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로 되돌아가다 / 모퉁이
수치로 되돌아가다
모퉁이
나는 사실 그 사람들과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227쪽)
나의 부모는 18세에 나를 낳았다. 나는 실수로 태어난 미운 오리 새끼였다. 아주 어려서부터도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서 우아하게 저들을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삼십 년도 더 걸렸다. 어려서 이미 그들이 얼마나 철없고 부모 역할에 부적합한지를 알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그들의 무지와 폭력으로부터 나와 동생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서른이 될 때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그들의 대책 없는 생활을 뒤치다꺼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혼을 하는 내가 수치스럽다고 했고(본인들도 이혼했다.) 아이를 줘버리라고 너무도 쉽게 충고했다. 그제야 그들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를 알게 됐고, 그 길로 그들을 떠나서 가족과 단절했다. 그렇게 폭력과 무지, 염치가 없고 수치도 모르는 그들을 경멸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내가 선택한 삶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모든 게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책감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나를 둘러싼 작은 사회에는 나처럼 단절 혹은 탈주를 감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에게 나는 별종이거나 독한 사람일 뿐. 그래서일까 염치가 없고, 수치를 모르는 그들을 정말 오랜 시간의 망설임과 주저함 끝에 힘겹게 떠나왔지만, 설거지를 하고, 운전을 하고, 샤워를 하는 동안 그들과 매일 무수히 맞닥뜨렸다. 그들은 맏딸로서 책임감을 저버린 나를 비난했고, 혼자만 살겠다고 뛰쳐나갔다면서 힐난했다. 내가 그들을 떠나서 얻어낸 평안함과 여유 뒤에는 항상 죄책감과 수치심이 결합한 유령들이 어슬렁거렸다. 마치 박노해의 『건너뛴 삶』이라는 시 속에서 버리고 떠난 핏덩이가 돌아와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선 것처럼 그들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작년 봄. 불현듯 그들이 사라졌음을 알게 됐다. 그들은 내 수치의 원천이었기에 나는 분명 그들만 사라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런데 몇 달째 그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삶은 별반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이 그런대로 흘러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허둥대면서 머릿속을 헤집고 그들을 마구 찾아다녔다. 그들은 없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그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 결국 그들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그들이 나를 비난한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변명하느라 삶의 많은 시간을 허비해왔다.
그렇게 한심함과 수치스러움의 화살이 이제 나 자신에게 내리꽂혔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다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만났다. 두려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물었다. ‘도대체 왜 되돌아가지? 제발 화해라는 아름다운 결말로 끝맺지는 말아줘. 그럼 내가 너무 외로울 거야.’ 나는 이해받고 싶었다. 이 책을 통해서라도 내가 한 선택들과 나를 만들어낸 방식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디디에 에리봉은 심리학적 접근을 벗어던지고 사회학적 접근방식을 통해 냉철하게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간다고 했으니 어쩌면 나에게 길을 열어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마저 되돌아가서 화해하기를 선택한다면, 나는 이대로 홀로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설 곳을 잃은 채 더 깊이 오래 방황하게 될 것만 같아서 너무 두려웠다. 그러나 그는 모욕과 수치로부터 탈주했고, 수행을 통해 자기를 발명했다. 심리학을 벗어던진 그의 냉철한 분석을 따라가면서 나는 결국 그의 귀환에 함께할 수 있었다.
나는 모욕의 산물이며, 수치심의 아들이다.(229쪽)
사르트르는 수치심을 설명하면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다. 각자 절대적인 주체성을 가진 ‘나’와 타자 사이에 관계가 성립하게 되면, ‘나’는 타자의 시선 혹은 판단에 의해 절대성을 잃고 객관화되고 정형화됨으로써 타자의 세계 안에 정의된 하나의 대상, 외부의 힘으로 판단되고 결정되는 비주체적인 대상으로 전락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수치심은 타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한 사람을 둘러싼 사회인 타자들이 그에게 규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모욕이다. 에리봉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다룬 다른 책에서 1부를 “태초에 모욕이 있었다.”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그 작은 소도시가 그에게 가한 모욕이 어떻게 수치를 생산해냈는지를 차분히 서술하면서 자신이 모욕의 산물이며 수치심의 아들이라고 단언한다. 모욕은 신체 속에 그리고 의식 속에 새겨지며 주체성과 개인의 인격을 주조한다. 이를 통해 수치는 개인이 경험하는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그를 주조하는 사회적 매트릭스로 작동한다. 에리봉에 따르면, 모욕은 소수자가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수치심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수자의 세계 및 타자와 맺는 관계의 지평이 형성되면, 소수자의 의식은 상처 받고 취약해진다. 사회는 그 취약한 점을 파고들어 개인의 의식을 구속하고 틀에 가두어 버린다.
도대체 그가 게이인 것이 왜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감내해야만 하는 문제일까? 그도 역시 “우리가 대체 무엇을 했기에?”라고 질문했고 오직 사회적 판결의 자의성, 그 부조리함이라는 답변을 찾아냈을 뿐이다. 사회적 판결의 자의성이라는 말보다 더 무책임하고 무서운 말이 있을까? 사회는 규범과 질서라는 명목하에 함부로 개인을 낙인찍고 그를 모욕하며 수치심을 감내하도록 종용한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결국 나는 내 부모의 무지와 폭력도 역시 사회가 그들을 (1) 노동자 계급이자 (2) 가난한 빈민이자 (3) 무지한 저학력자에 (4) 미성숙한 부모로서 기능하게 만든 데에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부모를 떠나온 못된 자식이라는 모욕과 수치의 프레임도 역시 사회로부터 강요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절대 우리의 삶을 온전한 개인의 것으로서 전유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사회가 만들어낸 프레임 속에서 기능하지 않을라치면 우리는 모욕을 감내해야만 하고, 특히 게이라는 그의 성적 정체성은 그를 무책임하고 부조리한 사회적 판결의 낙인 속에서 고통받게 했다.
그렇다면 나의 부모는 염치가 없고 수치심을 몰랐다기보다는 수치심을 대면하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저 많은 사회적 모욕 속에서 자기 개인의 삶을 다르게 발명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회 내 자기의 존재 위치를 확보하고자 싸워낼 만한 지적, 경제적, 문화적 장치가 없었다. 그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만으로 보냈던 시간이 이제 비로소 수치의 장벽을 넘어서서 이해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우리 존재의 출발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느냐 하는 시공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세계 내에서 우리의 자리와 세계가 맺는 관계, 그 안에서 세계를 어떻게 배우게 될 것인가가 시대와 사회적 공간이라는 교차점에서 결정된다. 나와 나의 부모는 그 지점이 출발부터 달랐다.
디디에 에리봉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20여 년간 떠나왔던 부모의 집으로 되돌아가기를 감행한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고, 어머니나 가족들과 소통을 할 수 없었던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게이로서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서 그리고 노동자 계급이라는 계급적 장치로서의 모욕과 수치를 담담하게 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 아버지가 태어나면서부터 속하게 된 노동자 세계를 이해하고, 어머니의 성장 과정 속에서 외할머니가 사회를 살아낸 방식과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룬 방식을 통찰한다. 결국 그의 아버지나 나의 아버지의 미치광이 같은 성정과 그로 인한 관계에서의 무능력은 궁극적으로는 그들 개인의 성격적 특징이 아니다. 그것들은 아주 정확하게 위치 지어진 이 세계 내의 그들이 자리한 좌표의 효과였다. 그의 아버지는 사회적인 결정 논리에 의해 태어났을 때부터 지배당했고 우리가 ‘재생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온갖 법칙과 메커니즘이 그를 규정해놓은 것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달리 단절을 통한 빠져나가기를 시도했고, 그의 탈주는 성공했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역사와 맺는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87쪽)
에리봉은 사람이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와야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자신의 과거와 그 과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이들에게 등을 돌린 채 자기 자신을 발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 시도는 단절이다.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스스로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과 인식론적으로 단절해야만 체계 전체를 재구성하면서, 사회질서가 재생산되는 매커니즘을 기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와 같이 다니는 일을 그만두고, 그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족과 게이라는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랭스에서 도망쳐 나간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탈주다. 단절이나 도망을 조금 소극적인 전환이라고 친다면, 탈주는 훨씬 과감하게 그 세계를 떠나 다른 장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부모는 빠져나오지 못했던 사회적 배치 속에서, 그는 과감히 탈주한다. 학교 교육이 제공하는 문화와 교양을 습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게이로서 자유로운 삶을 찾아서 파리로 떠난다. 그러나 단순히 떠남만으로는 그의 되돌아감이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타고나 사회적 가치체계는 유령처럼 계속 남아서 우리 주위를 맴돌다가 어느 때에 갑작스럽게 그 존재를 드러내어 문득 죄책감으로, 수치심으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그는 민중적이고 남성적인 가치에 맞서서 ‘문화’를 선택한다. 문화가 ‘구별짓기’의 벡터, 즉 자신과 타자의 차별화, 타자에 대한 거리두기와 제도화된 격차의 벡터이기에, 문화에 대한 애착을 통해 민중 계급 출신의 젊은 게이로서 주체화를 이루게 된다. 그 양식은 그의 ‘차이’에 버팀목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게 해주고, 그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해주고, 그리하여 그의 떠남은 단순한 도망이 아니라 자신의 에토스를 주조하는 탈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에 따르면 자기가 타자와 맺는 또 다른 관계,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시선, 세상사에 대한 또 다른 담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기에 그는 탈주 이후의 단계로서 수행을 선택한다. 즉 자신에 대한 교육, 더 정확하게는 과거의 자기 존재를 만든 학습으로부터의 탈피를 경유하는 재교육을 통해 단절과 탈주를 통한 거리두기를 공고히 한다.
그는 사르트르를 인용하여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세 그의 존재의 원칙을 구성했다.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으로서 수행의 원칙. 여기서 바로 그의 탁월함이 빛을 발한다. 그는 수치를 자긍심으로 전환하여 자신을 새롭게 발명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리고 사회가 완전히 사고의 방식을 전복할 거라는 불가능한 해방 따위의 헛된 희망에 매달리지 않는다. 우리는 살짝 이동하고 옆으로 한 보 옮겨 편차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것이면 된다. 우리에게 씌워진 사회적 편견 혹은 규정 등으로부터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하지만 평행선의 각이 0.1°만 어긋나도 서로 만나지기 마련인 것처럼 관계와 배치가 전혀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 그 0.1°의 탈주가 새로운 개인으로의 재발명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수치의 역사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는 일단의 단절과 탈주를 해내는 용기, 그리고 수행을 통한 자기 창조에 달려있다. 이 과정에서 수행은 수치심을 자긍심으로 변환할 수 있는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수치를 수치에 머무르게 할 것이냐, 수치로부터 나를 새롭게 발명하는 자긍심을 이루어낼 것이냐는 그의 부모와 나의 부모는 인식조차 할 수 없었던 영역이다.
디디에 에리봉
귀환의 (불)가능성에 끝까지 도전하기(335쪽)
이 책을 통해 나는 그 차이를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작년에야 비로소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전 남편이 내가 만들어낸 유령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스스로에 대한 수치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너무나도 별로인 내 상태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1년이었다. 그러나 나의 수치는 이제 나를 재발명할 기회가 되어야 한다. 에리봉이 수치를 수행으로 전유하는 과정에는 자신을 긍정하는 주체화 과정이 포함된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감당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나를 감당하는 데에는 인정하기 어렵고 불편한 진실을 감수하려는 인내심과 있는 그대로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에리봉도 정말이지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고 썼다. 디디에 에리봉은 랭스로 되돌아간다. 그 되돌아감은 모욕을 주고 수치를 가한 그 공간으로의 물리적인 귀환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도망쳐 나왔던 과거라는 시간성으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것이 굳이 귀환의 필연적인 이유여야만 하는지를 의심하며 불안하게 읽어나갔지만, 결국 그가 되돌아감으로써 하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을 감당하기 위한 자기 수행의 일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떠나온 환경, 혹은 가까스로 빠져나온 환경으로 되돌아갈 때면 즉, 항상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면, 부인했던 만큼의 보존되어 있는 나 자신과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시공간에서 완전히 독립된 개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과거의 기억과 모욕과 수치들이 거기 계속 있었음을, 사실은 우리의 심연 속에 숨은 채로 우리 안에 있었음을 발견, 아니 재발견한다. 그렇게 우리 안의 심연 속에 잠재해 있던 것들을 나는 긴 시간 동안 유령처럼 불러 세우고 나를 괴롭혔다. 이제 그 유령들은 사라졌고 나는 과거와의 억지스러운 화해가 아닌 이해를 해보려고 한다. 그는 떠남을 통해 자신을 재발명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되돌아가서 과거의 그를 다시 맞닥뜨렸다. 그것이 어떠한 완벽한 변환이나 전복을 의미할 수 없음을 이미 알지만, 그럼에도 그 모욕과 수치의 시공간에 다시 자신을 배치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자신을 마주 보려는 그리고 감당하려는 시도였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어쭙잖게 그의 행적을 흉내 내어 그 곤궁했던 산동네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그들과 단절했고, 탈주해서 나만의 사회적 장을 꾸렸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나를 변화시키는 나의 문화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게 나를 재발명하는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에리봉의 책을 읽고 난 뒤 그의 가족들은 사실과 다른 점을 지적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존재의 출발점이 다르니 각자를 구성하는 사회가 갖는 기억은 모두 다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쩌면 귀환이란, 애초에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나를 다르게 보고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 수행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이제 내 과거는 지워져야 할 수치가 아니라 새롭게 나를 발명하는 에너지로서 작동해야 한다. 귀환의 완벽한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귀환을 시도함으로써 수치의 에너지가 자긍심이 되고 나를 발명할 수 있게 만드는 수행으로서의 자기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설거지, 샤워, 운전을 하는 동안,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글을 썼다 지운다. 사회와 내가 합작해서 만들어낸 수치의 유령들이 아니라 여기, 현실의 글쓰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나 자신과 싸운다. 드디어 내 삶의 궤적이 0.1° 틀어졌다.
0.1도의 틀어짐으로 우리가 만난 모양입니다.
스스로를 감당하겠다는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아침부터 뭉클해지는 멋진글 잘 읽었어요. ^.^
그들이 우리에게 한 것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 하는 일이 중요하다! 작년에 에리에 디디봉 읽으며 기억에 남는 구절인데, 이 글에서 다시 보니 반갑네요^^ 모퉁이님의 다음 글도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