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4일부터 8월 19일까지 5일간 문탁네트워크에서 '밀양인문학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뉴미디어에서는 이와 관련해서  5개의 '밀양인문학' 에 관한 글과 영상을 올립니다.  나는 왜 밀양에 갔을까? 글 : 문탁 문탁과 밀양의 인연이 6년째로 접어들었다. 난 언제가 속으로 다짐했었다. 1년에 한번은 밀양에 가야지. 그런데 이번에 밀양일지를 정리하면서 보니까 나는 그동안 네 번 밖에 밀양에 가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무 바빠서. 혹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던 동화전이 박살나서. 혹은 우리의 공부와 활동이 밀양에서 탈핵으로 넓혀져서. ㅋㅋ...근데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1. 안다는 것은 ?  :  밀양- 삼문동을 익히다   이번 주 월, 화 1박2일 밀양방문은 그러니까 다섯번째 밀양방문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나는 밀양이라는 공간이 아주 조금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여러번의 뻘 짓^^(밀양역에서 버스로 너른마당을 몇 번 왕복함 + 영남루를 올라가는 길을 잘못 들어 강가를 헤매다가 겨우 도달한 게 아랑각. 진짜 볼 게 하나도 없는 아랑각에서 난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 영남루에서 밀양맛집을 찾아 택시를 타고 너른마당 바로 앞에서 내렸는데 거기서 너른마당을 찾지 못해 하마트면 또 택시를 탈 뻔함) 을 통해서..ㅋㅋ 그리고 묻게 되었다. 안다는 것은 도대체 뭘까?  <너른마당>을 밀양이라는 시골 산 속의 넓은 마당이라고 떠올리고, 아, 그 야외에서 어떻게 강의를 할까를 고민했다는 장금 (고미숙샘이나 도담샘도 비슷했다. 너른마당을 넓은 마당이라고 생각한 점에서는^^) 과  나는 진짜 뭐가 얼마나 다를까?  시공간과 굳건히 결합되지 못한 앎이란 얼마나 취약한 것(불안한 것)일까? 어쨌든 다섯번째의 밀양 방문 끝에 난 밀양의 구 도심(?),  너른마당이 있는 삼문동을 쪼끔 익히게 되었다.       2. 구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  밀양 - 얼굴과 이름을 익히다   예상대로 사주명리학은 '대박'이었다. 역시 사람들은 자기의 운명에,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 (8시간의 하드코어 사주명리학이 끝난 후, 밀양밀면집에서 나랑 마주 앉으신 000할매,  나에게 나즈막히 물으신다. "음...뱀띠와 소띠가 안 맞지예? " ㅋㅋ ) 이걸 몰랐던 게 (혹은 이걸 무시한게) 어쩌면 사회과학의 한계? 어쨌든 나에게 사주명리학 강좌는 뜻밖의 소득을 가져다주었다. '투사-밀양할매(배)'라는 보편개념으로 밀양분들을 떠올리는게 아니라(그것의 한계는? 일단 생략^^)  '경금. 그리고 비겁이 강한 윤여림 할배',  '나랑 같은 정화이고, 대운이 4인 김철원 실장님', '병화이고 식상 작렬이지만  다행히 올해부터 인성이 들어온 이계삼 샘' ,  '겉보기와 달리(?) 병화 일간에, 대운(7)이 들어온 10년전에 밀양으로 이사오신 구미현샘', '계수 권귀영샘'과 '임수 김은숙 샘, '경금이면서 밀양에서 가장 먼저 싸움을 시작하신 고정마을 안병수 할배'....이런 식으로 그 분들을 singular하게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금은 자신의 강사료 전부를 특별회비로 토해냈다. 자기가 밀양에서 많이 배웠다는 것이고 (하지만 나는 이 말은 약간 의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름으로만 알았던 게으르니, 느티나무, 달팽이와 친해져서 너무 좋구, 기쁘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진짜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금에게 나를 통해 알고 있는 문탁, 혹은 자누리 화장품을 통해 관계를 맺는 문탁은, 어쩌면 우리가 일년에 한 두번 싸움을 통해 밀양과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를 밀양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금은  -1박2일의 짧은 시간이지만 - 밀양3인방과 밥을 같이 먹고 잠을 같이 자면서 이제서야 비로서 문탁의 친구가 된 게 아닐까? 장금 왈. "생각해보니 그동안 제가 문탁에 특별회비를 단 한번도 안 냈더라구요. 이번엔 좀 내고 싶어요"   진짜(≠일반적, =구체적)알게 되면, 몸은 저절로 움직인다.     3. 우리는 왜 밀양에 왔을까?  : 우리가 해야 할 질문   밀양은 우리에게 뭘까? 우리는 왜 지난 6년간 꾸준히 밀양에 왔을까? 그리고 왜 이번엔 대규모(이번에 우리는 아이들 포함 43명이 밀양을 방문한다)로 와서 이계삼샘과 대책위분들을 괴롭히면서^^ '밀양인문학캠프'을 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권기영샘은 계속 계속 말씀하신다. "우리가 뭐라꼬, 도대체 밀양이 모라고, 문탁에서 이렇게까지 해주십니꺼? " , 이계삼샘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부하는 곳 중에 문탁처럼 행동하시는 곳을, 전 본 적이 없습니다." 음... 근데 고미숙샘은 이렇게 말한다. "음....너희는 왜 그런 (번다한) 일을 하니?....."   난 고미숙샘의 말이  우리에 대한 감사와 칭찬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귀를 기울인다.  물론 고미숙샘은 길게 말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농담 반 진담 반  "넌 , 아직도 00권이구나. " 라며 나를 놀릴 뿐이다. 쩝!.. 혹은 큭! 어쨌든 고미숙샘의 '.....' 을 나는 이렇게 읽고 있다.  "문탁식구 대부분이 집(아파트)도 있고(크고), 차도 있고(타고 다니고), 가족도 있고(표준적인 라이프스따일 유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그 삶을 계속 유지하면서(자기를 안 바꾸면서) 사회투쟁을 열심히 하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  (물론 그동안 내가 고미숙샘에게 아무 이야기를 안 한 건 아니다. 그리고 가끔 서로간에 언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여기선 패스!!) 그런데 고미숙샘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는 어떤 점에서는 내가 녹색다방에게 하는 이야기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왜 녹색다방은 매주 올리브영에 나가서 피켓시위를 할까?  너무 계몽적인 방식 아닌가? 그리고 너무 관성적 활동 아닌가? 그게 정말 우리에게 배움이 될까?....라는. (난 아직도 녹색다방이 나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밀양인문학캠프가 행사가 될지 사건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의 집단적 경험을 통해 우리 공부를, 우리 실천을, 밀양과의 관계를 우리 모두가 각자의 맥락에서, 그리고 공통의 맥락에서 철저하게, 뼈아프게, 다시 질문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맥락을 가지고 오늘 다시 밀양에 내려간다. 친구들의 응답을 기다린다.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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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는 이전의 웹진보다 우리의 공부를 좀 더 충실히 표현해 내고자 합니다. 2017년 봄 그리스를 다녀온 다섯명의 친구들이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사진과 함께 '조르바 여행단, 그리스에 가다'로 보여드립니다. [조르바 여행단, 그리스에 가다] ② 여행, 일상과 일탈사이에서 헤매다 글 : 게으르니 그리스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 '굳이 여행을 갈 필요가 있니? 일상을 여행처럼 살면 되는데' 라고 반응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반박할 수 있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껏 여행에 대해 심드렁했던 나의 기조가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여행을 빙자하여 서유럽의 남단 그리스로 일명 ‘조르바 여행단’에 속해 14일 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같이 가자는 친구의 꼬드김도 솔깃했고, 어쩌면 내가 발견하지 못한 무엇이 있을지도 모를 ‘여행’을 경험하고 싶다는 의지도 작용했다. 이 글은 여행 기간 동안 떠나지 않았던 질문 ‘여행이 뭐지’를 둘러싸고 고심했던 흔적이다. 1. 5인 5색 – 여행의 일상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친구들은 모두 문탁에 와서 만난 친구들이다. 그동안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현재 처한 조건도 모두 다르다. 게다가 관심 있는 공부도 달랐다. 그런 우리가 함께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다들 걱정을 했다. 너희들 함께 가서 맨날 싸우다 오는 거 아니니?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4시간을 꼬박 함께 보내는 2주일은 우리 모두 처음 경험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상대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고 각자 할 일을 챙겼다. 여행 일정 전반을 짜고 추진한 가이드 건달바. 그녀는 숙박과 교통수단, 여행 포인트까지 모든 일정을 처리했다. 여행지마다 숙소를 예약하고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그리스 여행이 두 번째라는 그녀는 심드렁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더 열심이었다. 어느 날은 자신에게만 맡기고 신경을 안 쓴다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결국 일정이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는 책임감으로 끝까지 묵묵히 했다. 새털은 가는 곳마다 해설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 기분까지 세심하게 보살폈다. 유적지에서 혼자 어슬렁댄 적이 많은 나와 달리 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여행 마지막 날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에는 우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사다 줄 선물만 챙겼던 우리에 비해 받을 선물까지 챙긴 그녀, 내가 아는 버럭만 하는 새털이 아니었다. 달팽이는 여행 내내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뭔가 만들었다. 아침 누룽지, 나프폴리오에서 먹은 고추장찌개, 산토리니의 냉동 생선을 끓인 매운탕. 그중에서도 압권은 뽕나무 잎을 따와서 쪄준 것이었다. 신나게 쌈을 싸먹으면서 더 따고 싶었지만 행여 주인한테 들킬까 조마조마 했다는 달팽이의 무용담은 덤이었다. 그 때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그녀의 미덕이 새삼 빛을 발했다. 일행 중 청일점이었던 뿔옹은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고 운전을 도맡았다. 크레타에서 단체 쇼핑을 하자고 우르르 옷가게로 몰려 들어갔다. 한 사람 한 사람 어울리는 옷에 대한 평을 성실하게 해 주던 그는 나름 패션 감각이 살아있는 친구였다. 나는 여행 내내 그리스 아침 산책을 나갔다. 아테네에서 첫 날은 낯선 공간이 주는 긴장감 때문에 머뭇거렸지만 다음 날부터 아침 산책을 거의 거르지 않았다. 낯선 도시의 적당한 긴장도 좋았고 그리스 아침 공기도 제법 신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과일 노점상이나 까페에 들러 친구들과 함께 먹을 것을 사오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족은 아니지만 때때로 가족보다 더 많은 일을 함께 했다. 그러나 함께 공통감각을 맞추기에는 여전히 미숙한 적이 많은 일상이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좀 더 익숙해졌고 때로 낯선 면을 발견하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익숙함에 편안하고 낯설음에 즐거워했던 여행의 일상, 우리는 서로에게 한 뼘 더 능숙해졌다. 2. 낯설음에 질문하다 – 여행의 사이 이번 여행의 첫 여정은 아테네 도심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었다. 숙소가 있었던 빅토리아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모나스트라키역에서 내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남서쪽을 펼쳐진 아고라부터 들렀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신전들이 신들을 받드는 곳이라면 아고라는 시장이 있는 세속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시장을 보러 나온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여론을 접하는 곳이기도 했다. 동양 경전 중심의 공부만 해온 나로서는 그 공간의 의미가 너무나 생경했다. 이게 뭐지? 이런 광장이 있었기에 직접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정치가 가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이런 광장이 필요했던 것일까? 공자에게는 고대 성왕들의 말씀이 있었다면 소크라테스에게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말이 있었던 것일까? 아고라 광장에서 아크로폴리스언덕을 올려다보니 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우뚝 선 신전이 청명한 지중해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는 두 개의 신전이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네 신전이었다. 막상 정상에 올라서서 보니 시야에 잡히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그 위용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라 곳곳에 철골구조물이 버티고 있었다. 신전이 있는 언덕에서 아래쪽으로는 원형 극장이 보였다. 2500여 년 전의 화려한 명성은 다 스러지고 무너진 돌의 형상만 고스란히 남아 그 영화를 가늠케 할 뿐이었다. 광장에 모여서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에 연관된 문제를 성토하고, 극장에 둘러 앉아 인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운명의 비극을 체감하고, 그 운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신탁을 듣기 위해 제물을 지고 오르는 사람들. 그리고 때가 되면 폴리스들 사이의 전쟁에 나가 삶과 죽음만 존재하는 그 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한 사람들. 그리스 유적지를 돌면서 떠올린 고대 그리스인의 형상이었다. 우리는 같은 인간일까? 다른 인간일까? 그리스 현지에 관해 알고 있는 얕은 지식으로 매순간 마주치는 낯선 공간을 경험하려니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정답은 모르더라도 그럴듯한 해답 정도라도 건졌으면 했으나 역량 밖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상이나 공부에서 질문을 벼리지 못하는 것은 익숙함에 머물러 있기 때문 아닐까. 어떤 식으로든 낯설음과 마주칠 때 질문을 벼릴 수 있다면 여행은 질문 없는 편안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문을 향해 떠나기 아닐까. 3. 편안함 너머 - 여행의 일탈 그리스에서의 아침 산택은 점점 일상이 되어 갔다. 친구는 이런 나에게 단체 여행을 와서도 혼자 배낭여행족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 치켜세웠다. 여행의 중반 크레타에 도착한 첫 날 노천 까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낯선 여행지의 경계심도 많이 사라지고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 속에 앉아 있으니 평소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일상을 여행처럼 보내면 될 걸 굳이 여행을 갈 필요가 있니? 일상을 벗어나보고 싶었다. 여행 내내 현지인들과의 접촉은 다른 사람 몫이라고 여기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산책길에 일찍 문을 연 까페에 들어갔다. 직원에게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서 두 잔을 의미하는 손가락 두 개를 펼치고 투 라고 말도 했다. 주문을 받던 그리스 아가씨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에스프레소 투샷 한 잔을 받아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바디 랭귀지가 안 되면 그냥 나오는 대로 한국말로 했다. 신기하게도 알아들었다. 현지인이나 나나 모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받아들이니 그들을 보는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크레타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조르바가 흰머리로 늙은이 취급을 당하는 것에 분개해 염색을 감행하는 부분에서 이거다 싶었다. 염색하면 달라 보일 거라고 권한 친구들도 있었다. 계속 망설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런데 여행 중에 찍은 사진에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점점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당장 염색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친구들은 더 신나하면서 슈퍼에서 염색약을 골라 주었다. 침대가 놓인 호텔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염색을 했다. 천식이 있는 친구가 독한 약 냄새를 견디며 열심히 머리에 염색약을 빗질해 주었다. 여행지에서는 물건을 산 적이 거의 없다. 여행 상품점에서도 대부분 주마간산 식으로 지나간다. 그런데 옆에서 다들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쇼핑이라 부추겼다. 옷 가게를 지나거나 혹은 들어가서는 이 옷이 괜찮아 저 옷이 낫네 품평하면서 서로에게 옷을 권했다. 평소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옷을 두 벌이나 샀다. 여행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산토리니의 첫날은 저녁을 다 차리고 마주 앉으니 해가 지는 어스름 무렵이었다. 산토리니 숙소는 현지에서 생산된 와인에 럼주, 그리스 토속주 우조까지 갖춰져 있었는데 주인은 마음껏 마셔도 된다고 했다. 지나온 여행지의 감흥, 함께 읽고 있던 <그리스인 조르바> 주인공들의 운명에 대한 애도,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는 애로사항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주제가 두고 온 일상과 여행 사이를 횡단하는 동안 술병은 점점 비고 때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산토리니 하늘에서는 폭죽까지 터졌다. 옆 집 아줌마의 정보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빵집 주인 아들이 장가가는 날, 축하 피로연 폭죽이라고 했다. 여행이 주는 일탈을 만끽하는 어떤 순간이었다. 여행지에서 서로 마음을 챙기는 친구들과의 일상은 여행을 즐겁게 하는 동력이었다.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지 않더라도 여러 사람의 능력이 합쳐지니 편안하고 풍족한 여정이었다. 이것이 일상인지 여행인지 헷갈릴 즈음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을 저지르는 소소한 일탈도 있었다. 해답을 찾지 못한 질문의 숲에서 질문 없는 일상이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감을 잡기도 했다. 그리스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아테네의 수니온곶에서 선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여행자 필이 좀 나는 걸. 여행이 끝나는 것이 아쉽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이 뭐냐고? 시작은 두렵고 끝은 아쉬운 것. 여행은 끝났다. 다시 일상이다. NM

뉴미디어는 이전의 웹진보다 우리의 공부를 좀 더 충실히 표현해 내고자 합니다. 2017년 봄 그리스를 다녀온 다섯명의 친구들이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사진과 함께 '조르바 여행단, 그리스에 가다'로 보여드립니다. [조르바 여행단, 그리스에 가다] ③ 그리스, 문명의 폐허를 지나가다 글 : 새털 1. 맥주와 올리브로 여행은 시작되었다 나의 그리스여행은 미토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알파와 친숙해졌고 더러 픽스를 접하기도 했지만, 베스트는 스파르타였다. 이렇게 그리스 맥주들과 함께 나의 그리스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안내서에서 소개하는 그리스 대표술은 우조와 락키다. 인천공항을 떠나기 전부터 우조와 락키를 맛볼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미토스와의 만남은 기습적이었다. 아테네여행 첫날 아크로폴리스 유적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으러 간 수블라키식당에서 미토스를 발견했을 때, 나는 내가 한국을 벗어나 그리스에 도착해 있음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세상에 맥주이름이 미토스라니!’ 미토스(mythos)는 신화와 이야기를 이르는 그리스말이다. 미토스의 맛은 좀 싱거웠다. 그리스 사람들의 대중적 입맛을 사로잡은 맥주는 알파다. 독일맥주 하이네켄과 디자인과 맛이 비슷한 알파는 시원하고 깔끔했다. 픽스는 크레타에서 마셨는데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탁월한 맛은 아니었다고 본다. ‘나의 베스트’ 스파르타는 밀맥주와 흑맥주의 풍미가 느껴지는 달짝지근한 감칠맛이 났는데, 스파르타 근방에서만 판매되어 딱 한 번밖에 마시지 못했다. 많이 아쉽다. 그리고 하이네켄처럼 세계적인 네덜란드맥주 암스텔이 알파와 함께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맥주다. 나는 휴대폰 사진폴더에 맥주리스트를 쌓아가는 재미가 있으리라고는 여행을 준비하는 6개월 동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누가 그리스여행을 준비하며 맥주 마실 계획을 짜고 있겠는가?) 그리스에서의 15일, 나는 맥주뿐 아니라 많은 것들과 기습적인 만남을 가졌다. 햇수로 4년,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고 떠난 여행에서 놀라웠던 건 그간 읽었던 책에서는 행간으로도 읽을 수 없는 것들과의 대면이었다. 이를테면 올리브가 그렇다. 아테네도시의 주신이 되기 위해 아테네여신이 포세이돈신과 경쟁하며 올리브나무를 선물로 주었다는 신화는 알고 있었지만,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올리브나무숲은 상상 이상이었다. 신화가 아니라면 올리브오일이거나 병조림 올리브가 올리브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였던 나에게 이제 막 꽃이 피어나는 올리브나무를 본다는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우리는 자주 영화의 제목처럼 빽빽이 들어찬 올리브나무 사이로 곡예운전을 하며 지나갔다. 그간 읽었던 책 어디에도 내가 구글맵이 찍어주는 올리브나무 사이 길을 지나가게 되리라고는 알려주지 않았다. “모든 곳에 신들로 가득 차 있다”는 탈레스의 말은 “모든 곳에 올리브로 가득 차 있다”로 바꿔야 한다. 일주일에 하루씩 꼬박 4년을 갈고닦은 공부가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순간, 나는 완벽한 여행자로 리셋 되었다. 2. 펠로폰네소스에서 궤도를 변경하다 펠로폰네소스에서 우리의 일정은 아테네에서 출발해 ‘코린토스-에피다우로스-나프폴리오(1박)-아르고스-스파르타(1박)-올림피아(1박)-델피(1박)-테베-아테네공항(크레타로 출발)’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자동차로 달려 아테네에서 1~2시간 거리에 있는 코린토스, 아르고스, 델피, 테베와 거기서 1~2시간쯤 더 달려야 도착하는 스파르타와 올림피아는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며 자주 등장하는 지명들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그곳들은 까만 점으로만 보일 뿐, 그 위치와 거리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 점들 사이의 ‘짧은 거리’를 ‘물리적 거리감’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델피신전에서 저주받은 신탁을 전해들은 오이디푸스는 아르고스가 아니라 왜 하필이면 테베로 달아났을까?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협곡이나 산맥이 이들의 불화를 조장했던 것인가?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없애고 아테네로 귀향하던 테세우스는 왜 낙소스섬에서 잠이 들었을까? 크레타에서 낙소스 그리고 아테네는 얼마나 먼 거리인가? 펠로폰네소스 일주를 앞두고 내 머릿속엔 전설적인 인물과 역사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펠로폰네소스에서의 첫 번째 날, 숙소의 주인아저씨는 우리에게 ‘미스트라스행’을 강력 추천했다. “당신들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미스트라스는 그리스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곳이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그곳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우연히 일정에 추가된 미스트라스는 보석 같은 명소였다. 여기서 우리는 머리가 둘 달린 독수리를 문장으로 가진 비잔틴제국과 만나게 되었다. 그랬다. 그리스에는 내가 공부한 신화와 전설 속 고대 그리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그리스와 국가부도의 위기상황에 있는 현재의 그리스가 겹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그리스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 정교회 신도들이었다. 지금 그들에게는 올림포스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활절 달걀을 나누어 먹는 일이 더 중요해 보였고,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적대가 아니라 그리스와 터키의 적대감정이 보다 생생했다. 수학여행을 떠나온 나에겐 궤도를 이탈한 황당한 느낌도 들었지만, 미토스와 알파맥주를 번갈아 마시며 ‘지금 보고’ 있는 그리스에 집중하기로 했다. 3. 폐허의 고요함과 평온함, 미스트라스와 스파르타 미스트라스는 해발 600미터의 산중에 세워진 요새도시이다. 산의 상층부에는 성곽과 궁전이 하층부에는 교회와 수도원과 관공서가 그리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비잔틴제국의 전성기에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보다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번성했고, 이 절정의 시기에 ‘모레아의 경이’라는 뜻으로 미스트라스의 이름이 지어졌다. 도도한 성채도시는 1463년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침략에 백기를 들고 만다. 미스트라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몰락 이후 3년을 더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대항한 최후의 항전도시이다. 이후 그리스와 터키는 오랜 정복과 독립전쟁을 거쳤고, 그리스사람들의 터키에 대한 적대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숙소의 주인아저씨가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왜 꼭 미스트라스에 가봐야 한다고 고집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모레아의 경이’ 미스트라스는 지금 ‘비잔틴의 폐허’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미스트라스는 산중에 위치한 성채도시라 다른 도시들과 달리 세월의 변화로부터는 비껴서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번영기의 우아한 풍채는 이제 흔적처럼 남겨진 잔해를 통해 짐작해야 하지만, 사람의 발길로부터 멀어진 비잔틴의 폐허는 아이러니하게도 비잔틴시대의 아름다음을 자연의 방부처리를 거쳐 보존하고 있다. 미스트라스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중세 도시와 교회의 양식을 잘 기록하고 있는 ‘화석’과 같은 도시다. 우리가 미스트라스를 찾았을 때는 오전부터 내리던 비가 막 그칠 즈음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는 선선했고, 빗물에 씻긴 시야는 선명했다. 먼 이국의 유적지에 도착하면, 의식적으로 표지판을 찾고 어떤 정보든 읽어내려 하는 여행자들의 습관을 미스트라스는 무력화시켜버렸다. 아......여기서 무얼 더 알아야 할까? 우리 눈에 보이는 폐허와 그 폐허가 주는 공허함을 그냥 느끼면 될 일이다. 웃자란 거목들과 잡초가 우거진 성채와 교회는 이 도시가 겪어낸 세월의 풍상과 더불어 고요함과 평온함을 동시에 전달해준다. 미스트라스에서 나는 거대한 허무가 가져다주는 경건함이라는 역설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미스트라스에는 성 소피아 교회와 성 데메트리오스 교회가 있다. 이곳에서는 중세 비잔틴 양식으로 그려진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다. 칠이 벗겨진 프레스코화는 예수의 사랑과 사도들의 이야기 등 성경의 내용을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와 성인들의 머리에 동그랗게 그려진 아우라와 평면적이라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표정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너무 단순하게 표현되어, 너무 직접적인 그 표정들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프레스코화 어디에선가 나와 같은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좌절하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 도시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시간의 압도적인 힘 아래 인간은 여전히 원하고, 원망하고, 노력하고, 좌절하는 희노애락애오욕의 인생을 살아간다. 이건 그저 부질없는 미련함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철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무함을 알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애쓰며 살아간다. 내가 여행중 유일하게 스파르타 맥주를 맛본 곳도 미스트라스의 식당이었다. 스파르타는 미스트라스와 1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스파르타 맥주병에는 스파르타의 전사가 귀엽게 그려져 있다. 용맹한 전사라기보다 현역에서 물러난 ‘예비역’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 귀여운 전사맥주를 스파르타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연고지를 벗어나서는 판매되지 않는 스파르타 맥주가 쇠락한 스파르타의 입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우리가 찾아간 스파르타의 유적지는 아테네와 같이 아크로폴리스, 아고라, 원형극장, 경기장 등 고대 폴리스가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구비하고 있었지만, 유적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잡초더미에 방치되어 있었다. 스파르타 시내에 위치한 박물관 또한 규모가 작고 전시물이 거의 없었다. 펠로폰네소스의 전통강호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승리하며 신흥강국 아테네의 무릎을 꿇렸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스파르타에도 아테네에도 영광은 없다. 그들의 영광은 내가 읽은 기원전 5세기의 책들 속에만 있다고 생각하니 쓸쓸함이 느껴졌다. 스파르타 맥주를 더 이상 마시지 못한 나의 아쉬움에는 이런 사연도 있었다고 사족을 달아본다. 4. 그리스에 김치찌개 식당을 열어볼까 현재 그리스는 국가부도의 위기상태에 있다. 가는 곳마다 비어진 상가가 많고, 관광수입으로 그리스 경제가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한때는 세계 최고의 선박기술을 자랑했으나 이제는 관광객들이 쓰고 가는 돈으로 유지되는 그리스의 살림살이는 팍팍해 보인다. 지금의 그리스는 문명의 영광보다는 퇴락을 좀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퇴락하는 것들에서 어떤 편안함을 느꼈다. 그건 왜일까? 우리가 델피에서 갔던 식료품점 할아버지는 집에서 직접 양봉한 꿀이라며 진열된 상품의 품질을 자랑하셨다. 짧은 영어로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가 뻔하지만, 바디랭귀지로 표현되는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진지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올림피아에서 우리가 머문 그리스농가에서는 전형적인 그리스 아저씨와 아줌마를 만날 수 있었다. 난방이 잘 되지 않아 잘 때는 썰렁했고, 방음이 안 돼 속닥거리는 소리에도 시끄럽다는 잔소리가 들려왔다. 집은 낡았고 사용하기에 편리하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 짐을 싸서 출발하려는 우리에게 집주인 부부는 집에서 짠 올리브오일을 한 병 주셨다. 우리는 부부의 마음이 고마워 되도록 버리지 않고 다 먹으려고 가는 곳마다 기름병을 싸들고 다녔다. 미스트라스를 추천한 나프폴리오의 숙소아저씨는 막 도착해서 피곤한 우리를 붙잡고 한 시간 동안이나 그리스여행에 대한 정보를 전해준 ‘열혈 오지라퍼’였다. 산토리니에서 탄 버스에서는 차장이 차비를 받았다. 대부분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인데 탄 곳과 내려야 할 곳을 전혀 헷갈려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신전이나 선셋이 아니라 이런 일상적인 삶이었다. ‘국가부도’라는 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공기처럼 느껴졌지만, 위기가 대수라는 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일상을 알뜰살뜰 꾸려가고 있었다. 경제성장이라는 ‘거품’이 터져버리면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욕망의 크기도 줄어들지 않을까? 내 눈에는 그리스 사람들의 생활이 단순하고 소박해 보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믿을 수 없는 여행자의 시선이다. 그러려고 작정하고 떠난 여행이 아니었는데, 나는 여행중 문득문득 발견되는 내 모습과 감정에 조금 놀랐다. 미스트라스와 스파르타의 폐허에서 나는 가정경제가 허물진 ‘나’를 보았고, 그걸 마주한다는 게 민망하고 쓰렸다. 코린토스 유적지 박물관 뜰에는 머리만 달아난 조각상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신체의 일부가 사라져도 조각상은 자기 시대의 유전자를 간직하고 꼿꼿하게 서있다. 훼손된 채, 망실된 채, 보장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가 그리스에서 본 것은 유한한 존재의 취약함과 일상생활의 견고함이다. 내가 그리스에서 본 것은 서양문명의 기원이라는 빛나는 영광이 아니라 그것이 허물어진 자리에서 일상생활을 여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적한 바닷가마을인 코린토스를 지날 때는 여기에 와서 한 달쯤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어 놓은 가게보다 비워진 가게가 많은 스파르타를 지날 때는 여기에 김치찌개 식당을 하나 차리면 어떨까 라고 생각이 조금 자랐다. 김치찌개, 파전, 소주로 메뉴를 한정해서 팔고,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공부를 한다는 마스터플랜을 세워보았다. 관광지인 크레타와 산토리니는 아무래도 물가가 비쌌고, 관광객이 많은 만큼 도로를 가득 메운 매연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살기엔 임대료가 싸고 인적이 드문 스파르타가 최적이라는 확신을 굳혔다. 임대료로 싼 김에 식당이 아니라 민박과 식당을 겸해보면 어떨까? 그리스 고전 기숙프로그램을 돌려보면 어떨까? 아...그러려면 렌트카도 하나 있어야겠다는 데까지 망상은 새끼를 치며 커져 갔다. 그리스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이민과 새로운 사업구상을 하고 있는가? 아니다. 하루살이 인생을 바쁘게 살고 있다. 운전 중 길이 막힐 때마다 여기가 올리브나무로 가득 찬 펠로폰네소스평원이라고 주문을 걸며 잠시 짜증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운이 좋다면 스파르타에 한국식당을 차릴 절호의 찬스가 주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런 운이 돌아오지 않아도 한번쯤 그리스의 공기를 쐬고 온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다음엔 터키에 가볼까? 트로이전쟁이 일어났던 터키에서 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아닌 무엇과 만나게 될까? 또 다시 고개를 쑥 빼고 내게 올 행운(?)과 필연(!)을 기다린다. NM

뉴미디어는 이전의 웹진보다 우리의 공부를 좀 더 충실히 표현해 내고자 합니다. 2017년 봄 그리스를 다녀온 다섯명의 친구들이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사진과 함께 '조르바 여행단, 그리스에 가다'로 보여드립니다. [조르바 여행단, 그리스에 가다] ④ 그리스 여행, 낭독하기 참 좋아요 글 : 뿔옹 여행이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남이라고 할 때, 요즘은 여행이 쉽지 않다. 저 멀리 남미로 여행을 갔다고 해도 매일 통화를 하고, 안부는 물론 사진까지 쉽게 전달할 수 있다보니 지금의 여행은 여행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우리는 여행 첫날부터 진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함께 사용할 수 있다던 와이파이 장치가 여행 시작부터 작동하지 않았다. 이걸 어쩐다? 개별적으로 해외 인터넷 신청을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까지 인터넷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첫 여행지였던 아테네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볼 것도 많고 가야할 곳도 많았기에 인터넷을 사용할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유적지의 탐사부터가 문제였다. 고대 그리스 하면 보통 아테네를 떠올리지만 우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불씨를 제공했던 코린토를 보고 싶었고, 에피다우로스의 원형 극장 한 가운데에 서서 노래도 불러보고 싶었다. 또한 철학적으로 아테네보다 더 큰 영향력으로 남아 있는 스파르타의 현재를 경험하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여행의 반 정도가 펠로폰네소스 반도 탐사에 할애되어 있었다. 문제는 방문하고자 하는 유적지들이 꽤 많이 떨어져 있다는 점.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우리나라 남한보다 작다고 하더라도 대충 대전과 전라도를 거쳐 부산과 강원도를 돌아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을 떠올리면 된다. 한국의 고속도로를 생각한 다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 도로의 대부분이 편도 1차선이고, 구불구불한 산길의 연속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우리는 하루에 보통 100~200km 정도를 이동해야 했고, 하루에 3, 4시간 이상을 차 속에서 보내야 했다. 무료한 차 속에 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 낭독하기. 15일의 여행을 마치기 이틀 전쯤 우리는 460페이지의 <그리스인 조 르바> 낭독을 끝냈다. 와~우! 요즘엔 한 권의 짧은 문학책 읽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더군다나 낭독으로, 목소리를 내어서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우리가 해냈지 뭔가! ^^ 낭독, 어디까지 가봤니? 근대인들은 묵독으로 책을 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묵독으로 밖에 책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디서나 학구적 의지 를 보여주는 친구가 있었고, 책을 듣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환경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작은 해치백 승용차 한 대에 5명의 친구들이 3~4시간 동안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행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라디오를 틀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우리는 차를 탈 때마다 책을 읽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책을 읽다보니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여러가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차에서 책을 읽으면 어지럽다는 달팽이를 조금 더 알게 되었고, 두목과 조르바, 부불리나와 과부의 목소리를 연기하려고 노력하지만 거의 비슷하게 씩씩한 톤으로 책을 읽어주던 게으르니의 목소리는 모두를 유쾌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한 사람이 책을 읽어줄 때마다 우리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고, 각자의 톤과 호흡으로 ‘조르바’와 ‘두목’을 표현하는 것이 다채롭고 흥미로웠다. 책 읽는 소리를 듣다보면 간혹 잠이 들기도 하지만 옆 친구에게 지나간 이야기를 묻는 것도 재미 중에 하나였다. 마치 인터넷이 없던 시절 보지 못한 미니시리즈의 지나간 이야기를 묻고 듣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라고 해야할까. 단 14일동안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듣는 것만으로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구술문학과 낭독, 낭송에 대해서 공부하고 실험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14일 간의 낭독 경험 그 자체로 소리를 내어서 책을 읽고 듣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조르바 이야기에 우리 5명은 꽁꽁 묶여져 있었다. 장난 삼아 이름 지었던 ‘조르바 여행단’은 딱 맞는 이름이 되었다. 조르바의 신나는 춤과 사랑이야기, 두목의 이야기와 고민, 그리고 부불리나의 사랑 스러운 행동과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우리는 함께 희희낙락했다. 여행의 막바지에 들어서 산토리니에 들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날 저녁은 맛있는 해물을 사와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친구들 몇몇이 시장으로 향했다. 나는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조르바를 읽기 시작했다. (바로 이 사건이 지금 내가 조르바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라고 할까) 우리가 내기를 걸면서까지 궁금해했던 두목과 과부의 하룻밤이 성사되었고,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부불리나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먼저 알게 되었다. 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줘야겠구나! 숙소에 있던 나는 시장에 가 있는 친구들에게 부불리나의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온 뒤 우리는 그 하룻밤에 기뻐했고, 부불리나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을 읽는 시간은 우리에게 하나의 경건한 의식 같았다. 5명 모두가 산토리니의 숙소에 둘러 앉아서 돌아가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한 사람씩 책을 읽어내려갈 때 그 호흡 하나까지 집중하면서 예민하게 조르바와 두목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언제나 행동과 열정으로 움직였던 조르바와 생각만 많아서 ‘계산기’라고 놀림을 받았던 두목, 이 두 사람은 고국의 해방을 위해서 몸 바치고자 하는 열정과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고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크레타 출신 니코스 카잔차키스 자신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두목은 조르바가 되어갔고 조르바는 두목이 되어갔다. 호메로스를 사랑한 니코스 카잔차키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가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여행을 떠난 이후에야 알았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열정적으로 호메로스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그의 책에서는 호메로스의 냄새가 난다. 두목과 조르바의 인생에서 오뒷세우스적인 모험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조르바의 행동과 사고 방식은 행위와 정신에 틈이 전혀 없는 호메로스적 인간의 부활처럼 느껴진다. 뭔가를 생각하기 싫어하고, 생각을 저울질 하는 두목을 보면서 답답해 하던 조르바. 그가 보여주는 행동은 분명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몸으로, 행동으로 드러내고 있다. 내용만이 아니다. 함께 읽었던 모두가 느꼈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는 분명 구술 문학적 특성을 보여준다. 한국어 번역본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 한 문장 그 문체 자체가 읽기 에 알맞은 문장으로 만들어졌다. 카잔차키스 역시 자신의 작품이 읽히는 것이 아니라 호메로스의 시처럼 노래불려지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그저 여행하는 동안 책 한권을 읽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르바는 우리 마음 속에 크게 자리 잡았다.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보고 크레타에 도차할 때 쯤에 우리는 그리스인과 고대 유적들 속에서 조르바를, 조르바의 이야기 속에서 그리스 고전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크레타에 있는 그의 무덤에 도착해서 읽게 된 간결한 그의 묘비명에 우리는 다시 한 번 감격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유라는 말은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고귀함을 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쟁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도 그의 책을 소리 내어 읽었고, 따뜻한 햇살에 누워 한동안 꿀같은 휴식을 취했다. 만약 조르바를 읽지 않았다면 크레타의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는 그의 박물관을 찾아가는 수고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르바의 숨결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고 그에게 조금 더 가까 이 가고 싶었다. 물론 니코스 카잔차키스 박물관에 놓여 있다던 한국어 책의 모습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크레타에서도 차를 빌려서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가 갔을 때 다른 어떤 관광객도 없던 박물관으로 찾아갔다. 그리스의 다른 유적지 박물관처럼 이곳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1층에는 주로 그의 생애와 관련된 내용과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손으로 썼던 원고들이 있었고, 2층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번역본들이 있었다. 특별히 눈에 들어왔던 것은 카잔차키스가 썼다는 <오뒷세이아> 수고였다. 12년동안 7 번이나 고치면서 출간되었다는 <오뒷세이아>는 그 자신이 새로운 호메로스 시인이 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오뒷세이아>의 다른 버전이 아니라 <오뒷세이아>가 끝나는 시점을 시작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카잔차키스가 쓴 ‘오뒷세이아’는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 까? 그리고 그의 <오뒷세이아>가 그리스인들에게 지금도 불려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박물관을 거의 다 살펴보고 우리는 한국어판 <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 그리스인 조르바> 한국어판이 보이지 않았다. 안타까움은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우리는 그곳에 우리가 읽었던 한국어판 <그리스인 조르바>를 기증했다. 책 한 권의 선물은 다시 한번 이곳에 오게 되지 않을까라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혹시나 그리스에 가신다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박물관에 들려서 한국어판 <그리스인 조르바>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알려주시기를. 크레타, 신화와 현실이 만나는 곳 그리스 신화를 생각한다면 크레타는 그리스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크레타에 가면 꼭 가 봐야 할 곳이 두 군데 있다.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시작하여 로마시대까지 이어지는 보물이 가득한 이라클리오의 고고학 박물관과 미노타우로스 신화로 유명한 크노소스 궁전이다. 우리는 크레타의 중심가인 이라클리오에 있는 엘 그레코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고고학 박물관은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난 오—래된 보물들은 우리 눈을 정화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한적하게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몰라볼 만큼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단순함과 소박함을 특징으로 하지만 결코 유치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고, 지금 당장 사용한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크노소스 궁전은 숙소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박물관을 가려고 차를 빌린 상태여서 박물관을 거쳐서 여유롭게 크노소스 궁전을 살펴보았다. 크노소스 궁전 유적은 뼈대만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그리스 본토의 유적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아주 작은 방들처럼 보이는 구조들이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었고, 넓은 홀이나 아고라와 같은 광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왕궁이라기 보다는 크노소스 궁전 자체가 다이달로스가 설계했다던 미로처럼 보였다. 크레타인들은 어떤 이유로 이런 궁전을 쌓았을까? 푸른 바다색의 돌고래와 황소를 뛰어넘는 모습의 젊음이 를 보여주는 프레스코화만이 크노소스 시대의 활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신화를 품고 있는 현실의 장소였다. 미로를 완성하고 하늘을 날아 성을 탈출하고자 했던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미로에서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반인 반수의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무사히 성을 탈출할 수 있었던 테세우스, 또한 그와 함께 돌아가다 낙 소스에 남게된 아리아드네의 이야기까지. 신화란 이름 없는 이야기이고, 진실은 상상력의 딸이라고 했던가. (폴벤느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조르바’를 낭독하면서 도착한 크레타는 호메로스의 신화들이 넘쳐나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조르바’는 이름 없는 시처럼 우리의 상 상력을 자극했다. 신화는 단순히 신화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더 넓혀진 상상력의 궁전 안에서 가능할 뿐이다. 여행을 하면서 상상하고, 그 상상 속에서 다시 현실을 재구성하고 싶다면 그리스 여행을, 그것도 ‘조르바’를 낭독하면서 크레타를 여행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NM



문탁 & 이슈 >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➃ ] 리셋하다, 전환이 시작되었다        글 : 새털 밀양X문탁 인문학 캠프에서 많은 사람들이 <점필재 연구소> 정출헌샘의 강의의 매력에 푹 빠졌지만, 나에게는 같은 날 오전에 있었던 손희정 평론가의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읽는 이야기책> 강연도 인상 깊었다. 손희정샘의 강의는 인문학캠프와 무관하게 정기적으로 열리는 너른마당의 ‘달공’(한 달에 한 번 공부한다는 뜻의) 프로그램이었다. 금요일 저녁 토론회에서 “문탁 사람들은 너무 공부만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곽빛나씨가, 다음날 아침 손희정샘 강의를 들으러 쪼르륵 달려가기에 나도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우리 보곤 왜 그렇게 공부 많이 하냐고 하면서, 토요일 오전부터 무슨 공부예요?” 나는 곽빛나씨에게 힐난 아닌 힐난을 던졌고, “아! 이건 한 달에 한 번 하는 공부예요!”라고 곽빛나씨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나는 곽빛나씨의 뒤에 앉아 영화 강의를 들었다. 주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재난과 파국이었다. 브루스 윌리스가 지구를 구하는 과학자로 ‘열일’을 했던 1998년의 <아마겟돈>과 봉준호 감독이 백인남성이 아니라 동양인소녀와 흑인소년을 지구의 생존자로 설정한 2013년의 <설국열차>와 문명이 파괴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사냥꾼’으로 살아가는 파국 이후를 다룬 2010년의 <더 로드>까지, 이날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발표된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대표작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강의에서 손희정샘은 두 편의 영화를 꼭 보라 추천했다. 앞에서 언급한 <더 로드>와 2012년에 발표된 <멜랑콜리아>다. 손희정샘은 최근 재난영화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제까지 재난영화들은 어떻게든 파국을 막아내는 방식이었다면, 두 편의 영화에서 파국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기정사실화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제 지구의 재난과 파국은 미국의 대통령이나 머리 좋은 과학자, 재력 있는 히어로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는 범주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동안 인류가 자행한 ‘사악한 일’들을 생각하면, 지구의 파국을 막아내는 일 자체가 ‘정의’가 아닐 수 있다는 성찰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밀양에서 돌아와 몇 주를 보내고, 몇몇 사이트를 거쳐 맥스무비에서 <멜랑콜리아>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심지어 넷플릭스에도 가입했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매번 회원가입을 하는 번거로움과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다시 인증절차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보게 된 <멜랑콜리아>는 멋진 영화였다. 지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던 ‘멜랑콜리아’ 행성과 지구는 충돌할 것인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것인가? 영화는 과감하게 지구와 행성의 충돌을 화면으로 담아내고 있다. 위기의 순간을 비명과 화염과 폭발과 함께 표현했던 재난영화의 관습과 결별하며 <멜랑콜리아>는 파국의 순간을 바그너의 음악과 함께 고요히 끝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의 파괴가 내 눈 앞에서 펼쳐진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그래...지구가 끝장날 수 있구나...세상을 리셋할 수 있구나...이런 생각의 전환과 감수성의 전환을 <멜랑콜리아>는 선취하고 있다. ‘전환’은 쉽지 않다. 습관과 생각과 관습이 바뀐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습관도 생각도 바뀔 수 없을 것 같은 ‘벽’을 느낄 때가 많다. 2014년 문탁에서 76.5일 탈핵릴레이를 시작했을 때, 2015년 광화문에서 녹색당 탈핵집회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과 귀는 오로지 스마트폰에 장착되어 있었다. 핵발전의 위험, 원자력 신화의 거짓말, 송전탑 때문에 흘린 밀양 할매들의 눈물까지 어느 것 하나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과 귀에 전달되지 않았다. 습관처럼 전단지를 받고 가방에 넣어버리는 무심한 동작 하나하나가 벽이었다. 2016년 수지구청 올리브영 앞으로 탈핵집회를 옮겨오면서 동네 노인들이 자주 우리에게 훈수를 두셨다. 훈계와 호통 그리고 “고생한다”는 훈훈한 격려가 뒤섞인 애매모호한 얘기들이 오고갔다. 그리고 대통령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으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더 자주 피켓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노인뿐 아니라 풋풋한 20대도, 애 키우는 엄마들도, 우리 남편 같은 중년의 아저씨들도 피켓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보탠다. 올리브영 앞에서 나는 최근 ‘어떤 변화’를 느낀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하나의 사건이다. 8월 초 갤럽조사에서 계속건설 40%, 건설중단 42% 오차범위 내 근소한 차이로 앞서갔던 반대의견이, 9월 초 조사에서는 계속건설 42% 건설중단 37%로 밀리는 상황이 되었다. 탈핵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지금은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기사를 인터넷뉴스로 읽으며 ‘지각변동’을 느낀다. 2014년 76.5일 릴레이를 시작할 때, ‘탈핵’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에게 입력이 되지 않았다. ‘탈핵’은 대중적인 용어가 아니니 ‘핵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를 쓰자는 의견이 자주 논의되었다. 이번 공론화과정이 없었다면, 여전히 사람들은 핵발전소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 같다. 고리와 신고리 핵발전소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산과 울산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건설 중인 핵발전소를 멈출 수도 있다는 사실, 국가전력수급계획을 정부와 전문가만이 아니라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하는 영역이라는 사실, 이것들에 대해 필부필부(匹夫匹婦)가 갑론을박(甲論乙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나는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역사톡톡] 시즌 10월부터 4개월동안 파지사유 인문학에서는 'n개의 역사'를 탐구합니다. 흔히 서구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오히려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게 합니다. 역사와 이야기, 사실과 상상, 역사와 신화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편 오랜동안 제도권에서 '왕따'를 당했던 '일요일의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그동안의 제도사, 연대사, 정치사와 전혀 다른 감각과 방식으로 역사를 탐구합니다. 바로 '심성사(histoire des mentalites)'라는 전대미문의 영역. 그를 통해 그는 탄생, 죽음, 유년기, 가족등과 관련된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태도의 역사를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필립 아리에스의 정반대편에서, 맑스주의적 방법으로 역사연구를 한 홉스봄이 있습니다.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라는 그의 역사 3부작은 위대한 역사적 유산입니다. 파지사유 인문학 [역사톡톡] 시즌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역사에 대한 메타 질문과 지금-여기-우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놓치지 마세요 10월 :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이희경(문탁) / 11월: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김혜영(요요) 12월: 헤로도토스 <역사>-박연옥(새털) / 1월 : 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이희경(문탁) <아동의 탄생> 필립 아리에스 著 1960년. 프랑스에서는 듣보잡 '바나나 수입업자'가 아동과 가족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는 풍문이 떠돌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세 권의 책을 낸 역사학자였지만 프랑스 아카데미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책 <앙시앙레짐 하에서의 아동과 가족>으로 프랑스 역사학계에 극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일요일의 역사가'로 불리는 필립 아리에스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이고 반동주의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반 일리치, 푸코 등과 같은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들과 깊은 교감을 나눴습니다. 그들은 따로 따로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시대를 연구하고 거의 같은 문제를 파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작업을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 탐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10월 파지사유 인문학에서는 필립 아리에스 초기의 대표작 <앙시앙레짐 하의 아동과 가족>(번역판 <아동의 탄생>) 을 읽습니다. 푸코라면 고전주의 시대라고 불렀을 앙시앙레짐 하에서 아동과 가족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결과 어떻게 근대학교와 핵가족이 탄생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린이는 결코 예쁘거나 귀엽거나 순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학교는 아동을 감금시키는 곳이라는 것, 핵가족은 근대의 게토라는 것. 근대의 최종승리자는 가족주의라는 것!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것. 혹은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 그것을 다시 아리에스를 따라 낱낱이 파헤쳐보겠습니다. 이미 망한(?) 근대 이후의 비전을 탐구하기 위해! 재밌지만 두꺼운, 쉽지만 따끔한, 이 역사책을 한 달 동안 함께 읽고 토론할 분들을 기다리겠습니다. 텍스트 :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문지영 옮김, 새물결) 일정 : 2017년 10월14일부터 4주간 /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12시반 강사 : 이희경 (문탁 / 문탁네트워크 회원) 일정 1강 (10월 14일) 1부 아동기에 대한 인식 2강 (10월 21일) 2부 학교생활 1장~4장 3강 (10월 28일) 2부 학교생활 5장~결론 4강 (11월 4 일) 3부 가족 강의 및 세미나 파지사유 인문학은 강의 + 강사와 질의 응답 + 수강자들의 세미나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토론) 로 진행됩니다. 책을 꼼꼼히 읽고 각자 나누고 싶은 질문이나 구절을 정리해 옵니다. (세미나 시간은 수강자들 간의 적극적인 토론과 대화로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 신청방법 1. 댓글로 신청해주세요. 신청사연과 연락처도 남겨주세요. 전화번호 비공개를 원하면 비밀글로 써주세요 2. 회비는 6만원입니다. 입금을 해야 신청이 완료됩니다. (단 복회원인 경우, 복사용을 원하시면 신청할 때 함께 적어주세요.) 문의 : 공일공-9118-하나 둘 팔 삼 (오영) 입금계좌: 우리은행 1002 9335 17477 ( 김시연) *문탁네트워크는 영리를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회비는 강의가 시작되면 반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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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서 삶정치를 묻다 글 : 김혜영(문탁네트워크 회원) 문탁네트워크는 밀양을 만난 뒤, 기꺼이 밀양의 친구가 되기를 자처했다. 우리는 밀양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발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에게 밀양은 탈핵 탈송전탑 싸움의 사회적 상징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밀양을 지원한다고 생각했던 연대활동은 밀양을 돕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를 살리고 역량을 키우는 활동이 되었다. 밀양을 통해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된 탈핵은 윤리적 삶을 성찰하는 공부가 되었다. 지난 5년, 밀양은 문탁의 공부와 활동에 언제나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밀양과의 이야기는 문탁의 역사가 되었다. 2017년 여름 ‘밀양 인문학 캠프’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밀양을 만나다 2012년 여름, ‘민주주의’와 ‘정치’를 화두로 그 해 문탁의 공부를 갈무리하기 위해 개설한 강좌에서 우리는 밀양싸움에 대해 들었다. 농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투쟁의 주체라는 것도, 765kv송전탑 반대라는 이슈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멀고 먼 뉴욕에서 벌어진 오큐파이 운동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읽으면서 밀양의 싸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랐고 내심 부끄러웠다. 그래서 더 알고 싶었다. 직접 만나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로 농활대를 꾸렸다. 밀양과의 돌이킬 수 없는 만남이 시작되었다. 송전탑반대 이전에 탈핵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2011년 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뒤 우리는 문탁의 방식에 걸맞게^^ 공부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녹색평론에서 나온 <원자력신화로부터의 해방>을 같이 읽었고, 탈핵활동가의 특강을 들었다. 이 과정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은 몇 사람은 주머니를 털어 ‘원자력? 나는 반대' 배지를 만들어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탈핵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의 질문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고 삶을 바꾸는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듬해 가을, 밀양에서 어르신들을 만나고 나서 우리의 몸이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알게 되면 몸과 마음이 같이 바뀔 수밖에 없다. 탈핵이 삶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다. 밀양의 투쟁, 문탁의 공부 밀양의 송전탑 반대싸움은 오묘하고 놀라웠다. 농사일과 싸움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운동의 스타일. 송전탑건설예정지를 점거하여 싸우면서도 움막 앞 공터에 씨앗을 뿌리고 싹을 돌보며 꽃을 피우는 농성. 공사를 위해 올라오는 용역들을 막기 위해 옷을 벗고 쇠사슬을 목에 감지만, 또 날이 밝으면 된장국을 끓이고 김치 부침개를 부치고 밥을 지어 서로에게 먹이는 일상이 이어지는 싸움. 눈앞의 보상금이 아니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걱정되어 싸움을 멈출 수 없다는 어르신들. 마을 공동체가 깨져서 자신들은 고립되어 가면서도 아픔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너른 품이 된 밀양. 소수 활동가와 환경단체가 겨우 명맥을 이어왔던 탈핵운동의 불씨를 널리 퍼뜨린 운동. 밀양의 싸움은 일터와 삶터, 정치와 일상, 당사자와 연대자, 광장과 마을의 분리를 당연하게 생각해 온 상투적인 생각과 실천을 조용히 흔들었다. 이 운동은 전염성이 높았다. 문탁 역시 밀양이 퍼뜨리는 연대와 기쁨의 증식운동에 피할 수 없이 감염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두 팔 벌려 환영한 감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밀양이 우리를 감동시킨 것들은 모두 기존의 정치투쟁이나 조직활동의 문법과는 다른 것이었고, 그것은 우리가 공부를 통해 새롭게 깨우쳐가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밀양 할매 할배들이 농촌 노인들이라는 세상의 속견에 하이킥을 날리며 민주주의와 자기 삶의 새로운 주체가 되었듯이 우리도 공부를 통해 주부, 직장인 등의 정체성을 깨고 다른 삶을 발명할 수 있기를 원했다. 우리는 공부 역시 연대와 기쁨의 증식 운동이고 어르신들이 겪어내고 있는 싸움만큼 치열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탁의 공부가 세상의 습속과 가치를 뒤흔드는 급진적인 것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밀양들이, 서로 다른 문탁들이 접속하고 뒤섞이며 증식되기를 꿈꾸었다. 문탁의 밀양 시즌2 2014년 행정대집행 이후 문탁의 밀양 연대활동은 독자적인 녹색‧탈핵활동으로 전환되었다. 문탁에서도 밀양 시즌2가 시작된 셈이다. 시즌1이 밀양과의 연대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시즌2는 탈핵과 녹색에 대한 공부와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먼저 행정대집행 이후 한전 앞 항의시위를 동네로 가져와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76.5일간 탈핵 탈송전탑 릴레이 1인 시위를 했다. 1인 시위 형식의 릴레이는 2015년 4월에 다시 시작되어 지금까지 2년 4개월(원안위 앞 65주, 동네릴레이 53주)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에 탈핵과 관련된 책을 읽고 북 콘서트와 세미나를 하고 특강을 여는 한편 틈틈이 탈핵영화상영회도 개최했다. 밀양과의 만남은 인문학 공부의 형식과 내용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전강독에서 읽은 <논어>의 한 구절은 피켓의 단골 구호로 변형되었고, 북 콘서트에서 함께 읽은 <밀양을 살다>는 연극대본의 한 페이지가 되었고, <한국탈핵>은 유인물의 내용이 되었다. 탈탈탈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이들과 밀양으로, 부안으로, 홍성으로 다니며 길 위에서 공부를 했다. 5년 동안 열 번 넘게 농활을 다니는 동안 문탁에서 만나기 힘든 존재였던 청년들이 문탁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동화전 마을과의 인연이 깊어지고, 밀양 대책위를 통해, 전송넷을 통해, 녹색당을 통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처럼 새로운 공부와 관계가 생겼고 그 관계는 문탁의 움직임에 적지 않은 활력을 불어 넣었다. 탈핵이 수행적 실천이 되고 있는가 그 사이에 문탁에서 탈핵은 언제나 주요한 이슈였고 논란거리였다. 1년의 공부와 활동을 갈무리 하는 문탁 인문학 축제 첫날의 주요 프로그램이 3년간 연이어 탈핵시위나 집회였던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2014년은 축제 첫날 미금역에서 수 십 명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76.5일 시위를 마무리했고, 2015년은 꽹과리를 울리며 방독면 탈을 쓰고 커다란 평화의 새를 날리며 탈핵퍼레이드를 했고, 2016년은 이명박과 박근혜 가면을 쓰고 탈핵집회를 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기도 했지만 우리 스스로 밀양과 탈핵의 의미를 묻는 퍼포먼스였다. 과연 수도권에서 도시적 삶을 사는 문탁 학인들에게 탈핵이 삶을 바꾸는 수행적 실천이 되고 있는가라는 물음말이다. 문탁에서는 우리가 벌이는 일들이 모두 공부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릴레이 시위를 하고 농활을 하며 후기를 쓰고 느낌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문탁의 안팎에서 앎과 실천의 연쇄를 만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온 것일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탈핵활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동안 어떤 사람들은 문탁의 공부나 활동이 공동체 안에서 자족적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문제는 자족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문제는 끊임없이 활동을 벌이고, 나름의 실천을 만들어 왔지만 우리 자신의 ‘공부하는 삶의 양식’을 잘 만들어 오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우리는 말로는 자기 삶의 발명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몸은 여전히 밀양 연대자, 세월호 연대자, 인문학의 소비자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뭔가 찝찝했던 우리는 지난 3년간 인문학 축제에서 탈핵이 뭐냐고 물으며 이 문제와 거듭 대결하려 했는지 모른다.(올해부터 인문학 축제에서는 주제와 대토론회를 없애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를 보니 결국 밀양에서 축제의 프롤로그와 대토론회를 미리 앞당겨 하고 있는 것 같다.^^) 삶정치란 무엇인가 밀양과의 만남에서 시작해서 공부와 활동을 둘러싼 문탁 내부의 고민까지 멀리 돌아왔다. 포럼의 발표 주제인 ‘삶정치’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삶정치는 삶권력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삶권력은 다중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고 통치성의 형태로 사람들의 삶을 자본과 국가 장치 속으로 포획하려 한다. 그러나 삶정치는 그것에 대한 저항이고 새로운 대안적 주체를 낳는 삶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삶정치는 사람들을 나누고 분류하는 기존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그 분류 자체를 문제 삼는 자율적 주체를 만드는 실천이다. 삶도 정치도 함께 하는 것이기에 삶정치란 곧 대중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가치화하는 것이다. 나는 밀양어르신들을 삶정치의 주체로 이해한다. 밀양의 송전탑 반대 싸움은 탈핵운동 이상의 하나의 삶정치적 사건이었다. 문탁이 밀양에 감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도 그랬다. 그러나 삶은 가치화를 둘러싼 투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현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를 끌어 내리려는 중력과 맞서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매번 공부와 활동을 통해 배우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러면서도 각자 자신만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구성해가는 그런 신체가 되고 있는가. 삶정치적 사건이란 바로 그런 신체로의 변화이다. 바로 이런 삶의 변형 속에만 삶정치가 있다. 밀양인문학캠프는 이런 질문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문탁 안에서 시작하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신고리 5,6호기 반대라는 당연한 대답을 문탁 학인들에게 들으려고 공론화를 시작할 리가 있겠는가. 이 과정에서 각자의 질문을 던지고 서로의 공부가 연결되는 삶정치적 사건을 구성하자는 것이다. 정치에 대해서도 공부에 대해서도 심지어 탈핵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밀양인문학캠프에 와 있다. 문탁이 제안하고 밀양이 화답하여 공들여 만들어진 이 자리가 우리에게 작지만 그러나 소중한 변화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문탁의 밀양 시즌3에 대한 논의가 활기차게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NM “운동은 먼 미래에 쟁취될 승리를 약속한다. 반면, 사소한 순간들에 이루어지는 소박한 행동은 그때그때의 성취를 약속한다. 삶을 고무하면서, 때로는 삶의 비극적인 면을 들추면서, 자유를 향한 경험이 구체적으로 행동화하는 때가 바로 그 순간들이다. 그런 순간들은 인간의 통상적 이해를 뛰어넘어 초월적이고, 스피노자가 말한 영원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 순간들은 저 광대한 우주의 별들만큼이나 아주 다양하다.”(존 버거,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밀양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처음에 밀양은 우리에게 놀라움이었고 미안함이었다. 매일 매일 산꼭대기의 농성장까지 기어올라가 송전탑공사를 온 몸으로 막아내는 할머니들의 투쟁에 놀랐고, 이치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2012년까지 ‘밀양의 전쟁’을 새까맣게 몰랐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그렇게 찾아가고 지지하고 응원하면서 6년이 지났다. 이제 밀양은 우리에게 외갓집이고, 친정이고, 본가이다. 우리는 밀양의 연대자로 시작했지만 이제 우리는 밀양의 식구가 되었다. 밀양은 우리에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부끄러움이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전기가 그분들의 피눈물을 타고 흐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펑펑 쓰는 에너지가 핵발전소라는 전대미문의 정치괴물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되었다. 밀양을 통해 보게 된 나의 민낯, 우리 삶의 민낯. 우리는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밀양은 이제 경상남도에 있는 어느 지역의 이름이 아니다. 밀양은 탈송전탑 투쟁의 장소만이 아니다. 이제 밀양은 탈성장의 다른 이름이고, 고르게 가난한 사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밀양은 우리가 가고 싶고 찾고 싶은 새로운 삶의 비전이다. 하여 우리가 밀양을 도운 게 아니라 밀양이 우리를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밀양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