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동물> 필사 후기_필사는 어딘가 습지와 닮아있었다.

정의와미소
2022-07-09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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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바웃동물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난생 처음 매일 필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더지 잡기>를 시작으로 <습지주의자>의 필사가 이제 중반인데, 세미나 초기에는 매일 새벽에 필사를 하는 열의를 보였지만 요즘은 새벽보다는 저녁에 필사를 하게 되는 약간의 게으름을 피우는 중입니다. 역시 무엇을 꾸준히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ㅎㅎㅎ  우선 <두더지 잡기>를 필사하는 동안  두더지잡기의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음미할 수 있어, 필사 자체 보다는  책을 더 잘 느낄 수 있어서 여러모로 필사가 좋았습니다. 특히 두더지잡기의 책 디자인이  맘에 들어서 내용에 나온  새그림이며, 두더지 그림을 집어 넣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은 다음 책으로 넘어가 <습지주의자>를 필사 중인데, 이 책은 <비숲>을 쓴 김산하 작가가 '반쯤 잠긴 무대인 습지'에 대해 쓴 에세이입니다. 그런데 이번 책의 필사는 좀 달랐습니다.  습지주의자를 읽으면서 저는 필사라는 행위가 습지와 어딘가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반쯤 잠긴 무대>의 주인공은 습지입니다. 습지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데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습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물을 살펴봅시다. 습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물에 대한 감성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시는 물부터 긴 가뭄끝에 내리는 단비까지 다양한 물의 모습과 중요성을 알고 있음에도 물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 물을 알아차리는 데서부터 습지를 이해하는  것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습지라는 무대에는 자기가 출연하는 지도 모르는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내려갔다 하는데, 이 무대의 특징은 반쯤 물에 잠겨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물에 완전히 잠겨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는 물밖, 일부는 물 속, 물과 뭍에 걸쳐 있는 수륙양용무대입니다.  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작품으로 기획하고 올리는 것이 김산하 작가입니다.

 

 우리는 책을 읽는 것, 독서를 통해 책에 담긴 사상, 의미, 느낌, 감성을 배우게 됩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는 구술을 통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런 것이 종이의 발명을 통해 책의 보급이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낭독, 묵독을 통해 책에 담긴 것을 알게 됩니다. 필사도 책을 읽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필사가 낭독이나 묵독과는 다르게  조금 특별하다는 걸 이번 세미나미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필기구를 가지고 손으로 쓰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노트 위에 기록된 내용은 단어 하나, 문장 한구절이 좀더 특별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동안 스윽 하고 넘어갔을 문장이 남기는 자취는 물 안의 모습처럼, 물밖의 모습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왔고,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문장이 나에게 스며드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질서를 가진 건조한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물을 통제하고 가두고 하는 것을 통해 도시는 이미 물의 머무름이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습지는 다릅니다. 거기는 물의 머무름이 있습니다.   습지. 이름하여 젖은 땅이며 물이면서 동시에 뭍인 곳입니다.

바다와 물이 만나는 경계인  습지에 가보면 윤슬을 볼 기회가 많습니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반짝이는 잔 물결이라는 뜻인데 잔물결이 만나면서 만드는 새로운 패턴은 습지에서 만날 수 있는 물의 아름다운 모습 중에 하나 입니다.

 

  필사도  매일 계속하다보니,  내가 쓴 문장들이 마치 물처럼 유동적이고,  그 속에 젖어들게 합니다. 필사를 할 때  이전에 쓴 글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문장들은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때로 습지의 윤슬처럼, 그 잔물결처럼 중첩되는 이미지가 생기고, 문장의 의미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변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필사는 습지에서 만나는 물의 속성을  닮은 것 같습니다. 

 

  습지를 이루는 또 다른 하나는 흙입니다.  물에 젖어 있을때 흙의 모습과  말라있을 때 흙의 모습은 다릅니다. 물의 여부에 따라 습지의 흙은 전혀 색다르고 독특한 동적인 실체를 갖게 되는 데 이 또한 습지의 매력입니다.  물과 흙, 돌로 구성된 무대에서 어떤 배우들이 등장할 지 앞으로 더 기대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필사는 습지의 흙하고도 닮아 있습니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연출 의도를 밝힙니다. 첫번째는 근본으로 돌아가기입니다.지구 생태계의 가장 기초적인 구성 성분인  흙, 돌,  물의 차원에서 우리 눈앞의 세상을 다시 보고자 합니다. 동물이나 식물까지 갈 것도 없이, 생명 현상의 근본 물질부터 고립되고 틀어막혀 버린 상황에 대한 감을 잡고자 합니다. 두번째는 큰그림그리기 입니다. 어디든 자연은 있지만  흙 한줌, 돌 한개, 물 한모금이 혼자 덩그러니 또는 띄엄띄엄 있어서는  큰 의미가 없으며, 거시적인 경관의 수준에서 자연의 연결성을 인식하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흐름을 말합니다. 흙은 호흡해야 하고 돌은 굴러가야 하며 물은 넘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이 제 방식대로 펼쳐질 기회가, 통로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p.76-77)  이 세가지의 관점으로 본 습지의 모습은 말그대로 필사하는 행위의 모습입니다.  필사는  글이 말하고자 하는 기본을 파악하고,  큰 주제를 파악하고, 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흐름대로 읽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예술 활동 같네요.

 

   우리의 반쯤 잠긴 무대, 즉 습지는 물이 넘실거리며 자유 발랄하게 대지를 적실 수 있을 때 생겨나는 그런 공간입니다. 생명의 근간을 이루는  저 물이 원래 제 성질대로 넘치기도 하고 고이기도 하고 흥건힌 짓을 저지르며 돌아다니다 보면, 물과 뭍의 기가 막힌 조합이  곳곳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힌 지형의  온갖 기상천외한 곡면마다  골고루 훑으며 물은 만났다 헤어졌다 떠났다를 반복합니다. 말 그대로 흐름입니다. 습지는 물의 자유분방한 움직임과 체류에 따른 하나의 결과입니다. 그래서인지 습지는 유난히 '자연스러워'보입니다. 물의 흐름이 저절로 이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습지주의자 p. 77)

 

  습지는 이런 곳이었습니다. 쓸모없는 땅이라 간척지가 되어야 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소중한  곳 인 줄 몰랐는데.....  무엇보다 이번 필사를 통해 습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점이 저에겐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또한 필사라는 행위를 경험하고  얼마 안되는 기간이지만 세미나 기간동안 열심히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저의 자부심으로 남겨두려 합니다. 습지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습지에 대한 작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으니 기쁘고,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더 좋은 시간입니다.  마지막주에 가게 될 화성습지 탐방을 기대하며 눈앞에  보이는 것 말고 물 아래, 흙 아래도  보기 위해 좀더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ㅎㅎ

 

 

댓글 3
  • 2022-07-09 05:23

    와....너무 멋진 필사 후기네요.

    "필사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필사는 습지를 닮았다"

    기억하고 꼭 써먹어야쥐^^

  • 2022-07-09 14:38

    잔물결이 만드는 새로운 패턴과 빛에 반사된 윤슬이 너무 아름다워요!

    필사와 습지를 나란히 놓으니까 새로운 것들이 보이네요. 남은 필사는 습지의 흙과 물을 생각하며 해보아야겠어요:)

     

  • 2022-07-10 10:45

    필사의 멋과 맛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하셨네요~
    자연이 제 방식대로 펼쳐지듯

    우리 삶도 그리 될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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