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 차이 나는 두 여자
나래
2023-06-07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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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모범생 딸의 방황과 탐색
“이건 내가 알던 딸이 아니야.”
엄마 입장에서는 27년간 모범생으로 속 한 번 썩이지 않던 딸이 낯설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집안일을 잘 돕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수다를 같이 떨어주고 미주알고주알 묻지 않아도 이것저것 잘 말해주는 딸이었다. 엄마에게 나는 서울의 4년제 대학도 나오고 중국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직장도 잘 다니는 딸이기도 했다. 그러던 딸이 갑자기 주중에는 무역회사에서 퇴근하고 술 마시느라 연락도 없이 밤늦게 들어오거나 외박을 하거나, 주말에도 2030등산동호회를 다니느라 또 집에 붙어있질 않으니, 엄마는 딸이 방황하고 있다고 느꼈다. 더군다나 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아빠는 모두 엄마 탓을 해대는 통에 엄마는 이중고를 겪었다.
엄마의 이런 마음은 고려하지도 않고 나는 ‘이건 내가 알던 딸이 아니야’라는 엄마 말을 듣고 그동안 애써 유지해오던 가면을 이제야 깬 것 같아서 시원하고 통쾌했다. ‘나는 나래가 공부 못 할 줄 알았는데, 곧잘 하네.“ 중학교 1학년 때쯤 아빠가 엄마에게 말을 듣고나서 나는 줄곧 반 1등의 모범생 모드를 약간의 압박을 느끼면서도 편하고 즐겁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시험 때 잠깐의 벼락치기가 아닌 1년을 공부해야 하는 고3때 나는 오히려 한,중,일 드라마에 빠지고 친구들을 꼬여내어 노래방에서 놀며 보내다 당연히 명문대는커녕 서울의 4년제 대학에 겨우 붙었다. 딱히 분명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재수는 하기도 싫었으면서, 당연히 돌아온 결과를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가장 불만족스러워했다.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를 거쳐 무역회사로 전직하여 5년째 다니면서고, 계속 스스로 성에 안 차는 마음은 이어졌다. 중소기업에서 경리, 영업관리, 비서 노릇까지 해야 했지만, 전천후로 하고 있는 나를 해고시킬 리는 없었으니 안정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일은 생계 뿐만 아니라 영혼을 채워주어야 하며 자기계발에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내면화된 내게 당시에 일은 성에 차지 않았다. 퇴근하고 나서도 이대로 하루가 끝나는 것인지 만족스럽지 않아 술을 마셨고, 주말에는 전국 각지의 산을 타고 여러 사람들이랑 최대한 놀고 연애를 했다. 집은 아빠에게 맞춤식이기도 했고, 갑갑했다. 20대 나는 오히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비로소 하게 되면서, 그 당시의 에너지를 최대한으로 바깥으로 발산하며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극을 받으며 탐색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지금 나의 모습이 ‘내가 알던 딸’이 아니라고 했고, 엄마가 알던 딸은 내가 오히려 벗어 던지고 싶어했던 모습이니, 나는 울상이던 엄마를 뒤로하고 등산복에 배낭을 휙 둘러메고 지리산으로 가버릴 수밖에 없었다.
2.각자 분투기
“엄마의 변화는 공부하기로 선포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이 말을 엄마에게 건네면, 엄마는 언제나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확실히 엄마는 공부를 시작한 이후 그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엄마는 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2002년에 가족들에게 공부하기로 선언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2년간 중졸, 고졸 학력을 획득하고,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으며, 급식소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공인중개사 공부도 하고, 천주교 세례도 받았다. 엄마가 공부를 시작한 시기와 내가 성인이 된 시기가 같았고, 그래서일까 우리는 책을 읽고 알게 된 것들, 인간관계에서 깨달은 것들을 나눌 때면 ‘너도 그래?’, ‘엄마도?’라며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치는 일이 잦았다. 그야말로 26살 차이나는 여자 둘의 수다였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엄마는 전업주부로 매일 살림을 척척 해내면서도, 아빠와 싸우고 난 후나 술 한잔을 마시는 날이면 오랜시간 눌러왔을 한이 맺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때 엄마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패턴을 띠었는데 대상은 외할머니와 아빠였다. 평소에 나는 가족 안에서 엄마의 남편과 다섯 시누이의 뒷담화를 할 때 엄마 편을 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엄마가 결혼 전 회사에서 사무직 업무를 했고,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7장이나 되는 러브레터를 받기도 했다는 일화까지 알 정도였다.
평소 엄마는 부지런하고 칼같이 할 일을 제 때 해내는 야무진 모습인 데 비해, 술에 취한 엄마는 가슴 깊은 곳에서 사무치듯 내뱉는 울부짐 비슷한 소리로 조각난 문장들을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끝까지 엄마의 말을 못 듣고 내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러면 엄마는 혼자서 한참을 넋두리를 늘어놓다 잠이 들었고, 다음날 새벽에는 또 척척 아빠 도시락을 싸고 아침밥을 준비했다.
엄마가 공부를 시작하고 스스로 자부심과 자신감을 느낄 성취들을 늘려가면서 아빠에 대한 원망은 쏙 들어갔다. 외할머니를 향한 마음은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엄마가 중풍으로 쓰러진 외할머니를 집에서 3년간 간병하고 임종을 지키면서, 엄마는 외할머니를 향한 어떤 한을 끝내 풀어냈다. 엄마가 매일 아침 수행하듯 기도와 명상을 하고, 타인의 임종 곁에서 기도하는 천주교 봉사활동도 엄마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내 문제는 내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빠 흉을 내게 보듯, 내가 첫직장과 관련된 뒷 이야기를 하면, 그날 밤 나는 잘 잤으나, 엄마는 내 걱정에 잠을 잘 못 이루는 사람이었다. 나는 당연하게도 20대 이후로는 엄마에게 말 못하는 비밀이 늘어갔다. 20대 초반 있었던 자실시도와 남자친구의 자해 등의 일은 덮어두고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살다가 20대 후반에는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어졌다. 나는 엄마, 절친, 산을 같이 타던 사람들이 아닌 같이 읽고 쓰고 배우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독자를 상정하여 글을 써야 했으니 나조차 진득히 들여다보지 않은 서사를 객관적으로 풀어놓아야 했고, 그제야 이해되는 것들이 생겼고, 사건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생겼다. 그제야 나는 모두 각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도, 한 시인의 ‘이것을 불행 혹은 상처라고 얘기했을 때, 이미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이해하게 되었다.
3.그 후 엄마와 나
35살 비혼인 딸에게 엄마는 "니가 돈 벌어서 니가 쓰고 싶은 데 쓰니 얼마나 좋니. 그건 대단한 거다. 결혼은 친구같이 너로서 살 수 있게 해주는 남자와 천천히 해라", “승승장구해서 국장까지 되어라.”고 하면서도, 짬짬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늙어 죽으려고 해.’라며 농담도 섞어했다.
결혼하지 않겠다던 딸이 결혼하고 나서도 엄마는 ‘알아서 하게 둬야지,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면서도, 아침상은 잘 차려 사위와 잘 먹고 사는지, 둘이 싸우지는 않고 화목하게 사는지, 혹여 시댁에 미움을 받지나 않는지 걱정이 많다. 취업,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 엄마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생애주기에 딸이 잘 맞춰 사는지는 표현을 하고 안 하는 차이만 있을 뿐 꾸준히 엄마의 관심이자 걱정거리인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 우리는 바뀐 상황에 맞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엄마와 나는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살지만 한 달에 1번 외식을 하고, 2-3번 전화하거나 만난다. 전화해서 나는 주로 ‘우리 부부는 재미나게 살면서도 가사 일은 잘 배분해서 한다,’, ‘운동도 하고 건강도 잘 챙긴다’는 등 별일 없이 잘 사는 딸의 소식을 규칙적으로 엄마에게 알린다. 엄마도 이에 맞춰 ‘오이소박이 좀 먹겠냐’ 묻고 산책길에 딸네 대문 앞에 툭 놔두고 가거나, 전화해서도 ‘잘 사냐’ 세 글자로 각종 관심과 걱정을 압축해서 물으며 관심 어린 거리두기를 애써 한다.
엄마는 나와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를 내가 첫직장에 들어가서 2030등산동호회에 가기 전까지라고 말한다. 나는 그 때 직장에 다니면서 생활비 조로 용돈도 매달 꼬박 드렸고, 맛있는 것도 엄마 드시라고 사오고, 영화를 같이 보기도 하고, 맛있는 식당에도 종종 엄마와 같이 가기도 했다. 한 번은 엄마 생신에 내가 출근 전에 새벽같이 일어나 미역국에 불고기도 직접 만들어 생일상도 차려주었다. 딱 한 번이었지만, 엄마는 마치 매년 그런 생일상을 받았던 것처럼 떠올린다.
우리는 현재 서로 어느 정도의 거리는 있지만, 각자의 인생 통틀어 가장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물론 나는 2년 넘게 2세를 위해 시험관시술을 받다가 쉬었다를 반복하다 다음달 마지막 이식을 끝으로 시험관 시술은 더 이상 하지 않을 생각이다. 엄마는 작년 골다공증 경계 판정을 받고 건강을 최우선으로 관리하고 있다. 손주도 간절히 바라고는 있지만, 엄마도 나와 비슷하게 ‘노력하고 있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으니 어쩌겠냐’며 열심히 집 앞 망우산을 가고 단백질과 약을 챙겨 먹을 뿐이다. 우리는 누구든 심하게 아픈 몸이 된다면 우선 각자의 배우자와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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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더 많은, 다양한 모녀 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샘글도 그 중 하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