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알.모. 2회] 죽은 이를 기억하는 방법

여울아
2022-05-31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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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줄 알았지만 몰랐던 이야기" 여.알.모. 두 번째 순자 이야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방법

 

 

  1. 누구를 위한 의례인가

할머니의 장례식장은 북새통이었다. 내가 만삭의 몸으로 장례식장에 들어섰을 때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할머니의 막냇동생분의 아들이 해남 어디선가 개척교회 목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한참을 통성기도 하신 후에야 주위는 조용해졌다. 어느 틈에 도착하셨는지 집안의 먼 친척 비구니 스님이 엄마의 손을 꼭 붙들고 망자의 한을 달래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 엄마 아빠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할 기세였다. 그렇게 장지로 떠나기 전 할머니의 천도재(薦度齋)가 결정되었다.

 

 

할머니는 생전에 죽어서라도 훨훨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하셨다. 뼛가루는 산에 들에 뿌리고, 장례도 간소하게 치루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뇌졸중으로 몇 번을 쓰러지시고, 또 그때마다 재활에 성공하셨지만 할머니는 늘 당신의 마지막을 준비하셨다. 나는 부모님께 왜 할머니의 평소 소원대로 장례를 치르지 않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나까지 보태어 부모님을 비난할 수 없었다. 몇 달 전 새벽 할머니가 사라진 후 부모님은 생업을 전폐하고 매주 전국각지 보호소를 찾아 헤맸다. 당시 서울 살던 내게는 주말마다 바쁘다고만 하시고 할머니의 부재를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리셨다. 그 몇 달 사이 아버지는 이가 몽땅 빠지고 엄마는 앞머리가 듬성듬성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공무원의 실수로 할머니를 행불자로 이미 가매장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 공무원을 고발하지 않기로 서약서를 쓴 후에야 할머니는 주검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 나까지 부모님을 힘들게 할 수 없었다. 당시 우리는 그런 설왕설래를 하기엔 너무나 지쳐있었다.

 

상례와 제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장례식 내내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이 참담해서 울었고, 또 그로 인해 고인의 뜻을 마지막까지 펼치지 못함을 슬퍼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청상과부로 자식 넷을 기르셨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름시름 앓는 할아버지를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며 할머니는 전답을 팔아 굿을 하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숨결을 잡아보겠다며 집문서를 무당 손에 쥐어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자식들이 굶주리고 공부시키지 못했다고 자책하시며, 생의 마지막은 간소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데 왜 부모님은 평소처럼 할머니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장례식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말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였을까...

 

  1. 산 자들을 위한 의례

내가 작년에 읽은 『순자』에서 가장 의외의 부분은 상례와 제례에 관해서이다. 같이 공부했던 세미나 회원들은 예의 대명사로 불리는 순자가 예에 대해 얼마나 잘 풀어냈을는지 한껏 기대를 품었다가, 「예론」 대부분이 상례와 제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데 실망했다. 『논어』에 나오는 쇄소응대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순자용 생활 지침 하나 정도는 건질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나는 평소에 죽은 사람을 위한 제사 때문에 산 사람, 주로 우리 엄마만 죽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자가 왜 하필 삶의 마지막을 예법으로 세우려고 했는지 궁금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우리 엄마가 아직도 제사상을 차리느라 힘들게 말이다.

 

제사라 하는 것은 죽은 이에 대한 추모의 정을 쌓는 표현이다. 『순자』 「예론」

 

순자에게 제사는 산 자들을 위한 의례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 의식은 망자의 한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 자들의 여한을 달래기 위함이다. 추모란 산 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면서 쌓는 연대의 정이다. 죽은 이를 떠나보내며 애통해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하다보면 그 지극한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을 찾게 마련이다. 그는 이런 의례를 통해 산 자들이 애달픈 마음을 표현하고 어떠한 여한도 남기지 않을 때 비로소 가정이 화목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상례와 제례란 죽은 이를 떠나보내며 남은 가족들이 서로를 달래며 상처를 어루만지는 자리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의 장례식은 온가족이 각자의 방식으로 할머니를 잃은 슬픔을 표현하고 애끓는 마음을 추스르는 자리였다.

 

 

순자의 의례에는 조상의 음덕(蔭德)이나 기복신앙에 의탁하고자 하는 어떠한 미신적 요소도 없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일을 내세로 미루고 기약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없다. 의례를 통해 남은 가족들은 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죽음으로부터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으며, 경건히 고인을 기억할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상례의 마지막 도리이자 산 자들의 더 나은 삶(優生)을 의미한다. 공자에게는 부모의 삼년상이 자식을 길러준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답인 반면, 그에게는 자식이 부모를 잃은 슬픔을 치유하는데 걸리는 산 자들을 위한 3년의 시간이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이 담긴 의례가 어찌 형식적일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이런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의례는 더 이상 예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뿐 아니라 그 이후 제사에서 만난 가족들에게 먼저 위로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당시 내게 할머니의 죽음은 온통 미스터리였다. 할머니는 어쩌다 새벽에 길을 나섰을까? 그리고 왜 그 낯선 곳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까? 가족들이 실종 신고를 하고 전국각지를 찾아 헤맬 동안, 어쩌다 할머니는 이름도 없이 가매장되었던 걸까? 담당 공무원은 왜 할머니의 손가락 지문조차 채취하지 않은 걸까? 나는 이런 억울함과 애통함을 혼자서 삭였다. 자칫 누군가의 잘못을 들추고 원망하는 일이 될까봐 우리 가족은 이후로도 할머니의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1. 기우제를 지내는 이유

순자는 의례의 순기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가 제나라 아카데미(직하학궁)에서 20년간 좨주(교장)를 맡았을 당시 유가의 예법이 공론의 도마 위에 자주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논어』에는 재아가 “부모의 삼년상이 너무 길다. 일 년이면 족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전국시대에는 더욱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산 사람의 입도 거미줄을 치는데 어찌 죽은 이를 위한 예의 도리를 다하겠는가?”라고 제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산 자의 입장에서 의례의 필요성을 설득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기우제를 지내고 비가 오는 까닭이 무엇인가. 말하기를, 다른 까닭이 없다. 마치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가 오는 것과 같다.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나면 빌어서 이를 구하려 하고 날씨가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고 점을 친 연후에 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꾸미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일종의 꾸밈(文)이라고 여기고 백성들은 신묘(神)하다고 생각한다. 『순자』 「천론」

 

기우제는 비가 올 때까지 지내기 때문에 비가 올 수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순자는 기우제를 지내던 지내지 않던 비가 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았다. 그는 하늘이 일부러 사람을 벌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람은 자연 현상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하늘과의 교감을 비교적 강조했던 공자나 맹자와 달리, 그는 하늘과 사람의 분리(天人之分)를 통해 하늘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이해를 시도한 최초의 유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사람들은 별이 떨어지고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철제농기구와 우경(牛耕)을 이용한 농사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시기여서 농업생산량은 크게 늘었다. 한해 농사가 잘못되면 당장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가뭄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는 생사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니 이들에게 기우제는 하늘의 귀신을 달래고 복을 기원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기복행위였을 것이다. 순자는 이런 이들의 마음을 달래는 일이 지도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기우제는 실제로 비를 내리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들의 두려운 마음을 달래고 위안하는 공동체 의례였다.

 

따라서 순자에게 공동체 의례의 꾸밈(文), 즉 형식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기치 못한 재난 상황에서 슬픔과 통탄, 소망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식과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실효성 없는 기우제를 없애라기보다는 대신 더욱 정성껏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기우제는 제때 비를 내리지는 못하지만,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에 비를 내려주는 것과 같다. 그는 기우제에 대한 신비주의를 경계하는 입장이었지만, 기우제가 가뭄으로 인한 들끓는 민심을 가라앉히고 공동체의식을 고양하는 정치적 의식 절차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기우제를 지내는 이유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함께 겪는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또 위로 받기 위함이다. 만약 이런 의례의 형식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에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표현할 수 있을까? 꾸밈은 이러한 마음을 담는 의식 절차이자 그릇인 셈이다.

 

  1. 생명력 있는 의례를 위하여

예라 하는 것은 길면 자르고 짧으면 이으며 남으면 덜고 부족하면 보태어 애정과 경외하는 수식에 도달하여 도의를 행하는 미(아름다움)를 이루자는 것이다. 「예론」

 

『관자』에 따르면 “길면 자르고 짧으면 이으라.”는 말이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상이자 실용주의자로 불렸던 관중. 순자는 예의 형식에 대해 말하면서 왜 하필 관중의 말을 인용했을까? 이것은 자신의 본분과 처지에 맞는 예의 실용성을 추구하라는 의미이다. 그는 예의 형식을 제사 때마다 올리는 쌀밥과 고깃국에 비유한다. 제사에 쌀밥과 고깃국을 올리는 이유는 그 당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가장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는 귀신을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을 먹이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더 이상 쌀밥과 고깃국이 산 자들에게 귀한 음식이 아니라면 제상에 올릴 음식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예의 형식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그 형식에 사람들의 마음이 담기지 않는다면 그 의례는 더 이상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제사 많은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정말 많은 전을 붙였고, 정말 많이 제사 의례를 지켜봤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제사상에 꼭 팥빵을 올리셨다. 제삿날에는 아무리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졸린 눈을 부비며 귀신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아버지는 조상님이 잘 찾아오시라고 대문을 열어 두셨다. 나는 제사가 조상님을 위해서 산 사람이 좀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전통을 지키기 위한 형식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제과점에서 제상에 올릴 팥빵을 고를 때 할머니는 그 시절 멋쟁이 할아버지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엄마가 시장에서 가장 크고 좋은 사과를 고를 때 온가족에게 한 끼 귀하게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조차 괴롭다. 바쁘다는 핑계로 더 이상 할머니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다. 그렇게 내게서 할머니는 잊힐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풀지 못한 응어리가 어느새 원망으로 자라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죽음을 잊는 것이 남은 가족들을 위한 배려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족끼리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을 기회조차 놓쳐버린 셈이 아닐까. 나는 그동안 의례의 형식에 담긴 마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라도 내가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마음을 담은 의례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형식은 어떠해야 할까? 요즘 엄마는 집안 제사를 맡길 절을 알아보러 다니시는 중이다. 싫든 좋든 이제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제사라는 방식을 벗어난 새로운 형식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지난 3월 파지사유 생태공방 특강에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님이 초대되었다. 선생님은 매월 16일마다 자신의 머리를 민다고 하셨다. 이것은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자신만의 의례라고 하셨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따르다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어이없는 죽음에 대한 이 시대의 어른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더 이상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의례라고 설명하셨다. 나는 이러한 의례야말로 순자가 말하는 산자들을 위한 의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이제 그만 잊자는 말 한마디로 잊히지 않는다. 풀리지 않은 의문은 살면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세월이 흘러도 그 죽음을 떠올리는 일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해진다. 감정을 감추고 억누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순자의 의례가 필요하다. 서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기우제를 지내는 것처럼 단비를 내려줄 의례 말이다.

 

댓글 7
  • 2022-05-31 10:45

    어제도 남편이 직장동료의 장례식장에 다녀왔어요. 부고를 들을 때마다 '죽음'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요. 내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겠지요. 여울아의 글을 읽으면서도 추모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 2022-06-01 21:18

      아유, 크신 분! 남의 부고를 들으면서 죽음을 생각하다니요. 그나마 가까운 분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이 먼가 가까운가 누구랑 가나... 장례식이라는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형식적인 인간이라 그렇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많이 들었습니다. 

  • 2022-05-31 11:33

    재밌어요. 저, <순자>의 예론을 꼭,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음, 진달래에 이어 여울아까지 고전으로 북앤톡 글쓰기를 하니까 다시 고전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새록새록....ㅎㅎㅎ

    • 2022-06-01 21:21

      어쩌죠... 이 양가감정... 

      학이당 첫해 서지정리법 알려주던 문탁샘이 왜 떠오르는지. 이제 그렇게 하라고 하면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도 같고(그 땐 뭘 그렇게까지...), 아.. 고난에 행군이 또 시작되나 싶기도 하고.. ㅎㅎ

  • 2022-05-31 16:59

    ㅎㅎ 일삼아 걷기 하면서 생명력있는 의례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글 속에 담겨있네요~~ 할머니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한발짝 더 다가가는 시간이었기를^^

    • 2022-06-01 21:24

      등산하며 같이 읽어주신 덕분에 제 감정에 좀더 솔직할 수 있었어요~ 땡큐~

  • 2022-06-03 18:25

    순자 세미나할때 제례부분에서 뭔가 발견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더니만 이런 사연이 있었군요. 여울아샘께 할머님에 대해 몇 번 얘기를 들어서인지 그냥 남의 할머님 같지 않아요. 삼가 명복을 빕니다.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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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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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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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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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148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63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6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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