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1968년, 어떤 그리고 모든 혁명의 질문 <2> “청산”

명식
2019-04-0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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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청년들이 고료를 받고 연재하는 글쓰기 프로젝트입니다다섯 명의 청년들이 매주 돌아가며 세 달 동안 저마다의 주제로 세 개씩의 글을 연재합니다글은 매주 화요일에 업로드됩니다!

   

  명식의 보릿고개 프로젝트 : 1968어떤 그리고 모든 혁명의 질문

  인간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역사의 변곡점마다 반드시 던져지는 질문이다미지의 한걸음을 앞두고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에 의해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무의미하지 않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의해이미 몇 번의 실패를 지켜봐온 사람들에 의해.

그는 곧 다시 새로운 질문들을 낳는다만약 가능하다면세계는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무엇이 필요한가세계를 바꾸려는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글과 이어질 두 개의 글은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다이것은 1968년의 이야기이자 2019년의 이야기이며그보다 더 많은 해의 이야기이다그 흐름에 닿아있던 모든 사람들의 문답이자 나 자신의 문답이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가지고 가야 할 질문의지금 이 순간 스쳐가는 대답이다 




  < 2 > “청산”
  "우리가 함께 이뤄내야 할 시대적 소명은 분명합니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적폐의 청산'으로 불의의 시대를 밀어내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입니다!”
   - 문재인, 2018.9.1 <당·정·청 전원회의 연설> 中
   68년 5월, ‘자유인’의 물결이 서방 세계의 모든 거리에 넘실거리며 혁명이란 단어를 속삭이고 있었을 때 그곳에는 바다와 초원을 건너 온 이름들이 함께 휘몰아쳤다. 체, 호치민, 그리고 마오. 그 중에서도 특히 마오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웠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68년 서구세계에서는 수많은 거리의 혁명가들이 마오쩌둥의 어록을 인용하고 구호로 외쳤으며 그의 초상화 포스터를 만들어 거리와 대학을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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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쩌둥(모택동)은 수백의 게릴라로 시작해 공산주의 
중국을 건설한 혁명가로서 유럽에서도 체 게바라, 호치민과 더불어 하나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다.
  그곳에서 ‘마오주의자’란 이름은 학생과 산업노동자의 연대를 꾀하고 학생들을 공장과 작업장으로 떠나게 하여 혁명 조직을 창출코자 한 흐름을 의미했다. 그들은 장발, 마리화나, LSD, 프리섹스를 거부하며 무장투쟁을 선동하는 거리의 게릴라들 - 체 게바라의 아이들 또한 경계한다. 68년을 관통한 수많은 혁명의 가닥들 가운데 마오의 이름은 보다 ‘전통적인’ 공산주의 혁명 노선을 상징했으며, 상상력에 대한 그들의 다소 경직된 태도에 불구하고 서구의 구시대적 질서를 깨뜨리기 위한 연대의 계열들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5월 혁명에 대한 중국의 발 빠른 호응은 서방의 학생들로 하여금 미국과 유럽 뿐 아니라 대초원 실크로드 너머의 동방에서까지 이루어지는 연대를 상상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중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68년 5월 21일 베이징에서 “프롤레타리아적·혁명적 열정으로 충만한” 오십 만 명의 노동자, 홍위병 투사, 혁명적 교사, 학생, 당 간부가 한데 모여 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투쟁을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 “미제국주의 타도! 소련 수정주의 타도! 만국의 반혁명세력 타도!” 또한 시위대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파리 노동자와 학생들의 정당한 투쟁을 단호히 지지한다! 위대한 파리 코뮌 혁명전통 만세! (…) 1968년 5월 21일에서 26일까지 겨우 며칠 동안 중국인 총 2천만명이 프랑스 노동자의 요구를 지지하며 행진했다.」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181p)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2개월이 지나, 68년 7월, 마오쩌둥은 중국의 모든 학생지도자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눈물을 머금고’ 학생들이 역사 무대에서 퇴장할 시간이 도래했다고 밝힌다. 마오의 명령 하에 군대가 개입하여 중국의 학생운동을 끝냈다. 학생 지도자 꽈이따푸蒯大富는 울면서 위대한 마오 주석의 품에 안겼고, 마오 역시 눈물을 흘리며 그들 학생 지도자들을 치하했다. 68년, 중국에서의 학생 혁명은 그렇게 끝났다. 
  훗날 서방의 혁명가들은 그 일련의 과정에 대하여 두 번의 충격을 받아야 했다. 
  한 번은 위대한 우상이었던 마오쩌둥이 군대의 손을 빌려 학생 혁명을 끝내버림으로써 학생 혁명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다른 한 번은, 중국의 그 학생 ‘혁명’은 애초부터 마오쩌둥의 권력욕 속에 기획된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오늘날 그 혁명의 이름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无产阶级文化大革命 - 줄여서, 문화대혁명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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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사구破四舊」 : 마오 주석 가라사대, 구시대를 깨뜨려라!
   1960년대 초 공산주의 중국의 주석으로써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던 마오는 이른바 ‘대약진운동’이라 불리는 국가 주도 경제 개발 계획의 실패로 위기에 봉착한다. 대약진운동의 실패에서 드러난 것은 이미 진행된 중국 간부들의 부패, 엉성하기 짝이 없던 행정 조직, 홀로 지나치게 과감했던 마오의 독단성이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위시한 공산당 내부의 수정주의자들이 공고했던 마오의 권력을 위협했고, 급기야 마오는 권력투쟁에서 밀려 주석 자리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오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잠시 물러선 것이었다. 1966년, 마오는 마침내 후일 문화대혁명이라 불릴 참극을 통해 반격을 기도한다.
  문화대혁명은 이른바 ‘파사구破四舊‘를 기치로 내걸었다. 이는 네 가지의 옛것을 깨뜨린다는 것으로 옛 사상, 옛 문화, 옛 풍속, 옛 관습을 일소함을 의미한다. 마오는 이를 통해 중국의 사회 구조와 중국인 개개인의 정신을 완전히 개조, 아직까지 남은 봉건주의 잔재 및 자본주의와 타협하려는 세력을 쓸어버리고 완벽히 새로운 혁명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 주문을 받든 것은 다름 아닌 중국의 학생들이었다. 기존의 낡은 요소를 쓸어버리고 체제와 권위에 대항하라는 마오의 명령에 수많은 학생들이 호응했으며 전국적인 학생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마오의 옹호 아래 군대조차 건드릴 수 없는 수백만, 수천만의 준군사조직이 되어 홍위병이라 불렸다.
  “의심할 여지없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통해 무산계급의 신사조,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이 지주 및 기타 착취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과 같은 부패한 것들을 반드시 대체할 것이다.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하여 떨쳐 일어선 중국 인민은 반드시 온갖 잡귀신을 쓸어버릴 것이다!”
- 중국문화혁명소장 천보다陳伯達
  홍위병은 말 그대로 구세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했다. 그들의 적은 부르주아 계급, 관료주의, 노동 분야의 모든 전문성과 배타성, 부르주아적 향수를 자아내는 문화요소들, 그리고 마오쩌둥의 반대자들이었다. 그들은 관료와 마오의 정적들은 물론 모든 종류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내어 구타하고 모욕을 준 뒤 강제 수용소로 보내 육체노동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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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얼빈 시장 리판우를 조리돌리고 있는 어린 홍위병. 홍위병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었고 대학생 뿐 아니라 
중학생과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이런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수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북폴리오 출처.
  교수와 의사, 과학자가 사라졌고 청소부와 학생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납치와 고문이 수없이 자행되었으며 부유한 집안들은 약탈당했다. 사치품인 꽃과 애완동물은 불태워졌다. 당의 허가를 받지 않은 모든 음악, 연극, 전통무술, 전통문화, 전통 사상과 그를 다룬 책들도 불살라졌다. 구시대의 문화재들 또한 타깃이 되어 창힐, 공자, 왕양명, 곽거병, 제갈량, 악비, 주원장, 원숭환 등의 묘가 파괴되었다. 경찰과 군대는 마오의 지시 아래 이 모든 것을 방관하였다.
  이들의 ‘혁명’은 추정치 약 300만 명의 사망자와 그보다 훨씬 많은 부상자, 측정 불가한 문화적 손실을 남긴 채 68년 7월 끝을 맺었다. 마오의 추동으로 시작되었고, 마오의 명령으로 끝난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통해 마오는 자신의 정치적 적수들을 모조리 제거했으며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신앙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마오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려던 학생들은 강제로 농촌으로 보내져 ‘농촌 계몽’이라는 명목의 노역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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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의 어록을 쳐들며 환호하는 홍위병들. 
  이 모든 파괴행위가 구세계와의 결별로써 ‘혁명’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은 후일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들의 조롱과 더불어 고통스러운 고뇌와 의심을 안겼다. 프랑스의 68년 5월을 보며 누군가는 황홀한 목소리로 경의를 표했다. “바로 이것이 혁명이다!”(*1) 중국의 68년 7월을 보며 누군가는 비통하게 가슴을 쥐어뜯었다. “과연 이것이 혁명인가?” 마오의 명령에 서구의 수많은 학생들이 매혹된 데서 알 수 있듯 파리의 학생들과 중국의 홍위병들은 최소한 구세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비전을 공유했다. 파리의 5월은 상황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문화대혁명이 될 수도 있었다. 
 
  68의 모든 혁명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구세계를 청산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했다. 그 질문은 점차 조여들기 시작해, 곧 토론의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들을 몰아붙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또 다시 동방, 중국보다도 동쪽 끝에서 68혁명 최후의 토론 중 하나가 벌어졌다. 
  일본, 동경대였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두 극단의 탈주자들이 인간과 역사의 종언을 논하다
   60년대 일본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격렬한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미국의 냉전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이 그를 촉발시켰는데, 이 때 학생들은 주로 전학련(*2)이라 불리는 대학 자치기구들의 연합체를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허나 이 전학련은 군사적이고 수직적인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어 적지 않은 학생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그러던 중 68혁명의 여파가 일본에까지 미쳐 보다 평등하고 탈권위주의적인 학생 연합체의 탄생으로 이어지니, 그것이 바로 일본의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 즉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 이른바 전공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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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투가 수평적이고 탈권위적인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그들이 마냥 비폭력적 수단만 택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수평적 조직체계가 그들로 하여금 더욱 효과적인 파르티잔적 무력행동을 가능하게 했다. 그들은 ‘도심 한복판에서 언제라도 공성전을 벌일 수 있는 집단’으로 평가되었다. 안전모, 입을 가린 수건, 청바지, 쇠파이프, 죽창은 전공투에 있어 일종의 상징과도 같았다.
  전공투는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連帯を求めて孤立を恐れず”는 시인 타니가와 간의 글을 자신들의 모토로 삼았다. 이들은 근대와 제국주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대학'-기존 세계와 그에 속한' 대학생'-기성 구조 속의 인간으로서의 자신들을 부정하면서 그를 대신해 고립된 개개인들의 윤리 속에서 새로이 연대를 쌓아올려 세계를 변화시키려 했다. 개인의 주체성과 연대의 힘이 함께 가는 것이 세계에 도전하는 그들의 원리였다. 때문에 그들은 중심과 주변부가 확실한 기존 조직의 특성을 거부했다. 전공투는 여러 대학들의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연합체로서 자유로이 의사를 교환했으며, 거리로 나서 행동할 때면 지도부 없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움직여 경찰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68년 말 즈음에는 30개가 넘는 대학이 전공투의 바리케이트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그 전공투에게 어느 날 한 소설가가 대담을 요청했다. 그의 이름은 미시마 유키오였다.
 “나와 제군들의 정치사상은 정반대라고 합디다. 실제로 정반대겠지만, 단지 나는 지금까지 일본 지식인들이 사상과 지식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습니다. (...) 전공투 제군이 한 일들을 전부 긍정하지는 않지만, 다이쇼 시대의 교양주의로부터 이어진 우쭐대는 지식인들의 콧대를 꺾었다는 공적은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

 (미시마 유키오/기무라 오사무 외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23p)
   미시마 유키오는 『설국』으로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제자로, 평소 천황이 중심이 되는 일본의 부활을 주장하였기에 오늘날에 보기에는 극우파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그 미시마가 세간이 보기에는 극좌파인 전공투에게 일대다의 대담을 신청한 것이다. 
  동경대에서 이 격렬한 토론은 실로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미시마와 전공투는 구세계를 보는 서로의 인식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감했으며, 고성과 욕설만이 오갈 것이라 예상되었던 토론은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 속에 인간과 역사과 시공과 예술의 문제를 아우르며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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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대 고마바 캠퍼스 교양학부 900번 교실에서 이뤄진 미시마와 전공투의 대담.
   미시마는 당대의 일본을 ‘인간과 역사가 끝나버린 세계’로 정의했다. 일본은 세계대전에서 학살을 자행했지만, 그 죄를 직시하고 인간 존재에 대하여 회의하고 부정하는 대신 평화로운 장인과 장사꾼들이라는 가면을 쓰고 어느새 물질적 풍요를 되찾았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기에 ‘인간’에 대한 사고가 더 이어지지 않는다. 이 풍요의 시대는 계속해서 현재의 상태만을 유지하려 하기에 ‘역사’에 대한 사고도 끝나버렸다. 인간과 역사를 생각하고 있지 않기에 더 이상 예술과 정치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의 신적 천황을 부활시켜 다시 인간과 역사에 대한 사고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에 맞서 전공투는 ‘인간과 역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직 끊임없이 윤리적으로 고뇌하며 투쟁하는 주체인 나와 그 주체가 존재하는 공간으로서 세계가 있을 뿐 무언가 특별한 존재로서의 ‘인간’, 특별한 시간성으로서의 ‘역사’ 따윈 없다고 맞선다. 이 시대에는 인간과 역사가 부재하지만, 그건 멈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따라서 신적 천황을 부활시켜 일본의 뿌리부터 인간을 사고한다는 건 망상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금 구체제 - 지금의 일본이라는 국가가 쓸모없는 존재이며 폐기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를 보았다. 전공투는 그 점을 들어 미시마에게 자신들과 연대할 것을 권유했고, 미시마는 전공투에게 천황이란 존재를 인정하기만 하면 당신들과 함께하겠다고 받아쳤다. 결국 그들은 그 차이를 확인한 채 실소하며 토론을 마친다.
  그렇다면, 그 뒤, 그들은 각자 어떻게 구세계와의 결별에 나섰는가.
  미시마 유키오는 그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은 1970년, 자위대 본부에 쳐들어가 천황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며 할복하여 자살했다.
 
  전공투는 행동 노선을 두고 내부투쟁을 거듭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이탈해갔고, 전공투 조직은 거의 와해되었으며, 결국 극단주의자들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테러리즘 조직으로 변모해 자멸해갔다. 
 
  미사마와 ‘최후의’  전공투들은 서로를 등지고 구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저마다의 탈주선을 달려 나갔지만, 나란히 도착한 곳은 서로 같았다.
 
  「너희를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라」 : 바더-마인호프와 죽음의 탈주
   전공투의 잔재라 할 수 있는 테러리즘 조직 가운데 널리 알려진 이들로 일본 적군파赤軍派라는 조직이 있다. 항공기를 납치하거나 중동 지역으로 가서 반미 테러리즘 조직과 연합하는 등 과격한 행보를 되풀이하다 후일 산장에서 농성을 벌이며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멸당한 조직인데, 유럽에서도 이들과 연합하려 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서독 적군파, 일명 바더-마인호프 그룹이다.
  안드레아스 바더는 이미 68혁명 당시 과격한 학생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연인인 구드룬 엔슬린과 함께 두 곳의 백화점에 테러를 시도했으며, 그로 인해 체포되었다가 69년에야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70년 초 재차 체포되어, 이번에야말로 감옥에서 썩게 될 위기에 처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것이, 울리케 마인호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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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
  울리케 마인호프라는 이름은 68년의 독일에서 주로 여성운동의 흐름과 함께 나타난다. 그녀는 학생 때부터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으며 이미 20대에 좌파 시사평론지 <콘크레트>의 기자이자 사회비판적 TV프로의 대본작가가 되어 언론인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68년에 그녀는 이미 쌍둥이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사실은 그녀가 혁명에 투신하는 것을, 혁명 대열 속에도 존재한 여성억압의 문제들에 맞서는 것을, 남편과 이혼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독일 학생운동의 리더 루디 두취케에 대한 암살 기도를 목도하고 좀 더 ‘과감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70년 5월, 울리케 마인호프는 저명한 언론인의 자격으로 ‘테러리스트’ 안드레아스 바더의 인터뷰를 요청하고, 정부 당국은 그를 허가한다. 그 인터뷰는 시 외곽의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울리케 마인호프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안드레아스 바더를 탈출시키고, 바더의 조직에 가담한다. 
  2008년 제작된 독일의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는 그 인터뷰 현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울리케는 바더의 동료들에게 탈출을 돕겠다는 협력을 약속하고 인터뷰를 잡지만, 처음 그녀가 약속한 건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역할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놀라 굳어버린 언론인을 연기하는 것까지였고, 그 뒤 바더와 그 동료들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떠나서 무엇을 하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일 터였다. 
  바더의 동료들은 성공적으로 바더를 탈출시키지만 그 와중에 무고한 연구소 경비 한 사람을 살해하고 만다. 카메라는 세 개의 화면을 번갈아가며 비춘다. 울리케 마인호프의 떨리는 눈동자. 바더와 동료들이 빠져나간 뒤 열려있는 창문. 죽어가는 경비원. 다시 울리케. 다시 창문.
  그리고 울리케 마인호프는, 처음 계획했던 바와는 달리 바더의 그룹을 따라 창문을 넘어 사라진다. 
 
  바더-마인호프 그룹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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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 죽음. 탈출구. 다시 갈등. 그리고 탈주.
  이후 울리케 마인호프는 그룹의 ‘입’으로서 그룹의 모든 성명을 전담한다. 
 「우리의 입장 : 제복을 입은 자들은 인간이 아닌 돼지이므로, 돼지로 취급할 것이며 그들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그들에게 총을 쏠 것이다. 총이 말해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작전 중에 때로는 적들이 승리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들에는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성공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 울리케 마인호프의 성명문. 울리 에델의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 中
  “너희를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라!” 그것이 그들의 구호였다. 그들은 나치 독일의 과오를 직시하지 않으면서 냉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에 뛰어들려하는 정부, 무한경쟁과 자본주의적 소외로 인간을 짓누르는 사회, 제 3세계에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착취를 일삼는 세계에 대해 도시의 게릴라로서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는 한동안 수차례의 테러활동을 성공시키며 독일 사회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72년, 두 사람을 포함한 1세대 적군파 전원은 결국 경찰에 체포된다. 그들은 호른스트 말러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감옥에서 자결하였고(*3), 유일하게 살아남은 말러는 훗날 네오 나치로 전향하였다.
  바더-마인호프 그룹은 서방의 그 어떤 좌파 테러리스트보다 거대한 흉터를 독일 사회에 남겼다. 그들은 수차례에 걸쳐 은행을 털어 자금을 마련했고 그 돈으로 미군 사령부와 경찰서를 테러했다. 고등법원 판사와 검사장, 전경련 회장을 유괴해 살해했으며 두 대의 항공기를 납치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독일 정부로 하여금 거대한 대국민 감시망을 운영할 명분을 주었다. 전산화된 새 신분증이 만들어지고 무슨 일을 하건 신분증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테러전담부대 GSG-9이 창설되었다. 연방 수사국이 독일의 모든 경찰력을 총동원하고 국경까지 틀어막는 선례를 남겼다. 
 
  그들을 독일에게 진정한 경찰국가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또한 1세대가 전멸한 뒤로도 80년대를 넘어 90년대까지 이어진 테러리즘의 공포를 독일에 심었다. 
 
  그들은 그렇게 독일을 새로이 태어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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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년의 ‘검은 9월단’ 사건의 현장. 9월단은 팔레스타인 포로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인질로 잡았고, 결국 범인들과 인질 전원이 사망했다. 이 때 9월단은 팔레스타인 포로들과 함께 바더와 
마인호프의 석방 또한 함께 요구했다. 적군파와 연계된 독일의 테러들은 이후 90년대까지 이어진다.
  구세계여 안녕히
  「RAF(독일 적군파)는 해방투쟁 속에서 1970년 5월 14일 탄생하였다. 오늘 우리는 이 계획을 종결한다. 이제 RAF의 조직으로 진행되었던 도시 게릴라는 역사 속의 한 장이 되었다. RAF는 나치로부터 해방되고도 나치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항해 투쟁을 시작하였다. 무장투쟁은 권위적 사회형태와 소외와 경쟁에 대한 반항이었고 다른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해방의 바람 속에서 사이비 합법 체제를 거부하고 극복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의 시간이 무르익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좌파가 그 한계에 도달하고 붕괴하기 시작했을 때 RAF를 새로운 기획에 연관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비현실적이었다. RAF의 오류는 불법적 무장투쟁 외에 어떠한 정치 사회적 조직도 구축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런 기획의 부족은 RAF가 미래의 해방과정에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세계는 우리가 혁명을 시작했을 때보다 더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적절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저지른 오류들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 
  
  RAF는 해방의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었다. 그럼에도 해방된 인간의 세계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래의 해방계획은 여러 주체와 관점과 내용의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상이한 개인이나 사회그룹들이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68년 이래 독일 좌익의 구상은 새로운 해방의 기획이 될 수 없다.」

- 1998년 4월 20일, 최후의 독일 적군파가 로이터 통신에 보낸 ‘해체 선언문’(*4)


  혁명에 있어 구세계를 마주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1968년, 세계의 혁명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구세계를 극복하려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철두철미하게 구세계의 파괴를 꿈꾸었던 흐름들이 있었고, 그 흐름들은 예외 없이 그들 자신 또한 파괴시켰다. 그들은 구세계를 떠나 새로운 길을 개척했지만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기보다 오직 옛 삶을 파괴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그들의 탈주선은 파괴적 죽음의 선을 따라 흘렀다. 그들이 파괴하고자 한 구세계는 한층 더 뒤틀린 형태로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한 ‘끝’이, 혁명에 가담했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혁명을 회의토록 했다. 
  허나 우리는 또 다른 탈주의 선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전공투가 와해되어갔을 때, 떠나간 이들 가운데서는 모든 걸 접어버린 이들도 있었지만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자 한 이들도 있었다. 바더-마인호프 그룹이 죽음을 향해 방향을 잡았을 때, 그들과 68의 대열에 섰던 이들 가운데는 전혀 다른 것을 향한 탈주로를 밟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일본의 수많은 공동체 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을 꿇게 했다.  
 이제, 우리는 그 가능성들을 보인 순간들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 3 >으로 이어집니다)
  
 
*1 벨기에의 맑시스트 에른스트 만델Ernest Mandel.
*2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全日本学生自治会総連合
*3 실제로 그들이 자살한 것인지, 서독 정부가 비밀리에 살해한 것인지는 논란이 있다. 
*4 출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2Gui&articleno=43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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