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힙합을 묻다

우현
2023-03-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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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을 묻다

 

힙 합 은 안멋져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지’다는 가사가 히트를 친지도 1년이 넘었다. 이 가사를 쓴 이찬혁은 다른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특정 래퍼들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시대적 유행(당시의 힙합) 속에서 멋진 걸 찾기 힘들다는 의미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재범을 비롯한 주요 한국 래퍼들은 ‘우리 문화에 대해서 뭘 아냐’거나, ‘힙합을 까도 내가 깐다’며 발끈했다. 가사에 대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법 하지만, 적어도 힙합 경연 프로그램에서 뱉은 가사 한 구절이 지금의 힙합 전반적인 모습보다 멋지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나 또한 힙합의 ‘안 멋짐’을 체감하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월간 김왈리’ 프로젝트를 종료하며 지금까지 랩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힙합은 어쩌다가 멋이 없어진 것이고 앞으로의 힙합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미학을 공부하면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예술을 묻다』에서 채운샘은 코로나와 더불어 빠르게 변화해가는 사회 속에서 예술 전반에 대해 묻고(問), 동시에 예술을 특권화하며 삶이라는 맥락에서 예술의 문제를 탈각(8p)시키는 낭만주의적 사고를 묻고(埋) 있다. 서양 미술사에서부터 시작하는 고상한(?) 느낌과 힙합은 약간의 거리감이 있어 보이지만, 삶과 맞닿아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역사적으로 한 시대의 선택을 받은 장르라는 점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사고하고, 초월하려 하고, 형상화하는 태도는 인간의 생존이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로 환원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인간의 생존은 신체를 유지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마음을 보존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어디 내다버릴 수도 없는, 소용돌이치는 이 마음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절박한 질문이 문화를 형성하는 힘이 아니던가. 누구도 이런 문화적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그런 한에서, 각자 생각하는 ‘예술’이 뭐든 ‘예술’의 문제는 예술가나 예술애호가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는 모두의 문제다.

『예술을 묻다』 8p.

 

 ‘힙합이 멋지지 않다'는 가사에 발끈한 래퍼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래퍼들은 한낱 ‘대중가수’(사실 이찬혁은 처음 곡을 쓸때부터 랩을 했다!)가 왜 힙합에 대해서 논하냐는 식인데, 반대로 힙합이 이미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대의 선택을 받은 주류문화라는 점에서 힙합은 더이상 래퍼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힙합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할지 질문하는 게 중요하다. 이는 힙합을 주류로 남기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질문을 하건 말건 이미 시즌을 말아먹은 <쇼미더머니>는 폐지 위기에 놓였고, 주류문화로서의 힙합은 점차 거품이 꺼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지금의 힙합을 소비하는 이들은 일종의 공황을 겪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힙합이 가진 고유성의 문제(게토에서 자란 흑인이 아니면 힙합을 할 수 없는가?), 다양성의 문제(여성래퍼들과 세부장르), 문화-반문화(‘언더그라운드 정신’과 <쇼미더머니>)적인 측면 등에서 힙합의 윤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정리하지 못하며 인터넷에서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다. 이는 힙합이 자본과 결합되고 주류문화가 됨에 따라 팬과 래퍼들 모두에게 보이는 현상이며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내가 겪었던 힙합에 대한 공황과 힙합의 윤리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힙합의 남성성은 제거 대상인가?

 힙합이 주류문화가 됨과 동시에 내가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나의 가장 큰 화두는 힙합이 가진 남성성이었다. 자신의 (빈곤했던)출신과 속한 팀(주로 갱)을 당당하게 샤라웃(언급)하며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자신의 랩 실력과 사치품들을 자랑하는 ‘SWAG’. 나는 그 'SWAG'에 반해 힙합을 듣기 시작했지만, 내 주변 사람들(특히 여성들)은 그 ‘SWAG’ 때문에 힙합을 싫어했다. 미디어는 ‘SWAG’의 맥락보다는 사치품을 자랑하거나 거친 언행을 사용하는 형식에 더 주목했고, 그 속에 넘치는 여성혐오와 신자유주의적 태도는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 또한 기존의 힙합의 맥락들이 재미 없어지기 시작했고, 다른 형식을 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무해한 힙합’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에게 그런 시도가 ‘코코펠리’와 <overthinking> 앨범이었다. 코코펠리는 가사의 내용에 집중한다는 컨셉으로 욕설과 SWAGGING을 제거하고, 여성혐오적이거나 PC적이지 못한 내용을 검열하고 또 검열해왔다. 또한 <overthinking2> 앨범을 통해 힙합을 남성적 문화가 아닌 여성적(소수자적)인 문화로 해석하고자 노력했다.

 

저는 기본적으로 소수자성을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성 정체성이든,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든, 기존 사회에서 자신이 있을 곳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연대하여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이죠. 여기서 ‘자리’는 관념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물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힙합에서는 할렘가에 위치한 클럽이나 오락실을 빌려 만든 블록파티 현장이 되겠죠. 그곳에선 누구나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놀 수 있었습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틀고, 춤을 추고, 구절을 뱉으면서 디스코(와 힙합)은 시작됐죠.

‘낮달살롱 - 디스코편’ 원고 중 발췌

 

 이제와서 고백하지만 나는 호기롭게 적었던 글과는 달리 앨범의 곡들에서 일종의 어색함을 느꼈다. 글과 곡들의 유기성이 살짝 떨어진다는 스스로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뭔가를 놓친듯한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내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반대로 ‘김왈리’는 랩 스킬에 집중한다는 컨셉이었고, 고전적인 SWAGGING이나 공격적인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김왈리는 별 반응이 없음에도 월마다 한 곡씩 꾸준히 내왔다는 사실은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있는듯 했다.

 힙합은 억압받던 이들을 포용하는 문화이기도 했지만, 최전선에서 투쟁해나가는 문화이기도 했다. 게토의 흑인들은 연대하여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냈지만, 세상으로부터 그 공간을 지키기 위해 택했던 방식은 포용적이지만은 않았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마약을 팔고, 조금이라도 안전한 일상을 위해 갱에 입단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은 갱과 같은 방식으로 경찰들과 대립했고, 갱끼리도 치열하게 대립했다. 총을 들고, 약해보이지 않게 허세를 부렸으며, 같은 흑인들끼리도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생존을 위한 그들의 폭력성과 남성성은 결코 힙합에서 떨어뜨릴 수 없는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코코펠리의 작업에서 느낀 어색함은 그런 게 아닐까? 단순히 남성성을 제거하고 ‘원래 없던 것’으로 치부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닐까? 그럼 결국 '남성성과 여성성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가야하나? 그러긴 또 싫었다.

 

 

힙합 : 실존성의 미학

 

 푸코는 질문한다. 왜 예술은 대상을 창조하는 문제로 환원될까. … 우리 자신의 실존을 예술의 재료로 삼아 이를 어떤 양식(style)을 지닌 작품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도출된 개념이 바로 ‘실존의 미학’이다. … 시비와 선악, 규범 같은 기준으로는 판단불가능한, 독특한 기운을 내뿜는 그런 삶이 있다. 이런 삶이나 인물에 수식어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싶지만, 이들의 실존을 설명하려 할 때 ‘미학적’이라는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이 뭐가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예술을 묻다』 242p.

 

 푸코는 대상이 아닌 삶과 실존 그 자체를 예술로 바라보고자 했고, 나는 힙합이 그 실존성을 잘 드러내는 형태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푸코의 맥락과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힙합에서 한 래퍼의 삶과 그의 음악의 관계를 설명하는 표현은 이와 동일하다. 아직도 ‘투팍’이 최고의 래퍼로 꼽히는 이유는 그의 랩만 뛰어난 게 아니라, 그의 거친 삶이 고스란히 음악에 녹아있기 때문이며, 래퍼들이 ‘힙합에 대해서 뭘 아냐’고 발끈하는 맥락도 이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힙합을 ‘그냥 랩’으로만 인식하는 네가 뭘 아냐”며.

 결국 중요한 건 힙합의 남성성이냐 여성성이냐가 아닌, 게토에서의 실존적인 삶을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론 남성적이고 때론 여성적인. 폭력적이기도 하면서 포용적인.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힙합을 좋아했다. 따라서 우리가 논의해야할 지점은 지금의 힙합이 그들(혹은 우리)의 삶을 잘 담아내는가의 문제이다. ‘코코펠리’는 그러했는가? 글을 통해 힙합이 가진 포용성과 연대성을 강조했지만, 내 삶은 과연 그러한가? 가사의 내용이 무엇이 됐건 내 삶 속의 ‘미학적’인 지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가? 이건 테크닉만의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김왈리’의 경우는 어떤가? ‘김왈리'는 기술에 집중한다는 컨셉이었고, 그 핑계로 내용과 의미에 대한 검열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내 마음에 쏙 드는 곡들이 생겼다. <전태일 힙합 음악제>를 우승한 뒤 기분은 좋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적은 ‘wifi’, 아무리 생각해도 꼬인 것 같은 인생을 그래도 유쾌하게 살아가보자는 내용의 ‘먹고 살자’, ‘Risemara’, 성적인 욕망에 대해 사유하고 갈등하는 ‘매운 거’, ‘사재기’ 등.. 이 곡들은 모두 눈치를 1도 안 보고 쓴 가사라는 점이고, 동시에 내가 삶을 통해 느꼈던 감정이 잘 드러내고 있다. 비록 비슷한 감정과 언어의 곡들이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어 중단되긴 했어도, 난 김왈리를 통해 해방감을 느꼈다.

 여기서 나는 한발짝 더 나아가고 싶다. 랩 말고 다른 걸로 먹고 살겠다고 선언했지만, 랩 자체를 그만두기엔 내가 힙합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떤 식으로 ‘멋진’ 랩을 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느껴왔던 ‘힙합의 안 멋짐’과 ‘멋짐’에 대해서 정리하고나니,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랩을 뱉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댓글 6
  • 2023-03-13 15:48

    힙합은 1도 잘 모르지만 '실존의 미학'으로서의 우현의 힙합!, 기대됩니다.

  • 2023-03-13 19:30

    나도 래퍼 우현의 귀환을 기다리는 일인이여^^
    (우영우도 랩을 하잖아? 각자 각자의 랩을 뱉으면서, 균질화된 시공간의 지루한 일상에, 살짝씩이라도 다른 파열음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송투더우투더현투더 문투더탁투더 얼쑤!!

  • 2023-03-13 21:50

    CD로 만들어 달라도 떼 쓰던 나도.. 이제 더 이상 cd플레이어가 없고. 우현이는 힙합이 안 멋지다고 하고. 그래도 증여론 세미나에서 같이 김왈리를 배운 소중한 기억은 그대로~~

  • 2023-03-14 15:14

    저는 뭐랄까 어떻게하면 '장르적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힙합, 락, 가요, 아이돌, 클래식, 재즈... 같은 음악 장르를 넘어서 음악, 미술, 문학 등등까지..
    저는 약간, '실존성 그 자체의 예술로서 삶의 생산'을 이야기하다가 '힙합은 그걸 잘 드러내는 형태의 예술이다'로 왜 다시 돌아가는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오히려 글의 논조를 따라가자면, '힙합'의 '힙합성'을 넘어서는 쪽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 같은데...말이죠? 이유가 있다면 '힙합을 좋아한다'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예술의 생산물도 '힙합'이어야 할까...싶습니다. 뭐라고 이름붙지 않은 어떤 것이 더 좋지 않나 싶어요. 왈리팝?

  • 2023-03-15 08:58

    저도 정군썜과 좀 비슷하게 느껴요. 뭔가.. 힙합으로 자꾸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달까요.. 다음엔 진짜 '아! 뭔가 다르구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 2023-03-15 13:12

    멋짐과 안 멋짐으로 고민한다는 게 멋지다는 생각이 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