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진달래 2023.09.11 |
조회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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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정군 2023.09.11 |
조회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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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관주의와 신비주의 자여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그의 창자는 위쪽으로 올라붙었으며, 턱은 배꼽에 파묻혔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았으며, 상투만 달랑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 많이 아파보였으나 마음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로 가서 자신을 비춰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나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모습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습니다. “아니네, 그럴 리가 있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올빼미를 잡아 구워먹겠네. 내 꼬리뼈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따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삶을 얻는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고 그것을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일 뿐이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네. 옛사람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네. 그런데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사물이 자연의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된 진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장자』내편, <대종사(大宗師)>)   이 책의 제목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가 연유한 부분이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호접몽(胡蝶夢)의 구절 못지않게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의 근대철학자 호적(胡適)은 이 부분을 한 마디로 ‘낙천입명(樂天立命)’이라고 비판했다. 낙천입명은 하늘의 명을 따라 즐기고 이에 순응한다는 뜻의 ‘낙천지명(樂天之命)’과 같은...
달관주의와 신비주의 자여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그의 창자는 위쪽으로 올라붙었으며, 턱은 배꼽에 파묻혔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았으며, 상투만 달랑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 많이 아파보였으나 마음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로 가서 자신을 비춰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나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모습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습니다. “아니네, 그럴 리가 있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올빼미를 잡아 구워먹겠네. 내 꼬리뼈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따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삶을 얻는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고 그것을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일 뿐이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네. 옛사람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네. 그런데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사물이 자연의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된 진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장자』내편, <대종사(大宗師)>)   이 책의 제목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가 연유한 부분이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호접몽(胡蝶夢)의 구절 못지않게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의 근대철학자 호적(胡適)은 이 부분을 한 마디로 ‘낙천입명(樂天立命)’이라고 비판했다. 낙천입명은 하늘의 명을 따라 즐기고 이에 순응한다는 뜻의 ‘낙천지명(樂天之命)’과 같은...
봄날 2023.09.05 |
조회 165
      페미니즘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아마도 내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애증일 테지만, 나는 한때 주위에 페미니즘을 강매하는(?) 열성도였고, 또 어떤 때는 그 한계를 느끼며 버리고자 했다. 지금은 죽지 않고 다시 또 살아 돌아온 심지어 확장되어 나부끼고 있는 페미니즘의 깃발을 보며 겸손하게 그 부름에 응답하기로 마음먹었다. 페미니즘은 내가 갖거나 버릴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절실한 필요를 느끼며 부여잡고 일종의 인식론, 실천론에 가깝다. 유교를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여성인 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적 맥락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꺾이지 않는 페미니즘에 유교만의 방식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느낀다. 유교와 페미니즘이 결합하는 것은 가능할까?       1. 유교를 구원하던 페미니즘     유교와 페미니즘이라니, 조합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또래 페미니스트들 중에 유교가 우리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이 한국 여성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 원흉이자 여태껏 끈질기게 살아남은 악령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읽어온 페미니즘 책에서는 고대부터 여성들은 차별당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고대 동양 여성들의 삶에 대한 안쓰러운 시각은 오래전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왔다.      초기 프랑스 페미니스트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1974년 <중국 여성에 관하여>에서 한 장의 제목을 ‘공자-여자를 잡아먹는 자’라고 붙이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유교는 서구적 삶의 방식보다 뒤떨어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했다. 마저리 울프에게 유교란 여성 혐오와 동의어였다. “상하이의 젊은이들이 스탠포드대학교 MBA를 취득하고 다국적...
      페미니즘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아마도 내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애증일 테지만, 나는 한때 주위에 페미니즘을 강매하는(?) 열성도였고, 또 어떤 때는 그 한계를 느끼며 버리고자 했다. 지금은 죽지 않고 다시 또 살아 돌아온 심지어 확장되어 나부끼고 있는 페미니즘의 깃발을 보며 겸손하게 그 부름에 응답하기로 마음먹었다. 페미니즘은 내가 갖거나 버릴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절실한 필요를 느끼며 부여잡고 일종의 인식론, 실천론에 가깝다. 유교를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여성인 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적 맥락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꺾이지 않는 페미니즘에 유교만의 방식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느낀다. 유교와 페미니즘이 결합하는 것은 가능할까?       1. 유교를 구원하던 페미니즘     유교와 페미니즘이라니, 조합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또래 페미니스트들 중에 유교가 우리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이 한국 여성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 원흉이자 여태껏 끈질기게 살아남은 악령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읽어온 페미니즘 책에서는 고대부터 여성들은 차별당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고대 동양 여성들의 삶에 대한 안쓰러운 시각은 오래전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왔다.      초기 프랑스 페미니스트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1974년 <중국 여성에 관하여>에서 한 장의 제목을 ‘공자-여자를 잡아먹는 자’라고 붙이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유교는 서구적 삶의 방식보다 뒤떨어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했다. 마저리 울프에게 유교란 여성 혐오와 동의어였다. “상하이의 젊은이들이 스탠포드대학교 MBA를 취득하고 다국적...
고은 2023.09.04 |
조회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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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고응의 『장자』읽기     지난 번 <읽고쓰기 1234>에서 나는, 유소감이 장자의 도를 절대 자유로 풀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에게 장자의 도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각박한 현실과 별개인 “정신적 자유”이다. 정신적 자유가 절대 자유로 풀이되는 이유는 바깥 현실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도의 절대성이란 무조건성, 즉 일개 사물과 달리 도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나는 <읽고쓰기 1234> 시즌1에서 저자 정용선의 해체전략이나 시즌2 유소감의 도의 성질에 대한 풀이까지 모두 장자의 도를 “도가철학”의 흐름 속에서 파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도가철학의 입장에서 장자의 도가 어떻게 절대 자유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노장철학의 대가인 진고응의 『노장신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먼저 『사기』를 통해 노자와 장자의 연관성을 알아보자.   노자와 장자는 어떻게 연결되었나   “태사공은 말한다. 노자가 귀하게 여긴 것은 도로(,) 허무를 추구하였고 변화에 따라 무위로 화하였으므로 지은 책의 말이 미묘하고도 알기 어렵다. 장자는 (유가의) 도덕을 흩어 논조가 방자한데 요점은 또한 자연으로 귀의하였다.” 『사기열전』 연암서가, <노자·한비열전>   장자는 어째서 도가철학으로 분류되었을까. 노자와 장자가 함께 묶인 그 기원을 찾아보자.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에서 장자를 노자의 계승자로 소개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노자와 장자 둘 다 은둔자로 살았다. 노자는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예를 물을 정도로 도덕과 학문에 뛰어났지만, 은둔자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다. 장자 역시 현인이라고 유명세를 떨쳤지만 입신양명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고응의 『장자』읽기     지난 번 <읽고쓰기 1234>에서 나는, 유소감이 장자의 도를 절대 자유로 풀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에게 장자의 도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각박한 현실과 별개인 “정신적 자유”이다. 정신적 자유가 절대 자유로 풀이되는 이유는 바깥 현실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도의 절대성이란 무조건성, 즉 일개 사물과 달리 도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나는 <읽고쓰기 1234> 시즌1에서 저자 정용선의 해체전략이나 시즌2 유소감의 도의 성질에 대한 풀이까지 모두 장자의 도를 “도가철학”의 흐름 속에서 파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도가철학의 입장에서 장자의 도가 어떻게 절대 자유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노장철학의 대가인 진고응의 『노장신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먼저 『사기』를 통해 노자와 장자의 연관성을 알아보자.   노자와 장자는 어떻게 연결되었나   “태사공은 말한다. 노자가 귀하게 여긴 것은 도로(,) 허무를 추구하였고 변화에 따라 무위로 화하였으므로 지은 책의 말이 미묘하고도 알기 어렵다. 장자는 (유가의) 도덕을 흩어 논조가 방자한데 요점은 또한 자연으로 귀의하였다.” 『사기열전』 연암서가, <노자·한비열전>   장자는 어째서 도가철학으로 분류되었을까. 노자와 장자가 함께 묶인 그 기원을 찾아보자.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에서 장자를 노자의 계승자로 소개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노자와 장자 둘 다 은둔자로 살았다. 노자는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예를 물을 정도로 도덕과 학문에 뛰어났지만, 은둔자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다. 장자 역시 현인이라고 유명세를 떨쳤지만 입신양명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울아 2023.09.04 |
조회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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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데이비드 로이,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을 읽고     한 때 인류가 멸종이 된다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 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인간 종이 지구에 행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인류가 생태적 재난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것은 업보일 뿐. 하지만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고 느끼게 된 후로 자주 마음이 아프다. 영화 ‘수라’에서 봤던 아기 쇠제비갈매기의 안부가 궁금한 이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불교 공부 이후부터였던 것은 확실하다.     영화 '수라'에서 어미 쇠제비갈매기와 아기 쇠제비갈매기     불교에서 ‘연기법’과 ‘공성(空)’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지구의 뭇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선수행자이자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데이비드 로이가 우리에게 당면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에코다르마’를 들고나온 이유도 불교적 깨달음의 생태적 시사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코다르마’는 불교 전통이 최근 전개하는 새로운 용어로, 생태적인 관심(eco)에 불교의 가르침과 그에 연관된 영적 전통(dharma)을 결합한 것이다. ‘생태 불교’라고도 할 수 있는 ‘에코다르마’에서는 궁극의 깨달음을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생태 보살’이다.     불교의 위기인가? 아니면 불교의 기회인가?   환경 위기가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 불교 수행자들과 불교단체들은 2010년 후반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생태위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데이비드 로이,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을 읽고     한 때 인류가 멸종이 된다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 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인간 종이 지구에 행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인류가 생태적 재난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것은 업보일 뿐. 하지만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고 느끼게 된 후로 자주 마음이 아프다. 영화 ‘수라’에서 봤던 아기 쇠제비갈매기의 안부가 궁금한 이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불교 공부 이후부터였던 것은 확실하다.     영화 '수라'에서 어미 쇠제비갈매기와 아기 쇠제비갈매기     불교에서 ‘연기법’과 ‘공성(空)’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지구의 뭇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선수행자이자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데이비드 로이가 우리에게 당면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에코다르마’를 들고나온 이유도 불교적 깨달음의 생태적 시사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코다르마’는 불교 전통이 최근 전개하는 새로운 용어로, 생태적인 관심(eco)에 불교의 가르침과 그에 연관된 영적 전통(dharma)을 결합한 것이다. ‘생태 불교’라고도 할 수 있는 ‘에코다르마’에서는 궁극의 깨달음을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생태 보살’이다.     불교의 위기인가? 아니면 불교의 기회인가?   환경 위기가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 불교 수행자들과 불교단체들은 2010년 후반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생태위기에 대한 관심이 별로...
도라지 2023.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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