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차 공지/ 열반에 이르는 길
시즌2-7회차 공지
열반에 이르는 길
스승님, 당신은 어떻게 생사의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존자여, 나는 머물지 않고 애쓰지 않고 생사의 폭류를 건넜다오.
스승님, 당신은 어떻게 머물지 않고 애쓰지 않고 생사의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존자여, 내가 머물 때, 그때 나는 빠져들었다오. 존재여, 내가 애쓸 때, 그때 나는 혼란스러웠다오. 존재여, 그래서 나는 머물지 않고 앴지 않고 생사의 폭류를 건넜다오.(생사의 폭류, SN1.1)
상윳따니까야의 첫 번째 게송입니다. 생사의 폭류란 윤회적 생존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생사의 폭류를 건넜다는 것은 열반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천신이 붓다께 어떻게 생사의 폭류를 건넜는지 묻습니다. 붓다께서는 머물지 않고 애쓰지 않고 건넜다고 말합니다. <불경>의 번역자 이중표 선생은 ‘머물지 않았다는 것은 선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애쓰지 않았다는 것은 고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이 경전을 출발점으로 삼아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에 대해 공부해보겠습니다.
7회차 텍스트를 읽으면서 1. 열반의 의미 2. 열반에 이르는 길 3. 수행론에서 나타나는 선정과 통찰지의 관계를 정리해봅시다.
상윳따니까야의 <무위상윳따>에서 '무위'란 열반의 다른 명칭입니다. 무위상윳따에서 우리는 열반의 정의와 열반에 이르는 길의 개략적인 지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반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경지로 상상하기도 하지만, <니까야>는 반복해서 열반이란 탐진치의 소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열반과 해탈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때 사리뿟따의 개념정리가 담긴 <큰 교리문답경>도 도움이 될 것 같아 포함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탐진치를 소멸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붓다가 설한 길을 통틀어 37조도품이라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니까야>에서 열반과 해탈에 이르는 길을 이야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사념처, 사정단, 사여의족, 5근, 5력, 7각지, 팔정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개념의 지도를 그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윳따니까야 5. 대품의 상윳따들이 이와 관련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념처는 선정수행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8정도의 정념과 정정은 계학, 정학, 혜학의 삼학 중 정학과 관련됩니다. 선정수행이라고 하면 초선에서 사선까지의 색계 선정, 공부변처에서 비상비비상처까지의 무색계 선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의 단계가 바로 해탈의 단계인 것일까요? 아닐까요? 심해탈과 혜해탈은 어떻게 다를까요? 더불어 선정에 빠질 위험과 선정의 공덕에 대해서도 맛지마니까야의 <거룩한 소원경>, <차제경>과 앙굿따라 니까야의 <열반> <선> <아닌다> <바라문> <따뿌싸> 등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해보면 좋겠습니다.
읽어올 텍스트
1.<상윳따니까야>
제1 천신 상윳따 <생사의 폭류>(SN1.1), 제2 천자상윳따 <로히따>(SN2.26) <수시마>(SN12.70), <정신적인 청정>(SN36.29), 제43 무위상윳따 <몸-길>(SN43.1~11) 5. 대품(제45, 46, 47, 48, 56상윳따)
2.<맛지마니까야>
<거룩한 소원경>(MN26), <큰 교리문답경>(MN43), <부동도경>(MN106), <차제경>(MN111), <구경지겸증경>(MN112), <고빠까 목갈라나경>(MN108)
3.<앙굿따라니까야>
<열반>(A3.55, A9.34), <선>A9.36, <아난다>(A9.37), <바라문>A9.38, <따뿌싸>(A9.41)
* ref.
1.<숫따니빠따> 5장 피안품
2.<대념처경>(DN22)
3.<호흡주의집중경>(MN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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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에 빠지는 것과 선정을 닦는 것
<생사의 폭류경>에서 천신은 붓다에게 어떻게 폭류를 건넜느냐고 묻는다. 붓다는 머물지 않고 애쓰지 않고 건넜다고 답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되물음에는 머물 때 빠져들었고 애쓸 때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경은 머묾과 애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풀지 않지만, 이중표 선생은 주석에서 머물지 않음을 선정에 빠지지 않음으로, 애쓰지 않음을 고행을 하지 않음으로 풀이한다. 이 풀이는 <거룩한 소원경>에서 붓다가 말한 이력과 겹쳐 읽을 수 있다. 붓다는 알라라 깔라마에게서 무소유처를, 웃다까 라마뿟따에게서 비상비비상처를 체득했지만, 이 법은 번뇌의 소멸과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 경지에 이르게 할 뿐이라 여겨 두 스승을 떠났다. 이후 홀로 우루웰라에서 정진하여 열반을 성취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붓다가 <무위상윳따경>에서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열거한 뒤 선정을 닦으라고 권한다. 선정에 빠지지 않는 것과 선정을 닦는 것은 어떤 차이인가.
<무위상윳따경>은 무위를 탐심의 소멸, 진심의 소멸, 치심의 소멸이라고 정의한다. <열반>에서 자눗소니 바라문이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열반이 무엇이냐고 묻자, 붓다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물든 마음은 자신과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괴로움과 근심을 겪지만 그것들을 버리면 겪지 않는다고 답한다. 열반은 알 수 없는 곳이 아니라 이 마음에서 탐진치가 소멸한 자리이다. 길의 끝이 이러하므로 선정이 그 길에서 하는 일을 물을 수 있다.
<거룩한 소원경>의 두 스승은 선정을 이루고도 열반에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선정이 이끄는 곳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부동도경>은 같은 자리를 달리 말한다. 평정한 마음을 얻은 비구가 그 평정한 마음을 즐기고 환영하고 탐닉하면 분별의식이 그것에 의존하고 그것을 취하여 반열반하지 못한다. 그가 취하는 것은 비상비비상처이다. 즐기지 않으면 취가 없어 반열반한다. 빠짐은 선정에 드는 일이 아니라 선정에 의존하여 취하는 일로 읽는다.
먼저 선정을 어떻게 닦는지 보자. <차제경>에서 사리뿟따는 초선에서 상수멸까지 차례로 머문다. 선정마다 사유, 기쁨, 접촉, 느낌, 생각, 의도 같은 법들이 나타나고, 그는 그 법들이 없다가 나타났고 있다가 없어졌다고 통찰한다. 그는 그 법들에 집착하지 않고 빠져들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묶이지 않고 해탈한 마음에 머물며, 이보다 위의 벗어남이 있다고 통찰하고 더 닦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상수멸에서 통찰지로 통찰하자 번뇌가 소멸했고, 비로소 더 닦을 것이 없다고 한다. <선경>도 같은 형식이다. 선정에 든 비구는 나타나는 법들을 무상한 것, 괴로운 것, 자아가 없는 것으로 보고, 마음이 그 법들에서 벗어나 열반에 마음을 집중하고, 그곳에 머물러 번뇌의 소멸을 성취한다. <구경지검증경>의 비구도 초선부터 제4선까지 마음을 정화한 뒤 번뇌를 소멸하는 앎에 마음을 기울여 사성제를 통찰하고 욕루, 유루, 무명루에서 해탈한다. 선정은 마음을 정화하는 자리이고, 번뇌를 소멸하는 것은 통찰지이다.
그렇다면 선정에 빠지는 것과 선정을 닦는 것의 차이는 무얼까? 빠진다는 것은 선정의 즐거움에 의존하여 취하는 일이고, 닦는다는 것은 선정 안에서 나타나는 법을 무상, 괴로움, 무아로 보며 더 위의 벗어남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열반>(A9.34)에서 사리뿟따는 선정마다 앞서 넘어선 것에 속한 생각과 관심이 일.어.나.면. 그것이 질병이라고 한다. 선정에 머물더라도 언제든 그 행복이 흔들릴 수 있고, 흔들리면 그것이 질병이며 괴로움이라는 것. 그렇다면 선정의 행복은 의존할 자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부동도경>은 선정의 길을 마치고 통찰지로 해탈하거나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적절한 분별의식이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지난 주 <큰 갈애소멸경>을 읽을 때는 분별의식이 그대로 유전하고 윤회한다고 알고 있는 사띠 비구를 붓다가 조건이 없으면 분별의식은 생기지 않는다고 여러 방법으로 말하지 않았느냐며 꾸짖었다. 죽은 후 분별의식이 경지에 도달한다는 서술과 이 꾸짖음을 어떻게 함께 읽을 수 있을까?
이번에는 읽을 경전들이 많았는데 하나하나의 경전이 또 왜 그렇게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지 어떤 것을 가지고 메모를 해야할 지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면서 읽었다. 그러다가 맛지마니까야의 <부동도경>(MN106)에 꽂혔다. 새벽낭송으로 불경을 읽었는데 이 경을 읽은 기억이 없는 걸 보니 결석으로 넘어간 부분이었던 것 같다.
주석에 따르면, ‘부동’이란 분별의식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서 선정에 든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경의 서두는 익숙하다. 감각적 욕망은 무상하고 공허하고 허망하고 헛된 것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불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감각적 욕망을 부정한다는 세간의 평이 떠오른다.
이어 “비구들이여, 그것은 허깨비의 장난이며, 바보의 꼬드김이라오.”라고 하신다. 왜 그럴까? 우리가 ‘즐거움’이라고 분별한 것에 탐심을 내어 집착하면 그것이 변할 때 괴로움이 되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즐거움이 있기에 일어나고 괴로움에서 즐거움이 일어나는 이치를 알면 끊임없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되는 윤회적 생존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부동도경>에서 붓다는 부동에 도달하는 길을 세 가지로 설하신다. 하나는 ‘현재의 감각적 욕망과 미래의 감각적 욕망,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에서 사악하고 불선한 마음이 생기고 이는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통찰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통찰을 토대로 수행자는 ‘크고 넓은 생각을 가지고 세간을 극복하려는 확고한 마음으로 사악하고 불선한 마음, 즉 탐욕이나 분노나 격정을 포기하는 삶을 실천한다. 그 실천을 통해 (선정의 단계?) 머무는 곳에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현재의 부동을 성취하여 통찰지로 해탈하거나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적절한 분별의식이 부동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부동에 유익한 첫 번째 길이라고 한다.
부동에 유익한 두 번째 길은 ‘형색은 무엇이든 4대와 4대를 취하고 있는 형색이다’ 라고 성찰하고 그를 실천함으로써 부동에 도달하는 것이고, 세 번째 길은 ‘현재의 형색과 미래의 형색, 현재의 형색에 대한 생각과 미래의 형색에 대한 생각, 이 둘이 무상하고 무상하기에 즐기거나 탐닉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성찰하고 그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무소유처에 대한 성찰과 그를 실천함으로써 무소유처에 도달하는 세 가지 방법이 나온다. 앞서 말씀하신 부동에 이르는 세 가지 길과 비슷하다. 첫 번째 방법은 앞서 언급한 현재와 미래의 감각적 욕망과 형색, 그에 대한 생각, 그리고 부동에 대한 생각까지, 그 모든 생각이 남김없이 소멸한 무소유처에 대한 성찰과 그를 실천하는 삶을 통해 무소유처에 도달하는 길이다. 무소유처가 평온하고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을 성찰이 선정 상태뿐 아니라 수행과제로 실천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두 번째는, ‘자아나 자아의 소유가 비었다’라는 성찰과 그를 실천하는 삶을 통해 도달하는 길이며 세 번째 역시 ‘나는 어디에도 없고, 그 누구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의 소유도 어디에도 없고, 그 어떤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다’라고 성찰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무소유처에 도달하는 길이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차이가 뭔지 잘 모르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비유상비무상처에 도달하는 길도 부동이나 무소유처에 도달하는 길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아난다의 질문이 나온다. 이 단계에 이르면 반열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반열반하는 수행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하셨다.
왜 그럴까? 붓다는 '자아도, 자아의 소유도 존재하지 않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는 것을 버리겠다'고 실천하여 평정한 마음을 얻는 사람도, 그 평정한 마음을 즐기고 환영하고 탐닉하여 살아간다면 그의 분별의식이 그것에 의존하고 그것을 취하기 때문에 반열반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반면에 그 평정한 마음을 즐기거나 환영하거나 탐닉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는 그의 분별의식이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반열반한다고 답하셨다. 즉 취가 없어야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이 감각적 욕망이든 비유상비무상처와 같은 높은 경지이든 자기 존재에 집착하는 한 해탈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각 단계에 대한 말씀 끝에는 ‘통찰지로 해탈하거나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적절한 분별의식이 비유상비무상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구절이 되풀이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선정을 닦는다 해도 모두가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정과 해탈은 같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큰 교리문답경>(MN43)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심해탈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이 네 가지라고 한다. “행복감을 포기하고, 괴로움을 버리고, 이전의 만족과 불만을 소멸함으로써 고락을 벗어나 평정하고 주의집중이 청정한 제4선을 성취하여 살아가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는 무량심해탈, 무소유심해탈, 무상심해탈은 공심해탈 등 해탈의 종류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때의 해탈의 의미는 아마도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라는 의미가 아닐지... 각 해탈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받자 사리뿟따 존자는 각각의 해탈이 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 다르지 않다고 답했다. 그 설명에 따르면, 해탈의 핵심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텅 비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비유상비무상처에 이르렀다 해도 5취온이 괴로움이라는 사성제에 대한 통찰과 팔정도라는 실천적 삶이 따르지 않으면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교학교 2-7 메모 / 인디언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열반
탐진치를 버리면 자신을 해치는 생각, 남을 해치는 생각, 자신과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마음에 수반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겪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열반이다. 탐진치를 버리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수행은 사념처수행이고 그 시작은 호흡집중 명상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몸을 대상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열심히 알아차리고 주의집중하며 살아가면, 비구는 세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없앨 수 있다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러한 호흡을 여러 몸들 가운데 하나의 몸이라고 말한다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몸을 대상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열심히 알아차리고 주의집중하며 살아감으로써 비구는 세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없애야 한다오. (맛지마 니까야 <호흡주의집중경>)
바라문이여, 탐욕에 물들고 정복되고 사로잡힌 마음은 자신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자신과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며, 그 마음에 수반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겪는다오. 탐욕을 버리면 자신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과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 마음에 수반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겪지 않는다오. 바라문이여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열반’은 이와 같은 것이라오.
바라문이여, 분노로 인해서 화가 나거나 어리석음에 눈이 멀면 자신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자신과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며, 그 마음에 수반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겪는다오. 분노를 버리고 어리석음을 버리면 자신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과 남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 마음에 수반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겪지 않는다오. 바라문이여,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열반’은 이와 같은 것이라오.
바라문이여, 탐욕이 남김없이 소멸했음을 몸소 증득하고, 분노가 남김없이 소멸했음을 몸소 증득하고, 어리석음이 남김없이 소멸했음을 몸소 증득하면, 이와 같은 것은 ‘바로 지금 와서 보라고 할 수 있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알아야 할,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열반’이라고 한다오. (앙굿따라 니까야 <열반경>)
사리뿟따는 행복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느껴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하냐고 묻자 느껴진 것이 없는 것, 그것이 실로 행복이라고 한다. 비구가 초선, 제2선, 제3선, 제4선을 성취하여 살아갈 때 각각의 선정을 얻을 때 멀리했던 것들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것은 질병이고 그 질병은 괴로움이다. 감각적 욕망을 수반하는 생각과 관심은 물론이고, 평정한 행복을 수반하는 생각과 관심이 일어난다면 그것도 질병이고 괴로움이다.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유상비무상처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상수멸을 성취하면 통찰지로 본 후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므로 행복한 사람에게 질병에 의한 약간의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행복=열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앙굿따라 니까야 <열반경>)
아이고,, 오늘은 황정아님과 송이샘이 메모를 안 올리셨군요!!
메모와 질문편집본입니다.
강의안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