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60, 정년이라는 해고

먼불빛
2023-01-30 00:19
436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나의 60세는 정년퇴직으로 시작되었다. 나이 첫 자리의 5가 6으로 바뀐다는 건 남다른 차이를 느끼게 한다. ‘젊다’에서 ‘늙다’의 경계로 넘어서는 일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전환기 일 수밖에 없다. 나이 60에 정년퇴직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지만 사는 게 바빠 아무 준비 없이 덜컥 맞은 나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 설상가상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아무리 준비 없이 맞았다 해도 고민이 없었겠는가? 대책이랄 게 없었으므로 계획적 노력은 하지 못했지만 60세, 정년퇴직, 수입 끝, 노후 30년 시작, 그 단어의 무게감은 나를 충분히 짓누르고도 남았다. 내가 정년퇴직을 한 건 2022년 6월이다. 그러나 나의 정년퇴직 이야기는 지금(2023년 1월)으로부터 약 2년 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묻지 마, 노후 계획!

 

 

 ‘은퇴 후 30년 노후 자금 10억’이란 말을 액면가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억~ 소리가 날 만큼 두려움을 주기는 충분했다. 이제 내년이면 정년퇴직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벌어놓은 돈은 없고, 태생이 흙수저인 내게 60줄 나이에 들어선다는 것은 마주하기 싫은 미래였고, 백 세 시대 재앙의 서막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던 월급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목덜미에 뜨거운 다리미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노후 준비를 경제적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마세요~’ 운운하며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왠지 긴박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노인빈곤율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말이 더 실감이 났고, 요행일지라도 그 빈곤율 안에 내가 포함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 이외에 달리 세울 만한 노후 계획이라는 것이 내게는 없다. 생각하면 숨 막히는 일이지만 70을 훌쩍 넘길 때까지 허리 휘는 일이라도 찾아 먹고 살아간다면 그건 오히려 다행이지 않을까.

 

 

 

 

 

 

이리저리 검색하고, 관련 사이트를 뒤져봐도 화~악 당기는 일이라던가, 아, 요거다 하는 일을 찾기는 어려웠다. 모든 것이 결국 돈 문제인 것 같고, 가방끈 탓인 것도 같고, 이건 이래서 어렵고, 저건 저래서 힘들고 특별한 재주도 잘하는 것도,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나는 참 애매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생전 써보지 않았던 몸 쓰는 일을 쉽게 볼 수도 없다. 내가 청소나 홀 서비스, 주방 설거지, 김밥이라도 썰어야겠다고 이야기하면 내 주변 사람 모두가 이구성동으로 생각도 말라며 말린다. 하루 만에 초주검이 되어 뻗거나 한바탕 그릇을 엎질러 깨뜨리고 쫓겨날 거라며 놀려댄다. 맞다, ‘아냐, 할 수 있어!’라고 응수할 자신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년이 없는 숙련도 높은 기술을 배웠어야 했나... 무엇 하나 만만한 것도,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의 노동시장이란 이처럼 나 같이 애매한 중고령자에겐 냉정한 현실만 생생히 보여줄 뿐이다. 결국 ‘어찌어찌 닥치는 대로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노라’하는 무계획, 무대책, 막무가내, 헝그리정신밖에 없지 싶었다. 여태껏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게 가장 믿을만한 계획 아닐까?

 

 

누구도 내게 정년을 앞두고 뭐할 거냐, 계획이 있냐고 묻지 않길 바랐다. 내가 생각해도 무대책, 막무가내 정신은 한심해 보인다. 그래도 나에게 지금 희망이 뭐냐고 묻는다면 63세부터 국민연금이라는 걸 받는다는 거다. 국가 부도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국민연금과 노인 기초연금까지 받을 요량이니 어쨌거나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희망이랄까. 그건 ‘10억’에 대적할만한 나의 유일한 노후 대책이다. ‘10억’이라는 귀신 씨나락 같은 말은 이리도 나를 궁핍한 상상 속으로 밀어 넣는다. 대체로 정년퇴직을 맞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할까? 프리덤을 외칠까. 전원생활을 꿈꿀까. 인생 2막을 찾고 있을까. 전전긍긍 나처럼 먹고사니즘을 고민하고 있을까. 나는 한 번도 내 맘을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베이비붐 세대 중에 이런 곤한 말년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들도 나처럼(한심해서) 안으로 숨는 걸까? TV와 신문 통계에 잡히는 빈곤의 주인공들은 모두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언제나 드러나는 건 무엇이든 성공한 쪽의 이야기들이다. 내가 좋아했던 TV 프로그램 중에 <건축탐구 집>을 보면 집이라는 로망을 실현하는 저들이 부럽다가도 50대, 60대에 저렇게 땅을 사고 자기 집을 지을 동안 나는 뭐했는지 싶고, 애쓰며 살아온 나의 족적들이 너무 가볍고 보잘것없어지는 것 같아서 슬그머니 꺼버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정년 연장, 땡큐!?

 

이런 진퇴양난의 숙제를 앞에 둔 재작년, 그러니까 2021년 1월 초 국장이 나를 불렀다. ‘정년 연장’에 대한 의사를 물어왔고, 운영 규정을 개정해야 하지만, 큰 어려움 없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정년 연장? 실은 나의 검색 키워드 1위가 ‘정년 연장’이었고, 구글 알리미가 보내준 ‘정년 연장’ 관련 콘텐츠들은 기술 숙련도가 높은 기능직 외에 아직 실효성이 없다는 점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먼저 제안해주다니 의외였다. 그러나 그 순간 이걸 고마워하며 덥석 받아야 하나, 끔찍하게 여겨야 하나 망설여졌다. 정년 이후 특별한 계획도 대책도 없는 상황이니, 연장된다면 당연히 ‘땡큐’여야 하는데, 사실 내 나이가 오십하고도 아홉수에 접어들면서 하루 8시간 노동을 견디는 일이 점점 지겹고 힘들어졌다. 원인을 따지자면 복합적이겠지만, 나이에서 오는 여러 가지 노화 현상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늙어서도 이력서를 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쪽이 훨씬 더 끔찍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정년 연장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한 양가감정, 좋은 데 끔찍한, 이 마음을 누가 이해할까?

 

 

사진출처: Unsplashkrakenimages

 

 

 

국장도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나이도 있고, 마냥 일할 수는 없을 테니 정년과 국민연금 수급 사이의 소득 공백 구간을 잘 계산해서 언제까지 일할 건지 날짜를 꼼꼼히 따져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라는 충고까지 친절하게 해주었다(역시 젊은 총기 좋아). 집에서 노트북을 켜고 이것저것 따져가며 두드린 결과 2024년 6월까지는 더 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 최소 3년 6개월을 더 견뎌야 하는구나. 어림잡아 3년 정도 더 일하면 그래도 노후 걱정을 좀 덜 해도 되지 않을까?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연히 불안해하면서 이것저것 인터넷을 뒤지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이 뭐 할 거냐고 물어도 할 말이 생기니까 말이다. 이제 나의 임무는 앞으로의 3년을 잘 견뎌내는 것이다. 늘 그래왔듯,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니까.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견뎌야 한다고 나를 다독이며 국장에게 정년 연장을 하겠노라고, 3년 정도는 더 일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세상일 참 우습다. 스포츠도 인생도 끝날 때까지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끝까지 조바심치며 잘 지켜봐야 했던 것일까? 정년 연장을 제안받은 그해, 11월 어느 날, 갑자기 국장이 또 나를 호출했다. 국장은 A4용지에 인쇄된 사회복지시설 보조금 인건비 사용 관련 지침을 내게 내밀며 ‘우리가 정년 연장 사례가 없다 보니, 이걸 놓쳤어’ 하며 설명했다. 결론은 사회복지시설 종사자는 60세가 정년이고 정년 이후는 정부 보조금으로 인건비 지급이 불가하다는 얘기였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어쩌구... 이건 안된다고 봐야 해’(지침에 적시된 내용은 실현 불가능해 보였다) 하며 공무원 정년 연장이 되기 전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아뿔싸~ 300일 동안 믿었던 정년 연장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국장도 난처해했고, 나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정작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알았어, 내가 정년퇴직할게~ 안 그래도 갈등이 많았어. 차라리 잘됐어, 나도 계속 일해야 한다는 게 괴로웠어~”.

 

심정 같아서는 당장 연차를 쓰고 어디론가 꺼져버리고 싶었다. 총기 있게 굴던 국장이 원망스러웠다. 뭐야 날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책임지라고 대거리 질이라도 해야 하나? 정년 연장이 될 것이라 믿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하루하루 견디는 게 고역 같았다. 몸의 노화는 틈을 보이지 않았다. 집중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오후만 되면 나른해지며, 무기력해졌다. 그럼에도 보약을 지어 먹고 총명탕도 지어 먹으며 버텨야 한다고, 애써 다독이며 견뎌왔는데, 이건 정년퇴직이 아니라 마치 정년 해고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힘들었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일하는 게 힘들고 싫었는데 비록 자의는 아니지만 시원하지 않아? 했다가,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 노후 계획이 통째 날아갔는데 어쩌지? 했다가, 몸을 생각하면 잘 됐지, 뭐, 했다가 그놈의 ‘노후 준비’ 생각하면 ‘젠장!’ 했다가, 이 이상하고 복잡 미묘한 마음, 누가 이해할까?

 

그래도 그놈의 ‘이성’이라는 걸 찾아야 했다. 서로 좋자고 했다가 이런 결과가 나왔는데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길 상황은 아니지 않는가. 내 마음속에서는 비록 천둥 벼락이 칠지라도 나는 나의 ‘이성’이 시키는 대로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일을 해야 했다. 아니 오히려 일에 더 집중이 잘 되었다고나 할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짝 밀어놓았던 60 이후의 생이 내 품에 다시 와락 안긴 느낌! ‘정년 연장에 기대지 마, 네가 피 터지게 짊어지고 고민해야 할 몫이야, 편히 갈 생각은 마!!’ 운명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다시 정년 연장이 아닌 정년퇴직을 해야 했다. 이 모두가 정년퇴직을 앞둔 1년 동안 생긴 일이다.

 

 

 

 

 

 

60세 몸의 발견

 

 2022년 6월. 나의 퇴임식은 소소하고 화기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새로운 출발을 응원받으며, 정년 퇴직자 1호가 되었다. 내 기분은 그저 덤덤하고 밋밋했으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연공 서열도 장기근속도 아니고, 특별한 공로도 없었으니 명예로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었다. 퇴임식을 치르고도 나는 1주일이나 더 일을 마무리한 후 마침내 소속도, 일도 없는 ‘잉여의 몸’이 되었다.

 

퇴직 후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나를 팽팽하게 지탱해주던 중심축이 사라지고, 온몸이 해체된 듯한 허한 기분이 들었다. 서두를 이유가 없는 텅 빈 시간도 낯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 이렇게 공백인 채로 보내고 싶었다. 아침 출근을 위해 10분 단위로 맞추어 놓은 알람들도 모두 해제해 버렸다. 정년퇴직을 축하한다는 꽃다발들로 어수선한 집 안을 정리하고, 고맙다는 인사 문자를 보내고, 일과 관련된 단체 대화방들을 정리했다.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나는 색칠 게임을 내려받아 종일 해보았다. 하루가 너무 쉽게 가버렸다. 게임에 빠지면서도 불안했고, 뭔가 비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강박이 나를 옥죄었다. 무용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나이 60에도 시간 낭비라는걸 해볼 수 있을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일상적인 일을 일상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다시 요가를 시작했고, 매일 1만 보를 걷기 위해 늦은 시간 트랙에 나가기도 했다. 뭘 할 거냐는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물론 앞일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 결정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지나고 생각해보니 뭘 어떻게 고민해야 할지도 잘 몰랐다는 말이 더 솔직하겠다.

 

뭘 할래, 어떻게 살래? 라는 물음은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늘 따라다니는 질문이다. 그러나 60줄에 들어서서 마주친 이 질문은 왜 다르게 느껴질까? 아마도 이전과는 다른 생애주기에 들어섰기 때문 아닐까. ‘나이 든 몸’이 되어 간다는 것. 내가 정년 연장과 퇴직을 둘러싸고 그 실랑이를 하는 동안에도 몸의 변화는 폭풍처럼 몰려왔지만, 마음은 전혀 따라가지 못하면서 그 ‘이상 복잡 미묘’한 상태를 겪은 것 아니겠는가. 바보처럼 보약을 먹고 총명탕을 먹으며(물론 이것도 필요하다) 몸이 회복되기를 바라다니, 노화가 회복될 현상은 아니지 않는가. 늙어간다는 이 존재론적 변화 앞에서 이제는 젊고 자유로웠던 이전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법을 질문하고 찾아야 한다. 나는 그런 60의 생과 마주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그저 직관적으로 따라가고 있었을 뿐 의미 있는 질문이나 사유로 연결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년퇴직의 긍정적인 점이라면 막연했던 60의 실체를 앞당겨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해야겠다.

 

 

출처: Unsplash의Aaron Burden

출처: Unsplash의Aaron Burden

 

 

지금 내가 마주한 60+ 인생은 그 어느 때 보다 불안하다. 대위기처럼 느껴진다. ‘몸은 늙어가고 직업은 없다’ 이 문장 하나가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하고 절박한 나를 설명해준다. 맞다. 겁난다. 나도 내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잘 모르겠다. 흔히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분명 위로가 된다. 그런데 나는 생을 달리한 어느 여배우의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고 했던 말이 더 생각난다. 무슨 똥 품을 잡을 생각 따위는 없지만, 나는 돈이 없어도 나의 60+ 인생이 납작해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말인데, 겁내지 않고 잘 반겨보려구. ‘절박함’은 나의 무기이고, 절망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 준 친구들은 나의 ‘힘’이다. 이 불안하고 미숙한 존재가 온갖 장르의 서스펜스가 넘칠 것 같은 나의 60+ 인생을 맞으며 외쳐본다.

오냐, 와라~ Welcome To다!! 60+! 맞짱 한번 떠보자!!

 

 

 

 

댓글 8
  • 2023-01-30 09:09

    납짝하지 않은 60+ 기대해봅니다~

  • 2023-01-30 09:31

    먼불빛님 글에 납작해지지 않고 살려는 많은
    사람들이 겹쳐지네요^^
    찐 가오로 무장하고 맞짱을 반기는 선생님을
    격하게 응원합니다

  • 2023-01-30 09:51

    ‘함께’ 해요! 맞짱뜨는 먼불빛님 응원합니다!

  • 2023-01-30 11:05

    먼불빛님^^가오에 찬 시작으로 글쓰기를 사작한 것을 응원합니다~~~

  • 2023-01-30 16:40

    먼불빛님글 팬입니다 역쉬하는 감탄과 공감의 가슴아픔이 동시에 ㅠㅠㅠ

  • 2023-01-30 20:18

    정년퇴임시기에 겪는 복잡 미묘한감정이 텍스트로 와락~왔어요~ 매일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사는 1인으로서, 먼불빛님의 글이 다른 감각들이 불러 일으켜졌어요~
    오냐~~와라~~~맛짱~~~뜨실~~멈불빛샘의 하루하루를 응원합니다!!!!!!

  • 2023-02-03 17:06

    와~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맞짱 뜨려는 패기와 글쓰기하는 마음과 행동 함께 있으니 납작해질 일 절대 없을 듯요! 다음 편을 기다립니다!

    *비밀메모가 필터링되었습니다

  • 2023-02-07 14:31

    글을 이렇게나 잘 쓰시다니. 샘의 앞으로의 날이 궁금해지고 기다려 집니다.!

인문약방 에세이
  수치로 되돌아가다   모퉁이       나는 사실 그 사람들과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227쪽)   나의 부모는 18세에 나를 낳았다. 나는 실수로 태어난 미운 오리 새끼였다. 아주 어려서부터도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서 우아하게 저들을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삼십 년도 더 걸렸다. 어려서 이미 그들이 얼마나 철없고 부모 역할에 부적합한지를 알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그들의 무지와 폭력으로부터 나와 동생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서른이 될 때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그들의 대책 없는 생활을 뒤치다꺼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혼을 하는 내가 수치스럽다고 했고(본인들도 이혼했다.) 아이를 줘버리라고 너무도 쉽게 충고했다. 그제야 그들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를 알게 됐고, 그 길로 그들을 떠나서 가족과 단절했다. 그렇게 폭력과 무지, 염치가 없고 수치도 모르는 그들을 경멸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내가 선택한 삶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모든 게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책감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나를 둘러싼 작은 사회에는 나처럼 단절 혹은 탈주를 감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에게 나는 별종이거나 독한 사람일 뿐. 그래서일까 염치가 없고, 수치를 모르는 그들을 정말 오랜 시간의 망설임과 주저함 끝에 힘겹게 떠나왔지만, 설거지를 하고, 운전을 하고, 샤워를 하는 동안 그들과 매일 무수히 맞닥뜨렸다. 그들은 맏딸로서 책임감을 저버린 나를 비난했고, 혼자만 살겠다고 뛰쳐나갔다면서 힐난했다. 내가 그들을 떠나서 얻어낸 평안함과 여유 뒤에는 항상 죄책감과 수치심이...
  수치로 되돌아가다   모퉁이       나는 사실 그 사람들과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227쪽)   나의 부모는 18세에 나를 낳았다. 나는 실수로 태어난 미운 오리 새끼였다. 아주 어려서부터도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서 우아하게 저들을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삼십 년도 더 걸렸다. 어려서 이미 그들이 얼마나 철없고 부모 역할에 부적합한지를 알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그들의 무지와 폭력으로부터 나와 동생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서른이 될 때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그들의 대책 없는 생활을 뒤치다꺼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혼을 하는 내가 수치스럽다고 했고(본인들도 이혼했다.) 아이를 줘버리라고 너무도 쉽게 충고했다. 그제야 그들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를 알게 됐고, 그 길로 그들을 떠나서 가족과 단절했다. 그렇게 폭력과 무지, 염치가 없고 수치도 모르는 그들을 경멸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내가 선택한 삶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모든 게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책감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나를 둘러싼 작은 사회에는 나처럼 단절 혹은 탈주를 감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에게 나는 별종이거나 독한 사람일 뿐. 그래서일까 염치가 없고, 수치를 모르는 그들을 정말 오랜 시간의 망설임과 주저함 끝에 힘겹게 떠나왔지만, 설거지를 하고, 운전을 하고, 샤워를 하는 동안 그들과 매일 무수히 맞닥뜨렸다. 그들은 맏딸로서 책임감을 저버린 나를 비난했고, 혼자만 살겠다고 뛰쳐나갔다면서 힐난했다. 내가 그들을 떠나서 얻어낸 평안함과 여유 뒤에는 항상 죄책감과 수치심이...
문탁 2023.09.19 조회 219
인문약방 에세이
        자기 삶의 연구자 되기 해야     “나이듦과 자기서사”에서 지금껏 네 편의 에세이를 썼다. 인생의 취약한 경험을 서사로 풀어내는 것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확인했다. 존경받는 영성가, 작가, 교육자인 파커 J. 파머는 그를 주기적으로 괴롭혔던 우울증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을 겪을 때마다 모든 걸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그 경험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숙고 끝에 파머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간 살펴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직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파머는 이 과정이 취약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일부로 통합시키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하는 파머는, 서사가 조언이나 요령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다. 또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훌륭한 서사에는 독자들이 저자를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여기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나는 파머가 바람직한 자기 서사의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고 느꼈다.      이러한 파머의 통찰과 들어맞는 두 편의 소수자 서사를 만났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푸코 전기의 작가로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이하 <<랭스>>)와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하 <<실격>>)이다. 나는 취약함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서사들에 공감했고 두 저자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두 책이 소수자 서사의  훌륭한 모델로 다가온 이유는 자기 기술지(autoethnography)라는 독특한 글쓰기 장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소수자로 정체화하는 사회 과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자기 기술지는 개인의 경험 (“auto”)에서 출발한다. 그 경험의 사회 정치적 배경 (“ethno”)을 탐구하고, 경험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에 기반하여 자기를 상세히 기술 (“graphy”)한다. 자기 기술지 연구자는 인생의 궤적이 사회 구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피고, 개념과 이론을 동원하여 서사를 해석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에 대한 앎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나는 두 저자가 자기 기술지라는 글쓰기 형식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어졌다.            자기 분석은 곧 수치 분석이다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탐구는 개인적인 배제와 차별의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모욕의 경험을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하지 않았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 그 경험을 문제화하였다. 노동자 아들이자 성소수자로서 일상적인 모욕을 겪으면 자란 에리봉은 자연스럽게 게이의 성적 주체화를 연구의 주요 의제로 삼게 되었다. 가족과 고향을 탈주하여 자유로운 게이이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으나, 성적 수치는 그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몸에 새겨진 인장과 같은 것이었다. 떨쳐내기 어려운 성적 수치와 수치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가 에리봉의 지적 탐구의 중심이 되었다.     에리봉은 폭력 가장이자 동성애 혐오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지금껏 외면해 왔던 가난한 노동자 아들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줄곧 본인의 동성애 성향과 아버지 및 노동 계급 문화의 동성애 혐오라는 “고상한” 이유를 들어, 가족과 노동 계급을 떠나야 했다고 설명해 왔었다.  노동자 도시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자란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그는 본인이 노동자들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 체계에 대해 경멸감과 수치심을 갖고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명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했음에도 에리봉은 상급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문학, 철학, 예술 등의 교육은 중산층이 전유하는 아비투스(학습된 문화적 성향 쳬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고등 학교 과정에서 접하게 된 부르주아의 언어, 교양있는 행동, 상류층 취향의 문화 등은 동급생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에리봉에겐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는 무지를 감추기 위해 아는 것처럼 위장하고, 소외감을 반항으로 표출하고, 떄로는 민중 계급의 남성성을 버리고 심미주의자 소년이 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중산층 아비투스에 대한 체화나 학업에 열중하기 위한 신체적 훈육이 없이 지식인 사회로의 편입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란 걸 체험했다. 프랑스의 상급 학교 교육은 상류층 아이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었기에, 에리봉과 같은 노동 계급의 아이들은 지적인 열망을 갖더라도 그 체계 안에서 배제와 수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치심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라는 에리봉의 분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 자본과 사회 관계 자본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는 구별짓기는 내가 고등 교육에 접근하고자 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한국 및 미국의 교육 체계에서도 목격할 수 있기 떄문이다. 에리봉은 문화 자본이란 개념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급적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들(아비 투스, 사회 관계 자본, 구조의 평행 이동 등)에 기반하여 본인이 경험한 계급과 불평등을 분석한다. 사회학적 개념들을 장착하여 서사를 해석함으로써 구조 속에 위치한 개인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회학적 자기 탐구는 사회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앎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에리봉이 계급적 수치에 중점을 두었다면,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을 갖고 태어난 김원영은 <<실격>>에서 몸의 수치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신체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법과 제도, 사회적 관습, 통념 등에 의해 ‘잘못된 삶’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철저히 논증한다.  에리봉과 구별되는 점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적극적 변론을 펼친 점이다.   저자는 ‘비정상적’ 몸으로 인해 겪는 수치를 자신이 어떻게 다루는지 상세히 기술한다. 모욕적인 언사나 상황에 직면할 때, 그는 좌절감에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하여 말을 더듬지 않는다. 자아를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바로 구분한다. 바라보는 나는 냉철하게 상황 분석을 하고, 보여지는 나는 그 분석에 기반하여 유머 또는 차가운 분노가 담긴 대응을 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자신을 보고 가여워 하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묻는 이에게 “장애인 할인을 받으려고요”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방어적 퍼포먼스가 자기 존중과 사회적 존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여기서 나아가 수치가 자기 수용이나 존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자신과 비슷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들과 연대하여 “수평적 정체성” 그룹을 구성한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휠체어를 탄 친구들과 함께 간지 나는 휠체어 운전법을 연습하였고, 그 작동 기술 자체가 그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 경험은 자신들을 정상성이 결여된 존재가 아닌 정상성과 다른 무엇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하여 지식인 또는 전문직 종사자로의 계층 이동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역경을 극복한 성공의 서사 구조에 딱 들어맞지만, 이들의 자기 기술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성공 서사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치의 경험을 드러내며 ‘벌거벗은’ 채 독자에게 다가선다.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 경험을 사회 구조 내에서 분석하고, 해석한다.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두 저자가 깊이 있는 자기 이헤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변호사       정체성의 교차가 핵심이다   이 두편의 자기 기술지는 개인적인 경험이 구조의 산물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각 개인에게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정체성의 다양성과 교차성으로 인해 소수자 개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기술지를 통해 에리봉과 김원영은 여러 정체성의 충돌과 교차를 탐구하였다.      <<랭스>>는 자기 탐구가 성적 주체화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기에,  계급적 주체화를 주로 다루었다. 그럼에도에리봉의 서사에는 자신의 계급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 지식인,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게이 지식인이 되기 위한 여정은 성적인 자아와 계급적 자아가 충돌 가운데 이뤄진 것이었다. 또 게이로서의 정체성은 동성애 혐오적 노동자 문화와 거리를 두면서 성적 주체화에 대한 탐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에리봉의 서사를 통해 교차된 정체성이 가족(노동자 남성, 노동자 여성 등)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중 나는 에리봉이 명시적으로 기술하지 않은 젠더와 계급의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어머니는 저자의 동성애 성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반면,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노동 계급 남성들의 외도나 성적인 유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여성들의 자유 연애와 낙태(외할머니의 경우)는 사회적 낙인과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계급적 배경과 젠더로 인해 남성들이 겪지 않은 성희롱과 성적 대상화를 겪어야 했다. 같은 계급 내에서도 젠더에 따라 특권과 배제가 다르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도 장애와 다른 정체성들의 교차가 개별 장애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계급과 장애가 교차할 때 겪게 되는 모욕적인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장애인들은 적은 액수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대신 정치인들의  PR을 위해 동원되고 “전시품”으로 취급 받는다. 수치심을 느끼지만 본인들의 위치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하다.  장애인의 정체성은 학력과도 밀접하게 교차한다. 이동이 불가능하고 교육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아, 장애인들은 초등 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배제로 인해 이들은 자기를 드러낼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자신을 설명할 언어 발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낮은 계급과 무학 또는 저학력의 정체성이 장애와 만날 때, 출발부터 실격당한 인생의 운명에 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리봉은 최근의 사회 과학 연구와 정치 담론이 특정 정체성의 사회적 인정에 집중함으로써 계급이 간과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정체성 정치에서 놓치기 쉬운 개인적 체험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존재를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우리의 복잡한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개인을 특정 정체성의 고정된 주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완전한 자기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반증해 주었다. 나는 성적인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집중한 나머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정체성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여 지금의 나를 구성하였는지 살펴보지 못했다. 내가 겪은 배제와 차별, 그리고 특권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표현되는 나의 독특하고 복잡한 위치성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살필 때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두 책이 보여주듯 자기 기술지는 개인 서사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교차성의 서사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힘 또한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에리봉과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지만  사회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등 교육에 접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게이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대도시로 탈출한 경험도 유사하다. 난 김원영처럼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란 걸 확신하고 확인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원영이 장애인 이외의 “매력 자원”이 부족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예를 들어, ‘못생겼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집단 괴롭힘을 당한 명문대 여힉셍)을 본인과 비슷하게 실격당한 처지에 있다고 얘기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맥락이 그 서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엮어게 되는 힘이 있다. 두 저자의 복잡한 서사에 나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음을 발견하면서 난 이들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 기술지는 ‘나’의 서사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서사로 해석되고 확장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 기술지를 쓸 수 있을까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기술지 작업은 밀도 있는 자기 반성(self-reflection)과 엄격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수치와 배제를 생산하는 구조와 사회적 질서의 작동 방식을 잘 드러내었다. 동시에 그 질서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결합과 충돌 가운데 구성된 나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지난한 자기 연구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역자는 에리봉의 자기 연구의 과정을 자기 발명이라고 불렀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계급이 본인 인생의 변곡점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고, 특히 계급적 수치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핀 것 자체가 그에겐 자기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김원영은 자신을 비롯한 실격당한 이들의 삶이 가치있고 존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변론을 끝까지 밀어 부쳤다. 그의 자기 변호는 논리와 이론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이뤄졌고, 독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논리, 설득력, 당당함을 갖춘 서사는 그가 <<실격>>을 자기 발명의 일환으로 삼았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두 소수자의 자기기술지에 공감했고 영감을 받았다. 이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용기, 자기 성찰 능력, 학문적 엄격함, 정교한 자기 기술 능력 등이 글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자와 작가로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춘 두 사람이 부러웠다. 나와 같이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 자기 기술지를 서사의 장르로 삼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회 과학이나 철학 등에 대한 지적인 토대가 약하다. 개념과 서사를 엮는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훈련도 부족하다. 이에 대한 장기간의 밀도 있는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엄격한 의미의 자기 기술지에 접근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두 텍스트로부터  서사를 구성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기준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 기준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구조와 결합되어 서술되었는가’, ‘학문적 개념과 이론이 경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가’, ‘개인의 고유한 교차적 정체성이 드러났는가’,  ‘고유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자기 삶의 연구자”라는 표현은 박노해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자기 기술지는 서사가 중심이기 때문에 이론과 개념어로 점철된 논문에 비하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이 비교적  쉽다. 단,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 집단의 이해와 권리에 집중하는 사회운동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매몰되어 타정체성 그룹과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극단적으로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기 삶의 연구자 되기 해야     “나이듦과 자기서사”에서 지금껏 네 편의 에세이를 썼다. 인생의 취약한 경험을 서사로 풀어내는 것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확인했다. 존경받는 영성가, 작가, 교육자인 파커 J. 파머는 그를 주기적으로 괴롭혔던 우울증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을 겪을 때마다 모든 걸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그 경험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숙고 끝에 파머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간 살펴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직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파머는 이 과정이 취약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일부로 통합시키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하는 파머는, 서사가 조언이나 요령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다. 또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훌륭한 서사에는 독자들이 저자를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여기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나는 파머가 바람직한 자기 서사의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고 느꼈다.      이러한 파머의 통찰과 들어맞는 두 편의 소수자 서사를 만났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푸코 전기의 작가로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이하 <<랭스>>)와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하 <<실격>>)이다. 나는 취약함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서사들에 공감했고 두 저자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두 책이 소수자 서사의  훌륭한 모델로 다가온 이유는 자기 기술지(autoethnography)라는 독특한 글쓰기 장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소수자로 정체화하는 사회 과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자기 기술지는 개인의 경험 (“auto”)에서 출발한다. 그 경험의 사회 정치적 배경 (“ethno”)을 탐구하고, 경험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에 기반하여 자기를 상세히 기술 (“graphy”)한다. 자기 기술지 연구자는 인생의 궤적이 사회 구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피고, 개념과 이론을 동원하여 서사를 해석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에 대한 앎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나는 두 저자가 자기 기술지라는 글쓰기 형식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어졌다.            자기 분석은 곧 수치 분석이다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탐구는 개인적인 배제와 차별의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모욕의 경험을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하지 않았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 그 경험을 문제화하였다. 노동자 아들이자 성소수자로서 일상적인 모욕을 겪으면 자란 에리봉은 자연스럽게 게이의 성적 주체화를 연구의 주요 의제로 삼게 되었다. 가족과 고향을 탈주하여 자유로운 게이이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으나, 성적 수치는 그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몸에 새겨진 인장과 같은 것이었다. 떨쳐내기 어려운 성적 수치와 수치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가 에리봉의 지적 탐구의 중심이 되었다.     에리봉은 폭력 가장이자 동성애 혐오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지금껏 외면해 왔던 가난한 노동자 아들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줄곧 본인의 동성애 성향과 아버지 및 노동 계급 문화의 동성애 혐오라는 “고상한” 이유를 들어, 가족과 노동 계급을 떠나야 했다고 설명해 왔었다.  노동자 도시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자란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그는 본인이 노동자들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 체계에 대해 경멸감과 수치심을 갖고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명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했음에도 에리봉은 상급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문학, 철학, 예술 등의 교육은 중산층이 전유하는 아비투스(학습된 문화적 성향 쳬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고등 학교 과정에서 접하게 된 부르주아의 언어, 교양있는 행동, 상류층 취향의 문화 등은 동급생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에리봉에겐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는 무지를 감추기 위해 아는 것처럼 위장하고, 소외감을 반항으로 표출하고, 떄로는 민중 계급의 남성성을 버리고 심미주의자 소년이 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중산층 아비투스에 대한 체화나 학업에 열중하기 위한 신체적 훈육이 없이 지식인 사회로의 편입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란 걸 체험했다. 프랑스의 상급 학교 교육은 상류층 아이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었기에, 에리봉과 같은 노동 계급의 아이들은 지적인 열망을 갖더라도 그 체계 안에서 배제와 수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치심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라는 에리봉의 분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 자본과 사회 관계 자본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는 구별짓기는 내가 고등 교육에 접근하고자 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한국 및 미국의 교육 체계에서도 목격할 수 있기 떄문이다. 에리봉은 문화 자본이란 개념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급적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들(아비 투스, 사회 관계 자본, 구조의 평행 이동 등)에 기반하여 본인이 경험한 계급과 불평등을 분석한다. 사회학적 개념들을 장착하여 서사를 해석함으로써 구조 속에 위치한 개인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회학적 자기 탐구는 사회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앎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에리봉이 계급적 수치에 중점을 두었다면,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을 갖고 태어난 김원영은 <<실격>>에서 몸의 수치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신체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법과 제도, 사회적 관습, 통념 등에 의해 ‘잘못된 삶’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철저히 논증한다.  에리봉과 구별되는 점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적극적 변론을 펼친 점이다.   저자는 ‘비정상적’ 몸으로 인해 겪는 수치를 자신이 어떻게 다루는지 상세히 기술한다. 모욕적인 언사나 상황에 직면할 때, 그는 좌절감에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하여 말을 더듬지 않는다. 자아를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바로 구분한다. 바라보는 나는 냉철하게 상황 분석을 하고, 보여지는 나는 그 분석에 기반하여 유머 또는 차가운 분노가 담긴 대응을 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자신을 보고 가여워 하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묻는 이에게 “장애인 할인을 받으려고요”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방어적 퍼포먼스가 자기 존중과 사회적 존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여기서 나아가 수치가 자기 수용이나 존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자신과 비슷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들과 연대하여 “수평적 정체성” 그룹을 구성한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휠체어를 탄 친구들과 함께 간지 나는 휠체어 운전법을 연습하였고, 그 작동 기술 자체가 그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 경험은 자신들을 정상성이 결여된 존재가 아닌 정상성과 다른 무엇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하여 지식인 또는 전문직 종사자로의 계층 이동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역경을 극복한 성공의 서사 구조에 딱 들어맞지만, 이들의 자기 기술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성공 서사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치의 경험을 드러내며 ‘벌거벗은’ 채 독자에게 다가선다.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 경험을 사회 구조 내에서 분석하고, 해석한다.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두 저자가 깊이 있는 자기 이헤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변호사       정체성의 교차가 핵심이다   이 두편의 자기 기술지는 개인적인 경험이 구조의 산물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각 개인에게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정체성의 다양성과 교차성으로 인해 소수자 개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기술지를 통해 에리봉과 김원영은 여러 정체성의 충돌과 교차를 탐구하였다.      <<랭스>>는 자기 탐구가 성적 주체화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기에,  계급적 주체화를 주로 다루었다. 그럼에도에리봉의 서사에는 자신의 계급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 지식인,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게이 지식인이 되기 위한 여정은 성적인 자아와 계급적 자아가 충돌 가운데 이뤄진 것이었다. 또 게이로서의 정체성은 동성애 혐오적 노동자 문화와 거리를 두면서 성적 주체화에 대한 탐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에리봉의 서사를 통해 교차된 정체성이 가족(노동자 남성, 노동자 여성 등)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중 나는 에리봉이 명시적으로 기술하지 않은 젠더와 계급의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어머니는 저자의 동성애 성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반면,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노동 계급 남성들의 외도나 성적인 유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여성들의 자유 연애와 낙태(외할머니의 경우)는 사회적 낙인과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계급적 배경과 젠더로 인해 남성들이 겪지 않은 성희롱과 성적 대상화를 겪어야 했다. 같은 계급 내에서도 젠더에 따라 특권과 배제가 다르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도 장애와 다른 정체성들의 교차가 개별 장애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계급과 장애가 교차할 때 겪게 되는 모욕적인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장애인들은 적은 액수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대신 정치인들의  PR을 위해 동원되고 “전시품”으로 취급 받는다. 수치심을 느끼지만 본인들의 위치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하다.  장애인의 정체성은 학력과도 밀접하게 교차한다. 이동이 불가능하고 교육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아, 장애인들은 초등 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배제로 인해 이들은 자기를 드러낼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자신을 설명할 언어 발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낮은 계급과 무학 또는 저학력의 정체성이 장애와 만날 때, 출발부터 실격당한 인생의 운명에 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리봉은 최근의 사회 과학 연구와 정치 담론이 특정 정체성의 사회적 인정에 집중함으로써 계급이 간과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정체성 정치에서 놓치기 쉬운 개인적 체험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존재를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우리의 복잡한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개인을 특정 정체성의 고정된 주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완전한 자기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반증해 주었다. 나는 성적인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집중한 나머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정체성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여 지금의 나를 구성하였는지 살펴보지 못했다. 내가 겪은 배제와 차별, 그리고 특권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표현되는 나의 독특하고 복잡한 위치성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살필 때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두 책이 보여주듯 자기 기술지는 개인 서사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교차성의 서사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힘 또한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에리봉과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지만  사회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등 교육에 접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게이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대도시로 탈출한 경험도 유사하다. 난 김원영처럼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란 걸 확신하고 확인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원영이 장애인 이외의 “매력 자원”이 부족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예를 들어, ‘못생겼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집단 괴롭힘을 당한 명문대 여힉셍)을 본인과 비슷하게 실격당한 처지에 있다고 얘기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맥락이 그 서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엮어게 되는 힘이 있다. 두 저자의 복잡한 서사에 나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음을 발견하면서 난 이들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 기술지는 ‘나’의 서사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서사로 해석되고 확장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 기술지를 쓸 수 있을까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기술지 작업은 밀도 있는 자기 반성(self-reflection)과 엄격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수치와 배제를 생산하는 구조와 사회적 질서의 작동 방식을 잘 드러내었다. 동시에 그 질서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결합과 충돌 가운데 구성된 나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지난한 자기 연구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역자는 에리봉의 자기 연구의 과정을 자기 발명이라고 불렀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계급이 본인 인생의 변곡점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고, 특히 계급적 수치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핀 것 자체가 그에겐 자기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김원영은 자신을 비롯한 실격당한 이들의 삶이 가치있고 존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변론을 끝까지 밀어 부쳤다. 그의 자기 변호는 논리와 이론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이뤄졌고, 독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논리, 설득력, 당당함을 갖춘 서사는 그가 <<실격>>을 자기 발명의 일환으로 삼았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두 소수자의 자기기술지에 공감했고 영감을 받았다. 이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용기, 자기 성찰 능력, 학문적 엄격함, 정교한 자기 기술 능력 등이 글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자와 작가로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춘 두 사람이 부러웠다. 나와 같이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 자기 기술지를 서사의 장르로 삼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회 과학이나 철학 등에 대한 지적인 토대가 약하다. 개념과 서사를 엮는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훈련도 부족하다. 이에 대한 장기간의 밀도 있는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엄격한 의미의 자기 기술지에 접근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두 텍스트로부터  서사를 구성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기준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 기준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구조와 결합되어 서술되었는가’, ‘학문적 개념과 이론이 경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가’, ‘개인의 고유한 교차적 정체성이 드러났는가’,  ‘고유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자기 삶의 연구자”라는 표현은 박노해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자기 기술지는 서사가 중심이기 때문에 이론과 개념어로 점철된 논문에 비하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이 비교적  쉽다. 단,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 집단의 이해와 권리에 집중하는 사회운동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매몰되어 타정체성 그룹과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극단적으로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문탁 2023.09.19 조회 73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 합격자 게시판에서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쁨, 설레임, 죄책감, 부담감 등의 감정이 교차했다. 두려움 자체였던 아버지에게서, 성소수자로서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시골 동네에서 벗어날 명분이 생겨 기뻤다. 거기에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내 처지과 인생이 달라질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건 우리집 형편에 무모한 일이었다. 다른 시골 친구들처럼 취업하여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 주질 못할망정 가난한 시골집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들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 켠에 늘 죄책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에도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과연 내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고 수업료에도 보탤 수 있을까, 내향적이고 자의식 많은 내가 고립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상경하게 되었다.     서울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구로공단 근처의 지하방에서 자취를 했다. 바퀴벌레와 같이 사는 건 일상이었고, 때론 쥐까지 출몰했다. 보안이라곤 자물쇠 하나가 전부였던지라 며칠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밤손님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방을 다 헤집어 놓고 가곤 했다. 집주인들은 이사를 할 때면 아직 나오지 않은 마지막 달의 전기세와 물세를 몇 배로 뻥튀기하여 받아냈다. 그런 다음에야 월세 보증금을 내주었다. 거기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수업료를 제때 내고 졸업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노순택 사진 (오마이 뉴스에서 가져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9822 )       처음엔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일머리가 별로 없는데다 멀티태스킹이 잘 안되어 힘들었다. 게다가 점주가 일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주지 않아 그 일은 오래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남이나 목동에서 대학생 과외 수요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외를 연결해 주는 학교 취업처를 자주 들락거리고 벼룩시장에 광고를 냈다. 처음에 구한 과외들은 단기로 끝났다. 언변도 없었고 의욕이 없는 학생을 독려할 카리스마도 부족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요령을 터득했다. 난 무조건 10분 일찍 도착하는 걸 룰로 정했다. 내가 공부했던 방식을 복기해보며 어려운 영어문법 개념을 정리해서 가르쳤다. 학부모의 신뢰를 얻었고 과외가 꾸준히 연결될 수 있었다. 만원권 지폐가 빼곡히 담긴 봉투를 매달 받게 되면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은 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정된 돈으로 살아야 했기에 짠테크는 필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의 자취로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가격이 싼 몇 가지 제철 야채와 계란만으로도 여러 반찬과 국을 뚝딱 만들어냈다. 또 얼마 안되는 수입이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불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매달 정해 놓은 금액을 단기 적금에 넣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불어난 원금을 수업료에 충당했다.    나는  출퇴근 시간의 1호선 열차가 좋았다. 마치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안도감이 느껴졌다. 실제적인 연결감이 아니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친밀한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단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방 출신의 노동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다. 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돈도 내세울 지위도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은 내가 쉽게 수용할 수 없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사는 고향 친구들을 가끔씩 보는 게 반가웠지만 갈수록 이들과의 공유 지점이 없어졌다. 술에 취해 마초적 기질을 드러내는 것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 가면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속한 학과는 강남 출신과 해외거주자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학회 활동이나 데모 등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의 정의감과 열정이 부러웠지만, 난 노동자 계층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었고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다.    나는 청년기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억누르며 살아왔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를 위해서 살았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마음 한 켠에 있다. 가난과 어수룩함으로 인해 온당한 대우와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상처도 있다. 또 고립되어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이처럼 자존감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절은 건드리지 않고 묻어두는 게 속편했다.  20대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죄책감을 곁으로 밀어 놓자 지금껏 주목하지 않은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내게는 당시 마주한 장애물의 무게만큼이나 이를 넘어설 에너지가 있었다.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천천히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때론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도 발휘했다. 내 안에 자신을 지키는 힘이 생각보다 많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청년기를 떠올릴 때 무심코 사용했던 ‘자립’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를 챙겨주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는 다른 과외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난 시골집에서, 누나에게서 가끔식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학과장님은 장학금을 챙겨주기도 했다. 과외 학생의 학부모는 명절 때마다 보너스를 주셨다. 쉽게 잊고 살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를 살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처지와 내향적 성격으로 인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 다가와준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을 털어 놓았다. 다른 친구는 가족 문제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난 이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나, 다음 학기 수업료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란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농촌 출신의 일하는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내 배경에 대한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거부당할 것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자의식과 외로움으로 힘들었고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대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난 연결되어 있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음 편에서는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가진 두려움이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 합격자 게시판에서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쁨, 설레임, 죄책감, 부담감 등의 감정이 교차했다. 두려움 자체였던 아버지에게서, 성소수자로서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시골 동네에서 벗어날 명분이 생겨 기뻤다. 거기에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내 처지과 인생이 달라질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건 우리집 형편에 무모한 일이었다. 다른 시골 친구들처럼 취업하여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 주질 못할망정 가난한 시골집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들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 켠에 늘 죄책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에도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과연 내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고 수업료에도 보탤 수 있을까, 내향적이고 자의식 많은 내가 고립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상경하게 되었다.     서울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구로공단 근처의 지하방에서 자취를 했다. 바퀴벌레와 같이 사는 건 일상이었고, 때론 쥐까지 출몰했다. 보안이라곤 자물쇠 하나가 전부였던지라 며칠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밤손님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방을 다 헤집어 놓고 가곤 했다. 집주인들은 이사를 할 때면 아직 나오지 않은 마지막 달의 전기세와 물세를 몇 배로 뻥튀기하여 받아냈다. 그런 다음에야 월세 보증금을 내주었다. 거기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수업료를 제때 내고 졸업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노순택 사진 (오마이 뉴스에서 가져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9822 )       처음엔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일머리가 별로 없는데다 멀티태스킹이 잘 안되어 힘들었다. 게다가 점주가 일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주지 않아 그 일은 오래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남이나 목동에서 대학생 과외 수요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외를 연결해 주는 학교 취업처를 자주 들락거리고 벼룩시장에 광고를 냈다. 처음에 구한 과외들은 단기로 끝났다. 언변도 없었고 의욕이 없는 학생을 독려할 카리스마도 부족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요령을 터득했다. 난 무조건 10분 일찍 도착하는 걸 룰로 정했다. 내가 공부했던 방식을 복기해보며 어려운 영어문법 개념을 정리해서 가르쳤다. 학부모의 신뢰를 얻었고 과외가 꾸준히 연결될 수 있었다. 만원권 지폐가 빼곡히 담긴 봉투를 매달 받게 되면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은 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정된 돈으로 살아야 했기에 짠테크는 필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의 자취로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가격이 싼 몇 가지 제철 야채와 계란만으로도 여러 반찬과 국을 뚝딱 만들어냈다. 또 얼마 안되는 수입이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불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매달 정해 놓은 금액을 단기 적금에 넣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불어난 원금을 수업료에 충당했다.    나는  출퇴근 시간의 1호선 열차가 좋았다. 마치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안도감이 느껴졌다. 실제적인 연결감이 아니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친밀한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단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방 출신의 노동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다. 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돈도 내세울 지위도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은 내가 쉽게 수용할 수 없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사는 고향 친구들을 가끔씩 보는 게 반가웠지만 갈수록 이들과의 공유 지점이 없어졌다. 술에 취해 마초적 기질을 드러내는 것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 가면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속한 학과는 강남 출신과 해외거주자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학회 활동이나 데모 등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의 정의감과 열정이 부러웠지만, 난 노동자 계층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었고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다.    나는 청년기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억누르며 살아왔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를 위해서 살았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마음 한 켠에 있다. 가난과 어수룩함으로 인해 온당한 대우와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상처도 있다. 또 고립되어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이처럼 자존감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절은 건드리지 않고 묻어두는 게 속편했다.  20대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죄책감을 곁으로 밀어 놓자 지금껏 주목하지 않은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내게는 당시 마주한 장애물의 무게만큼이나 이를 넘어설 에너지가 있었다.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천천히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때론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도 발휘했다. 내 안에 자신을 지키는 힘이 생각보다 많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청년기를 떠올릴 때 무심코 사용했던 ‘자립’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를 챙겨주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는 다른 과외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난 시골집에서, 누나에게서 가끔식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학과장님은 장학금을 챙겨주기도 했다. 과외 학생의 학부모는 명절 때마다 보너스를 주셨다. 쉽게 잊고 살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를 살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처지와 내향적 성격으로 인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 다가와준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을 털어 놓았다. 다른 친구는 가족 문제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난 이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나, 다음 학기 수업료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란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농촌 출신의 일하는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내 배경에 대한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거부당할 것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자의식과 외로움으로 힘들었고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대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난 연결되어 있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음 편에서는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가진 두려움이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문탁 2023.09.15 조회 133
인문약방 에세이
      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_ 고미숙     김은영         1. 『동의보감』은 삶의 비전서다   저자, 고미숙은 40대에 생긴 종양의 치료법이 수술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없이 스스로 종양을 감당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먼저, 병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체 병이 왜 생겨났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데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병일까 등등. 질문이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졌고, 병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병은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와 몸을 이어주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몸들’에 대한 탐구로 연결되었고, 『동의보감』과 접속하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앎’들이 재배치되어 연결되는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인식론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고, 몸을 치유하는 것은 삶을 치유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질병과 치료에 국한되는 의서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약이나 침으로 하는 치료 보다 수양을 우선시 하라는 특급 요청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며,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중국 의학사의 엑기스가 깔려있다.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생명과 자연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텍스트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경편]의 첫 장에 등장하는 ‘신형장부도’와 손진인의 멘트를 들 수 있다.   신형장부도란 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린...
      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_ 고미숙     김은영         1. 『동의보감』은 삶의 비전서다   저자, 고미숙은 40대에 생긴 종양의 치료법이 수술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없이 스스로 종양을 감당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먼저, 병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체 병이 왜 생겨났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데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병일까 등등. 질문이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졌고, 병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병은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와 몸을 이어주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몸들’에 대한 탐구로 연결되었고, 『동의보감』과 접속하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앎’들이 재배치되어 연결되는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인식론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고, 몸을 치유하는 것은 삶을 치유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질병과 치료에 국한되는 의서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약이나 침으로 하는 치료 보다 수양을 우선시 하라는 특급 요청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며,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중국 의학사의 엑기스가 깔려있다.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생명과 자연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텍스트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경편]의 첫 장에 등장하는 ‘신형장부도’와 손진인의 멘트를 들 수 있다.   신형장부도란 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린...
문탁 2023.09.11 조회 141
인문약방 에세이
      『동의보감』으로 새롭게 보는 질병과 양생   지현       1.앞만 보고 달리다가 고꾸라지다   나의 통증연대기는 서른일곱 살에 심각한 요통이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퇴사를 하고 정형외과와 한방병원 등을 전전한 끝에 통증은 경감됐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다양한 병증이 발현됐다. 술이나 커피는 물론 홍차, 녹차, 심지어 초콜릿을 먹어도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카페인에 민감해졌다. 고춧가루가 든 음식을 먹으면 밤에 잘 때 땀을 많이 흘리는 바람에(도한) 김치나 라면도 먹을 수가 없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피부에 뭐가 나거나 두통이 생기곤 했다. 햇볕을 많이 쬐거나 과로를 하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말을 좀 많이 하면 확 까부라졌다. 9 to 6의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렸다.   만일 40대 중후반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3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엔 아직 젊었다. 활동가로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더 많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전문가로 성장해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굴렀다. 한창 자기 분야에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친구들이나 옛 동료들을 보면 부러움과 질투심에 속이 시끄러웠다. 몸, 몸, 몸. 이놈의 몸이 원흉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이 ‘몸’이라는 녀석. 당시 나에게 ‘몸’은 내가 사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나는데 나에겐 그게 몸이었다. 지난...
      『동의보감』으로 새롭게 보는 질병과 양생   지현       1.앞만 보고 달리다가 고꾸라지다   나의 통증연대기는 서른일곱 살에 심각한 요통이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퇴사를 하고 정형외과와 한방병원 등을 전전한 끝에 통증은 경감됐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다양한 병증이 발현됐다. 술이나 커피는 물론 홍차, 녹차, 심지어 초콜릿을 먹어도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카페인에 민감해졌다. 고춧가루가 든 음식을 먹으면 밤에 잘 때 땀을 많이 흘리는 바람에(도한) 김치나 라면도 먹을 수가 없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피부에 뭐가 나거나 두통이 생기곤 했다. 햇볕을 많이 쬐거나 과로를 하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말을 좀 많이 하면 확 까부라졌다. 9 to 6의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렸다.   만일 40대 중후반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3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엔 아직 젊었다. 활동가로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더 많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전문가로 성장해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굴렀다. 한창 자기 분야에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친구들이나 옛 동료들을 보면 부러움과 질투심에 속이 시끄러웠다. 몸, 몸, 몸. 이놈의 몸이 원흉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이 ‘몸’이라는 녀석. 당시 나에게 ‘몸’은 내가 사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나는데 나에겐 그게 몸이었다. 지난...
문탁 2023.09.11 조회 39
인문약방 에세이
      몸 = 신체 + 정신 + 자연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읽고     김지영     1. 한의학, 친근하지만 관심은 없습니다   동의보감은 총 25권(번역본은 총 2,500쪽)에 달한다고 한다. 분량에서부터 엄청나게 방대한 의서라는 것을 알게 한다. 내 또래에서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99년 방영돼 국민드라마 반열에 오른 <허준>을 통해 애민정신이 넘치는 명의가 불굴의 의지로 완성시킨 한의학의 자랑스런 유산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 그 의서 아닌가. 그렇게 친근했지만 나는 동의보감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 등은 한번쯤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기록유산인 동의보감은 그렇지 않았다. 한의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의서를 본다한들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침술을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어디에 써먹는다고 그걸 읽겠나? 바탕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의서는 그렇다치고 한의원은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 한의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보약이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란 나는 성장기에 보약 한 첩 먹어본 기억이 없다. 어린 시절 한의원 이미지는 보약 짓는 곳, 부자들의 구역이었다. 내가 한의원 문턱을 처음 넘은 건 서른을 훌쩍 넘었을 때로 기억한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나도 이제 보약 한 재 지어 먹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으로 한의원에 갔다. 맥을 짚은 후 한의사는 내 체질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무슨 체질이라고 했는지 지금은 까먹었다. 그 때 먹은 보약이...
      몸 = 신체 + 정신 + 자연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읽고     김지영     1. 한의학, 친근하지만 관심은 없습니다   동의보감은 총 25권(번역본은 총 2,500쪽)에 달한다고 한다. 분량에서부터 엄청나게 방대한 의서라는 것을 알게 한다. 내 또래에서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99년 방영돼 국민드라마 반열에 오른 <허준>을 통해 애민정신이 넘치는 명의가 불굴의 의지로 완성시킨 한의학의 자랑스런 유산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 그 의서 아닌가. 그렇게 친근했지만 나는 동의보감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 등은 한번쯤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기록유산인 동의보감은 그렇지 않았다. 한의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의서를 본다한들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침술을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어디에 써먹는다고 그걸 읽겠나? 바탕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의서는 그렇다치고 한의원은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 한의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보약이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란 나는 성장기에 보약 한 첩 먹어본 기억이 없다. 어린 시절 한의원 이미지는 보약 짓는 곳, 부자들의 구역이었다. 내가 한의원 문턱을 처음 넘은 건 서른을 훌쩍 넘었을 때로 기억한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나도 이제 보약 한 재 지어 먹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으로 한의원에 갔다. 맥을 짚은 후 한의사는 내 체질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무슨 체질이라고 했는지 지금은 까먹었다. 그 때 먹은 보약이...
문탁 2023.09.11 조회 30
인문약방 에세이
    복직과 두려움, 떨쳐낼 수 있을까?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리뷰       박정은       1.작은 갈등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   일주일 뒤에 5년간 휴직이 끝나고 출근을 한다. 어제 개학준비로 학교에 가서 동료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민원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도시학교보다 시골학교는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5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학생과도 잘 지내야 하는데 학부모는 더 큰 고민으로 보였다. 학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게 민원이 발생하지 않는데 중요해보였다. 학생에 대해 보이는 대로 말을 하면 불쾌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떤 자세로 학교로 돌아가야 할까.   복직을 앞두고 참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데 그 이유가 뭘까?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관계에서 갈등은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오직 완전무결하게 평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작은 갈등에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왜 사건이 발생하고 생기는 감정들을 가볍게 털어버리지 못할까. 감정들을 꽁꽁 싸매고 행여 흩어질까 재차 확인하고 묶어둔다. 산다는 것이 사건의 연속인데 다음 사건이 일어나면 앞서 묵혀둔 감정 위에 새로 생긴 감정을 덧씌운다. 점점 몸과 마음이 무거워져 천근만근이다. 그러다보면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오기를 날짜만 새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담임인 나조차도 학교를 즐겁게 다닐 수 없는데 아이들한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사건의 연속 속에서 가볍게, 즐겁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동의보감> 속에서 지금 나의 두려움을...
    복직과 두려움, 떨쳐낼 수 있을까?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리뷰       박정은       1.작은 갈등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   일주일 뒤에 5년간 휴직이 끝나고 출근을 한다. 어제 개학준비로 학교에 가서 동료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민원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도시학교보다 시골학교는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5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학생과도 잘 지내야 하는데 학부모는 더 큰 고민으로 보였다. 학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게 민원이 발생하지 않는데 중요해보였다. 학생에 대해 보이는 대로 말을 하면 불쾌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떤 자세로 학교로 돌아가야 할까.   복직을 앞두고 참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데 그 이유가 뭘까?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관계에서 갈등은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오직 완전무결하게 평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작은 갈등에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왜 사건이 발생하고 생기는 감정들을 가볍게 털어버리지 못할까. 감정들을 꽁꽁 싸매고 행여 흩어질까 재차 확인하고 묶어둔다. 산다는 것이 사건의 연속인데 다음 사건이 일어나면 앞서 묵혀둔 감정 위에 새로 생긴 감정을 덧씌운다. 점점 몸과 마음이 무거워져 천근만근이다. 그러다보면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오기를 날짜만 새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담임인 나조차도 학교를 즐겁게 다닐 수 없는데 아이들한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사건의 연속 속에서 가볍게, 즐겁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동의보감> 속에서 지금 나의 두려움을...
문탁 2023.09.11 조회 47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던 시골 벽지 동네에 자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매우 가난한 축이었다.  부모임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 모아 놓은 전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난 성인이 되어서도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될까 겁이 났다. 아버지와는 한번도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평소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소한 일에 윽박을 지르거나 술을 마시고 나면 자살하겠다고 농약병을 찾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프다고 하면 혼이 났기에 몸이 불편해도 눈치를 보며 숨겨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엔 게이라는 말조차 생경했고 성소수자라는 단어도 없었다. 얼마 전 한국 게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웃픈 농담이 기억난다.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걸 처음 인지했을 때 세상에 본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홍석천과 자신, 그 둘밖에 없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홍석천이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그가 일종의 아웃팅으로 동성애자로 알려진 게 서른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처럼 시골에서 자란 성소수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이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영화 <클로즈> 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벽을 조금씩 쌓았다. 최선을 다해 튼튼하게 쌓는 게 목표였다. 나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하기 전 자기 검열을 해야 했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나를 오픈했을 경우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을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기에 벽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자아가 벽장 안에 축소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 아버지, 이성애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 모두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두려움이란 감정 때문에 힘들었고 그 원인은 모두 잘못된 시대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내 괴로움의 원천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넘어서기에 너무 높다란 벽과 같은 것이었다.       약 이 년 전 두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양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많은 자유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자의식이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한국 인문학 공동체 강의가 온라인으로 열렸고 거기서 명리학의 기초적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사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민인권센터 2014. 8. 21       나는 천간은 계수(癸水)이고 지지는 해수(亥水)인 계해(癸亥) 일주이다. 거기다 동짓달에 태어났으니 차가운 얼음장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기운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월지 또한 자수(子水)이니 내 안은 온통 물기운으로 치성하다. 계해 일주는 성실함과 융통성을 무기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전진하는 타입이다. 해수는 역마의 기운을 품고 있어 해외로 나갈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나처럼 수렴의 기운이 강한 사주는 자의식과 망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과잉 해석을 하기 쉽고 사소한 것도 감추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려 하지 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 생명력을 발산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인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봄의 기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목(木)기운, 즉 식상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내 사주는 융통성, 꾸준함, 요령 등을 갖춘 반면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속을 알기 어렵다. 또 남들에게 음흉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펼쳐진 내 사주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의 내향성, 성실함, 말재주와 표현력의 빈곤, 자의식 과잉, 협소한 인간관계 등이 내 안에 내재해 있었다니. 거기다 역마의 기운은 미국으로의 이주에 일조를 했을려나. 사주를 해석하고 나서 내 팔의 잔털들이 쭈뼛 세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굳게 믿어왔던 두려움에 대한 해석이 틀리지는 않지만 협소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혀왔던 두려움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다섯 편의 글을 통해 내가 두려움을 대했던 방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좀더 큰 도시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했던 과정을 차근히 짚어보면서 나를 지배했던 두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글을 통해 두려움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탐구하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난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탈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던 시골 벽지 동네에 자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매우 가난한 축이었다.  부모임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 모아 놓은 전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난 성인이 되어서도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될까 겁이 났다. 아버지와는 한번도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평소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소한 일에 윽박을 지르거나 술을 마시고 나면 자살하겠다고 농약병을 찾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프다고 하면 혼이 났기에 몸이 불편해도 눈치를 보며 숨겨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엔 게이라는 말조차 생경했고 성소수자라는 단어도 없었다. 얼마 전 한국 게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웃픈 농담이 기억난다.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걸 처음 인지했을 때 세상에 본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홍석천과 자신, 그 둘밖에 없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홍석천이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그가 일종의 아웃팅으로 동성애자로 알려진 게 서른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처럼 시골에서 자란 성소수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이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영화 <클로즈> 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벽을 조금씩 쌓았다. 최선을 다해 튼튼하게 쌓는 게 목표였다. 나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하기 전 자기 검열을 해야 했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나를 오픈했을 경우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을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기에 벽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자아가 벽장 안에 축소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 아버지, 이성애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 모두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두려움이란 감정 때문에 힘들었고 그 원인은 모두 잘못된 시대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내 괴로움의 원천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넘어서기에 너무 높다란 벽과 같은 것이었다.       약 이 년 전 두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양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많은 자유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자의식이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한국 인문학 공동체 강의가 온라인으로 열렸고 거기서 명리학의 기초적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사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민인권센터 2014. 8. 21       나는 천간은 계수(癸水)이고 지지는 해수(亥水)인 계해(癸亥) 일주이다. 거기다 동짓달에 태어났으니 차가운 얼음장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기운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월지 또한 자수(子水)이니 내 안은 온통 물기운으로 치성하다. 계해 일주는 성실함과 융통성을 무기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전진하는 타입이다. 해수는 역마의 기운을 품고 있어 해외로 나갈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나처럼 수렴의 기운이 강한 사주는 자의식과 망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과잉 해석을 하기 쉽고 사소한 것도 감추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려 하지 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 생명력을 발산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인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봄의 기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목(木)기운, 즉 식상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내 사주는 융통성, 꾸준함, 요령 등을 갖춘 반면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속을 알기 어렵다. 또 남들에게 음흉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펼쳐진 내 사주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의 내향성, 성실함, 말재주와 표현력의 빈곤, 자의식 과잉, 협소한 인간관계 등이 내 안에 내재해 있었다니. 거기다 역마의 기운은 미국으로의 이주에 일조를 했을려나. 사주를 해석하고 나서 내 팔의 잔털들이 쭈뼛 세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굳게 믿어왔던 두려움에 대한 해석이 틀리지는 않지만 협소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혀왔던 두려움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다섯 편의 글을 통해 내가 두려움을 대했던 방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좀더 큰 도시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했던 과정을 차근히 짚어보면서 나를 지배했던 두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글을 통해 두려움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탐구하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난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탈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문탁 2023.09.08 조회 166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가마솥 2023.09.05 조회 183
인문약방 에세이
  그날 시는 내게 무슨 일을 한 걸까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남편과 함께하는 삶은 가윗날 두 개가 맞물려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상대와 함께 자르고 해체해 재구성했고 혼자였을 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에 더 ‘온전한’ 미래를 꿈꿨다. 그렇게 아이를 낳았다. 내게는 어떤 환상 같은 게 있었다. 아이 때문에 같이 산다는 말을 하는 많은 부부들과 우리 부부는 다를 거라는. 아이를 낳고 나서 환상이 허황된 자만임을 알았다. 물론 아이를 낳은 뒤에도 남편은 내게 어떤 반쪽 같은 존재였다. 아이가 중심인 세계에서 내가 밤이라면 남편은 낮인 느낌. 그와 함께해야 온전한 하루가 되는 느낌이기에 그는 여전히 소중했다. 그러나 남편은 같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곳에 가 버린 사람 같았다. 나만 어두운 곳에 남겨두고 자꾸 밝은 곳으로만 떠나려고 하는 느낌. 화가 났다가 외로웠다가 무시했다가 반성했다가 체념했다가,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밤의 세계에 그는 낮의 세계에 있다고 받아들이고는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자는 깨달음 같은 것을 얻은, 그렇게 밤의 세계의 머물며 별과 달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고 더 이상 낮의 세계가 신경 쓰이지 않거나 그 세계를 신경 쓰려하지 않게 된. 이런 상태의 요약이 아이 때문에 같이 사는 부부라면 우리는 아이 때문에 같이 산다. 그런데 아이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확신과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는 게 사랑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하는 추측과...
  그날 시는 내게 무슨 일을 한 걸까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남편과 함께하는 삶은 가윗날 두 개가 맞물려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상대와 함께 자르고 해체해 재구성했고 혼자였을 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에 더 ‘온전한’ 미래를 꿈꿨다. 그렇게 아이를 낳았다. 내게는 어떤 환상 같은 게 있었다. 아이 때문에 같이 산다는 말을 하는 많은 부부들과 우리 부부는 다를 거라는. 아이를 낳고 나서 환상이 허황된 자만임을 알았다. 물론 아이를 낳은 뒤에도 남편은 내게 어떤 반쪽 같은 존재였다. 아이가 중심인 세계에서 내가 밤이라면 남편은 낮인 느낌. 그와 함께해야 온전한 하루가 되는 느낌이기에 그는 여전히 소중했다. 그러나 남편은 같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곳에 가 버린 사람 같았다. 나만 어두운 곳에 남겨두고 자꾸 밝은 곳으로만 떠나려고 하는 느낌. 화가 났다가 외로웠다가 무시했다가 반성했다가 체념했다가,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밤의 세계에 그는 낮의 세계에 있다고 받아들이고는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자는 깨달음 같은 것을 얻은, 그렇게 밤의 세계의 머물며 별과 달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고 더 이상 낮의 세계가 신경 쓰이지 않거나 그 세계를 신경 쓰려하지 않게 된. 이런 상태의 요약이 아이 때문에 같이 사는 부부라면 우리는 아이 때문에 같이 산다. 그런데 아이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확신과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는 게 사랑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하는 추측과...
김현지 2023.09.05 조회 195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