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부루쓰 3탄] 파지사유 커피는 맛이 없다

히말라야
2019-03-07 18:37
437

나는 커피중독자다.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들에게 고기 중독자라느니 게임 중독자라느니 함부로 비난한다. 사실 아무리 고기를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하더라도 아침에 눈뜨자마자 고기를 먹고 싶다거나 게임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침에 눈을 뜨는 이유가, 진실로, 오늘도 또 한 잔의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마실 수 있는 커피는 하루에 단 한 잔이다. 두 잔이 들어가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관이 벌렁거리며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토록 사랑하는 커피를 하루에 딱 한 잔 밖에는 마실 수가 없다. 어쩌면 이렇게 내게 제한되어 있기에 더 커피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단 한 잔 밖에 허락되지 않기에, 나는 아무 커피를 아무렇게나 마시지 않는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주방으로 가서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커피알을 분쇄기에 넣은 후에 다소곳이 앉아,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인 양 경건한 마음으로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갈아낸다. 뜨거운 물이 드리퍼를 통과해서 커피가 되어 떨어질 때, 나는 정말로, 살아있어서 참 좋구나 생각한다.




이제 슬슬 노화가 시작된 어느 날부턴가 눈이 마르고 아파서 커피를 끊어보려고도 했다. 내 사주에 물이 부족하니 몸 속의 물을 말리는 커피를 마시면 안 좋다는 모 선생님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눈이 아파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읽을 수가 없으니, 나는 당장에 커피를 끊었다. 그 몇 개월 간, 눈 상태는 나아졌는데, 좋아하는 책을 읽는 나 자신은 뭔가 좋지가 않았다. 그 때 깨달았다. 아, 나는 책읽기만 아주 좋아하는게 아니라,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는 것도 아주 아주 아주 좋아하는 거였구나. 그 뒤로는 하루에 딱 한잔의 커피를 마시고, 쌍화차와 사물탕 같은 몸에 좋은 것들도 열심히 마시는 것으로 정책을 바꿨다. 그러니 삶이 훨씬 더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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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커피중독자인 나는, 고백컨데, 파지사유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말은 안했지만, 예전부터 모카포트나 드립으로 커피를 내려마시던 나는, 문탁에 처음 왔을 때부터 파지사유 커피가 정말 맛이 없었다. 그러나 내 입에 맛이 없다고 모두에게 맛이 없는 것은 아닐터. 다른 선생님들은 파지사유 커피가 다른 곳보다 맛있다며 잘도 마셔댔다. 그래서 나는 커피가 맛없다는 말로 초를 치는 대신에, 얌전히 다른 차를 마시거나 꼭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우유를 탄 라떼로 마셨다. 맛있는 커피는 내가 알아서 마시면 되니깐 말이다.




그런데 내가 큐레이터 활동을 시작한 뒤로 ‘파지사유 커피가 맛 없다’는, 내가 혼자서만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그 소리가 이제 내 귀에 자주 들려온다. 내가 큐레이터 직을 안 맡고 있었다면 파지사유 커피가 맛이 없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을 안 썼으리라. 그러나 내 직함은 나로 하여금 그런 말들에 신경을 쓰게 하고 내 머릿속을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그런 와중에 몇 년 전, 내게 파지사유 커피가 맛없다는 말을 안하게 했던 아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사건이 떠올랐다.


문탁에 온지 얼마 안된 어떤 회의시간이었는데, 어떤 선생님께서 노라찬방의 반찬이 자기는 맛이 없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보다 좀 더 고결한 인격을 가진 것 같아 보이는 다른 선생님께서 ‘누가  만들었는지 알면 맛이 없을 수가 없다’고 답했다. 나는 그 때 ‘누가 만들었는지 알면 맛있다’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다른 많은 일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만 잊고 말았었다.




지금에야 그 말이 다시 내게 돌아와 질문을 던진다. 나는 파지사유 커피는 파지사유라는 공유지 유지를 위해 무조건 마셔야 하는 것이라고, 특히나 큐레이터를 맡은 후에는 더욱 당연히 그렇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예전에 내가 듣고 의문을 가졌던 ‘친구가 만든 반찬은 무조건 맛있다’는 논리와 같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 앞에서는 맛없다고 말하면 마치 친구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들어, 더 이상 각자 느끼는 커피의 맛에 대해 말할 여지를 삭제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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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맛이란, 그리 믿을만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언젠가부터는 나도 줄곧 ‘음식은 맛으로 먹는게 아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왔다. 건강하게 살려는 사람은 맛있는 것만 먹으려 해서는 안되고, 또 사람이 맛있는 것만 먹으면서 살 필요도 없다. 맛이란 우리 머릿속의 관념에 불과하고, 신체가 길들여진 습관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건강한 맛을 포함하여 다양한 맛을 구분할 수 있고, 더 많은 다양한 맛을 알수록 맛들을 더 잘 구분할 수 있다. 만약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파지사유 커피만 마셔왔다면 나는 그냥 이게 제일 맛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다른 더 맛있는 커피를 맛보았다.




맛이란 관념이다. 그러나 우리 머리 속의 관념은 그냥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신체변용에 따른 관념들이다. 신체가 미세하게 느낄수록 우리 정신 속의 관념들 또한 미세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맛 볼수록 더 많은 맛을 구별할 줄 알고,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하며, 맛없는 것보다는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더 행복함을 느끼는 존재다. 스피노자 선생에 따르면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더 맛있는 것을 알고 먹을 수 있는 이에게 더 맛없는 것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쩌면, ‘네가 느끼는 대로 존재하지 말라’는 모욕적인 명령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 파지사유에 다른 커피전문점의 커피를 사들고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이 계시다. 혹은 그렇게 들고 들어오는게 미안해서 밖에서 다 마신 뒤에 들어오는 사려깊은 선생님들도 계시다. 파지사유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더 맛있는 커피가 수두룩한데, 공유지의 유지를 위해 파지사유커피를 마시라고 강요하는게 커피 맛을 알고 따지는 내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어떤 선생님은 본인이 좋아하는 커피를 가져와서 마시면서, 파지사유의 운영을 위해 그냥 커피값에 해당하는 돈을 금고에 넣어주시기도 한다. 그렇지만 파지사유 커피가 맛없다는 모든 선생님들께 이 분을 본받으라 강요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면 ‘나’에게 잃어버렸던 시간들을 되찾아 주는 것은 홍차 한 잔이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예전의 풍경과 사건들이 그 때와 같은 차를 맛보는 순간, “다시금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고 솟아나왔다”고 한다. 요즘 재밌게 읽고 있는 중인데, 같이 읽어보고도 싶고 잘난 척도 할 겸 인용해본다. (내 맘대로 줄바꿈 했음)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충실한


 냄새와 맛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해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jpg





책 속의 ‘나’는 냄새와 맛이 비물질적이라고 썼지만, 사실 냄새와 맛은 우리 신체 어딘가에 새겨진 물질적인 것일테다. 신체에 새겨진 냄새와 맛이 서로 다른 시공간을 어느 날 다시금 차 한잔의 맛과 냄새로 아주 견고하게 연결시킨다. 파지사유커피의 맛도 그렇지 않을까. 단지 현재와 미래와 같은 다른 시공간 뿐만 아니라, 지금 파지사유를 드나드는 서로 다른 신체들도  연결하고 있지 않을까.




스피노자 선생은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는 ‘결합에 대한 관념’을 공통관념이라고 불렀다. 그는 공통관념이 명백한 진리라거나 옳은 것이라 말하지 않고 단지 ‘적합하고 타당하다’고 한다. 나는 파지사유커피가 맛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로 다른 두 신체에게 ‘적합하고 타당한’ 관념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 것일까 새삼스레 생각해본다. 한 사람은 맛있다 하고 다른 사람은 맛이 없다고 할 때, 어떤 게 파지사유 커피에 대한 적합한 관념인가? 서로 다르게 맛을 느끼는 두 사람은 과연 그 맛에 관하여 어떤 관념으로 하나의 신체처럼 연결될 수 있을까?




스피노자 선생에 따르면 심신은 평행하고, 관념과 신체는 함께 변한다. 파지사유 커피가 맛있다는 생각이 들 때 진짜로 내 신체도 그 커피가 맛있을 것이고, 신체가 맛있다고 느낄 때 정신도 맛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신체가 변하지 않은 채, 혼자서만 맛있다고 ‘생각하는 정신’은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친구가 만드는 음식이 무조건 정말로 맛있으려면, 그 친구와 나 사이에 맛에 대한, 음식에 대한, 우정에 대한,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끊임없이 오고 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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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 급한대로 우선 파지사유에 드립커피를 손에 잘 닿는 곳에 준비했다. 머신 커피보다 수고로운 대신에, 커피 자체를 그리고 함께 마시는 친구와의 시간을 덜 소외시킨다. 바쁜 와중에 잠시라도 그 앞에 모여 앉아, 파지사유 커피의 맛에 관한 서로의 관념들을 교차시켜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과연 어떤 커피가 맛있는 것인지, 파지사유가 계속 운영되기 위해 맛없는 커피라도 계속 많이 마셔야 하는지, 아니면 파지사유 운영을 위해서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 내야 하는지, 맛있는 커피란 무엇인지, 파지사유란 무엇인지….



댓글 5
  • 2019-03-07 19:15

    아..히말라야가 이렇게나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구나!

    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네. ^^

    요즘 나도 파지사유에 오면 드르륵 드르륵 커피를 내려서 마시는데,

    커피가 갈아지는 소리도 참 좋고, 커피를 내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니까 더 좋은 듯.

    추신) 큐레이터에서 프루스트 같이 읽어보자니까. ㅎㅎㅎ

  • 2019-03-07 21:35

    앗! 저는 도라지한테 원두커피를 선물받게 돼서 집에서 드립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어요.

    커피가 내려오는 짧은 시간도 잘 기다리지 못하는 내 성질머리를 

    주저앉히려 마음수련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마시고~

    올해 제 모토입니다

    -인문약방팀

  • 2019-03-07 22:17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시고,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처지의 저는

    그 맛없다는 파지 커피를 맛보고 싶네요 ㅋㅋ

    큐레이터께서 이렇게 신경을 쓰시니 곧 맛있어지겠지요^^

  • 2019-03-08 06:52

    執大象하면 天下往하니          / 큰 '도'를 잡고 있음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돌아온다. 


    往而不害하면 安平大하리라   / 돌아와도 서로 해치지 않으니 그래서 모두 평화롭고 태평하다
    樂與餌는 過客止어니와          /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사람을 멈추게 할 수 있다.
    道之出口면 乎其無味하며  /그러나 '도'를 나타내면, 오히려 맛이 없을 정도로 담담하며,
    視之不足見이요 聽之不足聞이나 用之不足旣니라 / 그것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그것을 써도 다 쓸 수가 없다.   <노자, 35장>

    동양고전을 읽다보면..........'深味'.........'味'..........'無味'.......같은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한참을 그 단어 앞에서 서성거리게 되죠^^

  • 2019-03-13 10:35

    히말라야샘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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