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9회] 세상을 피하는 선비들의 지혜

진달래
2022-11-1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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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는 어디 있는가

 

장저와 걸익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께서 그곳을 지나가다 자로에게 나루터를 묻게 하셨다. 장저가 말했다. “저 수레에서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공구이십니다.”

장저가 말했다. “저 분이 노나라 공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장저가 말했다.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

자로가 걸익에게 나루터를 물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중유라고 합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노나라 공구의 제자인가?”

자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걸익이 말했다.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듯 천하가 모두 그러하다. 누가 그것을 바꾸겠는가? 또한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곰방메로 흙 덮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 이 일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실망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는 함께 무리를 지을 수 없다. 내가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논어』「미자,6」

 

초(楚)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위(衛)나라로 돌아가던 공자 일행은 길을 잃었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근처 밭을 갈고 있던 농부들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자로가 농부들에게 다가가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멀리 수레를 타고 있던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흘끗 보고는 정작 나루의 위치는 알려주지 않고 말했다.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 뜬금없어 보이는 이 대답으로 후세 사람들은 ‘문진(問津/나루터를 묻다)’을 ‘도(道)를 묻다’는 의미로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라고 한 이 대답은 한편으로 공자를 조롱하는 의미로 읽기도 한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는 공자이니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지 않겠나.”

자로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장저와 걸익은 평범한 농부가 아니다. 이들은 걸익의 표현대로 “피세지사(辟世之士)”다. 즉 혼란한 세상을 피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선비들, 흔히 ‘은자(隱者)’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장저와 걸익은 공자에게 이미 도가 사라진 세상의 흐름을 바꾸기 어려우니 혼자 그렇게 동동거리며 애쓰지 말고 자기들과 더불어 ‘세상을 피해 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걸익의 말에 의하면 공자는 “피인지사(辟人之士)”다. 공자는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자 노나라를 떠났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자신을 써줄 군주를 찾았다.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달려가지 않고 제대로 정치를 할 만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말 그대로 ‘사람을 가려서 벼슬을 구하는 선비’다. 자로가 이들의 말을 공자에게 전하자 공자는 “천하에 도(道)가 있다면 내가 굳이 이렇게 세상을 바꾸려 돌아다니겠는가?”라고 답한다.

 

 

정치는 위태롭다

 

『논어』 「미자」편에는 이런 은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장저·걸익의 앞뒤로, 세 편이 나란히 공자가 만난 은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노래를 부르면서 공자의 앞을 지나갔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덕이 그토록 쇠하였느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따를 수 있다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은 위태하구나!”

공자께서 수레에서 내려 그와 함께 말하고자 하셨다. 접여가 빠른 걸음으로 피하니 그와 함께 말하지 못하셨다.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 鳳兮 鳳兮 何德之衰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 已而 已而 今之從政者殆而 孔子下 欲與之言 趨而辟之 不得與之言) 「미자,5」

 

공자와 같은 사(士)계층으로 지칭되는 이들은 관직에 나아가 자기의 능력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다. 무릇 공부를 한다는 것은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의 분위기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했다.

춘추시대 말기에는 제후들을 시해하는 대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여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양화나 공산불뉴와 같은 가신(家臣)들의 반란도 자주 있었다. 이런 일들은 때로는 개인의 욕심에 의해서 생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릇된 일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명분이 있건 없건 그 사이에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모두 같았다.

초나라에서 만난 광접여는 바로 이런 사태를 경고하는 것이다. 공자는 어지러운 세상에 질서(道)를 다시 세우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고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광접여는 공자의 그런 행위 자체가 이미 위험하다고 보았다. 이들이 보기에는 세상을 구하겠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제 한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섣불리 출사(出仕)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이들은 이전의 사(士)들이 가지고 있던 삶의 방식을 뒤집어서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출사하지 않은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어디 산 속에 들어가 세상과 연을 끊고 사는 것은 아니다. 높은 벼슬이나 명성을 구하지 않는 것뿐이다.

 

오곡은 분간할 수 있어야 선생이지

 

자로가 공자를 따라가다 뒤쳐졌는데, 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지팡이에 삼태기를 매달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자로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저희 선생님을 보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선생이라 하느냐?”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을 맸다. 자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었다. 노인은 자로를 하룻밤 묵게 해주었다.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먹이며, 자신의 두 아들을 인사시켰다.

다음날 자로가 돌아와 이 일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자로구나.”

자로로 하여금 되돌아가 만나보라고 하셨다. 가보니 이미 떠나고 없었다. 자로가 말했다.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도 예절을 없앨 수 없는데,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를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고자 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그 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은 이미 알고 계시다.” (子路從而後 遇丈人 以杖荷蓧 子路問曰 子見夫子乎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植其杖而芸 子路拱而立 止子路宿 殺雞爲黍而食之 見其二子焉 明日 子路行以告 子曰 隱者也 使子路反見之 至則行矣 子路曰 不仕無義 長幼之節 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 欲絜其身 而亂大倫 君子之仕也 行其義也 道之不行 已知之矣) 「미자,7」

 

이번엔 자로가 공자와 함께 가다가 혼자 뒤떨어지게 된 모양이다. 길을 가다 삼태기를 맨 노인(菏蓧丈人)을 만나서 혹시 공자를 보았는지 묻는다. 그런데 이 노인은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선생이라 하느냐?”며 자로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논어』에 나오는 은자들은 ‘수레 가까이에 온 미친 사람(狂接與)’처럼 ‘밭을 가는 사람’, ‘삼태기를 걸머진 노인’등의 호칭이 나중에 이름처럼 불리게 된 경우가 많다. 이를 통해 보면 은자들은 농사를 짓거나 혹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개중에는 낮은 관직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논어』에 자로에게 공자를 “아, 그 안 되는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요!”라고 평한 성문지기 같은 이들이다. 『맹자』에 “포관격탁(抱關擊柝)” 즉 국경의 문지기나 야경꾼과 같은 낮은 벼슬을 할 수 있다고 한 것도 이러한 경우다. 아마도 이들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농가(農家) 혹은 도가(道家) 등으로 불리는 지식인 그룹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서민들 속에서 살아가는 은자들의 도는 고원(高遠)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도라 할 수 있다. 자로가 만난 노인의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냐’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나왔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어떤 사상이나 이상이 아니라, 매일 매일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만나는 도이다.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면 그만이다.

 

이런 은자들의 삶과 공자의 삶이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결과적으로 추구한 것은 ‘잘 사는 것’이었다. 혼란한 시대를 현명하게 살아내려는 각자의 방식이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공자 말년의 모습은 은자들의 삶과 비슷해 보인다. 주유를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공자에게는 관직에 나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공자는 제자들을 기르고 문헌을 정리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아마도 주유 중에 만난 이 은자들이 출사하지 못한 공자에게 세상을 사는 또 다른 지혜를 일깨워 준 것은 아닐까. 위나라에서 공자의 집 앞을 지나던 한 은자는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만 듣고도 공자의 심중을 헤아렸다.

 

공자께서 위나라에서 경쇠를 두드리며 연주했다. 삼태기를 메고 공자의 집 문 앞을 지나던 사람이 말했다. “마음이 남아있구나, 경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조금 있다가 말했다. “시끄럽구나, 경쇠 소리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 둘 뿐이다.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면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과감하구나! 어려울 것이 없겠구나.” (子擊磬於衛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 曰 有心哉 擊磬乎 旣而曰 鄙哉 硜硜乎 莫己知也 斯已而已矣 深則厲 淺則揭 子曰 果哉 末之難矣) 「헌문,42」

 

때로는 애를 쓰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공자가 “참 과감하군요. 당신에게는 어려울 게 없겠네요.”라고 한 말처럼 우리는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쉽게 마음을 놓거나 그에 맞는 방법을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나는 은자들의 말에 대한 공자의 답에 늘 얕은 탄식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들의 말에서 우리는 늘 실패할 것 같은 일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바지를 걷고 건너면 되지!” 

 

 

 

댓글 3
  • 2022-11-18 14:15

    아마도 주유 중에 만난 이 은자들이 출사하지 못한 공자에게 세상을 사는 또 다른 지혜를 일깨워 준 것은 아닐까
    : ㅋ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안 되는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인 공자를 보고 은자들이 세상을 피해 사는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할 수 있었다는 측면으로요~~ 그런 면에서 피해버리는 사람보다 피할 수도 없고 안 피할 수도 없는 곤란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공자님의 이미지가 저는 더 와닿네요^^

  • 2022-11-29 11:42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바지를 걷고 건너면 되지!”

    이건 기억해둘게요^^ 잘 읽었습니다.

  • 2022-12-02 00:14

    아, 저는 왠지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오곡도 잘 분간하는 분을 선생으로 모시고 싶은 모양입니다.
    어쩌죠?
    잘 읽었습니다~

봄날의 주역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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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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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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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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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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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95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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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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