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으로 새롭게 보는 질병과 양생 / 지현
『동의보감』으로 새롭게 보는 질병과 양생
지현
1.앞만 보고 달리다가 고꾸라지다
나의 통증연대기는 서른일곱 살에 심각한 요통이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퇴사를 하고 정형외과와 한방병원 등을 전전한 끝에 통증은 경감됐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다양한 병증이 발현됐다. 술이나 커피는 물론 홍차, 녹차, 심지어 초콜릿을 먹어도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카페인에 민감해졌다. 고춧가루가 든 음식을 먹으면 밤에 잘 때 땀을 많이 흘리는 바람에(도한) 김치나 라면도 먹을 수가 없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피부에 뭐가 나거나 두통이 생기곤 했다. 햇볕을 많이 쬐거나 과로를 하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말을 좀 많이 하면 확 까부라졌다. 9 to 6의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렸다.
만일 40대 중후반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3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엔 아직 젊었다. 활동가로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더 많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전문가로 성장해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굴렀다. 한창 자기 분야에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친구들이나 옛 동료들을 보면 부러움과 질투심에 속이 시끄러웠다. 몸, 몸, 몸. 이놈의 몸이 원흉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이 ‘몸’이라는 녀석. 당시 나에게 ‘몸’은 내가 사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나는데 나에겐 그게 몸이었다. 지난 십년, 먹고 싶은 음식과 하고 싶었던 많은 일, 일에서의 성공에 다가가지 못하고 몸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수행을 해야 했다. 이제야 가까스로 몸과 공존하는 법을 터득했다 싶을 무렵,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이하 『동의보감- 몸과 우주』)를 다시 만났다. 십년 전 고꾸라졌을 때에도 이 책을 읽었고 좋은 책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다시 읽어보니 그땐 제대로 이해한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마치 글자들이 살아서 걸어 나와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지난 시간, 경험 속에서 내 나름대로 터득한 양생의 지혜가 책의 내용과 조응하며 내 안으로 흡수되는 느낌이 들었다.
2. 질병은 “존재의 표현형식”이자 메시지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는 고전 평론가 고미숙의 『동의보감』 리뷰다. 고미숙은 인간의 몸을 우주와의 연결 속에서 바라보는 동양 고대의 인식론을 소개한다. 이것이 근대 서양의학의 인식론과 어떤 차이를 갖는지를 보여주며, 지금 우리를 둘러싼 의료 권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동의보감의 ‘양생’에서 찾는다.
먼저 『동의보감- 몸과 우주』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건강- 질병의 이분법에 문제제기한다. 우리는 건강을 목표로 몸을 관리하다가, 질병이 생기면 그 질병을 제거하기 위해 치료를 받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고미숙은 근대 이전에는 ‘건강’이라는 말이 없었으며 건강-질병의 이분법 역시 근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세균을 발견하여 병의 ‘실체’를 확인한 18-19세기, 항생제와 각종 첨단장비를 발명해 병의 실체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된 20세기를 거치면서 건강은 점차 ‘질병의 부재’를 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건강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질병은 제거해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
그러나 『동의보감- 몸과 우주』에서는 질병을 “존재의 표현형식”으로 본다. 우주의 시작 자체가 어긋남에서 출발하기에 자연의 일부인 인간 또한 태과 또는 불급의 상태로 태어나게 된다.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질병도 함께 탄생하는 것이고 “질병이란 특수한 고통과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반해야 하는 필연적 조건이다.”(132) 그래서 동의보감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병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병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식으로 사고한다면 질병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질병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문제가 된다. 질병과 적이 될 것인가 친구가 될 것인가. 적이 된다면 질병을 내 몸에서 떨쳐내기 위한 싸움이 시작될 테고 친구가 된다면 질병은 중요한 메시지를 들고 나에게 온 전령사가 된다.
과거 내가 질병을 보는 방식은 건강-질병에 대한 이분법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양방으로는 진단내릴 수 없는 증상들이 강약을 달리 해 가며 계속 나를 따라다녔는데 나는 아프기 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게 회복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것은 ‘비정상’이었기에 아프면 일단 몸을 ‘정상’(건강)으로 되돌려 놓는 게 급선무였고 그래서 몸에 열중했다. 이건 내 몸의 상태를 인정하고 몸에 정성을 들이는 차원이 아니었다. 아프면 급속도로 병과 동일시되면서 우울해하고, 빨리 낫기를 바라며 전전긍긍했다.(그러나 내 병증의 뿌리는 깊었고 후딱 나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이렇듯 질병을 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질병을 앓는 동안 나의 일상은 불완전한 것, 과도기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나는 건강해져야만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 나으면’, ‘~을 하게 되면’ 이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럴수록 병이 나에게 주려는 메시지는 놓치기 마련이었다.
3. 병의 원인을 보려면 일상과 욕망을 보라
서양의학은 해부학적인 몸을 기본으로 하며 “병의 장소성을 강조”한다. “병을 어떤 장기 혹은 기관의 국소적 장소와 일대일로 대응시킨다.”(311) 나 또한 심장이 쿵쿵거릴 땐 심장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심장내과에 가서 초음파 검사와 운동부하 심전도 검사를 했다.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면서 축하한다고까지 했다. 분명히 내 심장은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음에도.
『동의보감- 몸과 우주』에서는 질병을 인체의 특정한 장소나 세균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병을 “관계의 표현”으로 보기에 특정 장기만이 아니라 그 병증을 둘러싼 관계와 계열을 본다. 또한 질병을 내 몸과 일상과 외부 기운, 이 셋의 조화와 균형이 깨진 것으로 본다. 따라서 병의 원인을 찾으려면 일단 내 몸과 일상, 외부의 기운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치료의 주체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나의 일상과 나의 서사 속에서 병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단순히 일자 허리, 즉 척추의 문제인 줄 알았던 요통은 알고 보니 신허의 문제였다. 오장육부는 음양오행에 배속돼 있다. 신장은 ‘수(水)’에 배속되는 장기로 생명의 물질적 기초인 ‘정’을 저장한다.
오장육부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장부는 심장과 신장인데 이 두 기운의 원활한 운행을 표현한 말이 바로 ‘수승화강(水承火降)’이다. 원래 물은 아래로 내려가는 성질이 있고 불은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그런데 우리 몸에서는 이것이 반대가 돼야 한다. “우리 몸 자체가 상극의 산물이기 때문이다.”(255) 즉, 신장의 물은 위로 올라가야 하고 심장의 불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이것이 안 될 때 발생하는 것이 ‘음허화동(陰虛火動)’이다. 신장의 수에 해당하는 ‘음’이 허해져 심장의 ‘화’가 망동한다는 뜻이다.
내가 경험한 각종 증상은 ‘음허화동’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사주에 사(巳)화가 3개나 돼서인지 뭐든지 뜨겁게 경험해야 직성이 풀렸다. 활동가로서 늘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삶이 가짜 같다고 느꼈다. 또 무엇이든 빠르게, 잘 하고자 하는 욕망과 부조리한 세상을 확 바꿔버리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생애 전반에 걸쳐 고르게 써야 할 ‘정’을 20대~30대 중반 사이에 너무 많이 써 버린 셈이다.
이렇듯 나의 기질과 삶의 방식은 몸 안의 진액을 마르게 하고 심장을 달구는 것들이었다. 가뜩이나 화가 동하기 쉬운 몸을 타고 났는데 음이 허해지니 화가 날뛰어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었다. 술, 카페인, 고춧가루, 기름 등은 모두 화 기운에 해당하는 음식이니 이런 음식을 섭취했을 때 몸이 격렬하게 반응했던 것이 이해가 간다. 또 심장이 약하니 표리 관계에 있는 소장 기능도 저하되어 기름을 소화, 분해하지 못했고 이게 피부 염증으로 드러났던 거다.
“상생과 상극의 원리를 꿰뚫는” 경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약간의 한의학적 지식을 습득하고 주치의격인 한의사에게 힌트를 얻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내 몸을 관찰한 결과, 나는 내 몸의 증상들과 그 원인을 대강 이해하게 됐다. 심장이 뛴다고 계속 심장만 붙들고 있었다면 혹은 허리를 구조적인 문제로만 보고 물리치료와 도수치료를 받는 방식으로만 내 몸을 대했다면, 나는 아직까지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4. 몸과 마음을 탐구하는 것이 ‘양생’
과거의 나에게 양생이란 ‘하지 말아야 할 것,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의 리스트’였던 것 같다. 십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 ‘절제가 그렇게 쉽나?’ 하고 은근히 반발심이 들었던 이유도 이 책을 금지 리스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에게 양생이란 어떤 규범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은 금지를 촉구하는 게 아니라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양생의 기술을 닦는다는 건 몸과 우주, 삶과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윤리적 태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생술이란 특정 질병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포괄할뿐더러, 외부적으로 주입되는 의술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조율하는 삶의 기술을 의미한다.” (144)
“몸과 우주, 삶과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윤리적 태도를 갖는다”는 건 앞서 말했듯이 근대 서양의학의 인식론에서 벗어나 나의 몸을 우주와 자연의 일부로 여기는 것, 질병이 있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불어 생로병사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임을 깨닫는 것일 테다. 이러한 인식론적, 윤리적 태도의 변화가 양생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양생술은 “특정 질병”에서 어떻게 나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과, 나의 욕망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양생이 단순한 몸에만 국한된 문제일 수 없는 이유다. 고미숙은 동양 고대의 양생이라는 개념 속에는 의술과 수행(종교)이 나눠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즉 몸 따로 마음 따로, 몸 관리 따로 마음 수행 따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고미숙의 말을 빌어서 ‘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합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으로 양생을 정의하고 싶다. 양생이 단순한 규범이라면 오히려 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딘가 아픈 기간 동안 바짝 긴장해서 뭔가를 먹지 않거나 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러나 인식론적 전환이라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계속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지난 십년간 몸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이제야 몸과 친구가 된 것 같다. 물론 다시 예전의 몸을 갖게 된 건 아니다. 한번 드러난 증상들은 내 몸에 남아 잠복돼 있다가 어떤 기운과 조건을 만나면 또 다시 발병한다. 예전의 몸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나는 변했다. 십년에 걸쳐서 서서히, 왔다 갔다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몸에 대한 관점이 변했고 삶에 대한 태도가 변했다. 페미니스트인 내가 내 몸은 가부장처럼 대했다는 걸 깨달았다. 골골대며 무언가를 성취해 내지 못하는 몸을 끊임없이 타박하면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니까 너는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었다. 지향하는 가치가 신자유주의가 아니었을 뿐 몸을 대하는 태도는 여느 근대인들과 다를 바 없었던 셈이다.
열정적으로 살아오는 동안 내 몸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 채 늘 전시체제로 살아왔을 거라는 자각이 들면서 몸에게 미안해졌다. 생각으로는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부수었다 하지만, 몸은 한 번에 한 걸음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매일 실감한다. 이제는 무엇을 하든 지금의 내 몸과 협상하며(간을 보면서) 살금살금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 차차 몸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각한다고 해서 바로 일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양생의 기술이란 일상 속에서 체화되어야 실효성이 있는 것일 텐데 그게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기질이라는 것, 습이라는 건 너무나 강력해서 새로운 습관의 근육이 붙지 않으면 여차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 쉽다. 내 몸에 맞는 일상의 루틴을 만들고 그것이 안정화될 때까지 실패를 거듭하고 또 관찰하고 알아차리기를 반복하는 과정, 그건 나만의 양생술을 터득해 가는 시간이었다.
이번 시즌 『동의보감- 몸과 우주』를 읽고 글쓰기를 하면서 지난 십년을 갈무리한 느낌이 든다. 또다시 십년이 흘러 (그때 내가 살아있어서) 다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게 될까? 가족, 친구들, 파트너, 나 자신의 늙어감과 병듦, 죽음을 경험한 후에는 더 다채롭고 풍부하게 이 책을 읽어내게 될까? 아니 곧 다가올 갱년기를 통과하면서 다시 이 책을 집어 들게 될까? 분명한 건 이 책이 나의 책장에서 늘 함께 할 거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