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의 연구자 -/해야
자기 삶의 연구자 되기
해야
“나이듦과 자기서사”에서 지금껏 네 편의 에세이를 썼다. 인생의 취약한 경험을 서사로 풀어내는 것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확인했다. 존경받는 영성가, 작가, 교육자인 파커 J. 파머는 그를 주기적으로 괴롭혔던 우울증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을 겪을 때마다 모든 걸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그 경험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숙고 끝에 파머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간 살펴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직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파머는 이 과정이 취약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일부로 통합시키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하는 파머는, 서사가 조언이나 요령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다. 또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훌륭한 서사에는 독자들이 저자를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여기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나는 파머가 바람직한 자기 서사의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고 느꼈다.
이러한 파머의 통찰과 들어맞는 두 편의 소수자 서사를 만났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푸코 전기의 작가로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이하 <<랭스>>)와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하 <<실격>>)이다. 나는 취약함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서사들에 공감했고 두 저자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두 책이 소수자 서사의 훌륭한 모델로 다가온 이유는 자기 기술지(autoethnography)라는 독특한 글쓰기 장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소수자로 정체화하는 사회 과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자기 기술지는 개인의 경험 (“auto”)에서 출발한다. 그 경험의 사회 정치적 배경 (“ethno”)을 탐구하고, 경험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에 기반하여 자기를 상세히 기술 (“graphy”)한다. 자기 기술지 연구자는 인생의 궤적이 사회 구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피고, 개념과 이론을 동원하여 서사를 해석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에 대한 앎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나는 두 저자가 자기 기술지라는 글쓰기 형식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어졌다.
자기 분석은 곧 수치 분석이다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탐구는 개인적인 배제와 차별의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모욕의 경험을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하지 않았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 그 경험을 문제화하였다. 노동자 아들이자 성소수자로서 일상적인 모욕을 겪으면 자란 에리봉은 자연스럽게 게이의 성적 주체화를 연구의 주요 의제로 삼게 되었다. 가족과 고향을 탈주하여 자유로운 게이이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으나, 성적 수치는 그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몸에 새겨진 인장과 같은 것이었다. 떨쳐내기 어려운 성적 수치와 수치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가 에리봉의 지적 탐구의 중심이 되었다.
에리봉은 폭력 가장이자 동성애 혐오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지금껏 외면해 왔던 가난한 노동자 아들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줄곧 본인의 동성애 성향과 아버지 및 노동 계급 문화의 동성애 혐오라는 “고상한” 이유를 들어, 가족과 노동 계급을 떠나야 했다고 설명해 왔었다. 노동자 도시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자란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그는 본인이 노동자들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 체계에 대해 경멸감과 수치심을 갖고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명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했음에도 에리봉은 상급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문학, 철학, 예술 등의 교육은 중산층이 전유하는 아비투스(학습된 문화적 성향 쳬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고등 학교 과정에서 접하게 된 부르주아의 언어, 교양있는 행동, 상류층 취향의 문화 등은 동급생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에리봉에겐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는 무지를 감추기 위해 아는 것처럼 위장하고, 소외감을 반항으로 표출하고, 떄로는 민중 계급의 남성성을 버리고 심미주의자 소년이 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중산층 아비투스에 대한 체화나 학업에 열중하기 위한 신체적 훈육이 없이 지식인 사회로의 편입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란 걸 체험했다. 프랑스의 상급 학교 교육은 상류층 아이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었기에, 에리봉과 같은 노동 계급의 아이들은 지적인 열망을 갖더라도 그 체계 안에서 배제와 수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치심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라는 에리봉의 분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 자본과 사회 관계 자본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는 구별짓기는 내가 고등 교육에 접근하고자 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한국 및 미국의 교육 체계에서도 목격할 수 있기 떄문이다. 에리봉은 문화 자본이란 개념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급적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들(아비 투스, 사회 관계 자본, 구조의 평행 이동 등)에 기반하여 본인이 경험한 계급과 불평등을 분석한다. 사회학적 개념들을 장착하여 서사를 해석함으로써 구조 속에 위치한 개인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회학적 자기 탐구는 사회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앎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에리봉이 계급적 수치에 중점을 두었다면,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을 갖고 태어난 김원영은 <<실격>>에서 몸의 수치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신체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법과 제도, 사회적 관습, 통념 등에 의해 ‘잘못된 삶’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철저히 논증한다. 에리봉과 구별되는 점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적극적 변론을 펼친 점이다.
저자는 ‘비정상적’ 몸으로 인해 겪는 수치를 자신이 어떻게 다루는지 상세히 기술한다. 모욕적인 언사나 상황에 직면할 때, 그는 좌절감에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하여 말을 더듬지 않는다. 자아를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바로 구분한다. 바라보는 나는 냉철하게 상황 분석을 하고, 보여지는 나는 그 분석에 기반하여 유머 또는 차가운 분노가 담긴 대응을 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자신을 보고 가여워 하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묻는 이에게 “장애인 할인을 받으려고요”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방어적 퍼포먼스가 자기 존중과 사회적 존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여기서 나아가 수치가 자기 수용이나 존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자신과 비슷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들과 연대하여 “수평적 정체성” 그룹을 구성한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휠체어를 탄 친구들과 함께 간지 나는 휠체어 운전법을 연습하였고, 그 작동 기술 자체가 그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 경험은 자신들을 정상성이 결여된 존재가 아닌 정상성과 다른 무엇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하여 지식인 또는 전문직 종사자로의 계층 이동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역경을 극복한 성공의 서사 구조에 딱 들어맞지만, 이들의 자기 기술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성공 서사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치의 경험을 드러내며 ‘벌거벗은’ 채 독자에게 다가선다.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 경험을 사회 구조 내에서 분석하고, 해석한다.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두 저자가 깊이 있는 자기 이헤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변호사
정체성의 교차가 핵심이다
이 두편의 자기 기술지는 개인적인 경험이 구조의 산물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각 개인에게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정체성의 다양성과 교차성으로 인해 소수자 개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기술지를 통해 에리봉과 김원영은 여러 정체성의 충돌과 교차를 탐구하였다.
<<랭스>>는 자기 탐구가 성적 주체화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기에, 계급적 주체화를 주로 다루었다. 그럼에도에리봉의 서사에는 자신의 계급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 지식인,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게이 지식인이 되기 위한 여정은 성적인 자아와 계급적 자아가 충돌 가운데 이뤄진 것이었다. 또 게이로서의 정체성은 동성애 혐오적 노동자 문화와 거리를 두면서 성적 주체화에 대한 탐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에리봉의 서사를 통해 교차된 정체성이 가족(노동자 남성, 노동자 여성 등)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중 나는 에리봉이 명시적으로 기술하지 않은 젠더와 계급의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어머니는 저자의 동성애 성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반면,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노동 계급 남성들의 외도나 성적인 유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여성들의 자유 연애와 낙태(외할머니의 경우)는 사회적 낙인과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계급적 배경과 젠더로 인해 남성들이 겪지 않은 성희롱과 성적 대상화를 겪어야 했다. 같은 계급 내에서도 젠더에 따라 특권과 배제가 다르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도 장애와 다른 정체성들의 교차가 개별 장애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계급과 장애가 교차할 때 겪게 되는 모욕적인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장애인들은 적은 액수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대신 정치인들의 PR을 위해 동원되고 “전시품”으로 취급 받는다. 수치심을 느끼지만 본인들의 위치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하다. 장애인의 정체성은 학력과도 밀접하게 교차한다. 이동이 불가능하고 교육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아, 장애인들은 초등 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배제로 인해 이들은 자기를 드러낼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자신을 설명할 언어 발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낮은 계급과 무학 또는 저학력의 정체성이 장애와 만날 때, 출발부터 실격당한 인생의 운명에 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리봉은 최근의 사회 과학 연구와 정치 담론이 특정 정체성의 사회적 인정에 집중함으로써 계급이 간과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정체성 정치에서 놓치기 쉬운 개인적 체험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존재를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우리의 복잡한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개인을 특정 정체성의 고정된 주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완전한 자기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반증해 주었다. 나는 성적인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집중한 나머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정체성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여 지금의 나를 구성하였는지 살펴보지 못했다. 내가 겪은 배제와 차별, 그리고 특권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표현되는 나의 독특하고 복잡한 위치성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살필 때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두 책이 보여주듯 자기 기술지는 개인 서사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교차성의 서사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힘 또한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에리봉과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지만 사회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등 교육에 접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게이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대도시로 탈출한 경험도 유사하다. 난 김원영처럼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란 걸 확신하고 확인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원영이 장애인 이외의 “매력 자원”이 부족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예를 들어, ‘못생겼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집단 괴롭힘을 당한 명문대 여힉셍)을 본인과 비슷하게 실격당한 처지에 있다고 얘기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맥락이 그 서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엮어게 되는 힘이 있다. 두 저자의 복잡한 서사에 나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음을 발견하면서 난 이들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 기술지는 ‘나’의 서사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서사로 해석되고 확장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 기술지를 쓸 수 있을까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기술지 작업은 밀도 있는 자기 반성(self-reflection)과 엄격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수치와 배제를 생산하는 구조와 사회적 질서의 작동 방식을 잘 드러내었다. 동시에 그 질서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결합과 충돌 가운데 구성된 나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지난한 자기 연구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역자는 에리봉의 자기 연구의 과정을 자기 발명이라고 불렀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계급이 본인 인생의 변곡점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고, 특히 계급적 수치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핀 것 자체가 그에겐 자기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김원영은 자신을 비롯한 실격당한 이들의 삶이 가치있고 존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변론을 끝까지 밀어 부쳤다. 그의 자기 변호는 논리와 이론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이뤄졌고, 독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논리, 설득력, 당당함을 갖춘 서사는 그가 <<실격>>을 자기 발명의 일환으로 삼았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두 소수자의 자기기술지에 공감했고 영감을 받았다. 이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용기, 자기 성찰 능력, 학문적 엄격함, 정교한 자기 기술 능력 등이 글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자와 작가로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춘 두 사람이 부러웠다. 나와 같이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 자기 기술지를 서사의 장르로 삼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회 과학이나 철학 등에 대한 지적인 토대가 약하다. 개념과 서사를 엮는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훈련도 부족하다. 이에 대한 장기간의 밀도 있는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엄격한 의미의 자기 기술지에 접근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두 텍스트로부터 서사를 구성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기준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 기준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구조와 결합되어 서술되었는가’, ‘학문적 개념과 이론이 경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가’, ‘개인의 고유한 교차적 정체성이 드러났는가’, ‘고유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자기 삶의 연구자”라는 표현은 박노해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자기 기술지는 서사가 중심이기 때문에 이론과 개념어로 점철된 논문에 비하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이 비교적 쉽다. 단,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 집단의 이해와 권리에 집중하는 사회운동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매몰되어 타정체성 그룹과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극단적으로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몸의 일기 연재에 이어 해야님의 글을 또 볼 수 있으니 좋네요~~ 다음 글도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