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김은영
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_ 고미숙
김은영
1. 『동의보감』은 삶의 비전서다
저자, 고미숙은 40대에 생긴 종양의 치료법이 수술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없이 스스로 종양을 감당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먼저, 병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체 병이 왜 생겨났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데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병일까 등등. 질문이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졌고, 병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병은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와 몸을 이어주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몸들’에 대한 탐구로 연결되었고, 『동의보감』과 접속하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앎’들이 재배치되어 연결되는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인식론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고, 몸을 치유하는 것은 삶을 치유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질병과 치료에 국한되는 의서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약이나 침으로 하는 치료 보다 수양을 우선시 하라는 특급 요청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며,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중국 의학사의 엑기스가 깔려있다.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생명과 자연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텍스트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경편]의 첫 장에 등장하는 ‘신형장부도’와 손진인의 멘트를 들 수 있다.
신형장부도란 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린 그림, 이라는 뜻이다. 처음 봤을 땐 뭔가 엉성한 선으로 대충 구획만 나눠져 있는 것 같고, 게다가 몸통만 그려져 있는 옆모습은 과연 이것이 해부도가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또한 장부를 표현하는 선들은 해부도라기 보단 약도에 가깝다. 저자는 이것이 ‘한의학에서 보는 몸’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접속하고 변이하는 흐름을 강조하는 몸, 내부와 외부가 교감하며 활발한 변용력을 가진 몸, 한마디로 ‘살아있는 몸’을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묘사로 대상을 포착하는 그림이 아닌, ‘활발발’하게 살아숨쉬며 각각의 ‘틈새’ 사이로 소통하려는 의지를 가진 신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형장부도에서 각각의 장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몸은 (무엇보다) 생명의 활동이 우선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지는 손진인의 글에서 몸은 ‘우주와 기운’과 연결된다. 천지의 형상과 몸의 형상이 단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연결되고, 오행과 오장, 육극과 육부는 그저 ‘숫자’가 일치한다는 것으로 또 연결된다. 논리적인 설명은 생략되고, 직관적 연결성으로 우주와 신체의 거리를 단박에 좁혀서 보편적 사유의 바탕이 되게 한다. 동의보감에서 자연과 인간의 직관적 연결을 등장시킨 이유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의학의 전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은 유불도 삼교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대표 저자인 허준 뿐만 아니라 처음 편찬에 참여했던 인물들 중에도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특히 도가 사상에 주목했고, 이런 사상이 집약된 부분이 [내경편]의 신형이다. 그러므로 도가의 화두인,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가 『동의보감』을 이해하는 시작이면서 큰 축이 되는 질문이 된다.
인간이 자연과 소통할 수 있음은 인간이 자연에서 왔기 때문이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사유할 때 몸의 순환과 생명력이 활발해지고, 몸의 치유 또한 자연스러워지고 삶과 죽음이 대립하지 않게 되고, 소유와 집착에서 벗어날 내공을 기를 수 있다. 이것은 삶을 생기있고 ‘활발발’하게 만들며, 이것만으로 이미 질병의 반 이상은 해결되는 셈이다. 바로 여기, 동의보감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인, 삶의 치유,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는 삶의 비전이 될 수 있다.
2. 몸과 생명, 우주 그리고 질병
우주는 태역-태초-태시-태소의 스텝으로 생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기-형-질의 순서로 세계는 구체화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기’의 이합집산으로 형질이 갖춰져 생명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내경편의 ‘신형’에 해당되는데, 생명의 탄생 기원에 대한 중요한 설정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기-형-질의 단계에서 ‘질병’도 함께 탄생했다는 것.
에너지나 열은 완벽한 조건에서는 발생하지 않으며 원초적인 우주적 ‘결함’ 없이는 생명의 탄생이 성립되지 않는데, 그 결함의 속성인 질병이 함께 탄생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삶을 지속시키는 힘이라는 말이 된다. 질병이 멈추면 생명도 멈추는 것이고, 생명의 활동 근원은 질병인 셈이다.
이런 사유는 병에 대해 규정해온 전제들을 뒤집는다. 병은 나를 괴롭히고 일상을 해치는 불한당 같은 존재이며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적’이 아닌, 생명과 우주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게 하는 몸의 신호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신호는 ‘미병’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미병이란, 건강과 질병 사이에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몸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 스펙트럼 안에서 몸은 외부 환경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매순간 균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태어나면서 아픈 것은 미병이 발현된 질병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땐 잠복된 형태의 미병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질병 없음’을 건강이라 설정하는 근대(서양)의 관점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낳았고 완벽하게 건강한 신체(백인 남성의 신체)의 기준은, 그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사회의 구성원에서 열외시키는 이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한의학적 관점에서는 절대적인 균형, 건강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으며 동시에 몸의 장애란 것도 없다. 저자는, 질병과 공존하며 이것을 자신만의 삶의 운용법으로 변용하는 사례(「새로운 몸의 기억 만들기」김원영)를 소개하면서 오히려 질병이 ‘삶의 구성하는 토대’임을 말한다. 우리는 미병 상태에서 질병으로 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애초 태어남에 있어 원초적 불균형이 심하거나 외부 환경에서 오는 운명적 사건, 사고로 인해 치명적 질병/장애를 겪거나 혹은 노화가 원인이 되는 질병이 오더라도 이것들은 몸의 쇠퇴, 퇴행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신체적 리듬과 강밀도’로 옮겨갈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예전의 몸으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이 아닌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의 전환, 삶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이 질서 안에서도 질병은 만들어진다. 그러나 ‘질병이 곧 존재의 축이자 무게중심’이므로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어떻게 아프냐가 삶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3. 질병의 주체로 양생하기
『동의보감』이 예측하는 인간 수명은 120세, 라고 한다. 물론 전제가 있다. ‘자연스러운’ 삶의 결과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100세 시대로 상징되는 인간의 삶이, 한편에선 노화와 질병으로 이어지는 고단한 삶의 모습으로 연결되는 것과는 다르다. 사계절이 각각의 단계마다 고유의 충만함으로 빛나듯 노년의 삶도 ‘육체와 정신을 온전히 보존’하며 활기차게 이어가는 모습이어야 한다. 이것이 양생의 전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현대 의료 체계와 과학 기술로도 하기 어려운 일을, 양생과 의학의 ‘고차원적’ 결합인 동의보감에서 그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평균 수명이 40도 채 되지 않았고, 의료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왕조차 60을 넘긴 경우가 20%가 넘지 않는다고 하니, 양생술을 실천하는 일의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의료 체계와 양생술이 콜라보 해서 실행된다면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저자는 위생을 목표로 하는 서양 의학과 양생을 비전으로 하는 한의학의 합체 혹은 적절한 혼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양생의 기술이 가지는 ‘병과 건강’에 대한 규정, 몸과 우주,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서양 의학과는 다른 벡터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무엇보다 절대 합의될 수 없는 전제가 의술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하는가, 이다.
서양 의학에서 의료 기술 전과정의 주체는 ‘의사’(로 대표되는 의료 체계)다. 병을 연구하고, 예측하고, 환자의 몸을 진찰하고, 진단하고, 치료하는 전과정에서 환자가 하는 일은, 언제 어디에 통증이 발생했는지, 의학의 분류 체계에서 나의 통증이 어디에 해당하는지를(시행착오를 거치며) ‘판단’하는 것 뿐이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치료의 과정을 거쳐 완치가 되더라도 환자에게는 그 경험이 삶의 기술로 남지 않는다.
하지만 양생의 기술은 특정 질병에 대한 의술도 아니고 외부에서 주입된 의술도 아닌, 스스로의 욕망을 조율하는 ‘소통의 지혜이자 자기배려로서의 기술’이다. 저자는 인도 고대의학 ‘아유르베다’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도 이 양생의 기술을 보고 있다. 지혜롭지 못한 판단이나 성욕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 발생되는 잘못된 행위가 질병과 연결된다는 인식에는 윤리와 의학 또는 자기수련과 의학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이는 질병의 주체, 치료의 주체 혹은 진단의 주체가 의사에게만 몰빵이 되는 현대 서양의학의 체계가 절대진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은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기술을 연마해왔음을 알 수 있다.
『아파서 살았다』(오창희)의 저자는 류머티즘이 발병한 후, 처음 10여년 동안 예전의 몸으로 돌아가리라는 목표로 온갖 치료 방법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만큼 선택의 괴로움으로 힘든 시기가 없었음을 고백했다. 차라리 누군가가 희망을 버리라고 말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진단과 치료의 과정이 온통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의료 체계는 개별 환자의 치유를 위해서 진단과 치료의 과정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 자체를 진단하고 치료한다. 그 과정에서는 질병의 완치, 이외의 어떤 상태도 설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증상에 맞는 병명을 찾지 못해 병원을 전전하는 사례도 많다. 환자가 자신의 병과 그 치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의사가 제시한 진단과 치료를 선택할 것인가, 아닌가 뿐이다. 그런데 환자는 그것을 판단할 어떤 기준도, 지식도, 인식 체계도 없다. 완치가 아니면 모든 판단은 실패로 돌아간다.
저자가 병과 함께 살아가기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실제로 병증은 나아진 게 아닌데 불안감과 심리적 위축감이 나아진 건 물론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고 관절의 움직임도 많이 편해졌다고 한다. 내 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에 공부와 삶의 비전, 매순간 변화하는 몸의 순환체계를 조절하며 살아가는 경험이 결합되면서 얻어진 결과인 것이다. 물론 병원과 의사의 도움도 받아들인다. 다만 그 모든 선택과 판단의 주체는 저자이며, 그 선택의 결과까지도 하나의 과정으로 축적되어 질병을 포함한 내 몸을 돌보는 기술을 연마하는 데 보탬이 된다고 한다.
저자는 류머티즘을 어떻게 관리하며 살아갈까, 의 질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내 몸의 생리적인 리듬과 생의 이치, 자연의 이치 등을 사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병을 대하게 되면, 병에 대한 고정관념과 스스로가 가진 한계에 갇혀 오히려 병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하니, 결국 병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된다고 말이다.
앞으로도 이 병이 어떻게 변화될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 몸을 진단하고 치유하기 위한 저자의 사유와 경험은 그의 삶의 기술로 축적되어 있어 질병이 주는 생명과 우주의 메시지를 동력 삼아 양생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4. ‘다시’ 접속
나의 인문학 공부의 시작은 ‘몸’에 대한 관심이었다. 관심은 있으나, 몸의 다양한 변화들을 질병, 노화, 건강, 다이어트 등의 명사와 연결되는 담론 이외에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 내게는 없었다. 매일 다르게 느껴지는 몸과 나 자신이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그것이 삶에 있어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은 있는데 어떤 방향으로 그것을 만들어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었다.
그때 시작하게 된 공부에서 이 책을 만났지만, 처음에는 다 읽어내지도 못했다. 일 년 동안 사주명리와 주역, 불교에 대한 공부를 주욱 지나오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이해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다른 공부보다 『동의보감』을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 다음 해에는 일 년 동안 동의보감만 강의하는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올해, 이 책을 다시 만났다.
여전히 이 책을 통과하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고, 내 언어로 포착하는 능력의 부족으로 무수히 미끄러지는 글들이 더 많음을 확인하는 일은 괴로웠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싶었던 이유는, 『동의보감』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가 내가 어떤 사유를 만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데 여전히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몸이 자연과 우주와 연결되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것, 질병의 발현과 오장육부와의 관계성에 대한 것, 잘 산다는 것은 죽음까지 포함한다는 것, 제대로 아프고 제대로 죽기 위해 공부와 함께 가야하다는 것 등, 시시때때로 이런 생각들이 불쑥 들어와서 지금 내 자리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생각한 적이 많았다.
저자는 동양의학적 지식들의 바탕이 되는 사유체계가 보편지이기 때문에 특별한 기술이나 제도의 의존하지 않고도 터득할 수 있고, 이 지식에 접속하기만 하면 누구나 자기 안에 ‘치유본능’을 일깨우게 된다고 말한다. 치유본능은 앎의 의지를 작동시키고, 이것에 몸에 저장이 되면 삶의 기술이 되는 것이다. 내가 얕은 수준에서라도 이 책에 계속해서 접속해왔던 것이 ‘치유본능’을 지속적으로 일깨우는 일이 되었던 것 같다.
생로병사를 내 힘으로 넘어서겠다는 발심은 자기수련이라는 만만치 않은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의역학에의 접속으로 치유본능을 지속적으로 일깨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