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로부터의 역사학> 후기

띠우
2018-04-25 12:29
376

일본어 강독에서 이번에 읽은 글은 <3·11부터의 역사학>입니다.

산업혁명기 아시오 광산에서 일어났던 일본의 초창기 공해문제와 관련된 내용인데 읽다보면 현재에 겹쳐지는 여러 모습이 보입니다

마지막 시간에 결석한 분들을 위해서 뒷부분은 많이 요약하지 않았어요.

 

내용요약

<3·11부터의 역사학>

 

2011311일에 발생했던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3·11천벌혹은 하늘의 혜택으로 여기지기도 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역사의 전환을 이미지화되었다. 이 글은 그러한 전환이 어떤 의미를 가졌냐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고 있다.

고대사 연구자 요시오 아키오는 현대의 위기와 역사학의 과제-자연파괴를 시점으로 새로운 역사학을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하였다.

 

석유에너지는, 가까운 장래에 고갈한다고 말해진다. 그것을 대체할 원자력 에너지의 위험성은, 체르노빌사고에서도 보여지만, 이런 종류의 사고가 아니어도 핵폐기물처리의 안전성은 여전히 확립되어있지 않고, 그 확립을 위해서는 적어도 원자력발전에서 얻어지는 정도의 에너지를 다른 곳에서 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에너지 소비나 인구증가에 따라서 탄산가스의 증대는, 지구의 온도를 매년 올리고, 이상기상의 간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화학폐기물에 따른 오염은 그칠 줄 모르고, 난개발은 자연환경의 일부가 되었던 역사적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기근이나 홍수를 일으키는 규모로까지 발전했다. 인간의 손에 의한 자연파괴는, 현재 인간의 존립 기반 그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데까지 가능해졌다.

 

이 글이 게재된 것은 지금부터 약 30년 전이다. 그러나 3·11 , ‘석유에너지탄소계 에너지, ‘체르노빌후쿠시마로 바꾸는 것으로도 통용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결국 30년에서 무엇이 바뀐 것인가.

요시에는 인류사 총체를 관통해서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자립과 진보 발전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역사이고, 필연적으로 자연의 파괴를 생산한다고 지적하고 지금까지의 진보와 발전의 역사라는 역사관이, 동시에 그 치닫는 곳이 인류의 사멸에 이르는 것처럼 자연 파괴의 증대 과정이고, 그것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요시에는 새로운 역사관과 전체사로서, ‘우리들은 인간문명과 진보의 불가역성이라는 가치를 인정한 것에 더해 그것이 생산하는 자연파괴의 필연성과 실태를 역사적으로 따라가고, 또 그것을 근거로 해서 파괴된 자연과의 관계의 복원의 전 과정을, 인간이 여태껏 실현했던 것이 없는 자연과의 참괸 공존과 조화로 향하는 것, 따라서 인간지배를 필연적으로 파생할 수밖에 없는 자연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소유의 참된 폐기를 향한 끊임없는 걸음으로써, 통합적으로 그리는것을 제기했다. 본고는 그 구체적인 사례로써 일본의 아시오 광독문제를 가져와서, 일본의 산업혁명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론으로써 검토하고, 3·11부터의 역사학을 전망하고 싶다.

 

1. 아시오 광독에 따른 자연파괴

도치키현에 있는 아시오광산의 시작은 전국시기로 1610년에 막부 직할이 되고, 그 직후 연간생산이 1300톤 이상을 기록했다. 근세에도 광독에 따른 와타라세강 어업 피해가 보이며 지속적안 고생산을 유지 못하고 19세기에는 연간 100톤 이하가 되었다. 그러나 1876년에 무역상 후루카와 이치베가 메이지 정부로부터 아시오 광산을 불하받고, 그 후 1881년과 1884년에 새로운 광맥이 발견되어, 1884년에는 2286톤이라는 전국 1위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이때 아시오 광산에 최신식 기술이 도입되어, 일본을 대표하는 광산이 되었다.

다른 한편, 아시오 광산은 생산량의 증가에 비례해서 심각한 환경파괴를 일으켰다. 와타라세강 상류부의 산림의 자연파괴는 두드러져서, 100년 이상이 되어도 그 흔적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산림황폐로 1902년에 와타라세강 상류부에 있던 마을이 방기되어지고, 그 페허에는 거대한 퇴적장이 지어졌다. 폐광이나 동제련 후의 폐기물등은 아시오의 산중에 퇴적되었고, 그 퇴적물부터 황산구리 등의 광독이 유출되고, 홍수 때에는 대량으로 와타라세 강의 중상류를 오염시켰다. 이것이 아시오광독문제이다.

 

2. 환경파괴의 방지인가, 광산의 조업지속인가-‘공익을 둘러싼 대치

도치키·군마 두 현을 중심으로 와타라세 강 중상류 지역에서는 광독피해가 표면화되었던 1890년의 수해 이후, 다나카 쇼조를 중심으로 아시오 광독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광산 조업에서 이익을 얻었던 아시오 마을 등의 사람들의 대응은 달랐다. 1897년에 나왔던 아시오 광산 광업 비 정지 진정서를 보자. 이 진정서에는 아시오 광산을 제국의 부의 원천이라고 부르고 구체적으로는 동을 유출해서 1897년도만으로도 300만 엔을 얻고, 관세도 13만 엔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아시오 광산의 직공·갱부만으로도 1만 명을 넘어섰고, 그들에게 의식주 그 외를 공급하는 사람들도 모여서 옛날의 가난했던 한촌은 이제 변해서 번영한 공업도시를 이룬다고 하고, 아시오 마을뿐만 아니라 도치키·군마 두 현의 각지 농공상은 그 윤택을 누리지 않는 곳은 없다고 했다. 광업정지가 이루어지면 국가소유의 부의 원천을 막고 몇 만 주민의 생계를 방해하기에 광독에 의한 피해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게 된다고 주장했다. 아시오 광산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하게 그것을 경영하는 후루카와 자본의 문제만이 아닌, 국가와 지역사회의 공익으로서 의식되고, 와타라세강 유역의 자연과 생업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군마 현의회등의 공익과 격렬히 대치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시오만이 아니라, 전후까지 포함한 그 후의 근현대사회에도 내포되어져 왔다.

환경사 연구가인 이이지마 노부코에 따르면 근세 전반기만 해도 광산에 의한 농어업에 피해를 농민이 호소하는 경우, 조업· 개발정지가 되는 것이 많았다고 말한다. 근세 후반, 화폐경제가 침투하자 오히려 보상금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메이지정부는 아시오 광산의 조업을 옹호하였다. 다나카 쇼조의 의회연설이나 광독피해민들의 시위행동인 동경위압을 받고, 1897년에 메이지 정부는 여러 광독대책을 구사했지만 조업정지등의 근본적인 해결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하게 후루카와 이치베와 당시의 파벌의 이익으로부터만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아시오 광산은 부국강병의 중요한 일환이었다.

 

3. 광독문제의 치수문제로의 전환과 야나카마을 폐촌

와타라세강 중상류 지역의 주민은, 1897년 이후도, 다나카 쇼조의 지도아래, 가와마타 사건(1899)등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조업방지를 요구하는 반대운동을 계속했다. 의원을 사직했던 다나카 쇼조의 메이지 천황에의 직소(1910)’도 그 일환이었다. 1903, 메이지 정부는 예방공사를 실시했던 1897년 이후에는 새로운 광독의 유출은 없다고 한 데다가, 와타라세 강과 그것이 합류하는 토네강이나 그들의 지류를 개수하고, 와타라세강·토네강 합류지점에 딸린 곳에 유수지를 설치하는 등의 치수 사업을 실시하고, 와타라세 강 연안지역의 땅값 수정을 행하는 것 등을 골자로 대책을 제기했다. 이후, 유수지의 대상으로써 도치키현 야나카마을이 대상이 되고, 야나카 마을은 도치키현에 의해서 제방을 파괴당하고, 대다수 촌민은 소유지를 매수당해 이주가 부득이해져서, 1906년에 폐촌이 되고, 1907년에 잔존했던 촌민의 집을 파괴하는 강제 수용이 이루어졌다.

정리해서 말하면, 치수사업이라는 지방이익 배분에 의해, 광독피해민의 대부분은 자본- 국가쪽에 통합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야나카 마을 폐촌에 가담해 갔다. 그 안에서, 무토우 킨키치 무리의 정당정치가가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기 입헌정우회 등의 기성정당이 국가 통합의 중요한 장치로써 되어졌지만, 그것은 그것까지의 자연환경을 자본-국가가 극한까지 파괴해가는 것을 지역주민에 수용시킨다는 기능도 했던 것이다.

 

4. 대안에 대한 희구- 다나카 쇼조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러한 논리에 대항하는 대안을 희구했던 것이 다나카 쇼조였다. 다나카 쇼조는 도치키현 코나카의 명주집안에서 태어났다. 다나카 쇼조의 사상의 모티브의 하나로서, 근세 민중사상사 연구자 후카나 키요시는 민중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전념하는 것이 정치가의 본연의 자세이라고 하고 위정자윤리가 있었다고 하며, ‘민생안정과 정의 실천을 위장자의 윤리로써 당연하다고 보는 인정주의위정자윤리의 요구 그 자체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사상을 접하면서 쇼조는 이 자세를 자유민권으로 바꾸었다. 쇼조는 자유민권운동에 헌신적으로 참가하는 동시에, 도치키현 의회원을 거쳐, 1890년의 제1회 총선거에 따라 중의원회원으로 선출되었따. 다나카쇼조는 1891년부터 중의원으로 아시오 광독 문제를 취급하고, 아시오 광산의 조업정지를 호소했던 것이, 이 시기에 중심적으로 의거했던 윤리가 공익과 소유권이고, 크게 보면 민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광독피해가 심각화되고, 주민신체에 영향이 심해지자, 쇼조는 이제까지의 윤리에 더해서 생명’ ‘인권의 윤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쇼조는 광독피해는 잠재적이고, 광독의 농수산업에 대한 피해는 주민의 의식주의 결핍을 생산하고, 그것 자체가 신체에 유해하다고 했다. 다른 한편, 가와마타사건을 계기로 했던 정부에 따른 단압의 강화, 다나카 쇼조의 의원사직과 천황에 대한 직소의 좌절, 광독문제로부터 치수문제로의 전환등, 다나카 쇼조에 있어서 인위에 의한 운동수단이 한정되어졌고, ‘인도(人道)’를 넘어선 절대적 존재로서의 하늘’-‘자연이 강조되었다.

1922 2, ‘치수논고(쇼조전집제5)’에서 쇼조는 군국·촌락이라는 지역사회는 천연 지형에 따라서 만들어지고그것은 신이 정한 질서라고 하고애초에 인간은 이 천연의 지형에 정해졌던 천부의 생활을 좋아했지만문명발전의 결과개간· 관개· 성벽건설에 따라서천연의 지형에 커다란 변동이 더해져 왔다고 했다쇼조는 ‘애초에하천치수의 본의는 천연의 지세를 이용하는 것이다물살이 향하는 곳에 맡기고이것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본의로 했다고 하고근세막부에 의한 하천개수에 반대하며 비판했다쇼조는 새롭게 하천을 만들기보다 ‘오히려 오래된 강줄기의 지세를 회복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주장했다쇼조의 경우신이 정한 ‘하늘의 질서인 ‘자연에 회귀하는 것이 과제였던 것이다.

 ‘하늘앞에서는인간사회의 현질서는 상대화되어 가는 것이다. 1911 8 29일 일기(쇼조전집제12)에서는 ‘세계인류의 대다수는현재 기계문명이라는 것에 물어뜯어 살해된다라고 적어두고 있다그리고 1911 5월의 일기(쇼조전집 제12)에서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만물의 노예라도 좋고만물의 고용살이어도 좋고 사환이라도 좋다고 기술하고 있다인간중심주의가 훌륭하게 상대화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년에 이르기까지 나왔던 청원서· 진정서에는 헌법 · 인권이 정당성의 근거로 되고 있었다단지그것은 인간사회의 논리부터만이 아니라, ‘인권 또한 산천과 같다’(‘광업정지헌법옹호3현의회의 결의에 대한 진정서’, 1910 125쇼조전집 제4)자연 산천에 의해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마치며

요시에 유키오가 제기에 의거하면서, 여기까지 시론으로써 검토해왔던 것을 정리해보자. 산업혁명기의 아시오광독문제는, 근현대사회의 무제한의 자연파괴의 기원이 되었다. 인간사회는 애초에 그 성립시점부터 자연을 바꾸고, 파괴하는 지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농수산업등의 자연경제를 중심으로 했던 전근대시기에서는, 적어도 지역의 농수산업을 근저로부터 쇠퇴시키는 듯한 자연파괴는 억제되었고, 그것이 공익이라고 여겨졌다. 산업혁명이후의 자본주의는 자연과학의 성과를 도입하는 것에 의해서 커다랗게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그러한 억제를 배제하고 제한한 자연파괴에 이어져왔다. 그리고 무제한의 자연파괴를 동반한 자본의 발전은, 그 기업경영부터 이윤을 얻는 자본가들만의 이익이 아닌, 지역사회의 공익이고, 더불어 국가의이익이라고 여겨졌다. 더해서, 광독피해민의 대다수가, 입헌정우회등의 기성정당을 통해 치수사업비등의 지방이익을 분배에 따랐고, 자본-국가의 윤리에 통합되었다. 전근대에 볼 수 없는 공업생산이라는 인위에 에 따른 무제한적인 자연파괴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것을 추앙하는 국민국가에 의해 새로운 인간지배 방식으로 확립해지는 것과 이어졌다. 현실에는, 그렇게까지 생업을 파괴하고, 신체까지 침해하는 광독을 초래했던 아시오 광산의 조업을, 지역사회와 국가의 번영의 초석으로써 인식했던 것이다. 아시오 광산의 위험은, 기성정당을 통해서 국가에 의한 치수사업의 실시라는 지방이익=리턴으로의 교환으로 표면상 보여졌다.

이 구조는, 미나바타병을 초래했던 회사의 조업에서도, 후쿠시마원전의 건설에서도 반복되었다. 자본의 발전은 국가와 지역사회의 발전과 같은 뜻으로 여겨져, 자본주의에 따른 리스크는 지방 이익등의 리턴이라고 교환되었다. 그 배후에는, 마크로코스모스로서의 자연환경은 파괴되고, 이른바 내재된 자연으로서의 미크로코스모스인 인간의 신체도 망가졌다. 그 최종적인 국면을 암시하는 것이 체르노빌 사고이고,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였다. 라고 하지만, 같은 위기는, 산업혁명기이고 국민국가 건설기였던 근대 초기부터 내포되어져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구체저으로는 아시오 광독문제를 검토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시론에 불과하지만, 근현대사회전체의 문제로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나카 쇼조는, 자신이나 선행하는 세대의 전근대적인 사상 기반을 전제로써 하면서, 그것을 근현대 사회의 윤리로 바꾸어 주장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근현대사회총체를 비판하는 거점으로서 다나카 쇼죠가 선택한 것이, 인간의 인위에 의해 파괴되어가는 자연이고, ‘하늘이었다. 만년의 쇼조에게도, 헌법에 의거했던 인권이 주장되었지만, 쇼조는, 보다 고차원의 세계으 법칙으로서의 천칙(天則)’에서 헌법-인권의 정당성 원리를 구했다. 다나카 쇼조의 생애는, 과거에서 제기했던 것을 근대라고 하는 경험을 거쳐 미래에 부활하게 하는 것이었다.

쇼조의 이러한, 전부를 자연에 맡긴다는 것이 근현대 사회에서 가능할까 어떨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사상 안에, 무제한의 자연파괴를 내포하는 근현대사회의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적 의미에서환경보호운동이 넓어진 계기가 되었던 침묵의 봄을 썼던 레이첼 카슨은, 같은 책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는 인간만의 것은 아니다--이 생각에서 창조적인 노력에는, 자신들이 다루는 상대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인식이 줄곧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각지에서 일반화되었던 농약의 대량 살포에 그녀는 반대했지만, 그녀가 자주 오해되는 것처럼 과학기술의 이용일반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천적이나 방사선으로 불임화되었던 곤충의 도입 등, ‘조절하려는 생물을 잘 이해하고, 이러한 생물을 감싸고 삶의 사회전체를 분명하게 한다’ ‘생물학적인 해결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제기했던 것이다. 물론, 다나카 쇼조와 레이첼 카슨이 직접적인 계보관계를 가지지응 않지만, 기계제 대공업이 개시되었던 산업혁명기에 다나카 쇼조에 의해서 구상되었던 대안은, 레이첼 카슨에 의해서, 보다 세련되어져, 현대 사회에 적응하는 형태로 표현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제기했던 3·11로부터 역사학을 전망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3·11, ‘묵시록적인 재해였지만, 미증유의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전환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근현대사회가 처음 발생부터 내포했던 위기를 여러 가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역으로 위기에 있는 것이야말로 자연제어의 진보만을 인정하고, 사회의 퇴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사람들에 의해서 필사적으로 그것을 호도하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우리들에게는, 우리들에 선행했던 모든 세대에 한결같이, <희미>하면서도 메시아적인 능력이 부여되고 있지만, 과거는 이 능력에 기대하고 있다. 이 기대에 어설프게는 대답하지 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은 다나카 쇼조에게도 들어맞고, 그 역사적 경험을 보아왔던 우리들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이 지점부터 3·11이후를 전망해 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요약인지 그대로 옮기는건지 모를 후기를 이만 마칩니다.

학교급식 검수에 다녀오느라 비내리는 길을 헤치며 달려왔지만 시간에 늦어서 죄송했습니다

까치님과 뚜버기님 셋이서 얘기했어요

다음부터는 사람들 많을 때 읽어야겠다구요... ^^:;

 

 

숙제 알려드릴게요~

요요님 ~41쪽 첫줄까지

까치님 ~42쪽 열 번째줄까지

건달바님 ~44쪽 넷째줄까지

뚜버기님 ~46쪽 첫째줄까지

띠우 ~48쪽 셋째줄까지

 

인디언님, 토용님~~~ 건강해져서 오세요.. 숙제 많이 드릴게요^^

댓글 1
  • 2018-04-25 17:43

    결석자를 위한 자세한 요약정리, 감사해요!

    첫시간에 아시오 광독사건을 읽으면서 저는 폴라니가 영국의 산업혁명과정을 

    '개발이냐, 삶의 터전이냐'는 화두를 던지면서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 곧바로 떠올랐어요.

    아시오 광독사건으로 본 일본의 근대화과정 역시 예외가 아니군요.

    광독문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치수문제로, 또 지역의 이익문제로 전환되는 과정 역시

    공리주의와 경제적 접근법이 정당성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되네요.

    체르노빌과 3.11 원전사고를 겪었지만 정말 그 사건들을 겪기나 한 것인지,

    우리는 체르노빌 이후를, 3.11이후를 살고 있는 건지, 의문이 계속됩니다.

    저는 최근 쓰레기대란을 통해 '핵쓰레기'가 아니라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삶의 곤란함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핵발전을 멈춰라라고 외치는 것보다 이건 더 곤란한 문제구나 싶네요. 

    흠.. 다음 글은 또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 숙제를 하면서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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