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자본론 - 녹색자본론(4)

인디언
2018-08-1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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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자본론(4) 72-82


  교회는 확실히 고리대들에게 두려운 저주의 말을 던지고(고리대들은 현세의 번영을 체험한 뒤에 가장 비참한 지옥에 떨어진다고 교회에서 계속 위협하였다), 그 비난은 가장 악질적인 반유대주의에 구실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가 되면 스콜라 학자들의 논조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고리대 일반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느 정도의 이자를 붙인 금융이라면 허락되고, 어느 범위를 넘으면 허락될 수 없는가라는, ‘공정’의 이론을 정리해내는 것으로 그들의 관심이 옮겨간다. 스콜라 학이 이때 만들어낸 ‘공정’을 둘러싼 일종의 도덕철학은 결국 아담 스미스를 통해서 고전파경제학의 심장부에 흘러들어간다. 스콜라 경제학은 이자(이윤)가 자본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낳는 것을 예감한 점이 있다. 그 덕분에 고전파 경제학은 스콜라 경제학으로부터 사고법의 열쇠를 그대로 받을 수 있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시대에 ‘연옥’의 개념이 만들어졌다고 르 코프는 말한다. 현세에서 죄를 쌓은 것이 사후 바로 지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생전의 죄를 정화하여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열어 살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연옥이라 불리는 새로운 완충지대가 설정되었다. 이것으로 고리대들에게 무겁게 내리누르던 심리적 압박은 크게 경감되었다. ‘다시 회심하여 신에게 마음을 의탁한다면, “너의 이름은 신 앞에 명예로운 이름”이 되고, 예전부터 고리대라 불렸던 사람은 회심자라고 불리워 신에 의해 의롭게 된다.’(비토리의 야콥스의 설교)

  13세기가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이 때, 자본주의에 대한 스토퍼를 주춤주춤 해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선, 자본주의의 창시자인 미래형 상인, 고리대들에게 채워져 있던 족쇄를 벗겨야만 했다. ‘공정’의 이론과 ‘연옥’의 사상이 그것을 실현했다. 일신교의 세계에 이 때 결정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그 모습을 이슬람은 동방에서 의혹의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3 타우히드 화폐론

  이슬람은 과연 ‘최종・최고의 일신교’답게 이자(이윤)의 발생을 윤리적 금지라는 형태를 통해 억제하려고 시도해왔다. 그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서는 오랫동안 자본주의가 형성되지 않았다. 이자는 자본주의의 원자이다. 이 원자를 그 발생 단계에서 억제하는 ‘분자 차원’의 개혁을 통해 이슬람은 화폐증식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출현을 제지해 왔다.

그런데, 같은 ‘아브라함 종교’인 일신교 입장의 기독교세계에서는 생산력의 증대와 활발한 상업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13세기 이후가 되면서, 교회가 이자・이윤의 획득에 대한 억제를 급속히 약화하면서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이슬람권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던 종교의 영향력 저하가 기독교권에서는 일어났다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기독교의 사상구조의 내부에 자기증식하는 인자의 활동을 용인하는 듯한 가능성을 숨긴 어떤 요소가 처음부터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자크 르 코프의 연구는 이자・이윤에 대해 기독교가 ‘자연주의’로써 대립하려고 했던 점을 밝히고 있다. ‘금은 금을 낳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명목상 간판으로 내세워지고 금=화폐는 추상적 가치 실체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으로써 자력으로 새끼를 치지 않는다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필두로 한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사고였다. 유일한 신의 법칙은 자연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였다. 화폐가 화폐를 낳는다는 반자연을 신은 허용하지 않았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과 같은 사고방법이 거의 400년 후의 중농주의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중상주의자들이 ‘이윤은 공동체간의 차이에서 초래된다’는 차이론적 사고에 근거해 주로 무역차액에 의해 이윤을 얻을 것을 주장한 것에 반해, 중농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같은 격언으로써 반론했다. 화폐 그 자체는 가치증식이 불가능하다. 공장에서의 상품생산에 의해서도 가치는 늘지 않는다. 가치를 늘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연을 경작하는 농업뿐이며, 신이 부여한 ‘순수한 자연의 증여’가 자연의 증식이 되어 인간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였다.

프랑스혁명 직전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이 중농주의는, 철두철미하게 가톨릭신학적인 사고의식에 따르고 있다. 이 세계에 가치의 증식이 일어나는 것은 단지 ‘신의 선물’이 경제회로를 일탈한 자연과 영성에서 과잉분으로 되어 ‘은총’으로서 인간에게 초래될 때 뿐이라고 사고하는 가톨릭 신학은 이 사고법에 따라서 예전부터 이자, 이윤을 부정한 것으로 했던 것이지만, 마르크스도 높은 평가를 한 근대경제학의 시초, 중농주의 아래에 있더라도 마찬가지 사고법이 답습되어지고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생각을 확대해 갈 수 있다면 고리대적인 이자, 이윤은 반자연으로서 금지되어야만 하지만, 노동과 자연을 통해 초래된 산업적인 이윤은 ‘신의 이름으로도’ 승인할 수 있다고 하는 가톨릭교회의 생각으로 한 바퀴 순환하여 되돌아가게 된다.

  순수한 가치증식은 자연에 대한 노동과 그 노동을 매개하여 자연으로부터 초래되는 증여로서의 ‘순수이익’으로만 일어난다고 하는 중농주의 생각의 배후에서 우리들은 기독교적 일신교 사고의 강력한 자력장을 발견한다. 게다가 실제로 농업이 축적한 원시적인 자본이 근대자본주의를 산출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농업의 문제이다. 일찍이 일신교가 직면했던 농업이 품은 자기증식능력의 문제가 프랑스혁명 전야에 혁신적인 경제이론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가 강력한 농업국이라는 것에 관계하고 있다.

슘페터 같은 훌륭한 현대경제학의 연구자는 일찍부터 고전파 경제학의 골격에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스콜라학자의 경제론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순수한 자연의 증여’와 같은 중농주의의 가톨릭적인 개념을 비판하고 이윤의 발생을 노동과정 자체 안에서 발견하려고 했던 아담 스미스가 실제로 그러했다. 아담 스미스의 경제론은 잘 알려져 있듯이, 그 기초를 중상주의가 아닌 도덕철학 속에 가지고 있는데, 이 도덕철학 속에 ‘자연법’을 둘러싼 철학자들의 업적을 매개로 스콜라 경제이론이 도도히 섞여 들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중상주의를 우회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아담 스미스에 이르는 끊기지 않는 이치(코스)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서구  근대의 경제적 현실 속에 스콜라 철학적으로 이해된 일신교의 구조가 잠복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유대교는 증식의 아포리아를, 마술과 다신교를 부정하는 것에 의해서 뛰어넘으려고 하고, 이슬람은 이자의 엄금으로써, 경제생활전반의 실천적 혁신을 꾀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가톨릭·그리스도교는 시작 태도에서는 이것에 반대하고, 다음으로는 엉거주춤 용인하고, 마침내는 스스로가 낳은 아이에 의해서 대타격이 가해졌다.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그 아이 자신이, 증식의 원리의 부산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신교 내부에서의 그리스도교(특히 가톨릭적 그리스도교)의 특이한 성격이, 여기서 크게 부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추진하는 원리는, 이것을 동태적 구조로써 보는 한, 가톨릭신학의 가치이론과 극히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일신교와 고전파경제학(게다가, 서구에서의 생산, 유통, 분배 구조 그 자체)의 사이에는, 지금까지 생각되어왔던 이상으로, 깊은 본질적인 관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들은, 이제까지 명확하게 된 것이 없었던, 신학과 경제학을 묶는 ‘보지 못했던 고리’를 재별견하기 위한 탐구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같은 일신교인 두 개의 문명권에서, 오늘날의 ‘충돌’이 의미하는 것을 최대의 심도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탐구는 중요한 것이다.

  거기에서, 자본주의와도, 사회주의와도 다른, ‘이슬람경제’라는 현실이 실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예를 들어 경제지배력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약체라고 하지만, 이슬람 경제는 예전부터 실재하고, 지금도 실재하고, 앞으로도 실재한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그러면 자본주의에서든 이슬람경제에서든, 오늘날 모든 경제활동의 기초는 화폐이므로, 그 화폐의 이해에서, 가톨릭적 화폐론과 이슬람적 화폐론이 존재하고, 각각의 화폐론이 다른 경제적 현실을 형성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부터 볼 것처럼, 이슬람적 화폐론은, 일신교의 이슬람적인 이해인 ‘타우히드’의 구조에 따라서 조직되었고, 가톨릭적 화폐론(이것은 우스라와 싸웠던 스콜라철학에서 시작된, 중농주의와 고전파 경제학과 『자본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내부에서는 유효한 작동을 계속하고 있다)은, 일신교의 그리스도교적 이해인 ‘삼위일체’의 구조에 기초해서 작동하고 있다.

  두 개의 차이는, 이것을 외부로부터 보는 한은 사소한 것이지만, 일신교적 세계의 내부에서는 중대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경제 발전의 초기단계에서 이슬람의 절대적 우위, 십자군 문제, 근대에서 서구자본주의의 폭발적 전개, 이슬람의 경제적 열세, 오늘날의 세계화의 현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의 심층에서, 일신교로서 각각의 ‘초기조건’에 포함되었던 차이가, 중대한 작동을 일으킨다. 거기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두 개의 일신교의 ‘초기조건’ 사이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이슬람적 일신교는 ‘타우히드’의 논리로 관철되고 있다. 타우히드는 아라비아어로 ‘오직 하나로 하는 (一化하는)’을 의미한다. 이슬람 최대의 법철학자 가잘리의 정의를 보자.

  

  지고하신 신은 유일인 것, 신이 유일이라는 것은, 신 그 자체의 긍정과 신 이외의 것의 부정이라는 것으로 귀착한다. (....) 우리는 말한다, 하나인 것은 분할을 용납하지 않는 것, 즉, 크기가 없고, 한계가 없고, 양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고하신 창조주가 유일인 것은, 거기에는 크기가 없다는 의미이고, 분할을 정당화하는 크기를 신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것이다. (이슬람 신학요강 <중세사상원전집성 11>)

 

 삼라만상 이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형태, 색깔, 속성 등 여러 가지 다양성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그 모든 존재(있는 것)의 존재성이 ‘오직 하나의 실체’로 받아들여져서 즉, 유일의 신인 ‘오직 하나의 실체의 표출’로 이해된다. 역으로 말하면 유일한 신 알라(알라후)만이 삼라만상의 창조주가 된다.

  이것은 일신교로서는 아주 스탠다드한, 유대교와도 그리스도교와도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나, 가잘리의 이 정의에는, 다른 일신교 특히 그리스도교와는 조금 뉘앙스가 다른 점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여기에서는 그와 같은 ‘오직 하나의 실체’라는 유일성과 나란히 이 ‘실체’가 내면에서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유일신은 으로서 분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일체의 토폴로지적 구조화가 거절된다. 유일한 신은 완전히 단순한 실체이고, 그 내면은 토폴로지조차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슬람적 화폐론을 도출하게 되는 정통파 이슬람신학 특성의 하나가, 이것이다.

이것은 ‘주성의 타우히드’라고 불리는, 유일신의 ‘내면’을 둘러싼 지극히 단순함만을 중시하는, 다음과 같은 이해에 잘 보여진다.

‘주성에서의 타우히드’를 이슬람신학은, 알라가 (1)본체에서 부분을 갖지 않는다, (2)속성에서 비교할 수 없다, (3)행위에서 단독이다, 라는 세 가지의 인식으로서 정식화한다.

(1)본체에서 부분을 갖지 않는 단일이다 라는 것은, 알라가 분할가능한 여러 부분의 복합체가 아니라, 불가분의 단일한 실체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라는 신의 일체성을 위협하는 발상은 준엄하게 거절된다.

(2)속성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알라의 속성과 피조물의 속성이 명칭은 같아도 질적으로는 격절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3)행위에서 단독이다 라는 것은, 알라만이 유일의 자족적인 능동적 행위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피조물의 운동은 모두 알라의 끊이지 않는 창조에 의해 생성된다는 의미로 수동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진짜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나카타고 <이슬람의 로직>)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것을 인지론적 표현으로 옮겨보자. 이슬람은 스피노자 철학처럼, 전존재자를 횡단하는, 오직 하나의 힘의 유동이 실행되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지고의 신’이라 불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하나의 유동하는 힘(실체) 뿐이다. 이 유동하는 실체만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다른 온갖 신들을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정된다. 이같은 ‘다신교의 신들’은, 각 인지영역을 나눈 칸막이 부분에 있는 힘의 메타몰포시스(변형)의 현상을, 종교적인 표현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일신교에 있어서는, 그 힘의 메티몰포시스를 일으킨 ‘횡단하는 유동적 힘’ 그 자체 쪽이, 훨씬 근원적이다. 그러므로, ‘지고의 신’은 유일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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