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차 업과 윤회 후기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주제 중 하나가 업과 윤회다. 그간 자주 마주치긴 했어도 매번 막다른 골목길 같아 돌아 나오곤 했는데 이번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여전히 ‘업이 무엇이다’라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간 혼란스럽던 지점이 조금 해소되어서 기뻤다.
업은 무엇인가?
까르마(업)는 행위를 뜻하는 말에서 왔으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업은 ‘행위의 뒤에 남는 잠재력’의 의미를 지닌다. 다른 말로 습기, 종자라고도 한다. 여러 다양한 맥락에서 업설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니까야>에서의 업설을 보자면, 주로 자이나교도와의 대론이나 바라문들과의 대론에서 등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대론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붓다가 강조하는 지점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요샘의 강의를 통해 자이나교와 바라문들과 나눈 붓다의 대화를 중심으로 그 차이를 살펴보았는데, 업론자로서 붓다의 가르침, 업과 윤회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자이나교는 업을 정신적인 힘이나 에너지와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지바(영혼)에 달라붙는 미세한 물질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고행을 통해 업(특히 신업)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붓다와의 대론을 통해 신업이 더 힘이 세다는 니간타의 주장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고 붓다는 의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업결정론의 모순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바라문들은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런 그들에게 업은 도덕적인 행위의 의미보다 범천의 세계로 가기 위한 제사 의례 행위 그 자체였다. 그런데 붓다는 바라문 대론자들로 하여금 정작 자신들은 범천(브라만)처럼 살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범천의 세계로 가는 길을 가르친다는 것이 가능한 논리인지를 생각해보게 했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그들 중 누구도 범천과 친교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 세계로 가는 길을 알겠느냐는 논리였다. 붓다는 지금 여기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는 불교 수행자들이야말로 범천세계에 태어나는 것보다 더 수승한 삶, 즉 해탈에 이른다고 설하셨다.
업론과 업결정론의 차이
<작은 업분별경>에는 “중생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며, 업의 모태며, 업의 친척이며, 업이 보호자라오”라는 가르침이 있다. 중생이 업의 소유자고 상속자이며, 업의 모태라는 말은 업결정론처럼 들린다. 그런데 업이 친척이고 보호자라는 말은 좀 다른 느낌이다.
붓다는 ‘모든 일은 이전에 행한 것이 원인이다’라는 업 결정론을 비판했다. 이전에 행한 것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결과가 나온다면, 언제나 과거가 반복될 뿐 어떤 새로운 것도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지은 업을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업이 조건에 의해 성숙한 과보를 받는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숙이다. 업은 중생이 놓여 있는 여러 조건들의 영향으로 다르게 익어서 과보를 낳는다는 뜻이다. <소금덩어리경>에 보면, 지은 업을 그대로 받는다면 수행할 이유가 사라지지만 이숙을 받는다면 수행의 이유가 확실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요요샘은 이숙이 수행의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이숙보다 앞서 과보의 조건에 대한 숙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시바까경>에 따르면, 붓다는 과보가 생겨나는 조건을, 담즙, 점액, 바람, 체질, 계절의 변화, 불운한 사건, 피습, 그리고 업보의 성숙, 여덟 가지로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업보는 그 여덟 가지 조건 중 하나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느낌(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전부를 모두 업의 결과로만 단정지을 수 없다. 전생의 업 혹은 과거의 업이 현재를 구성하는 여러 조건 중 하나라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우리의 현재는 그를 포함해 여러 다른 조건들이 복잡하게 얽힌 관계로부터 생성되기 때문이다. 붓다의 업론이 업결정론과는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윤회, 업의 소멸과 수행
과보가 생기는 여덟 가지 조건에 대한 말씀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가르침인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간 과거의 업이 과보를 낳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업결정론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의 업 외에도 여러 신체적인 조건(담즙, 점액, 체질), 자연조건(바람, 계절의 변화), 사회적 관계(불운한 사건, 피습) 등 공업과 존재들의 얽힘으로 과보가 생겨난다는 가르침은 업결정론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혼란과 의심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괴로움의 근원이 붓다가 거론하는 여덟 가지 중 무엇 때문인가 식의 기원을 탐구할 생각은 없다. 그 기원 혹은 원인이 더이상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연기적이므로 지금 내가 괴롭다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금덩어리경>은 언뜻 보기에는 업을 바꾸기 위해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붓다는 설법 대상의 근기에 따라 선업을 닦으면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다고 설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붓다는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 비구들에게는 수행은 윤회적 생존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와 해방, 즉 통찰지를 증득하여 해탈하기 위해 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말씀하셨다.
해탈은 윤회의 종식을 의미하고 윤회의 종식은 업의 소멸을 뜻한다. 과거의 업을 소멸하지 못하면 윤회를 거듭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시바까경>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느낌은 연기적이다.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을 되풀이하면 과거의 업은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붓다는 무명에 뒤덮이고 갈애에 속박된 중생들은 시초를 헤아릴 수 없는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다. 하여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는 이처럼 윤회적 생존을 계속하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괴로움과 번뇌는 괴롭거나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패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통찰할 때 비로소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은 괴로움의 원인을 바로 보고 과거의 업을 멈추고 현재의 업을 새로 쌓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업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곧 사성제, 팔정도라는 사실이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새삼 놀랍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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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불경을 통해 새롭게 배우는 내용들이 흥미진진합니다. 이번엔 업! 업을 지으면 그대로 받는다는 인과응보설을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왔는데, 의외로 부처님은 과거의 업을 바꿀 수도 없애버릴 수도 없지만, 그것이 더 이상 미래의 번뇌와 괴로움으로 이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결국 중요한 것은 지나간 업이 아니라 지금 어떤 업을 짓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업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닦아가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