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10회차 후기...잉첩제와 육권이라는 사내, 그리고 擧의 뜻

봄날
2023-02-18 15:44
106

장공 19년과 20년을 지나간다.

장공19년 노나라 대부 공자결(結)은 '맺는다'는 뜻의 자기 이름값을 못했다. 진나라 제후에게 시집가는 위나라와 노나라의 잉첩을 위나라 도성까지 호위해야 하는데 견땅에서 자기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마침 제나라와 송나라가 회맹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대표로 회맹에 참여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위나라 여자가 진후에게 시집을 가는데 왜 노나라 잉첩이 따라가는지 이해를 못했다. 결국 우샘에게 진달래가 그 까닭을 물었다. "고대에 제후가 부인을 맞이할 때 1국, 2국의 서출여자를 배가(일종의 혼수)로 보내는 것을 잉첩이라고 한다"는 부분의 해석 때문이었다. 우샘은 고대에는 정해진 잉첩의 규모가 있는데 한 나라에서 가는 잉첩의 수가 모자랄 경우 이웃나라에서 보태어 보낸다는 것이니 위나라 여자가 시집갈 때 노나라 여자가 잉첩으로 딸려가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결국 공자결의 공명심(나는 이것이 공명심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겨울 제나라-송나라-진나라가 한꺼번에 노나라의 서쪽 비땅을 쳐들어온 빌미가 됐다. 위나라의 여자를 시집보내는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때의 회맹은 제후가 맺은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회맹의 당사자들을 모욕한 꼴이 됐으니 말이다....

 

19년 傳은 경에 나오지 않던 초나라 이야기이다.  이때의 초나라 군주는 초문왕이었다.  봄에 초문왕은 처음에 파나라 군대와 전쟁하여 잘 막아냈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도성으로 돌아오는데 당시 성문을 맡고 있던 '육권'이라는 성문지기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초문왕은 황나라군대를 적릉에서 격퇴했다. 군주가 싸움에 져서 돌아오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돌려보내고 또 그 왕은 다른 곳에서 전승한다는 이야기는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싸움에 지고 돌아온 군주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위한 육권의 충심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황땅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초땅에 이르러 초문왕은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육권은 석실에 묻고 자기도 따라 죽었고, 죽어서도 자신의 군주를 지키기 위해 초문왕의 지하묘로 가는 길앞에 자신을 묻게 했다.  육권은 처음에 문왕에게 간언했으나 듣지 않자, 무기로 그를 겁박해서 자신의 뜻을 따르게 했다. 육권은 감히 군주를 무기로 겁박한 자신의 죄가 크다고 말하고 스스로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내렸다. 후대에 사람들은 그를 대혼이라 불렀는데 이는 성문을 지키는 역할로서, 육권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 직책을 이었다. 육권이라는 사내...의리나 충심이 곤두박질쳐진 오늘날의 정치판과 관료사회의 인간들하고 꽤나 대조적이다.

한편 주나라는 혜왕의 시기인데 그 이전 장왕때 왕요라는  첩이 장왕의 사랑을 받아 그의 아들 자퇴를 낳자 위국을 스승으로 삼게 했다. 그런데 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혜왕은 위국의 장원을 비롯해 자퇴의 측근들을 따돌렸다. 이에 앙심을 품은 위국, 변백, 석속, 담보, 자금축궤 등 5명의 대부가 난을 일으켰다. 이때 5대부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자금축궤는 떼어서 두 명이고 그렇다면 6대부가 되는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이중에 석속은 대부가 아니라 그냥 사(士)라는 설에서부터 누구의 설이 맞는지 나도 모르겠다. 모두 다 자원기설(自圓其說), 자기 학설을 그럴듯하게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암튼 5대부들은 우여곡절 끝에 자퇴를 옹립하기에 이른다.

 

장공20년은 혜왕의 복귀를 꾀하는 내용이다.  왕자퇴(자퇴)는 아마도 인물됨됨이가 훌륭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즉위하자 5대부를 위해 음주가무를 곁들인 향응을 베풀었다. 정여공은 이것을 보며 그에게 재앙이 닥칠 것을 짐작했다. 때가 어느 때인가. 혜왕이 쫒겨났지만 변방에서 그가 보물을 탈취해가는 등, 신중해야 하는 때인데 부어라 마셔라 하다니....형을 집행할 때는 군주도 불거, 즉 잘 차려먹지 않는 법이거늘, 자신이 왕의 자리를 빼앗은 무도함도 잊고 향응에 빠졌다. 머지 않아 공자퇴의 퇴락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하다. 아마도 장공21년은 혜공의 복위사건이 다루어지지 않을까? To be continued....ㅎㅎ

 

 

댓글 1
  • 2023-02-20 15:12

    이웃나라에서 잉첩의 수를 보태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더불어 고대 봉건제를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구요.
    이런 제도가 춘추말까지 이어졌을까요? 그리고 같은 성씨가 아닌 다른 성씨의 제후국에서도 잉첩을 보태줬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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