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노인 실업자, 복지 수혜자로 산다는 것

먼불빛
2023-02-2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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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그래서 나는 저항하기 위해 실업급여를 과감히 거부했다”라고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할까.

제도의 수혜자로 힘없는 ‘약자’로서의 하소연, 소심한 복수로 이 글을 쓴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주관적 

감정의 덩어리만 풀어놓았다. 그래서 이 글은 미완성이다. 언젠가 이 주제로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성찰과

깨달음의 글을 다시 쓰는 나를 기대해 본다.

 

 

정년퇴직 후 나는 백수가 되었다. 정년 백수. 백수가 되기 위한 필수 아이템, 백수 패션의 완성을 위해 나는 1+1 하는 저가 의류 매장에서 츄리닝 바지 2개와 맨투맨 티 2개를 샀다. 백수 패션은 바깥 생활에 요구되는 눈치와 예의 따위를 버리고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런 자유로운 백수로 좀 더 살고 싶었으나 정년 백수가 받을 수 있는 실업급여는 놓치기 아까운 혜택이었다. 정년퇴직도 비자발적 실업이므로 실업급여가 지급되는데, 퇴직한 날로부터 1년 이내 받지 않으면 모두 다 소멸하기 때문에 빨리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순간부터 매월 급여를 받기까지 제도는 내가 얼마나 비루하고 하찮은 인간인지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재취업이 전제된 조건부 급여의 성격은 자유로운 백수의 영혼이 아닌 비루한 ‘노인 실업자’가 되는 일이었다. 조건을 맞추기 위해 찾아본 일자리는 나의 취업 의지를 더 꺾었고, 실업급여는 나의 자존감을 더 깎았다.

 

마법의 돈-공공부조

 

실업급여는 고용보험 가입자가 비자발적 이유로 퇴사를 한 경우에 한 해 생계비 걱정 않고 재취업할 수 있도록 돕는 고용보험 제도로서 국가의 1차 사회안전망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보편복지가 아닌 선별적 복지이다. 조건이 붙는다. 대표적인 복지 프레임이 근로연계복지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슬로건 아래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그런 노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어떤 것도 지원할 수 없다는 기조다. 고용보험의 실업급여가 대표적이다. 우선 비자발적 실업자(해고, 계약만료, 질병, 원거리 이사 등)여야 하고, 고용보험 피보험 기간이 6개월 이상이어야 하며, 반드시 재취업을 전제로 한 구직활동 증빙을 제출해야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복지제도에 조건이 붙는다는 것은 그 복지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아닌 ‘시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을 전달하는 자의 막강한 권력관계 안으로 포섭되는 것임을 나는 실업급여를 받는 7개월의 경험을 통해 톡톡히 깨달았다. 잔혹 동화의 마법사 같다. ‘너 내 말 잘 들어야 떡 하나 줄 거야’ 마법사는 말한다. 실업급여 수급자는 떡을 받기 위해 기꺼이 마법에 걸려든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버려야 하는 마법. 나 역시 마법에 걸렸다.

 

 

 

 

 

투명 인간과 AI의 만남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모든 절차와 처리는 인터넷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교육을 빼고 맨 처음 1회와 4회차에는 직접 고용복지플러스센터로 방문해야 한다. 첫 번째 방문은 얼굴을 보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다 쳐도(그렇다고 해도 담당자와 나는 말을 섞을 일이 없었다), 두 번째 방문의 목적은 정말 다. 역시 담당자와 눈길도, 말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투명 인간이 된다. 모든 설명은 서류로 한다. 창구에 앉아 있는 시간은 단 몇 분도 안 된다. 그들은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며 클릭하거나 두드렸고, 나는 계속 그들이 말없이 내민 서류에 사인만 해댔다. 나만 그런가 싶어 주변에 물어보니 비슷한 반응이다. 아마도 ‘대면’이 주는 강압의 더 큰 효과를 노리는 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친절의 문제일까? 아니, 그런 문제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실업급여 제도를 실행하는 모든 과정은 법규와 규칙을 세세하게 해석해놓은 효율화된 매뉴얼에 따라 움직인다. 효율은 필수적으로 관료화를 부른다. 모든 사람은 매뉴얼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규격화된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그들의 관리 대상인 ‘복지 소비자’일 뿐이다. 말이 필요 없다는 건 관계 속에서 빚어질 예외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고,  예외란 매뉴얼에 따르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는 제재 조치 감이다. 창구에 앉아 있는 그들의 얼굴이 매뉴얼 책자처럼 보였다. 입력된 값에 따라 움직이는 AI 행정 관료들.

 

켄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가 절로 떠올랐다. 영국 실업 부조의 관료주의적 시스템, 인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자본주의 복지제도의 폐해를 생생하게 고발하는 영화다. 한 시민 다니엘 블레이크가 경직된 복지 제도 시스템하에서 어떻게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심장병에 걸려 질병 수당을 청구한 댄(다니엘 블레이크)에게 현실에 맞지도 않는 매뉴얼만 강압적으로 읊조리는 심사관, 수당이 끊기면 당장 끼니를 굶을 위기에 처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절차만 강조하는 고용센터 직원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급여를 타지 못하고 쫓겨나는 또 다른 실업자 케이티는 결국 생리대를 훔치고 성매매까지 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인터넷 신청을 할 줄 모르는 댄에게 친절했던 공무원은 상급자에게 불려가 잘못된 선례를 남긴다는 질타를 받는 모습도 나온다. 조금 과장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통제와 관리의 위계적 복지 시스템의 모습은 영국이나 여기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잠재적 범죄자가 되다

 

매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실업 인정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문제는 이 신청 과정 과정마다 부정수급 경고들과 다그치듯 확인하는 사항들을 반복적으로 거치다 보면 인내심의 한계가 온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이런 문구와 절차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사실 맨 처음 실업 신청 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방문할 때도 엄청나게 많은 곳에 사인을 했다. 부정수급하면 처벌받겠다. 재취업을 위해 노력하겠다, 허위 증빙 서류 제출 시 제재 조치에 응하겠다...등등. 그런데 같은 내용들이 매월 제출하는 인터넷 절차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강조 또 강조된다. 이쯤이면 실업급여 수급자는 잠재적 범죄자나, 도둑놈이며, ‘피의자’와 비슷한 신분이 된다. 복지 수혜자는 언제든 거짓말로 급여를 타낼 수 있다는 낙인을 찍는 것이다. 결국 그것을 꿀꺽 참고 삼키는 자에게 떡(실업급여)은 주어진다. 자존심은 개에게 줘버려야 한다.

 

실업급여 담당자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직업훈련도 나의 실업급여 담당자에게 사전 협의를 해야 한단다. 우선 내가 구직하고자 하는 직종과의 연관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으로 구직활동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전 협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참에 IT 자격증을 따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직업훈련도 구직활동으로 인정되므로 그에 해당하는 서류를 인터넷으로 제출했다. 그런데 전화를 걸어온 담당자의 목소리는 많이 격앙되어 있었다.

 

담당자. “선생님~ 지금 직업훈련 받고 계신 거예요? 이렇게 하시면 안 되세요. 사전에 의논하셨어야죠.”

나. 순간 당황 “...예에?..”

담당자. “이 자격증 과정 왜 따려고 하시는 거죠?”

나. 정신을 차리고 “아, 원래 할 줄은 아는데요. 자격증이 있으면 그걸 이력서에 표현할 수 있잖아요. 나이 60세니까 보통 문서나 행정 능력 없는 걸로 볼 확률이 높으니까요...”

 

나는 안절부절 구구한 설명을 했다. 그 순간 이번 달 실업급여를 못 받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담당자는 교육 시간과 일정을 꼼꼼히 따져 물으며 몇 가지 질문을 더 하더니 다행히 나긋해진 말투로 처리해 주겠다고 답변했다. 물론 다음부터 이러시면 안 된다는 당부를 잊지 않으면서.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런 상황에 화가 나거나, 항의할 생각보다는 ‘한 번만 봐주세요~! 몰랐어요...’하며 저자세로 읍소할 생각을 먼저 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노인 일자리의 저열함

 

실업 인정 절차(구직활동 증빙서류)가 급여를 타기 위한 요식 행위에 불과할지라도 재취업에 대한 은근한 심리적 압박이 안 될 수 없다. 그냥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 대충 만든 이력서를 한두 곳에 찔러 넣고 증빙만 뽑으면 될 일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내 이름이 들어 있는 이력서를 아무 곳에나 노출시키는 것도 께름칙했고, 이왕이면 취업도 하고 싶었다. 밤늦도록 일자리를 찾느라 이리저리 구직 사이트를 뒤지고 다녀 봤지만, 얻어지는 정보는 그저 긴 한숨만 토하게 할 뿐 이력서를 내밀 만한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익장의 준말), 고다자(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노인 노동자를 일컫는 말)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나는 저임금의 임시, 단순노무직 일자리들뿐이다. 대표적인 중장년 직업 포털 2곳의 채용정보를 눈으로 훑어본다.

 

 

0000빌 주상복합아파트 경비원 구인/12개월/1조 2교대 주 36시간/월급 190만 원,

000아파트 청소원 모집/6개월/주6일/168만 원,

00동요양보호사 모집/시간제 9:30~12:30(주 15시간)/시급 12,100원,

00동 신축 건물 미화원 모집/주6일(30시간)/근로계약12개월/월급 174만 원,

00어린이집 보조교사 월급 1,042,000원

.....................

 

 

어느 곳에도 시선을 오래 머물며 생각할  수가 없다. 우선 최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드물다. 또 내가 하던 일이 아니어서 엄두도 안 난다. 중장년이나 시니어를 겨냥한 일자리 정보는 어디든 기술 없이, 경력 없이 갈 수 있고, 언제라도 잘릴 각오로 가야 하는 그런 일자리 같았다. 청소나 경비직은 파견업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임계장 이야기>를 쓴 저자 조정진 작가가 왜 공기업 출신이면서도 임시직, 계약직으로 전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를 쓴 작가 고 이순자 씨도 생각났다.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62세부터 세탁공장 수건 접기, 백화점·건물 공사장·병원 청소, 어린이집 주방 업무, 가정집 아기 돌보미로 전전하다 요양보호사로 정착한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력서의 학력도 경력도 없애고 자존심 따윈 내려놓은 채 아무 일이나 주는 대로 하겠다고 굽혀야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는 그분의 증언은 지금 생계 앞에 서 있는 노인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내 이력서의 경력도 자격증도 모두 필요 없는 알량한 휴지 조각같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자격증을 따기 위해 분투하며 보냈던 시간이 안타깝고 씁쓸할 뿐이다. 대체 나는 어떤 일자리를 상상했던 것일까.

지자체 공공시설이나 기관 등에 파견되어 월 30시간 정도 일하는 정부 노인 일자리는 나같이 생계형 노인은 갈 수 없다. 그나마 연령대도 65세 이상이다. 60세부터 65세 미만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서비스나 시장형 일자리는 한정적일 뿐 아니라 근무 시간도 월 60시간 이내로 제한되어 있어 임금도 50만 원대에 불과하다. 정부 노인 일자리는 여전히 용돈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실업급여 수급 7개월째를 맞고 있는 내가 고용노동부의 의도대로라면 지금 막바지 재취업 의욕을 갈아 넣어야 할 때이다. 그런데 나는 점점 더 취업을 기피하고 싶어진다. ‘근로의욕’이 사라진다. 진짜 복지라고 주장하는 ‘일자리의 질’은 나몰라라 놔둔 채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소 탓만 한다. 내가 겪은 실업부조 제도의 결론이다. 영화 <인턴>에서 멋진 시니어 인턴으로 자신의 경험을 발휘하는 지혜로운 로버트 드니로는 환상이다. 덕분에 노인 일자리에 대한 나의 환상은 완전히 깨졌다. 그렇다고 해도 생계형 노인인 내가 일하기 위해서 고 이순자 씨처럼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실업 급여의 목표인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댓글 8
  • 2023-02-27 09:21

    당연히 받아야 할 걸 받는데, 시혜를 받는 듯한 느낌, 엄청난 감정의 소모를 요구하는 먼불빛 실업급여 분투기를 읽자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프랑스에서 정년연장법안이 올라왔을 때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연대하여 반대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그때 저는 그 기사를 보고 '정년연장'이 보편복지의 확대 대신 각자 알아서 일해서 먹고 살라고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실업급여에 이어, 초고령화 사회에서의 정년과 연금, 노인의 생계와 일자리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 2023-02-27 13:27

    정말 세상은 요지경이네요. 문제는 우리가 요지경 속 등장인물이라는 것 ㅠㅠ
    먼불빛님 글 읽으니 예전 기억도 되살아나고 .. 그렇네요.. 감사해요

  • 2023-02-27 14:17

    백수 선배님 먼불빛님께 ‘슬기로운 백수생활’을 여쭸었는데… 먼불빛님 글을 읽으며 결코 슬기로울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을 미리 엿볼 수 있었습니다ㅜ 글 감사드려요. 그리고 다시 쓰실 글을 기대합니다.

  • 2023-02-27 14:29

    10여년 전 실업급여 받던 때가 떠오르네요
    그때는 아직 젊어서 그렇게 분노가 일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는 좀 더 느슨했던 것 같고 이렇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도 같고요
    점점 실업이 많아지고 실업급여자가 많아져서 더 심해지나 보네요
    어쨌거나 신자유주의 이후 '복지'와 관련된 것들이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아요
    먼불빛님, 응원해요~

  • 2023-02-27 20:59

    샘 말대로 정말 ‘잠재적 범죄자’ 취급이군요!
    속이 쓰립니다 정말!
    예전에 대관업무할 때 공무원들한테 굽신거리던 생각도 나구요.
    실업급여는 권리인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지….

  • 2023-02-27 21:40

    요즘 이직전에 실업급여 받고 쉴려고 하는 직장동료들이 받아서 그져 쉴 수 있는 기회 정도로 좋게 생각했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네요ㅠ
    쉽지않은 일이였군요ㅠ
    먼불빛님 응원합니다~!!

  • 2023-02-27 21:42

    먼불빛님 글 읽으며, 샘 글에 소개된 <예순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를 일욜엔양생팀과 읽으며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녹록치는 않지만, 계속 힘내는 방법으로 글쓰기가 의지가 되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 2023-02-28 19:09

    잠재적 땡땡 취급하고 ‘임계장’, ‘고다자’로 여기는 현실이 복지 시스템의 민낯이네요ㅠ 먼불빛님 앞으로의 글도 응원합니다!

('로봇이 아닙니다' 체크 필수)
먼불빛의 웰컴 투 60
*맘마 미아(Mamma mia)는 이탈리아어로 놀라움이나, 괴로움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세상에, 맙소사!", 직역하면 "우리 엄마"다.(엄마는 성모마리아를 의미)/위키백과, 나무위키 참조     지난 2월 나는 딸의 결혼식을 치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결혼보다 더 낯설고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딸의 결혼이었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결혼에 ‘축하한다’는 말보다 ‘반댈세’라는 말을 먼저 던졌던 사람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너무나 불리했고, 그런 이유로 나도 이혼했으며, 좌우지간 남녀를 떠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혼’에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필수’였던 결혼이 요즘 세대에겐 ‘선택’이 되었다(억울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3포, 5포 세대(삼포:연애, 결혼, 출산/오포:삼포+취업, 주택을 포기)’처럼 ‘포기’를 하기도 하지만, 자발적 비혼과 동거족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은 삶이 아닌 자기만의 삶을 다양하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라는 오래된 전통에 대한 저항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명절 금기어로까지 등장할까. 여하튼 그래서 내 딸만은 좀 다른 선택,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다. 이혼 후 단출한 2인 가족이 늘 외로움과 결핍의 근원이었던 딸은 전형적인 가족주의 안에서 자신의 결핍감을 채우고자 했다. 내가 다르게 살지 못했는데 딸에게 다른 삶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결혼은 반대’라는 말과는 달리 나는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어야만 했다.     “돈만 주고 가~”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가 다 그렇지 않을까?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책...
*맘마 미아(Mamma mia)는 이탈리아어로 놀라움이나, 괴로움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세상에, 맙소사!", 직역하면 "우리 엄마"다.(엄마는 성모마리아를 의미)/위키백과, 나무위키 참조     지난 2월 나는 딸의 결혼식을 치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결혼보다 더 낯설고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딸의 결혼이었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결혼에 ‘축하한다’는 말보다 ‘반댈세’라는 말을 먼저 던졌던 사람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너무나 불리했고, 그런 이유로 나도 이혼했으며, 좌우지간 남녀를 떠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혼’에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필수’였던 결혼이 요즘 세대에겐 ‘선택’이 되었다(억울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3포, 5포 세대(삼포:연애, 결혼, 출산/오포:삼포+취업, 주택을 포기)’처럼 ‘포기’를 하기도 하지만, 자발적 비혼과 동거족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은 삶이 아닌 자기만의 삶을 다양하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라는 오래된 전통에 대한 저항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명절 금기어로까지 등장할까. 여하튼 그래서 내 딸만은 좀 다른 선택,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다. 이혼 후 단출한 2인 가족이 늘 외로움과 결핍의 근원이었던 딸은 전형적인 가족주의 안에서 자신의 결핍감을 채우고자 했다. 내가 다르게 살지 못했는데 딸에게 다른 삶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결혼은 반대’라는 말과는 달리 나는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어야만 했다.     “돈만 주고 가~”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가 다 그렇지 않을까?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책...
먼불빛 2023.03.27 조회 296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나의 사업장이 넓혀졌다    몇 년 전에 사 놓고 나 혼자 가끔씩 튕겨보던 기타는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다. 헌데, 동천동 예술 플랫폼 꿈지락(꼼지락이 아님!)에 기타 강습이 생겼다. 제대로 한번 배우고 싶었는데, 아주 잘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치던 ‘로망스’로 시작했다. 어느 강습 날 저녁, 연습실 앞 복도가 난리가 났다. 어디에서 물이 새는 것인지, 복도에서 물이 넘쳐 계단을 따라서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다. 추운 날이긴 하였지만 계량기 동파(凍破)는 아니었다. 물이 새는 곳을 살펴보았다. 전기온수기를 쓰고 있었는데, 냉수 파이프를 온수기에 연결하여 물을 데워 사용하고 있었고, 온수 파이프는 그냥 잘려진 채로 있었다. 그 곳에서 물이 펑펑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랍쇼? 온수 파이프를 왜 이렇게 방치했지? 꿈지락 회원인 바람님이 내일 아침에 주인에게 전화해서 해결하겠다고 해도, 내게는 이미 기타 연습보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이 더 재미있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일단 계량기를 잠그고 여기 저기 조사를 하며 해결방법을 강구한다. 잘려진 온수 파이프밖에 다른 원인이 없다. 그런데 가만, 이것이 원인이라면 왜 지금에서야 그곳에서 물이 새는 것이지? 음...... 두께...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나의 사업장이 넓혀졌다    몇 년 전에 사 놓고 나 혼자 가끔씩 튕겨보던 기타는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다. 헌데, 동천동 예술 플랫폼 꿈지락(꼼지락이 아님!)에 기타 강습이 생겼다. 제대로 한번 배우고 싶었는데, 아주 잘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치던 ‘로망스’로 시작했다. 어느 강습 날 저녁, 연습실 앞 복도가 난리가 났다. 어디에서 물이 새는 것인지, 복도에서 물이 넘쳐 계단을 따라서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다. 추운 날이긴 하였지만 계량기 동파(凍破)는 아니었다. 물이 새는 곳을 살펴보았다. 전기온수기를 쓰고 있었는데, 냉수 파이프를 온수기에 연결하여 물을 데워 사용하고 있었고, 온수 파이프는 그냥 잘려진 채로 있었다. 그 곳에서 물이 펑펑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랍쇼? 온수 파이프를 왜 이렇게 방치했지? 꿈지락 회원인 바람님이 내일 아침에 주인에게 전화해서 해결하겠다고 해도, 내게는 이미 기타 연습보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이 더 재미있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일단 계량기를 잠그고 여기 저기 조사를 하며 해결방법을 강구한다. 잘려진 온수 파이프밖에 다른 원인이 없다. 그런데 가만, 이것이 원인이라면 왜 지금에서야 그곳에서 물이 새는 것이지? 음...... 두께...
가마솥 2023.03.11 조회 249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그래서 나는 저항하기 위해 실업급여를 과감히 거부했다”라고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할까. 제도의 수혜자로 힘없는 ‘약자’로서의 하소연, 소심한 복수로 이 글을 쓴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주관적  감정의 덩어리만 풀어놓았다. 그래서 이 글은 미완성이다. 언젠가 이 주제로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성찰과 깨달음의 글을 다시 쓰는 나를 기대해 본다.     정년퇴직 후 나는 백수가 되었다. 정년 백수. 백수가 되기 위한 필수 아이템, 백수 패션의 완성을 위해 나는 1+1 하는 저가 의류 매장에서 츄리닝 바지 2개와 맨투맨 티 2개를 샀다. 백수 패션은 바깥 생활에 요구되는 눈치와 예의 따위를 버리고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런 자유로운 백수로 좀 더 살고 싶었으나 정년 백수가 받을 수 있는 실업급여는 놓치기 아까운 혜택이었다. 정년퇴직도 비자발적 실업이므로 실업급여가 지급되는데, 퇴직한 날로부터 1년 이내 받지 않으면 모두 다 소멸하기 때문에 빨리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순간부터 매월 급여를 받기까지 제도는 내가 얼마나 비루하고 하찮은 인간인지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재취업이 전제된 조건부 급여의 성격은 자유로운 백수의 영혼이 아닌 비루한 ‘노인 실업자’가 되는 일이었다. 조건을 맞추기 위해 찾아본 일자리는 나의 취업 의지를 더 꺾었고, 실업급여는...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그래서 나는 저항하기 위해 실업급여를 과감히 거부했다”라고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할까. 제도의 수혜자로 힘없는 ‘약자’로서의 하소연, 소심한 복수로 이 글을 쓴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주관적  감정의 덩어리만 풀어놓았다. 그래서 이 글은 미완성이다. 언젠가 이 주제로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성찰과 깨달음의 글을 다시 쓰는 나를 기대해 본다.     정년퇴직 후 나는 백수가 되었다. 정년 백수. 백수가 되기 위한 필수 아이템, 백수 패션의 완성을 위해 나는 1+1 하는 저가 의류 매장에서 츄리닝 바지 2개와 맨투맨 티 2개를 샀다. 백수 패션은 바깥 생활에 요구되는 눈치와 예의 따위를 버리고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런 자유로운 백수로 좀 더 살고 싶었으나 정년 백수가 받을 수 있는 실업급여는 놓치기 아까운 혜택이었다. 정년퇴직도 비자발적 실업이므로 실업급여가 지급되는데, 퇴직한 날로부터 1년 이내 받지 않으면 모두 다 소멸하기 때문에 빨리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순간부터 매월 급여를 받기까지 제도는 내가 얼마나 비루하고 하찮은 인간인지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재취업이 전제된 조건부 급여의 성격은 자유로운 백수의 영혼이 아닌 비루한 ‘노인 실업자’가 되는 일이었다. 조건을 맞추기 위해 찾아본 일자리는 나의 취업 의지를 더 꺾었고, 실업급여는...
먼불빛 2023.02.27 조회 294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외워야 하느니라   문탁에서 10년을 공부하고 있는 마눌님이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논어(論語) 책(?)을 시도 때도 없이 외운다. 특히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있을 때에는 거의 백퍼센트다. 방금 읽었던 앞 페이지도 다시 봐야 할 때가 빈번한 이 나이에 논어를 통째로 외운다고 시도하니, 무섭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다. 사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먼저 그의 말을 이해하고 나의 말로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외우는 것일 게다. 나도 함 해볼까?   문탁 홈페이지를 열어 꼼꼼히 살펴보았다. 공부하는 방식이 크게 보아서 선생님이 하는 강의가 있고, 참가자들끼리 하는 세미나가 있다. 일단 발제없이 듣기를 잘하면 되는 논어 후반부 강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공부도 쉽지 않다. 학교 다닐 때처럼 기록하고 정리하여야 따라 갈수 있었다. 외운 것을 까먹어 헷갈리는 상황에서도 ‘그렇지!’하는 문장을 발견하는 재미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강의를 들었다.   반장님이 강의 마지막 날 행사에 대해서 말한다. 다른 강의들은 에세이를 쓰지만 이번 강의에서는 논어 ‘낭송(朗誦)’을 하겠단다. 다만, 책을 보고 읽는 게 아니고 암송(暗誦)하는 것이란다. 나도 외워 본다. 첫 페이지, 논어 학이(學而), 제...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외워야 하느니라   문탁에서 10년을 공부하고 있는 마눌님이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논어(論語) 책(?)을 시도 때도 없이 외운다. 특히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있을 때에는 거의 백퍼센트다. 방금 읽었던 앞 페이지도 다시 봐야 할 때가 빈번한 이 나이에 논어를 통째로 외운다고 시도하니, 무섭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다. 사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먼저 그의 말을 이해하고 나의 말로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외우는 것일 게다. 나도 함 해볼까?   문탁 홈페이지를 열어 꼼꼼히 살펴보았다. 공부하는 방식이 크게 보아서 선생님이 하는 강의가 있고, 참가자들끼리 하는 세미나가 있다. 일단 발제없이 듣기를 잘하면 되는 논어 후반부 강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공부도 쉽지 않다. 학교 다닐 때처럼 기록하고 정리하여야 따라 갈수 있었다. 외운 것을 까먹어 헷갈리는 상황에서도 ‘그렇지!’하는 문장을 발견하는 재미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강의를 들었다.   반장님이 강의 마지막 날 행사에 대해서 말한다. 다른 강의들은 에세이를 쓰지만 이번 강의에서는 논어 ‘낭송(朗誦)’을 하겠단다. 다만, 책을 보고 읽는 게 아니고 암송(暗誦)하는 것이란다. 나도 외워 본다. 첫 페이지, 논어 학이(學而), 제...
가마솥 2023.02.19 조회 292
나이듦에 관한 리뷰
어른,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그랜토리노>(2009,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글에는 두 개의 영화가 등장하는데 둘 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1. 왜 내 눈엔 할머니들만 보이는 걸까?   87세에 한글을 깨쳐 “먹고 싶은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갈 때 대가 곱게 잘 가는 게 꿈이다.”라는 시를 쓴 칠곡의 박금분 할머니가 94세를 일기로 얼마 전 돌아가셨다. 신문 기사를 보니 당신 시처럼, 당신 바람처럼 가신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박 할머니 기사를 찾아 읽다가 소위 ‘권안자체’ ‘추유을체’ ‘이종희체’ ‘김영분체’ ‘이원순체’ 등 칠곡할매체의 주인공들의 짧은 글도 읽게 되었다. 폰트 개발을 위해 4개월 동안 한 명당 2,000장의 종이를 사용했다는 할머니들의 글씨는, 내용도 폰트도 따뜻하고 정감이 넘쳤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의 저자인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도 비슷했다. 거기에도 할머니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진솔하고 유머러스하게 펼쳐지고 있다. 할머니들의 삶에는 그 험난한 생애 여정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뭔가가 있다. 노년 구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야기청’의 구술작가 ‘육끼’ 역시 주름진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편안해지며, 그 주름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아카이브 같다고 말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들의 얼굴은 묘하게 아름답다. 웃을 때마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그 주름들은 길게 이어진 밭의 이랑과 고랑을 연상시킨다...나는 밭의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내는 굴곡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머니들의 주름을 볼 때도 비슷한 안도감을 느낀다. 밭의 이랑 고랑도, 할머니들의 주름도 아주 평범하지만 들을수록 찰지고 구성진 이야기를...
어른,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그랜토리노>(2009,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글에는 두 개의 영화가 등장하는데 둘 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1. 왜 내 눈엔 할머니들만 보이는 걸까?   87세에 한글을 깨쳐 “먹고 싶은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갈 때 대가 곱게 잘 가는 게 꿈이다.”라는 시를 쓴 칠곡의 박금분 할머니가 94세를 일기로 얼마 전 돌아가셨다. 신문 기사를 보니 당신 시처럼, 당신 바람처럼 가신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박 할머니 기사를 찾아 읽다가 소위 ‘권안자체’ ‘추유을체’ ‘이종희체’ ‘김영분체’ ‘이원순체’ 등 칠곡할매체의 주인공들의 짧은 글도 읽게 되었다. 폰트 개발을 위해 4개월 동안 한 명당 2,000장의 종이를 사용했다는 할머니들의 글씨는, 내용도 폰트도 따뜻하고 정감이 넘쳤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의 저자인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도 비슷했다. 거기에도 할머니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진솔하고 유머러스하게 펼쳐지고 있다. 할머니들의 삶에는 그 험난한 생애 여정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뭔가가 있다. 노년 구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야기청’의 구술작가 ‘육끼’ 역시 주름진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편안해지며, 그 주름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아카이브 같다고 말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들의 얼굴은 묘하게 아름답다. 웃을 때마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그 주름들은 길게 이어진 밭의 이랑과 고랑을 연상시킨다...나는 밭의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내는 굴곡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머니들의 주름을 볼 때도 비슷한 안도감을 느낀다. 밭의 이랑 고랑도, 할머니들의 주름도 아주 평범하지만 들을수록 찰지고 구성진 이야기를...
문탁 2023.02.15 조회 301
겸목의 문학처방전
  무사(無事),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 -위암에 황정은의 에세이집『일기』를 처방합니다     황정은을 좋아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無事)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 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황정은, 『일기』, 창비, 2022년, 41쪽)   황정은의 에세이집 『일기』는 작고 예쁘다. 친구에게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니 친구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으로 택배를 보냈다. 그런데 읽다보니 좋은 선물이었는지 불안해진다. 나에게는 불편하게 읽히는 책을 친구는 어떻게 읽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질책으로 다가오는 황정은의 말들을 친구는 어떻게 독해하고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걱정으로 나는 황정은의 『일기』를 여러 번 읽었다. 여러 번 읽으며 든 생각은, 내가 힘들게 읽은 만큼 황정은 또한 힘들게 썼겠구나 하는, 이상한 동질감이다. 독자가 작가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나도 힘들게 읽고 그도 힘들게 썼으니 피장파장이라는 느낌이다.   무엇이 읽기에 힘들었을까? ‘징그럽다’는 그의 생생한 감정이다. 나의 무사(無事)함이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라는 것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무한 경쟁과 탐욕의 시대, 무사하고 무탈함을 바라는 것은 욕망의 기본값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날은 ‘보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결코 보통의 대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다. 무사한 보통의 삶은 많은 비용을 치룰 수 있어야 가능하고, 무사하지...
  무사(無事),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 -위암에 황정은의 에세이집『일기』를 처방합니다     황정은을 좋아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無事)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 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황정은, 『일기』, 창비, 2022년, 41쪽)   황정은의 에세이집 『일기』는 작고 예쁘다. 친구에게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니 친구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으로 택배를 보냈다. 그런데 읽다보니 좋은 선물이었는지 불안해진다. 나에게는 불편하게 읽히는 책을 친구는 어떻게 읽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질책으로 다가오는 황정은의 말들을 친구는 어떻게 독해하고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걱정으로 나는 황정은의 『일기』를 여러 번 읽었다. 여러 번 읽으며 든 생각은, 내가 힘들게 읽은 만큼 황정은 또한 힘들게 썼겠구나 하는, 이상한 동질감이다. 독자가 작가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나도 힘들게 읽고 그도 힘들게 썼으니 피장파장이라는 느낌이다.   무엇이 읽기에 힘들었을까? ‘징그럽다’는 그의 생생한 감정이다. 나의 무사(無事)함이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라는 것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무한 경쟁과 탐욕의 시대, 무사하고 무탈함을 바라는 것은 욕망의 기본값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날은 ‘보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결코 보통의 대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다. 무사한 보통의 삶은 많은 비용을 치룰 수 있어야 가능하고, 무사하지...
겸목 2023.02.03 조회 357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나의 60세는 정년퇴직으로 시작되었다. 나이 첫 자리의 5가 6으로 바뀐다는 건 남다른 차이를 느끼게 한다. ‘젊다’에서 ‘늙다’의 경계로 넘어서는 일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전환기 일 수밖에 없다. 나이 60에 정년퇴직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지만 사는 게 바빠 아무 준비 없이 덜컥 맞은 나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 설상가상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아무리 준비 없이 맞았다 해도 고민이 없었겠는가? 대책이랄 게 없었으므로 계획적 노력은 하지 못했지만 60세, 정년퇴직, 수입 끝, 노후 30년 시작, 그 단어의 무게감은 나를 충분히 짓누르고도 남았다. 내가 정년퇴직을 한 건 2022년 6월이다. 그러나 나의 정년퇴직 이야기는 지금(2023년 1월)으로부터 약 2년 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묻지 마, 노후 계획!      ‘은퇴 후 30년 노후 자금 10억’이란 말을 액면가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억~ 소리가 날 만큼 두려움을 주기는 충분했다. 이제 내년이면 정년퇴직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벌어놓은 돈은 없고, 태생이 흙수저인 내게 60줄 나이에 들어선다는 것은 마주하기 싫은 미래였고, 백 세 시대 재앙의 서막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던 월급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목덜미에 뜨거운 다리미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노후 준비를 경제적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마세요~’...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나의 60세는 정년퇴직으로 시작되었다. 나이 첫 자리의 5가 6으로 바뀐다는 건 남다른 차이를 느끼게 한다. ‘젊다’에서 ‘늙다’의 경계로 넘어서는 일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전환기 일 수밖에 없다. 나이 60에 정년퇴직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지만 사는 게 바빠 아무 준비 없이 덜컥 맞은 나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 설상가상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아무리 준비 없이 맞았다 해도 고민이 없었겠는가? 대책이랄 게 없었으므로 계획적 노력은 하지 못했지만 60세, 정년퇴직, 수입 끝, 노후 30년 시작, 그 단어의 무게감은 나를 충분히 짓누르고도 남았다. 내가 정년퇴직을 한 건 2022년 6월이다. 그러나 나의 정년퇴직 이야기는 지금(2023년 1월)으로부터 약 2년 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묻지 마, 노후 계획!      ‘은퇴 후 30년 노후 자금 10억’이란 말을 액면가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억~ 소리가 날 만큼 두려움을 주기는 충분했다. 이제 내년이면 정년퇴직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벌어놓은 돈은 없고, 태생이 흙수저인 내게 60줄 나이에 들어선다는 것은 마주하기 싫은 미래였고, 백 세 시대 재앙의 서막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던 월급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목덜미에 뜨거운 다리미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노후 준비를 경제적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마세요~’...
먼불빛 2023.01.30 조회 310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두번째 은퇴    중소기업 연합회 회장이 “내일 저녁 시간을 비워 달라“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략 예상이 된다. 올해, 2020년. 호적나이로 만 60세이다. 이 곳은 경기도와 산업자원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수탁기관이다. 센터장은 그들의 인사권(?)으로 지명 받은 사람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다. 나도 그랬다. 인사철인데, 자기가 추천했노라고 생색내며 전화하는 놈들이 없다. 연임은 물 건너 간 것이다. 담당 후배에게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시쳇말로 ‘가오’ 빠지는 것, 조용히 내가 정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랫배에서 무언가가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이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서 들어야 해? 이 놈들이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거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동지는 어디 가고!’ 등등. 워워워...... 진정하자, 진정해. 예우하며 직접 듣는다고 바뀔 것인가? 어떻게 통지하든, 어떤 이유로든, 계약해지는 누구나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며칠 전 한차례 책상을 가볍게 하였으니 별것 없지만, 마지막으로 컴퓨터 파일들을 정리하고 서랍을 정리했다. A4용지 박스 하나로 충분했다. 시원 섭섭. 딱 그런 기분이다. 돈 버는 일에 내 시간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니 “야호! 이제야 해방이다!”...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두번째 은퇴    중소기업 연합회 회장이 “내일 저녁 시간을 비워 달라“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략 예상이 된다. 올해, 2020년. 호적나이로 만 60세이다. 이 곳은 경기도와 산업자원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수탁기관이다. 센터장은 그들의 인사권(?)으로 지명 받은 사람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다. 나도 그랬다. 인사철인데, 자기가 추천했노라고 생색내며 전화하는 놈들이 없다. 연임은 물 건너 간 것이다. 담당 후배에게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시쳇말로 ‘가오’ 빠지는 것, 조용히 내가 정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랫배에서 무언가가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이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서 들어야 해? 이 놈들이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거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동지는 어디 가고!’ 등등. 워워워...... 진정하자, 진정해. 예우하며 직접 듣는다고 바뀔 것인가? 어떻게 통지하든, 어떤 이유로든, 계약해지는 누구나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며칠 전 한차례 책상을 가볍게 하였으니 별것 없지만, 마지막으로 컴퓨터 파일들을 정리하고 서랍을 정리했다. A4용지 박스 하나로 충분했다. 시원 섭섭. 딱 그런 기분이다. 돈 버는 일에 내 시간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니 “야호! 이제야 해방이다!”...
가마솥 2023.01.16 조회 369
나이듦에 관한 리뷰
만국의 늙은이여, make kin, not babies!!           1. 내가 늙으면 누가 나를 돌봐주지?   한 5년 전쯤인가? 그러니까 어머니를 돌본 지 3년 정도 되던 어느 날이었는데 떨어져 사는 아이 둘과 간만에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독박돌봄의 고단함을 한도 끝도 없이 펼쳐놓았고 그 끝에 “내가 늙으면 도대체 누가 나를 돌보지?”라는 질문을 꺼내놨다. 그러면서 딸에게 모계 돌봄의 전통^^을 이어받으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딸은 이런 저런 저항을 시도했지만 결국 굴복, 내가 딸을 20년 키워준 만큼 이후 최소 20년은 나를 돌봐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옆에서 우리 둘의 ‘티키타카’를 지켜보며 낄낄거리던 아들 녀석은 그것을 ‘9.15 OO 효녀 선언’이라 이름 붙였다. “자식에게 아첨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후는 부탁할 셈이다”(우에노 치즈코,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p57) 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그렇게 한 셈이었다.   어머니와 살기 전까지는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노년에 대해서도, 나이듦 일반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저질 체력이긴 했지만 특별한 지병은 없었고, 맏딸 프리미엄으로 다른 사람 눈치를 별로 안 보면서 컸기 때문에 나는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나에게 약간 예외적인 케이스, 즉 본투비 의존적인 성격에 사별 트라우마로 인한 일종의 신경병까지 덧붙여져 끊임없이 누군가 돌봐줘야 하는, 그런 손이 많이 가는 별종일 뿐이었다.   그런데, 요 몇 년...
만국의 늙은이여, make kin, not babies!!           1. 내가 늙으면 누가 나를 돌봐주지?   한 5년 전쯤인가? 그러니까 어머니를 돌본 지 3년 정도 되던 어느 날이었는데 떨어져 사는 아이 둘과 간만에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독박돌봄의 고단함을 한도 끝도 없이 펼쳐놓았고 그 끝에 “내가 늙으면 도대체 누가 나를 돌보지?”라는 질문을 꺼내놨다. 그러면서 딸에게 모계 돌봄의 전통^^을 이어받으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딸은 이런 저런 저항을 시도했지만 결국 굴복, 내가 딸을 20년 키워준 만큼 이후 최소 20년은 나를 돌봐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옆에서 우리 둘의 ‘티키타카’를 지켜보며 낄낄거리던 아들 녀석은 그것을 ‘9.15 OO 효녀 선언’이라 이름 붙였다. “자식에게 아첨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후는 부탁할 셈이다”(우에노 치즈코,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p57) 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그렇게 한 셈이었다.   어머니와 살기 전까지는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노년에 대해서도, 나이듦 일반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저질 체력이긴 했지만 특별한 지병은 없었고, 맏딸 프리미엄으로 다른 사람 눈치를 별로 안 보면서 컸기 때문에 나는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나에게 약간 예외적인 케이스, 즉 본투비 의존적인 성격에 사별 트라우마로 인한 일종의 신경병까지 덧붙여져 끊임없이 누군가 돌봐줘야 하는, 그런 손이 많이 가는 별종일 뿐이었다.   그런데, 요 몇 년...
문탁 2023.01.03 조회 779
겸목의 문학처방전
‘월간 부끄러움’ -이석증에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한 사람을 위한 마음』, 문학동네, 2019년)을 처방합니다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나는 단지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고, 그러나 그후의 삶이 두려워 자주 울었다. 그런 나의 매일에 대한 말들은 할 수 없다기보다는 하면 안 되는 것에 가까웠다. 언젠가 결국엔 ‘그만하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였다. 그즈음엔 내가 몇 년 전, 오래 알고 지낸 후배에게 들은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는 말을 자주 복기했다. 쉽게 뱉은 말이었을까, 어렵게 꺼낸 말이었을까, 비아냥댄 걸까, 내게 상처를 받았던 걸까. 그러니까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거의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거나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 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얼마 전 그 후배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59쪽)   H가 직장을 그만둘 때의 심정은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의 주인공과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퇴사에는 공통된 감정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 속 주인공은 “다 싫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두세 달만 쉬고 싶었는데 아예 그만두지 않는 한, 두세 달을 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외곽에 있는 엄마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고 했던 후배의 말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미안해,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입에...
‘월간 부끄러움’ -이석증에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한 사람을 위한 마음』, 문학동네, 2019년)을 처방합니다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나는 단지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고, 그러나 그후의 삶이 두려워 자주 울었다. 그런 나의 매일에 대한 말들은 할 수 없다기보다는 하면 안 되는 것에 가까웠다. 언젠가 결국엔 ‘그만하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였다. 그즈음엔 내가 몇 년 전, 오래 알고 지낸 후배에게 들은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는 말을 자주 복기했다. 쉽게 뱉은 말이었을까, 어렵게 꺼낸 말이었을까, 비아냥댄 걸까, 내게 상처를 받았던 걸까. 그러니까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거의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거나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 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얼마 전 그 후배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59쪽)   H가 직장을 그만둘 때의 심정은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의 주인공과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퇴사에는 공통된 감정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 속 주인공은 “다 싫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두세 달만 쉬고 싶었는데 아예 그만두지 않는 한, 두세 달을 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외곽에 있는 엄마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고 했던 후배의 말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미안해,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입에...
겸목 2022.10.24 조회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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