.작은 갈등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   일주일 뒤에 5년간 휴직이 끝나고 출근을 한다. 어제 개학준비로 학교에 가서 동료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민원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도시학교보다 시골학교는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5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학생과도 잘 지내야 하는데 학부모는 더 큰 고민으로 보였다. 학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게 민원이 발생하지 않는데 중요해보였다. 학생에 대해 보이는 대로 말을 하면 불쾌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떤 자세로 학교로 돌아가야 할까.   복직을 앞두고 참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데 그 이유가 뭘까?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관계에서 갈등은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오직 완전무결하게 평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작은 갈등에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왜 사건이 발생하고 생기는 감정들을 가볍게 털어버리지 못할까. 감정들을 꽁꽁 싸매고 행여 흩어질까 재차 확인하고 묶어둔다. 산다는 것이 사건의 연속인데 다음 사건이 일어나면 앞서 묵혀둔 감정 위에 새로 생긴 감정을 덧씌운다. 점점 몸과 마음이 무거워져 천근만근이다. 그러다보면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오기를 날짜만 새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담임인 나조차도 학교를 즐겁게 다닐 수 없는데 아이들한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사건의 연속 속에서 가볍게, 즐겁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동의보감> 속에서 지금 나의 두려움을...
    복직과 두려움, 떨쳐낼 수 있을까?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리뷰       박정은       1.작은 갈등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   일주일 뒤에 5년간 휴직이 끝나고 출근을 한다. 어제 개학준비로 학교에 가서 동료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민원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도시학교보다 시골학교는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5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학생과도 잘 지내야 하는데 학부모는 더 큰 고민으로 보였다. 학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게 민원이 발생하지 않는데 중요해보였다. 학생에 대해 보이는 대로 말을 하면 불쾌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떤 자세로 학교로 돌아가야 할까.   복직을 앞두고 참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데 그 이유가 뭘까?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관계에서 갈등은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오직 완전무결하게 평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작은 갈등에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왜 사건이 발생하고 생기는 감정들을 가볍게 털어버리지 못할까. 감정들을 꽁꽁 싸매고 행여 흩어질까 재차 확인하고 묶어둔다. 산다는 것이 사건의 연속인데 다음 사건이 일어나면 앞서 묵혀둔 감정 위에 새로 생긴 감정을 덧씌운다. 점점 몸과 마음이 무거워져 천근만근이다. 그러다보면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오기를 날짜만 새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담임인 나조차도 학교를 즐겁게 다닐 수 없는데 아이들한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사건의 연속 속에서 가볍게, 즐겁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동의보감> 속에서 지금 나의 두려움을...
문탁 2023.09.11 조회 47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던 시골 벽지 동네에 자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매우 가난한 축이었다.  부모임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 모아 놓은 전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난 성인이 되어서도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될까 겁이 났다. 아버지와는 한번도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평소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소한 일에 윽박을 지르거나 술을 마시고 나면 자살하겠다고 농약병을 찾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프다고 하면 혼이 났기에 몸이 불편해도 눈치를 보며 숨겨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엔 게이라는 말조차 생경했고 성소수자라는 단어도 없었다. 얼마 전 한국 게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웃픈 농담이 기억난다.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걸 처음 인지했을 때 세상에 본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홍석천과 자신, 그 둘밖에 없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홍석천이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그가 일종의 아웃팅으로 동성애자로 알려진 게 서른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처럼 시골에서 자란 성소수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이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영화 <클로즈> 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벽을 조금씩 쌓았다. 최선을 다해 튼튼하게 쌓는 게 목표였다. 나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하기 전 자기 검열을 해야 했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나를 오픈했을 경우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을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기에 벽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자아가 벽장 안에 축소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 아버지, 이성애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 모두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두려움이란 감정 때문에 힘들었고 그 원인은 모두 잘못된 시대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내 괴로움의 원천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넘어서기에 너무 높다란 벽과 같은 것이었다.       약 이 년 전 두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양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많은 자유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자의식이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한국 인문학 공동체 강의가 온라인으로 열렸고 거기서 명리학의 기초적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사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민인권센터 2014. 8. 21       나는 천간은 계수(癸水)이고 지지는 해수(亥水)인 계해(癸亥) 일주이다. 거기다 동짓달에 태어났으니 차가운 얼음장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기운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월지 또한 자수(子水)이니 내 안은 온통 물기운으로 치성하다. 계해 일주는 성실함과 융통성을 무기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전진하는 타입이다. 해수는 역마의 기운을 품고 있어 해외로 나갈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나처럼 수렴의 기운이 강한 사주는 자의식과 망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과잉 해석을 하기 쉽고 사소한 것도 감추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려 하지 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 생명력을 발산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인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봄의 기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목(木)기운, 즉 식상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내 사주는 융통성, 꾸준함, 요령 등을 갖춘 반면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속을 알기 어렵다. 또 남들에게 음흉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펼쳐진 내 사주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의 내향성, 성실함, 말재주와 표현력의 빈곤, 자의식 과잉, 협소한 인간관계 등이 내 안에 내재해 있었다니. 거기다 역마의 기운은 미국으로의 이주에 일조를 했을려나. 사주를 해석하고 나서 내 팔의 잔털들이 쭈뼛 세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굳게 믿어왔던 두려움에 대한 해석이 틀리지는 않지만 협소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혀왔던 두려움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다섯 편의 글을 통해 내가 두려움을 대했던 방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좀더 큰 도시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했던 과정을 차근히 짚어보면서 나를 지배했던 두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글을 통해 두려움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탐구하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난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탈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던 시골 벽지 동네에 자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매우 가난한 축이었다.  부모임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 모아 놓은 전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난 성인이 되어서도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될까 겁이 났다. 아버지와는 한번도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평소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소한 일에 윽박을 지르거나 술을 마시고 나면 자살하겠다고 농약병을 찾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프다고 하면 혼이 났기에 몸이 불편해도 눈치를 보며 숨겨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엔 게이라는 말조차 생경했고 성소수자라는 단어도 없었다. 얼마 전 한국 게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웃픈 농담이 기억난다.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걸 처음 인지했을 때 세상에 본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홍석천과 자신, 그 둘밖에 없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홍석천이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그가 일종의 아웃팅으로 동성애자로 알려진 게 서른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처럼 시골에서 자란 성소수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이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영화 <클로즈> 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벽을 조금씩 쌓았다. 최선을 다해 튼튼하게 쌓는 게 목표였다. 나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하기 전 자기 검열을 해야 했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나를 오픈했을 경우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을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기에 벽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자아가 벽장 안에 축소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 아버지, 이성애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 모두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두려움이란 감정 때문에 힘들었고 그 원인은 모두 잘못된 시대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내 괴로움의 원천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넘어서기에 너무 높다란 벽과 같은 것이었다.       약 이 년 전 두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양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많은 자유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자의식이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한국 인문학 공동체 강의가 온라인으로 열렸고 거기서 명리학의 기초적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사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민인권센터 2014. 8. 21       나는 천간은 계수(癸水)이고 지지는 해수(亥水)인 계해(癸亥) 일주이다. 거기다 동짓달에 태어났으니 차가운 얼음장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기운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월지 또한 자수(子水)이니 내 안은 온통 물기운으로 치성하다. 계해 일주는 성실함과 융통성을 무기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전진하는 타입이다. 해수는 역마의 기운을 품고 있어 해외로 나갈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나처럼 수렴의 기운이 강한 사주는 자의식과 망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과잉 해석을 하기 쉽고 사소한 것도 감추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려 하지 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 생명력을 발산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인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봄의 기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목(木)기운, 즉 식상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내 사주는 융통성, 꾸준함, 요령 등을 갖춘 반면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속을 알기 어렵다. 또 남들에게 음흉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펼쳐진 내 사주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의 내향성, 성실함, 말재주와 표현력의 빈곤, 자의식 과잉, 협소한 인간관계 등이 내 안에 내재해 있었다니. 거기다 역마의 기운은 미국으로의 이주에 일조를 했을려나. 사주를 해석하고 나서 내 팔의 잔털들이 쭈뼛 세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굳게 믿어왔던 두려움에 대한 해석이 틀리지는 않지만 협소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혀왔던 두려움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다섯 편의 글을 통해 내가 두려움을 대했던 방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좀더 큰 도시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했던 과정을 차근히 짚어보면서 나를 지배했던 두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글을 통해 두려움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탐구하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난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탈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문탁 2023.09.08 조회 165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가마솥 2023.09.05 조회 183
인문약방 에세이
  그날 시는 내게 무슨 일을 한 걸까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남편과 함께하는 삶은 가윗날 두 개가 맞물려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상대와 함께 자르고 해체해 재구성했고 혼자였을 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에 더 ‘온전한’ 미래를 꿈꿨다. 그렇게 아이를 낳았다. 내게는 어떤 환상 같은 게 있었다. 아이 때문에 같이 산다는 말을 하는 많은 부부들과 우리 부부는 다를 거라는. 아이를 낳고 나서 환상이 허황된 자만임을 알았다. 물론 아이를 낳은 뒤에도 남편은 내게 어떤 반쪽 같은 존재였다. 아이가 중심인 세계에서 내가 밤이라면 남편은 낮인 느낌. 그와 함께해야 온전한 하루가 되는 느낌이기에 그는 여전히 소중했다. 그러나 남편은 같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곳에 가 버린 사람 같았다. 나만 어두운 곳에 남겨두고 자꾸 밝은 곳으로만 떠나려고 하는 느낌. 화가 났다가 외로웠다가 무시했다가 반성했다가 체념했다가,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밤의 세계에 그는 낮의 세계에 있다고 받아들이고는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자는 깨달음 같은 것을 얻은, 그렇게 밤의 세계의 머물며 별과 달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고 더 이상 낮의 세계가 신경 쓰이지 않거나 그 세계를 신경 쓰려하지 않게 된. 이런 상태의 요약이 아이 때문에 같이 사는 부부라면 우리는 아이 때문에 같이 산다. 그런데 아이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확신과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는 게 사랑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하는 추측과...
  그날 시는 내게 무슨 일을 한 걸까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남편과 함께하는 삶은 가윗날 두 개가 맞물려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상대와 함께 자르고 해체해 재구성했고 혼자였을 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에 더 ‘온전한’ 미래를 꿈꿨다. 그렇게 아이를 낳았다. 내게는 어떤 환상 같은 게 있었다. 아이 때문에 같이 산다는 말을 하는 많은 부부들과 우리 부부는 다를 거라는. 아이를 낳고 나서 환상이 허황된 자만임을 알았다. 물론 아이를 낳은 뒤에도 남편은 내게 어떤 반쪽 같은 존재였다. 아이가 중심인 세계에서 내가 밤이라면 남편은 낮인 느낌. 그와 함께해야 온전한 하루가 되는 느낌이기에 그는 여전히 소중했다. 그러나 남편은 같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곳에 가 버린 사람 같았다. 나만 어두운 곳에 남겨두고 자꾸 밝은 곳으로만 떠나려고 하는 느낌. 화가 났다가 외로웠다가 무시했다가 반성했다가 체념했다가,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밤의 세계에 그는 낮의 세계에 있다고 받아들이고는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자는 깨달음 같은 것을 얻은, 그렇게 밤의 세계의 머물며 별과 달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고 더 이상 낮의 세계가 신경 쓰이지 않거나 그 세계를 신경 쓰려하지 않게 된. 이런 상태의 요약이 아이 때문에 같이 사는 부부라면 우리는 아이 때문에 같이 산다. 그런데 아이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확신과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는 게 사랑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하는 추측과...
김현지 2023.09.05 조회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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