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차이와반복>읽기 시즌2 2장3절 요약 모음

정군
2022-06-22 01:27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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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 2022-06-22 16:01

    차이와 반복(p.205-p.207)_가마솥

     

    균열된 나, 수동적 자아, 시간의 텅빈 형식

    데카르트는 오로지 코기토를 순간으로 환원하고 시간을 몰아내는 데 힘입어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데카르트는 시간을 연속적인 창조작업 중인 신에게 내맡겨 놓는다(주25, 데카르트의 연속창조론-매 순간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 내가 존속성, 단순성, 동일성을 향유하는 한에서 신은 계속 살아 있다. 그런 것들은 신적인 것과 나 사이의 전적인 유사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신의 죽음은 나의 동일성을 존속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죽음을 통해 내 안에 있던 신의 표지나 인장은 사라진다. 그 대신 어떤 본질적 비유사성, ‘표시삭제’가 생겨나고 내면화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바로 이 점을 적어도 한 번은 아주 깊이 꿰뚫어 보았다. 즉 (칸트에 의해서) 이성 신학과 이성 심리학은 동시에 소멸하고, 신의 사변적 죽음은 나의 균열로 이어진다. 만일 초월론 철학의 가장 위대한 창의성이 시간의 형식을 본연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면, 순수하고 텅 빈 이 형식은 이제 다시 불가피하게 죽은 신, 균열된 나, 그리고 수동적 자아를 의미하게 된다. 물론(하지만) 칸트는 이런 창의성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는다.

    즉 신과 나는 실천적 차원에서 부활하게 된다. 심지어 사변적 영역에서 조차 새로운 형식의 동일성, 능동성을 띤 종합적 동일성을 통해 그 균열은 곧바로 메워진다. 반면 수동적 자아는 단지 수용성에 의해 정의되고 이런 자격에서 어떤 종합의 능력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우리는 변용들을 겪는 능력인 수용성은 어떤 귀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수동적 자아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 자체가 수동적인 어떤 종합(응시-수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보았다. 인상이나 감각들을 수용할 가능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이제 칸트적 할당 방식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재현의 세계를 구제하기 위한 최상의 노력이다. 여기서 종합은 능동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나 안에서 새로운 형식의 동일성에 호소한다. 수동성은 종합을 결여한 단순한 수용성으로 파악된다. 칸트적 창의성이 회복될 가능성은 바로 이 수동적 자아를 전혀 다르게 평가하는 데 있다.

    이 새로운 평가 안에서 시간의 형식은 죽은 신과 균열된 나를 동시에 지탱한다(앞에서 미규정적 실존이 규정될수 있는 형식은 시간의 형식이다.p.203 참조). 이런 의미에서 칸트주의의 마지막 출구는 피히테나 헤겔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횔덜린에게 있다는 말은 옳다. 횔덜린은 순수한 시간의 공허를 발견한다. 공허 안에서 신성한 것의 연속적 전회, 나의 심화된 균열, 본연의 자아를 구성하는 수동적 정념을 동시에 발견한다. 바로 이런 시간의 형식 안에서 횔덜린은 비극의 본질이나 오이디푸스의 모험을, 곧 죽음본능의 상호 보완적 형태들을 보았다. 그렇다면 칸트의 철학은 오이디푸스의 계승자일 수 있는 것일까?

     

    (Q) 마지막 문장의 ‘오이디푸스의 계승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주석으로 본 한 줄 요약)

    데카르트는 [세 번째 성찰] 후반부에서 시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신 존재의 확실성을 증명하는데, 세계의 지속은 사유하는 자아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고 매 순간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가정할 때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증명의 내용이다[데카르트의 연속창조(creation continuee)론]. 들뢰즈는 시간을 ‘사유하는 주체’의 내면에 둔다는 점에서 칸트적 코기토의 독창성을 찾고, 이 점을 중심으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이 시간의 내면화를 서양 철학사의 가장 커다란 전환점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 2022-06-22 19:26

    (212~215p) 세 번째 종합안의 반복 : 결핍에 의한 조건, 변신의 주체, 무제약적 특성

     

    시간의 계열 안에서 모든 것은 반복이다. 과거는 결핍에 의한 반복이며, 현재 안에서 변신에 의해 구성되는 또 다른 반복을 준비한다. 역사적인 반복은 역사가의 반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반복은 행위의 조건이다. 한번은 과거를 구성하는 양태에 따라 반복하고, 그 다음은 변신의 현재 안에서 반복한다는 조건에서만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반복은 과잉에 의한 반복, 영원회귀에 해당하는 미래의 반복이다. 영원회귀는 세 번째 시간(의 종합)에만 관련된다.

    여기서 영원회귀가 과잉에 의한 반복이라는 의미는 이 반복이 결핍을 겪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동등하게-되기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회귀는 결핍을 조건으로 하는 새로운 것만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또 영원회귀가 미래의 반복인 이유는 그 자체만으로도 계열의 세 번째 시간이며 본연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는 조건도 행위자도 돌아오게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자율성과 작품의 독립성을 구성한다.

    영원회귀는 나의 고유한 일관성, 자아의 동일성, 신의 동일성을 배제한 비밀스러운 일관성이다. 영원회귀는 평민, 이름 없는 인간만을 되돌아오게 한다. 왜? 영원회귀는 죽은 신과 분열된 자아를 자신의 원환 안으로 끌어들여 폭발시켜 버린다. 그러면 태양은 사라지고 성운들만 남는다. 영원회귀는 이런 성운들과 뒤섞여 하나가 되고 오로지 성운들을 위해서만 운동한다. 영원회귀는 시간의 집합이 아니라 시간의 순서, 순수하고 텅 빈 형식으로서의 시간이다. 시간의 집합은 사태를 너무 단순화시키거나 진부한 것으로 만든다.

    시간의 (텅 빈)형식은 단순한 원환은 와해시켜 버리고, 훨씬 복잡하고 비밀스러우며 찌그러진 원환, 성운에 가깝고 영원히 궤도에서 벗어나는 원환을 만든다. 이 새로운 원환은 오로지 계열 상의 세 번째 시간 안에서만 재형성되는 차이의 원환, 탈중심화된 원환이다. 이런 시간의 계열에서는 매순간이 결정적인 어떤 순간이다. 이런 시간의 (텅 빈)형식은 근거를 와해시켜버린다.

  • 2022-06-22 19:39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칸트적 코기토(구판 202-204p)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규정 속의 규정되지 않은 실존(나는 존재한다)에서 나온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미규정된 실존은 그 실존을 사유하는 존재자 자신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칸트는 이를 다음과 같은 논리로 비판한다: "내가 순수한 사유를 통해 갖는 의식 안에서, 나는 존재 자체이다.(코기토 에르고 숨) 하지만 이를 통해 이 존재의 어떤 것도 아직은 나에게 사유할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나는 존재한다가 나는 생각한다에 어떻게('고로'라고) 규정되는지 우리를 아직 모른다)" 따라서 칸트는 미규정적인 실존(나는 존재한다)를 규정하기 위한 형식을 덧붙인다. 그것은 본연의 차이 자체를 발견하고, 이는 '존재'와 '사유'를 '선험적'으로 관계짓는 내적 차이이다. 이 형식은 바로 시간의 형식이며, 나의 실존(나는 존재한다)은 시간 안에서만 규정되는 수동적인 현상적 주체의 실존이다. 또한 여기서 자발성은 단지 수동적 자아의 변용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나는 어떤 타자이다"라는 말 등으로 집약된다(들만철에 나온 갓 같은데...). 이 주체는 능동성을 창출하는 것보다 그 효과를 느끼며, 그 능동성을 자기 안의 타자로 체험한다.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존재한다'에는 자아를 덧붙여야 한다. 

    규정에, 규정되지 않는 것에는 규정형식의 가능성, 즉 시간을 덧붙여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이를 만들고 이를 존재(존재한다)와 사유(생각한다) 안에 내면화함에 있다. "나는 시간 안에 나타나는 수동적 자아의 상관항이다."

  • 2022-06-22 22:22

    P217~221

     

  • 2022-06-23 08:40

    207~9

     

     

    기억의 불충분성: 시간의 세 번째 종합

     

     

    들뢰즈는 플라톤의 상기에서도 시간의 문제가 도입되어 있다고 말한다. 본유성(“우리 모두는 그것을 아는 채로 태어나 평생 그것을 안다”)과 달리 플라톤의 상기는 “언젠가 알게 되었던 것”을 “어떤 다른 시간에 잃게 되”었다가 다시 알게 되는 것이다(<파이돈>). 즉, 무언가를 배우면 영혼은 배움의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기억할 것이 어딘가에 있고(순수 과거로서 이데아) 그 기억이 다시 조직되는 때가 있다(현재들의 질서). 플라톤이 말하는 상기에서 시간은 당연히 운동에 종속되는 물리적 시간이겠지만, 들뢰즈는 자신의 시간론으로 상기를 다시 풀어낸다. 이 시간에서 이데아는 순수 과거, 즉 근거다. 1) 이 근거에 따라 현재들의 질서가 조직되어 원환을 형성하고, 또한 2) 이 근거에 따라 영혼은 이 원환으로부터 벗어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므네모시네다.

     

    1) 현재들이 시간의 원환 안으로 조직될 때 순수 과거는 현재 관점에서 표현된다. 이때 재현의 원리는 높이 고양된다. 근거는 언제나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없다(즉자 존재). 그것은 현재의 관점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대자 존재). 이것이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이 지닌 애매성이다. 근거, 순수 과거는 그 자체로 원환을 만들지 않는다. 원환은 현재들이 조직화되며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재현이 발생한다. 즉자 존재인 근거는 우리에게 마치 재현의 상관항인 듯 가상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근거는 그렇게 머무르지 않는다. 2) 두 번째 종합은 이 가상을 폭로하는 세 번째 종합을 향해 자신을 넘어선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혹시 이번에는 어떤 짤이? 하며 들어와봤는데... 칸트샘 쪼끔 언짢으신듯요? ㅎ

  • 2022-06-23 09:08

    시간의 형식, 순서, 집합, 계열

    시간의 텅 빈 형식,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무엇인가. 이 시간은 빗장이 풀린 미친 시간으로, 원환적 형태에서 풀려나고, 사건들로부터 해방된 시간이다. 미래와 과거는 시간에 대한 경험적이고 동역학적인 규정이 아니라 시간의 형식적이고 고정된 특성이다. 시간은 운동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대신 각운의 중단이며, 이때 나의 균열은 중단이 결정적인 한 순간을 부여할 때 만들어진다. 이때 우린 경험적 내용을 버리게 되고 자신의 고유한 근거도 전복하게 된다.

    또한 이 시간은 집합과 계열 의해 정의된다. 각운의 중단은 어떤 행위의 이미지 안에서 규정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이미지는 무엇인가) 이 이미지를 통해 시간 전체가 회집된다. 각운이 중간되기 이전과 이후를 모두 회집하는 상징적 이미지는 시간의 집합을 구성한다.

    또그런 이미지를 동등하지 않게 분배할 때 시간의 계열이 가능하다. 과거, 현재, 미래에 사건 자체가 완료되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과거는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살아내고 또 내던져지는 과거다. 현재는 행위의 이미지 안에 어떤 이상적 자아를 투사하는 시간이다. 세번째 시간인 미래의 경우, 이 시간은 자아를 수천조각으로 쪼개서 사건과 행위가 자아에 등을 돌리는 일관성을 가진다. 새로운 세계를 잉태한 자는 자신이 낳은 파열하는 다양체에 압도된다. 이런 시간 계열에 분할된 자아는 이름도, 가족도, 특질도, 자아도 나도 없는 인간이다.

     

     

  • 2022-06-23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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