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자본론 - 녹색자본론(5)

둥글레
2018-08-28 13:38
244

p82-93 수정해석



  게다가 여러 존재물을 횡단하여 유동하는 이 힘(실체)에는 내부 구조가 없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단일한 실체로서, 어떤 구조도 토폴로지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를 준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그리스도교는 유일한 ‘신’ 내부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를 인정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 구조에는 어떤 양적 개념도 관계되지 않는다. 순수한 ‘관계성’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토폴로지로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슬람은 이러한 단일성을 모독하는 위험을 잉태한 토폴로지 사고를 ‘알라’에게 미치게 하는 것까지도 엄격히 거절한다.


  그러나 세계의 창조주는 이렇게 단순한 ‘실체’인데, 이 세계는 이렇게도 다양하지 않는가? 이 세계의 다양성을 이슬람은 어떻게 이해할까? 단일한, 단순하기 짝이 없는 ‘힘=실체’는 스스로를 모든 존재하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이 프로세스를 앙리 코르뱅은 『일신교의 패러독스』에서 수피즘 철학자 이븐·알라비의 제자 하이달·아모리가 ‘타우히드’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그린 다음과 같은 그림(『거울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선 이 그림의 중앙에는 유일한 신이 그려져 있다. 그 주위에는 많은 거울이 있고, 그 거울에는 다수의 다양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데 이것은 신의 표출(theophany, 신의 현현)을 나타낸다. 그 자신의 안에 있는 ‘일자’와 신의 직접적 표출로서의 다양한 존재자. ‘일자’에 의해 하나가 되지 않으면 다양성은 없는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 하이달 아모리는 이 모습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설명한다. ‘이 같은 동심원 그림이 그려진 이유는 “타우히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곤란하고, “존재”의 설명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철학자들이 (하나가 되는 행위인) 타우히드와 존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길을 잃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길을 잃게 되었다.’ ‘하나가 되는 것(一化)과 다양화’는 뛰어난 지혜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 또 두 가지가 완전히 일체로 이해되지 않으면 두 개의 프로세스는 함께 파멸에 이른다. ‘하나가 되는 것과 다양화’라는 두 개의 프로세스는 완전히 하나인 것으로서, 겹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타우히드의 실천을 의미한다. 이것을 ‘통일의 통일’이라고 한다. 모든 피조물을 신적 존재와 일체로 파악하지 않을 때, ‘분리’가 일어난다. ······ 신적 존재와 피조물을 동시에 파악하고, 피조물을 신적 존재에 겹치면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가 되는 것 안에서 다양화를 발견하고, 다양성 안에서 하나의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처럼 이슬람에서는‘하나()’와‘많음()’이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뭇 존재자는 모두가 ‘하나’를 직접 표출하는 존재로서 평등하다.하지만 각각의 존재자는 표출하는 정도를 달리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같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 따라서 세계는 놀라울 만큼 다양성으로 가득하다.‘하나’와 ‘많음’은 완전히 동일한 사항을 나타낸다고 이슬람은 생각한다. 이 생각에 따르면 일신교가 존재자의 세계를 ‘균질화’하는 사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나’의 직접적 표출인 존재자는 모두 표현의 정도를 달리하기 때문에 딱 어떤 하나로서 균질한 것은 없다. 모두가 차이로 들끓지만, 동시에 이 차이는 ‘하나’ 속에서 통일화되어 어떠한 분리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여기서 일컬어지는 다양성이 일신교가 경계해온 증식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어떤 존재자도 ‘하나’와 직접적으로 맺어져있기 때문에 그 존재자는 다른 어떤 존재자를 표상(represent)하는 것이 아니며, 한 쪽이 다른 쪽의 시니피앙으로서 자유롭게 늘거나 줄어들 수 없는 ‘정직함’을 갖추고 있다. 일신교가 경계하는 증식 현상이 일어날 때에는 ‘하나’와의 직접적인 표출관계를 잃고 자유롭게 떠다니는 상태가 된 시니피앙이 제어 장치 없이 수와 양과 강도를 늘려가는 것이다. 이러한 증식이 일어날 때, 언뜻 세계는 다양성을 풍부하게 한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풍부한 다양성을 품은 것이 균질화하는 표상 안에 포획되어 그 표상작용이 늘고 있을 뿐으로 다양성 그 자체는 빈곤해지게 된다. 돈이 늘어나도 마음은 가난해진다. 이는 표상이 양을 늘리더라도 다양성은 빈곤해진 것이고, ‘하나’인 유일신과의 직접적인 연결이 빈약해졌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일신교는 본래, ‘하나’와의 직접적인 연결을 지키기 위해서 다신교에 반대하고 황금송아지(우상)를 파괴하고, 이자를 엄금하고, 마술에 저항해왔다. 이를 엄격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신학 속에서 증식성의 위험으로 이어질 법한 모든 유혹, 모든 과실을 신중하게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슬람의 타우히드(一化) 사고야말로 일신교의 성립이라는 인류의 ‘제1차 형이상학혁명’의 정신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실현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4. 성령은 증식한다



  그 증식성이 그리스도교 원리 속에는 확실하게 세팅되어 있다. 증식하는 것은 ‘하나’인 신의 다양한 표출과는 다르고, 신과 인간 사이에 서는 매개자를 중개자로 하여 우리들의 세계에 방사되고 양이 있는 것(부의 경우) 양이 없는 것(지복감의 경우)을 불문하고 어쨌든 무언가를 ‘늘린다’. 지고의 신과 전존재자가 직접 표출의 관계에 있는 이슬람에서는 이러한 타입의 증식의 개념은 부정된다. 그런데 같은 ‘유일신’에 관해 타우히드와는 전혀 이질적인 이해를 보이는 그리스도교에는 이런 타입의 증식이 그 신학 중심부에 세팅되어, 그것에 알맞은 현실을 만들어 냈다. 이슬람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최대의 논점의 하나, ‘삼위일체론’의 문제가 그것에 관련되어 있다.


  삼위일체론의 구조가 그리스도교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예수에게 그런 발상이 있을리 없고 바오로가 쓴 서간 중에도 곡예를 부리듯 이해하지 않는 한 그렇게 견고한 사고구조가 이미 있었다고 증명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이 구조는 고대 초대의 이단 아리우스파와 그 아류와의 논쟁을 통해 고대의 교부들에 의해서 점차 형성되었다. 그 과정을 대강 복습해 보자.


  우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논쟁을 일으켰다.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이고 예언자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이사(Isa,예수)’도 같다고 이슬람은 생각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이다. 그러나 예수가 마리아라는 여성으로부터 인간의 아이로 태어났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단성설’(1)을 주창하는 아리우스파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는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인 지역의 사람들은 나중에 이슬람 신의 단일성을 둘러싼 가르침을 받아들여 간다. 이것에 저항하여 초창기의 그리스도교 정통파는 단성설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했다. 


  정통파의 사고방식에서는 신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다고 인식되었다. 양자는 ‘본질의 일치(호모우시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신에게 있는 본질은 모두 그리스도에게도 있다. 그러나 신과 그리스도는 동일하지는 않고 엄연한 차이가 유지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유전자를 완전하게 전달되도록 하여 ‘아들’을 산출한다. 유전자 정보는 완전하게 동질이지만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산출된 것으로 양자가 같은 것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이 ‘아버지’로서 설령 ‘아들’을 낳았더라도 그 본질은 단일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 단일성의 내부에는 ‘부성’과 ‘자식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관계성이 있고 이 관계성에 의해 하나로 통일된다고 하는, 실로 복잡한 사고법을 채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일신교의 신은, 인간이 행하는 유한한 인식영역을 횡단한 초월적인 유동적 지성으로서, 어떤 인식의 수단에 의해서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곧 신은 실무한(2)이다. 그리스도는 지상에 있고 이 신과 동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파악하는 현실 세계 속에 무한이 있고, 혹은 유한의 세계에 무한이 투입된다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이러한 것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실무한인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에는 엄연한 심연이 가로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에게 신성을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에서는 현실세계에 실제 무한이 투입된다는, 터무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서구적으로 이해되었던 화폐의 경우와 거울이 비친 반전상처럼 아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화폐는 모든 것을 균질화하는 것에 의해서 무한의 개념을 경제로 도입한다. 다양한 상품의 질적 차이는 화폐라는 균질한 유동성 안에 집어넣어지고 소실되지만, 그 대신에 하나하나 셀 수 있는 양으로 변화한 덕분에 언제까지나 셀 수 있는 수, 즉 수학적 무한을 향해 화폐를 증대시키려는 욕망이 발생한다.


  그 의미에서는 일신교의 신과 화폐 사이에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다. 화폐는 세계를 균질화한다. 일신교의 신도 ‘유일의 신’으로서 온갖 질적 차이를 가진 것을 평등하게 하고 자신 내부에 감싸안는다. 화폐는 현실 속에 무한을 끌어들이는 작동을 한다. 물론 이것은 수학적 무한으로서 신의 실무한과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 양자(수학적 무한과 실무한)의 사이에는 잘 보면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는데도 까딱 잘못하면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대부분은 무심코 이 양자를 혼동한다. 그러한 혼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이슬람은 타우히드의 관상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신의 아들’이 지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무심한 위험성이 계속 증대하게 된다. ‘하나’(이것을 셀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와 ‘많음’(수학적 무한으로서 세는 것이 가능한)이 완전히 일체인 신의 실무한과 화폐가 만들어 내는 무한의 개념의 사이에는 이렇게 종종 분별을 잃어버리게 하는 위험이 잠입한다.


  상인경험이 긴 무하마드는, 화폐가 발휘하는 이러한 마력을 숙지했기 때문에, 화폐라는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무한한 확대’가 신의 유일성(타우히드)을 모독하는 것으로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금과 은을 쌓아서 그것을 알라의 도를 위해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참혹한 징벌을 경고하라.


그날 그것들(금은)은 지옥의 불에 달구어져 그들의 이마와 옆구리와 등에 낙인 찍힐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이 자신의 혼을 위해 축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축적한 것을 맛보아라.’


                                                                                                                           (『꾸란』회개장9, 34-35)



  우리들은 이런 발언을 어쨌거나 종교도덕 류의 말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금욕을 말하는 도덕 언설이 아니다. 이슬람의 사고는 타우히드의 사고로서 비길데 없는 일관성을 나타낸다. 무하마드는 화폐가 그 숨겨진 마력을 발휘하여 황금송아지로 변모하지 않도록 유일신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에 한순간이라도 주의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일신교적 기호론으로부터 귀결되는 하나의 윤리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윤리는 타우히드 논리와 일체이다. 그렇지만 삼위일체론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은 신의 내면구조의 논리로부터 직접적으로는 도출될 수 없다. 즉 스피노자가 말한 의미에서는 ‘윤리’로는 안 된다. 스피노자가 말한 ‘윤리’란 ‘실체’의 내재논리와 일체여야만 한다. 그래서 욕망의 억제를 말하는 가르침은 종종 금욕적인 도덕 언설의 성격을 띠게 되어버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른 방향으로 관심을 돌리면, ‘아버지’가 ‘아들’을 산출하는 그리스도교적 일신교의 문명에서는 현실의 세계, 가령 수학적 지성이 인식가능한 세계 안에서는 실무한이 기호화되어 투입되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된다. 이슬람에서는 신의 지성과 인간의 지성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절대의 심연이 가로놓여있기 때문에 신의 지성을 드러내는 실무한을 ‘א’등으로(3) 기호화하여, 수학의 세계 안으로 거두어들이고, 그것으로 모순없는 체계를 만들려고 생각하는 수학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교적 서구에서는 그런 수학이 실제로 만들어지고 뛰어난 지성이 그것에 몰두해왔던 것이다. 거기에는 자본주의의 경이적인 확대와 정신분열병적 문명(‘무한의 수학’이라는 것을 생각한 칸토어는 실제로 분열병에 빠졌다)이 수상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달을 이뤄왔다. ‘아들을 산출하는 신’, 화폐, 무한의 수학, 자본주의, 정신분열병적 문명. 이것들 사이에는 분명히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자본주의 발달의 기저에는 무한한 욕망을 재촉하는 화폐의 작동이 있다. 그러나 타우히드에 따르는 이슬람 경제라는 이질적인 문명이 실재하는 이상, 이러한 화폐는 “신이 아들을 산출하는 세계” 특유의 화폐론에 기반한 화폐의 작동에 따른다고 보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이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출현은 일신교적 기호론에 있어서는 분명 추문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상으로 일신교에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 ‘성령’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이 ‘프네우마=영기’라고 부른 것은 사람의 호흡을 통해서 생명활동에 드나드는 비물질적인 작용과 종교의례와 제례 때에 사람들 위로 내려와서 깊은 공감과 공명, 일체감이나 사랑의 감정이 폭발하게 하여 그 장소를 하나의 ‘코뮤니온’으로 만드는 불가사의한 힘과, 뛰어난 영적 지도자가 설교나 세례를 줄 때 그 사람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카리스마적 힘 등을 가리킨다. 이 말은 『신약성서』에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셨다. (마태오 4: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루카 4:1)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리셨다. (루카 3:21-22)(3)



역주(1) 단성설(單性說, 영어: Monophysitism) 또는 단성론 (單性論) 이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론을 신학적으로 정의할 때 사용되는 용어로서, 육신을 지니고 세상에 나온 예수에게는 단일한 성질(나투라)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역주(2) 실무한 [實無限, aktuale Unendichkeit] 자연수열 1,2,3,…,n,…과 같이 한없이 계속되어 끝이 없는 '생성하는 무한'을 가능적인 가무한(假無限)이라 하고, 이에 대하여 이 무한 과정 전체를 무한의 원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결된 집합으로 파악할 때, 현실적인 '존재하는 무한'으로서 실무한이라고 한다. G.칸토어가 집합론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말로서 초한(超限)이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양의 정수 전체의 집합 또는 모든 실수의 집합을 들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 무한의 존재를 부정하고, 가능적 무한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그 후 신학이나 철학에서는 현실적인 참무한[眞無限]을 생각하게 되었다. 실무한은 이 참무한의 개념이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역주(3) 가톨릭 성서 참조.역주(3) (ʼaleph) [א]. 히브리어 알파벳 의 첫 번째 글자. G.칸토어가 무한집합의 크기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했다.

역주(4)가톨릭 성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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