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자본론-슈톡하우젠 사건

인디언
2018-10-13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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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톡하우젠 사건 - 안전구체에 감싸여있는 예술의 시련


  요즘 독일의 작곡가 칼 하인츠 슈톡하우젠씨를 덮친 재난만큼, 이 시대의 병증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도 없다. 이 사건은 언론보도가 만들어낸 것이고, 그 뒤에도 보도는 현실의 왜곡된 상만 전달하려고 했을 뿐이므로, 우선 사건 경과의 개략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73세인 작곡가 슈톡하우젠씨가 함부르크 공항에 도착한 것은, 지난 2001년 9월 16일 저녁 무렵이었다. 작곡가는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 도로 양쪽에 주욱 붙어있는, 많은 포스터를 보았다. 그 대부분은 투표일이 임박한 이 도시의 시의회선거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에 섞여서 함부르크 음악제의 개최를 알리는 아름다운 포스터도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개최되는 유명한 음악제의 올해 주제는 『외부 공간 WELT-RAUM(우주)』, 백미는 슈톡하우젠씨 작품의 대대적인 연속 연주회였다.

   오케스트라 악단원도 이미 유럽 각지에서 모여들어, 다음날부터는 본격적인 리허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처럼 자신의 작품이 한꺼번에 공연될 기회는 이 현대 음악의 거장에게도 처음 있는 일로, 그날 마련된 기자회견 전에 약간의 흥분을 금치 못했다.

관례적인 기자회견은 예정보다 조금 늦은 6시 15분에 시작되었다. 호텔 애틀랜틱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는 우주 공간의 사진을 아름답게 디자인한 큰 포스터나 프로그램이 몇 장 붙여져 있고, 십수명의 기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질문을 받는 슈톡하우젠씨는 매우 기분 좋아 보였다. 그 남자 ‘북독일 라디오’의 디렉터 J·슐츠라는 그 남자가 질문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기자들의 질문은 이 음악제에 상연이 예정되어 있던 난해한 대작 『LICHT(빛, 작곡가 자신은 이것을 히카리라고 일본어로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시리즈로 옮아갔다. “당신에게 빛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개념입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여, 슈톡하우젠은 우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곡가 “… 그래서 그 이후 이 거대한 작품은 히카리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세계 전체에서 일어난 일이 마침내 연주에 28시간이 걸리는 이 작품 속에 출현했습니다. 물론 거기에 나타난 여러 테마를 이 시간 안에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만, 그것은 음악과 대천사 미카엘의 모습을 통해 듣는 사람의 시간적 의식의 질서에 포착되는 것입니다. 미카엘은 하늘의 신을 위해 이곳 유럽과 독일에서, 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브는 생명의 어머니이고, 루시퍼는 빛의 왕자입니다. 이 둘이 거대한 규모의 세계혁명을, 우주혁명을 일으킵니다. 여전히 슈톡하우젠은 미친거지요…”

기자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회견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화제는 천사로 모아져, 작곡가는 자신에게 천사는 지식이나 교양의 문제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작곡가 “나는 매일 미카엘에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루시퍼에게는 절대 기도하지 않습니다. 루시퍼는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기 때문에 도저히 그런 짓은 할 수 없습니다. 아, 루시퍼는 그 때 (9월 11일) 뉴욕에서도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잠깐 한가한 질문이 이어진 뒤, 돌연 슐츠씨가 끼어들었다.

슐츠씨 “당신은 좀 전에 뉴욕의 사건을 화제로 삼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썼던 글에서 음악은 인류의 조화를 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쓰고 있는데요.”

작곡가 “그렇습니다.”

슐츠씨 “게다가 당신은 뉴욕의 루시퍼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이렇게 이해해도 괜찮습니까?”

작곡가 “괜찮습니다.”

슐츠씨 “당신은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일어난 저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히 앞으로 연주 예정인 작품 속에서 인류의 조화에 대하여 말한 당신은, 저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기에서 슈톡하우젠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작곡가 “그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분 머리를 리셋해주세요... 그 사건은 최대의 아트작품입니다... 나는 루시퍼가 행한 전쟁의 아트, 파괴의 아트의 소름 끼치는 효과에 놀랐습니다.”

슐츠씨 “당신은 이 루시퍼의 아트 작품을 범죄라고 보십니까?”

작곡가 “물론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범죄입니다. 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살해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영적으로 파악하자면 이와 같은 안전으로부터의 일탈, 자명성으로부터의 일탈, 일상생활로부터의 일탈은 때때로 아트 세계에서도 일어나는데, 그런 것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한 것은 비공개(오프더레코드)로 해주세요. 오해받으면 곤란하니까요.(여기에서 기자단은 동의를 표하듯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슈톡하우젠씨는 위험한 질문을 자신에게 들이댄 이 기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어디로 잡아끌려는 겁니까?... 당신은 혹시 음악가입니까?” 슐츠씨는 그런 적도 있다고 대답했다. 작곡가는 조롱하듯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당신이 루시퍼인 게로군요.”

불행하게도 작곡가의 이 예언은 적중하게 된다. 실제로 그 후의 행동을 보면, 슐츠씨는 마치 파괴의 왕자 루시퍼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녹음기를 급하게 조작한 슐츠씨는 보기좋게 목적하는 발언을 테입에 수록하는 데에 성공했다(그 자신도 이렇게 일이 잘 될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북독일 라디오’는 ‘함부르크음악제 기자회견에서 작곡가 슈톡하우젠씨의 입에서 나온 믿기 어려운 비인도적 발언’을 뉴스에서 크게 다루어 방송했다. 게다가 발언의 전후사정을 주도면밀하게 삭제하고 마치 세계무역센터빌딩 사건에 대한 감상을 질문 받은 이 작곡가가 태연하게 “그건 최대의 아트작품입니다”라고 발언한 것처럼, 보기 좋게 조작해서 방송된 것이기 때문에, 그 보도는 슈톡하우젠씨와 함부르크음악제에 바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다음날 아침, 불안감을 안고 리허설 회장에 나타난 슈톡하우젠씨는 (보도를 둘러싸고 골치 아픈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전날 밤에 매니저로부터 듣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잔뜩 찌푸린 못마땅한 얼굴의 주최자로부터 어제 기자회견에서의 발언 탓에 네 차례에 걸쳐 예정되었던 당신의 작품 연주회가 모두 취소되었다고 통고받았다. 그뿐 아니라 사태는 급속하게 악화일로를 걸어서, 몇 시간 뒤에는 함부르크 음악제 자체가 중지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작곡가는, 한 번 더 기자회견을 열어주길 바란다, 그러면 오해를 풀 수 있다고 주최자측에 간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 냉정함의 원인은 주최자측의 대표자가 몇 일 후에 시회 선거에 입후보했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소문이 났다), 바로 그 날 중에 열차로 함부르크시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로부터 슈톡하우젠씨에게는 사회적 공격의 칼날이 차례로 덮쳐왔던 것이다. 독일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그에 대한 공공연한 보이콧을 선언하고 방영이 예정되어 있던 작곡가의 생활과 신조를 말하는 다큐 프로는 갑작스럽게 취소되었다. 슈톡하우젠씨는 매스컴을 통해 몇 번이나 해명을 했다. 그러나 이번 일이 음악 라디오 프로의 한 디렉터의 어두운 기획에 의한 것임은 전후사정으로부터도 명백하고, 그것은 기자회견장에 마침 있었던 다른 회사의 기자들도 실제로 목격했을 터인데도 일반 매스컴은 그것을 다루려 하지 않은 채, 이 세계적 전위 작곡가가 기자회견에서 한 비인도적인 말을 취소하는 발언과 사죄를 했다고만 보도했다. 

  매스컴이 행한 일련의 행동으로부터 정신분석학적으로 추론하면,  슈톡하우젠씨의 (일부의) 발언은 바로 매스컴 자신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것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예술가’라는 사람들의 입을 빌려 그 내용을 말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책임은 모두 ‘예술가’에게 떠넘겨버리는 것으로, 스스로는 사회적 정의의 장소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예전에 음악가를 목표했었다는 이 디렉터는 되지 못한 ‘예술가’로서 슈톡하우젠씨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려고 했고, 그 욕망은 매스컴 자신의 것이기도 했기에, 그들은 그 후 작곡가를 덮쳤던 재해에 대해서도 객관성을 가장한 어딘가 냉정한 태도를 계속 취했다는 것이 본심이지 않을까.

  그런데 이 사건은 현대의 예술이 놓여진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매우 시사적이면서 교훈적인 내용을 품고 있다. 우선 지적해야만 하는 것은 오늘날 양의적으로 생각하거나 양의적 의미를 발언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행위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슈톡하우젠씨는 예술가답게 모든 일을 양의적으로 인식하는 습관이 몸에 붙어있다. 그 사고법에 의하면 빛은 양의적이다. 사물의 내부에 숨겨진 것을 빛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 ‘진리’를 드러내는 사고의 행위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렇게 하여 빛 속으로 끌어낸 것을 계량하고 계산하여 에너지나 유용한 운동으로 변환하는, 기술 행위의 본질도 나타내고 있다. 빛의 대천사가 미카엘과 루시퍼로 분열한 것처럼, 야훼의 것이고 알라의 것이며, 진리와 정의를 구하는 계몽의 빛도 역시 자신의 내부에서 무자비한 파괴력을 가진 존재를 출현시키고 만다. 그것이 루시퍼의 의미이고 세계무역센터빌딩에 돌진한 항공기가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도 또한 양의적이다. 예술은 안전함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보호된 세계에 항상 도전을 준비해왔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루틴으로부터 탈출을 모색하고, 사람들이 사로잡힌 환영의 베일을 찢고 현실을 출현시키려고 하는 일탈적인 모험을 시도해왔다. 예술은 치유와 온화함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는 도발과 파괴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실험정신으로 풍부한, 20세기 유럽 대부분의 격동을 체험해왔던 73세의 예술가의 이러한 양의적 인식으로부터, ‘저것은 예술의 최대 작품입니다’라고 하는 발언이 넘쳐흘렀던 것이다. 예전에는 예술가와 사상가가 일으킨 이러한 양의적인 사고를 허용하고 지성 넘치는 그 발언을 칭찬까지 했던 사회는 이제 그것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저널리즘에 있어서는 풍요로움과 위태로움을 품은 양의적 사고는 최대의 먹이이자 적인 것이다.

   글로벌화되고 있는 지구상의 인류는 오늘날 압도적으로 풍요로운 세계와 압도적으로 가난한 세계로 이분화가 계속되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들이 만드는 세계는 잠재적인 테러리즘의 위협을 떠안으면서, 온갖 조직을 네트워크상으로 이어가면서,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것을 ‘안전구체’ 라고 이름 짓고 있지만, 이 안전구체 내부에는 예술만이 아니라 일체의 양의적 인식이 차츰 생존의 장소를 잃고 있는 것을, 이번의 슈톡하우젠 사건은 명백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풍요로운 세계는 자신들의 생활권을 ‘쾌감원칙’에 따라서 구성하려고 다양한 방책을 강구하고 있다. 자신들의 생활권을 쾌감원칙에 따라서 조직하는 것은, 온갖 생명체가 행하는 것으로, 각별히 인간만이, 오감을 통해서 도입된 감각에서 가능한 불쾌한 요소를 없애려고 노력한다든지, 쾌감적인 환상을 채우기 위해, 굳이 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쾌감획득에 대한 소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물질적인 권력에 관해서 절대적인 힘을 획득했던 ‘제국’에서는, 사람들이 안전한 것에 더할 바 없이 관리되었던 생활권 내부에서, 불쾌한 것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지고, 세련된 여러 가지 쾌감적 ‘문화’를 향수하기 위한 환경이 조절되고, 다른 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생물의 생태인 것이다.

   그러나 쾌감원칙 획득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안전구체의 내부에서 종교는 타락하고 예술은 퇴폐한다. 혹은 의미를 잃는다. 그리고 그 때, 인간 자체가 정체와 퇴폐에 빠지는 것이다. 잘 알려진 이 역사적 사실의 원인을 밝혀내려고 했던 프로이트는 종교와 예술이 쾌감원칙에 맞서고, 쾌감원칙의 피안을 지향했던 활동이라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인간에게는 쾌감을 일으키기는커녕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한 체험이 자기에게 일어난 현장으로 몇 번이라도 되돌아가서 그 현장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강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프로이드는 발견했던 것이다.

   획기적인 『쾌감원칙의 피안』속에서, 프로이트는 유아의 행동을 상세히 관찰하는 것에 의해, ‘문화’ 발생의 원초적 광경을 접하는 감동적인 발견에 이르렀다. 어머니가 외출할 때마다 불안한 표정을 보였던 그 아기가, 집안에서 방에 있는 실패를 주워서 실의 한 끝을 손에 쥔 채 멀리 던지고는 ‘없다’라고 소리치고, 그런 뒤 실을 잡아 당겨 실패를 다시 손에 쥐고는 환희에 차서 ‘있다’라고 외쳤다. 이 동작은 몇 번이고 반복되고 그 때마다 아기의 표정에는 만족과 뭔가를 정복했다는 충실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로부터 다음과 같이 추리했다. 어머니의 부재와 같이 참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체험을, 쾌감원칙은 가능한 한 멀리 떼어 두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아기는 그 고통을 일으키는 체험을, 실패를 이용한 행동에 의해 상징화하고 그 고통의 현장으로 몇 번이고 되돌아오는 것이다. 아기는 이 때, 쾌감 원칙에 반한 행동을 하고 있다. 굳이 자신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체험의 현장에 상징화의 도구를 손에 쥐고 되돌아와, 그 상황을 자력으로 극복하려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프로이트가 행한 관찰은, 실은 심원한 의미를 품고 있다. 우선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진실한 대상이 상실되어 부재할 때, 그로부터 가능한 틈을 상징의 작동으로 보충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언어를 시작으로 하여 모든 상징화를 위한 도구가 욕망의 대상을 결정적으로 잃어버렸다는 현실인식과 안팎을 이루며 형성된 것이다. 이 상징화의 도구를 손에 넣고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사랑의 대상이 결정적으로 상실된 현장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고통과 불쾌감으로 가득한 상실의 체험을 통과하여 처음으로 인간은 언어를 손에 넣어 상징화의 도구를 얻게 된다. 쾌감원칙에 따르는 한은, 고통과 불쾌로 가득한 현실에 굳이 직면하여 그것을 극복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지만, 언어를 재잘거리는, 인간이라는 영장류는 자신을 구성하는 조건이, 분명 불쾌함과 고통을 초래하는 상실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쾌감에 저항해서라도 그 피안으로 향하려고 한, 몇 안되는 생물인 것이다.

   종교는 다양한 의례와 신화를 통해 그 결정적 현장의 광경을 기념하려고 해왔다. 온갖 ‘성스러운 것’이 장려한 아름다움으로 스스로를 빛나게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무시무시하게도 불쾌한 심연의 어두움을 들여다보게 한다. 상징화의 능력 그 자체는 시각에 쾌감을 주는 아름다움으로 승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능력이 발생하는 원초적 장면에서는, 그것은 아무리해도 쾌감 원칙에 의해 개조하는 것이 불가능한, 바닥없는 공간에 닿아 있다. 이렇게 해서 종교는 ‘문화’에 소속되어 있음과 동시에 ‘문화’에 저항하면서 ‘문화’의 피안에도 닿으려 해왔다. 종교야말로 양의성의 최대 저장고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는, 너무나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는 안전구체의 내부에서는 스스로의 진실을 사는 것이 불가능한 운명이다. 물론 세간에서는, 안전구체의 내부야말로 다양한 형태의 종교가 번성하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는 쾌감원칙에 종속된 순간, 아니 거기에 접한 순간 그저 다른 것으로 변질된다. 이 별종의 것의 활동에 부여되어야 하는 적당한 명칭을, 우리는 빠뜨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오래도록 우리의 세계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해 온 것이다.

   과거의 종교가 수행했던, 괘감원칙의 피안에 접촉하려는 기능이 상실된 세계에서, 그 기능을 대행해온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야기된 것이다. 서구에서 그 경향이 나타난 것은 17세기부터였지만,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모던 예술’에서 그 경향은 정점에 이르렀다.

   조화로운 형태비율이나 색채배색은 우리들 안에서 쾌감을 만들어낸다. 예정조화적인 화성이 있어야 비로소 음악으로부터 기쁨과 쾌감이 발생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빈이라는 안전구체의 내부에서 창조된 하나의 신비로서, 아폴론의 미를 가득 채운다. 예술은 그 세계에서는 틀림없는 ‘문화’이고, 과거 종교가 수행했던, 이제는 잃어버린 기능을, 세속화한 사회에서 대행한 것이, ‘고전적’이라고 불렸던 위대한 예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던예술에 있어서는 쾌감원칙의 내부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술이 과거 종교가 수행한 역할의 전부를 계승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대체물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던 예술은 여기서부터 쾌감원칙의 피안을 지향하게 되었다. 화성, 색체, 형태에 있어서, 일체의 예정조화를 극복하고 예술에서 인간의 상징능력발생의 현장을 재현하는 능력을 되찾는 것. 불쾌함이나 폭력성, 고통, 두려움의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카오스의 가운데로 몸을 날려, 과거의 예술이 실현했던 것이 아닌, 새로운 ‘미’를 끄집어낸 것이다. 모던 예술은 실패를 허공을 향해 던지는, 저 프로이트의 아이를 방불케하는, 쾌감원칙을 넘어서는 모험을, 자신의 사명으로 했던 것이다.

   20세기의 정치적 동요가 이러한 모던예술의 야심에 양분을 공급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그 후의 냉전체제 속에서 커다란 규모로 안전구체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곤란했고, 이상적인 안전구체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된 미국에서조차 60년대 이후는 내부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조화를 깨뜨리는 힘에 의해 끊임없는 동요와 국소적인 파괴를 피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쾌감원칙의 피안에 접촉하려는 모던예술에서 아트는, 매우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환상에 의지하여,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 몸에 걸맞지 않을 정도의 높은 상품가치를 얻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백 년 동안 계속된 모던예술의 번영에 사실상의 종지부를 찍었다. 초대국은 이제 하나 뿐. 거기에는 발달한 테크놀로지를 구사하여 일찍이 한 번도 지구상에서 실현되지 못했던 안전구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 내부에서는 안전구체의 자기동일성을 동요시키는, 안팎의 교란요인은 가능한 한 배제될 것이다. 안전 기준은 동일성과 단순화와 안정성을 우선 첫 번째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양의성이다. 쾌감원칙의 내부에서 모든 일이 진척해간다면, 구태여 특별히 내세워 죽음의 욕동에 접촉해가는 양의성 같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재잘거리고, 상징화의 능력에 의해 살아가는 인간은 이렇게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죽음의 욕동이 밀려오는 물가에 접촉한다. 그런데 안전구체를 완성시키려는 정치적 사고는 이러한 진실을 볼 수 없게 하는 방법을 발달시켜 왔다. 감각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깨뜨리고 쾌감원칙을 넘어서려는 모던예술은, 이러한 세계에서는 지금까지처럼 안심할 수 있는 거처를 얻기는 어렵게 되었다.

   하물며 그 안전구체가 테러리즘의 위협에 노출되었을 때, 양의적인 사고에 대한 불신이 이번 슈톡하우젠 사건 같은 형태로 단숨에 분출하게 된 것이다. 슐츠씨는 한 사람이 아니다. 매우 많은 수의 보이지 않는 슐츠씨들이, 쾌감원칙의 외부를 지향하려는 자들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안전구체에 감싸여있는 예술은 이후 점차 이중언어의 사용에 숙달할 필요를 강요당하지 않을까. 진의를 결코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표현함으로써 감춘다. 이러한 이중언어적 사고에 의해 절반은 영웅적이기조차했던 양의적 사고에 의한 예술을 넘어설 수 없는 한, 슈톡하우젠씨를 덮친 재해는 내일은 우리들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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