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자본론-녹색자본론(3)
띠우
2018-08-17 20:37
259
2. 이자(이윤)를 부정하는 이슬람
원리에 있어 일신교에서는 ‘기호’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여겨진다. ‘나는 있다. 나는 있음이라고 하는 자다’(『율법서』). 자신을 ‘나’라고 말하는 신은 존재와 일체이고 존재 그 자체이다. 이 ‘있다’란 우리가 보통 현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구성하는, 온갖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일신교의 원리에서는 상징계(신의 로고스)와 현실계는 일체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조금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바람의 살랑거림, 동물의 한숨, 빛의 떨림, 떠오르는 수증기, 목소리, 시선, 말 등, 무릇 이 세계에 있는 것 모두가 신의 로고스의 직접적인 표현이고, 현실계는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신의 로고스인 상징계에 가득차서, 상징계의 활동을 수행한다. 이 신의 로고스의 활동과 닮은 것이 인간의 언어·상징활동이고 거기서는 다양한 종류의 ‘기호’가 이용되고 있다.
이 원리적인 사고에 따르면, ‘기호’의 본래의 존재방식이란, 상징계와 현실계를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결합한 것이어야만 한다. ‘기호’는 항상 한편에서는 신의 로고스가 임하는 것에 닿고(나뭇가지들의 끝을 바람이 지나간 순간에 거기에서 신의 로고스의 섬세한 직접표현을 감지하는 정신상태라고 말하면 좋을까), 또 한편에서는 그 신의 말씀이 직접표현된 것인 현실이 ‘부풀림’도 ‘줄어듦’도 되지 않은 곧이곧대로 존재에 단단히 결부되어야만 한다. ‘기호’는 상징계와 현실계의 직접적인 경첩인 셈이므로,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멋대로 기호가 자기증식한다든가, 혹은 현실의 아름다움을 질투하여 일부러 자기위축한다든가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또한 쾌감원칙에 지배받기 쉬운 상상계의 개입에 의해 상징계의 로고스의 작동이 일그러뜨려진다든가, 저해된다든가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은 일상 생활 속에서 여러 종류의 ‘기호’를 사용하면서 거짓말을 한다든가(경첩의 형태를 멋대로 바꿔 만들어서 현실을 일그러뜨려 버린다), 일부러 남의 마음을 끌려고 한다든가 (상상계의 과잉인 활동을 끌어들인다), 타인과 다른 사회를 매도한다든가 (분노 때문에 온갖 ‘타자’가 신의 말씀의 표현인 것을 일시적으로 잊어버린다) 하는 것을, 자신에게 금지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생활의 모든 장면에서 인간은 신의 말씀으로 관통되는 윤리를 살아야만 한다.
이렇게 사고하는 일신교는, 대개 상상계의 작동에 대해서는 경계한다. 상상계에서 해방된 신의 말씀의 표현자(그것을 구조주의에 경의를 표하여 ‘시니피앙’이라고 불러보자. 덧붙여 레비스트로스에게 ‘구조’의 개념은 스피노자에 의해 근본적으로 변경된 일신교의 ‘있음’의 사고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며, 라캉의 그것은 카톨릭화된 일신교 그 자체이다)가 상징계의 규칙의 손아귀를 용케 피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서로 자유롭게 결합을 행하고 멋대로 출산하고 (이때 시니피앙의 자기증식이 일어난다), 태어난 아이들을 곁에 두고 떼어 놓지 않는다(아버지인 상징계의 말씀의 손에 건네져서 할례를 받게 되는 것을 싫어해서 상상계에 아이를 남겨둔다)는 꺼림칙한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상계의 작동이 현실계와 결부되고 비대화할 때에는, 저 농경사회의 우상숭배가 발생해 간다. 우상숭배자들은, 아이를 진실한 어른으로 만들수 없다. 어른이란 엄격하 윤리적 결의를 가지고, 상징계와 현실계의 직접적인 일체 상태를 이겨내고, 신의 로고스를 살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 어른은 쾌감원칙을 부정할 수 있는 의지를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상숭배적 사회의 사람들은, 쾌감 원칙에 따라서 기분좋게 만들어졌던 상상계의 시니피앙을, 자신들의 신으로 가치로 숭상하는 것에 의해서, 혼에 가해진 할례의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것이다.
우상숭배적 사회는 자유인 것과 많은 증식하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두고 있다. 그 때문에 거기에서는, 상징계(신의 로고스이고 아버지의 로고스인 것)의 권능을 빼앗고, 쾌감원칙적인 상상계의 작동을 기초로 하는 사회를 구성하려고 해왔다. 금송아지상은, 일신교 신민의 아이들의 혼조차, 손쉽게 더럽혀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현대를 특징짓는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이라는, 상징계의 권능의 박탈로부터 생겨난 사태는, 바로 일신교 신민사이에서 발생하고, 눈깜짝할 사이에 지구 대규모로 확대되었던 것이지만, 단지 이슬람만이 이 사태를 병으로써 진단하고, 일신교의 사고에 따르는 우리들은, 상징계와 현실계의 직접적 일치의 원리를 지켜야만 하지않는가, 라고 다른 일신교 신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신교적 기호론에서, 독특한 화폐론·이자론·자본론이 생겨난다. 이것을, 일신교적 기호론의 사고가 애초에 순수한 형태로 실천되었던 이슬람을 예로 해서, 설명해보자. 우선 화폐란, 일신교적으로 이해되었던 ‘기호’여만 한다. 즉 그것은, 상징계와 현실계를 직접성에서 연결이음매로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늘 현물과의 대응관계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화폐는 단적으로 말해서, 물의 대용이어야만 하는 것이다――이스람은 ‘원리에 대해서는’ 실제로 이렇게 사고한다.
이러한 직접성을 유지하는 것이 극히 곤란한 것은, 이슬람 자신이 잘 이해하고 있다. 화폐가 물의 대용이고 ‘교환’이라는 상징계의 행위를 성립시키는 로고스가 직접적으로 현실적인 물과 관계맺고 있는 안에서는, 팔사람과 살 사람 사이에 결정적인 구별이 발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상적인 일신교적 경제세계에서는, 파는 것 없이는 사는 것은 없고, 사는 사람은 동시에 파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이를 움직이는 화폐가 자립한 시니피앙으로서의 활동을 일으키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화폐는 물건에 대한 시니피앙으로서의, 즉 물건에 대하여 표현자로서의 위치를 즉각 획득한다. 이때, 파는 쪽과 사는 쪽 사이에는 결정적인 분리가 일어난다. 파는 쪽은 물건의 소유자이다. 이에 대하여, 화폐를 지불하는 사람이 사는 쪽이 된다. 화폐가 교환과정에서 시니피앙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그 순간 ‘지연’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 구매를 매각으로부터 지연시켜, 파는 쪽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지연을 이용하게 된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다른 물건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물건의 일반적 대용물(즉 유동적인 자유 시니피앙)’으로서의 화폐를 보다 많이 획득하기 위해, 화폐는 자신의 내부에 숨겨두었던 가공할만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신의 말을 ‘직접’ 돌의 표면에 새겨 넣은 율법 석판을 껴안고 산을 내려온 모세를 놀라게 하고, 분노가 치밀게 했던 황금 송아지 상으로, 화폐는 어떤 장해도 없이 변신을 이룬 것이, 매우 간단히 되어버린 것이다.
화폐가 상징계와 현실계를 직접성으로 이어주는 경첩으로서의 작용을 이탈하고, 황금송아지 상으로 변신을 이루어 버린 후에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될 것인가. 이슬람권 최고의 지성 중 한사람이었던 무하마드 바킬즈 세도르는 <이슬람 경제론>에서 그 양상을 마르크스에 보다 유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 후에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경제적 강자만이 화폐가 제공하는 이 기회를 내것으로 하고, 전력을 다해서 축재를 위한 판매로 달려가고, 사회 내부에 유통하는 화폐를 자신의 보물창고에 모아서 쌓아놓기 위해, 생산, 판매를 계속한다. 그들은 서서히 유통하는 화폐를 흡수하고, 생산과 소비의 매개로서의 교환이 가진 역할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많은 대중을 비참과 빈곤의 늪으로 전락시켜버린다. 그 결과 생산 활동이 마비됨과 동시에, 사람들의 경제적 수준의 저하와 구매력의 결여가 원인이 되어, 소비도 정체한다. 소비자의 구매능력의 결여, 저하는 생산으로부터 이윤을 빼앗고, 정체를 경제생활의 전 부문으로 퍼지게 한다.
그러나 저 신과 같은 준엄한 모세조차 백성이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풍요의 제사를 벌이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그 때 모세에게 가능했던 것을 말하자면, 일신교 원리적 사고에 따르는 윤리적 결의를 가진 자들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백성을 학살해 버린 것이지만 그 해결법을 후대에 유대교도도 이슬람도 좋다고 하지 않았다. 화폐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는 이슬람도 크게 괴롭혔다. 더구나 예언자 무함마드는 상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것도 아주 유능한 상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화폐의 마력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무함마드에 의해 창출된 이슬람운동은 화폐의 마력에 대항하여 상상계에 대해 사상계의 절대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일종의 「분자혁명」방법을 채용했던 것이다. 화폐가 자율적인 시니피앙으로써 자기 증식 활동을 시작하게 하는 미시적 현장에 발을 들이고 증식으로의 드라이브를 싹부터 잘라버리는 방법, 즉 다시 말해 「이자금지」 이다. 이슬람은 (그 원리에서) 일체의 타협 없이 이자를 엄금하고 있다. 그 규정은 『꾸란』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유래한다.
이자를 탐하는 자는 악마에게 씌여 넘어진 사람이 하는 것처럼 일어나는 것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상업은 이자를 취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라는 상업을 허락하고, 이자(고리)를 금지하셨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훈계가 내려온 후, 그만두는 자는 과거의 일은 용서될 것이다.
그의 일은 알라(의 수중)에 있다.
그러나 (그의 잘못을) 반복하는 자는 지옥의 주민으로 떨어지고, 그들은 영원히 그 안에서 살게 된다. (암소장 2, 275)
너희들 믿는 자는, (참된) 신자라면 알라를 경외하고, 이자 잔액을 장부에서 지워버리시오.
만약 너희들이 그것을 (방기)하지 않는다면, 알라와 그 사도로부터 전쟁이 선고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회개한다면, 너희들의 원금은 회수될 수 있다.
(사람들을) 부당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면, 너희들도 부당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암소장 2, 278~279)
화폐가 화폐를 낳는 것을 이들 규정은 금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신교적 사고에 의하면 (상징계와 현실계의 경첩으로서) 화폐는 사물의 대용물로서 교환의 장에 투입되어, 이상적으로는 즉시 다른 교환의 장소에 가지고 가서 다른 교환유통을 발생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화폐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경우에 빌려준 쪽의 불안에 대한 보증이든, 빌려준 화폐가 빌린 쪽의 수중에 있는 사이에 벌어들일지도 모르는 금액을 보증하기 위해서이든, 교환의 장을 일시적으로 빠져나간 화폐가 일종의 자율적인 시니피앙이 되어, 조용하게 자기증식을 하고, 그 증식분이 ‘이자’로서 빌려준 쪽으로 굴러들어오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이자·이윤이 대량으로 환전상인들에게 흘러들어가게 될 때, 자본주의 형성의 운동이 개시된다. 이슬람은 이자·이윤의 발생을 ‘분자수준’에서 컨트롤하는 것에 의해 자본주의라는 황금 송아지상 주위에서 경제활동이 확장되어, 폭발적으로 전개되어 돌입하는 것을, 발생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계속 감시하는 것에 의해 막아내려고 시도해 왔다.
(…) 이슬람은 어떠한 타협도 용인하지 않고 이자를 엄금하고 있다. 이는 분배의 장에서의 위험한 이윤과 그에 따라 초래되는 나쁜 결과인 경제 전반의 불균형을 제거한다. 그리고 전적으로 화폐로부터 부를 증대시키는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박탈하고 화폐본래의 역할, 즉 사물에 대한 일반적 대용성과 사물의 가치산정의 기준으로써 그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회복시킨다.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 살며 그 여러 형태에 익숙해진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자나 이윤의 폐지는 은행 및 금융업의 폐지를 의미한다. 또 경제체제의 활동을 중단시켜 은행 등의 기관이 제공하는 이 체제의 근육과 혈관의 기능을 마비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은행이 경제생활에 수행하는 실제 역할과, 이슬람 경제제도가 이자나 이윤의 폐지에 의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정하는지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의 억측에 불과하다. (이슬람 경제론, ムハンマド・バーキルッ=サドル, 黒田 寿郎 訳, 未知谷, 1993)
여기서부터 ‘무이자은행(※각주1)’의 시도를 필두로, 이슬람 특유의 몇 가지 흥미로운 실험이 시도되게 되었다. 원리적으로 일신교는 상징계에 결정적인 우위를 부여하는 그 기호론에 따라 화폐가 화폐를 낳는 것, 시니피앙이 (아버지 없이 처녀잉태 내지 자기증식에 의해)시니피앙을 낳는 것을 부정한다. 유대교는 파생하는 이자・이윤의 금지에 관한 규정을 같은 유대민족에게만 적용하고 동족이나 같은 친족으로부터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한 대신, 이교도나 이민족에게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징수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은 이자를 ‘법’으로 엄금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인 모든 지역에 적용했지만, 이교도나 다신교도에게 적극적으로 이자를 징수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고로는 무릇 인류가 있는 곳, 모든 지역에서 이자를 거두는 일은 악이다. 인류는 ‘하나(一)’의 표현으로써 모든 개인이 평등하기 때문에 개인이 행하는 활동의 현장에는 보편적으로 일신교적 기호론(이는 나중에 더 정확하게 ‘타우히드 화폐론’ 이라고 바꿔 말하게 될 것임)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의 세계에서도 원리적인 것을 말하자면 사정은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들은 『꾸란』은 존중하지 않았지만, 무하마드의 계시가 의거하고 있는 『구약성서』에도 실은 이렇게 적혀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동포에게 네 곁에 있는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줄 경우, 그에게 고리대같은 대접을 해서는 안된다. 그로부터 이자를 받아서는 않된다. (출애굽기 22: 25)
너희와 함께 있는 어떤 형제가 곤궁하고 너희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을 때는, 이방인이나 체류객(거류민)을 돕는 것처럼 그 사람을 돕고, 함께 생활하게 해야 한다. 일을 시켜서도 이자를 받아서도 안 된다.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너희 형제를 너희와 함께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자를 받아내려고 돈을 꾸어주어서도 안 되고, 이득을 취하려고 양식을 주어서도 안 된다.(레위기 25: 35-37)
이 ‘레위기’의 마지막 문장은 중세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번역 성서(불가타 성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그에게 우스라(Usura)를 목적으로 돈을 빌려줘서는 안 되고, 또 과잉의 식량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나오는 ‘우스라’라는 말이다. 이 말은 단수형으로는 문자 그대로 ‘고리’를 의미한다. 『구약성서』의 우스라 금지의 율법에는 이스라엘이 아직 하베루(불량배)를 형성하는 새로운 타입의 공동체로서 주위의 적의에 둘러싸여 있던 시대에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에 균열을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 이자가 붙은 대차를 금지했다고 하는 사회학적인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에서 더 이상 그러한 새로운 타입의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12세기의 유럽에서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이 경제활동 때문에 고리대 금융업의 활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즈라 공주의 등장이, 사회의 근저로부터 구해졌다. 중세의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탄생을 알리려고 하였다. 경제활동의 활발화에 따라, 교회의 슬하에서도 그리스도 교도의 고리대에 의해서, 공공연히 고리를 걸고 돈을 빌리는 활동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교회는 그것을 묵과할 수 없는 행위로써, 몇 번이나 금지하려고 하고, 우스라의 시비를 둘러싼 대논쟁이, 12세기 중간부터 격렬하게 전개되었지는 것이 된다. 이 논쟁에는, 당시 유명한 신학자와 교회법학자들도 동원되었다.
신학자들이 펼쳤던 ‘우스라 반대’의 논쟁은, 이스람 세계의 이자 금지론의 경우와 같은 일신교적 기호론에 의해서 무장되었던 것이 아니라, 주로 ‘돈은 돈을 낳을 수 없다’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에서부터 고무되었던 것이,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돈이나 자본이 생산성을 가진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새끼를 치는 것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고 하는 이유로, 우스라를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화폐는······ 주로 교환을 목적으로써 발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화폐 본래의 제1의 용도는 교환에서 지출 소비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금리의 이용에서 대가를 받는 것은, 그것 자체로써 부정하다. 거기에 우스라=고리가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금은 그 본성으로부터 말하면 비생산적이므로, 금으로부터 이자가 생길리 없다는 ‘자연주의적인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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