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8회차 후기 - 식군부인이냐 식규냐

진달래
2023-02-07 00:12
94

공부가 좀 늘다보니 본의 아니게 여기 저기 얻어 들은 이야기들로 퍼즐 맞추기를 하게 된다. 

장공 14년에 등장하는 식규(息嬀) 이야기도 '어, 어디서 들어봤는데' 했던니 <열녀전>에 나오는 '식군부인'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이다. - 하지만 내용이 좀 다르다. 

 

일단 <좌전>의 내용은 이렇다.

채나라 애후가 일전에 식나라 군주(식후)의 간계에 빠져서 초나라의 포로가 되었던 일에 원한을 품고 초나라 왕에게 식후의 부인(식규)의 미모를 연신 칭찬을 했다. 그러자 초나라 왕이 음식을 가지고 가서 식나라에서 잔치를 열어 식후를 대접하다가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식규를 데리고 초나라로 돌아갔다. 식규는 도오와 성왕을 낳았는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초나라 왕이 듣고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식규가 대답하기를 "나는 한 여자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 말을 하겠습니까?(吾一婦人而事二夫 縱不能死 其又奚言)"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초나라 왕은 채 애후 때문에 식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생각해서 채나라를 정벌했다. 

 

<열녀전>의 내용은 좀 다르다. 

초나라가 식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식의 군주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도망가는 식나라 군주의 부인을 잡아 초나라로 데리고 왔다. 초나라 왕이 지방에 간 사이 식나라 군주의 부인은 궁궐을 빠져나와 식나라 임금을 만나 말했다. "사람의 삶에서 한 번 죽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인데 스스로 고통스러울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잠시고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결코 저는 혼례를 두 번 치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죽어서 지하로 돌아가는 것만 하겠습니까?(人生要一死而已 何至自苦 妾無須臾而忘君也 終不以身更貳醮 生離于地上 豈如死歸于地下哉)" 하고 시를 지어 부르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식나라 군주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같은 날 함께 죽었다. 초나라 왕이 이를 알고 식나라 군주의 부인이 보여준 수절과 의리를 훌륭히 여겨 제후의 예로써 그들을 합장해주었다. 

 

두 이야기는, <사기>에는 없다. 여기서 초나라 왕은 초 문왕(文王)을 말하는데 6년에 채나라를 정벌하고 채 애후를 사로잡았다는 이야기는  있으나 식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이야기는 없다. 단 "초나라가 강해져서 한수 유역의 작은 여러 나라를 괴롭히니 작은 나라들이 초나라를 무서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망한 나라의 부인을 데려다 첩으로 삼는 일은 이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어쩔수 없이 초나라에 살면서 두 아들을 낳았지만 식규가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나라의 유향은 더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굳이 식나라 군주를 몰래 만나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설정한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이런 일이 기록에 남았다는 건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열년전>의 기록은 식군 부인이 정절을 지킨 것에 포인트가 있지만 <좌전>의 기록엔 채 애후의 행동을 비난하는 내용에 더 포인트가 있다.  역사적 기록은 사실 여부를 떠나 일정부분 필요에 의해서 강조점이 달라지고 심지어는 이렇게 각색되는 일도 빈번하다. 

<좌전>이 쓰인 춘추시대엔 아직은 제후들 간에 모종의 질서가 존재했던 시대였다. 따라서 식규의 이야기도 식규의 이야기보다는 그걸 통해 채 애후의 파렴치한 행동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더 들어 있다. 그에 비해 <열년전>은 한나라 때 외척을 경계하는 유향의 의중에 맞추어 식규의 행동에 더 무게를 실었다. 그에 비해 사마천에게는 별로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나보다. ^^

 

<좌전>을 읽는 재미가 여러 가지 있지만 이렇게 이리 저리 꿰어 맞추는 재미도 한 몫 한다. 

댓글 2
  • 2023-02-08 15:36

    고전이 당대의 상황에 맞춰 재해석되는게 당연하지만, 열녀전은 쫌 재미가 없게 각색이 되었네요^^

    • 2023-02-08 16:59

      그래도 일부인이사이부 종불능사(一婦人而事二夫 縱不能死) 이 말은 진짜 유명해지지 않았습니까... 참, 그렇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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