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부루쓰) 오른손엔 식칼, 왼손엔 쟁반!

날리히말
2018-12-27 11:51
493


많은 학자들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유에 대해 서로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오만가지 일들을 한 사람이 전부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갖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면서 사는게 더 좋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 만든 빵이 이웃에게는 일용한 양식이라는 선이 된다.” 아담 스미스씨는 그렇게 말했다지.

그러나 그런 학자들의 말과는 전혀 반대로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내가 하기 싫어하던 일, 더군다나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일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살다보니 어쩌다가 결혼해서 엄마라는 것이 된 집에서도 그렇고, 지금 이 곳 문탁이라는 인문학공동체 안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날도 그랬다. 문탁의 파지사유는 명색이 공유지다. “공유지의 주인은 공유지를 오가는 우리 모두이고, 공유지의 물건들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친구들과 웃으며 이런 슬로건을 외쳐대지만, 평상시 내게 공유지의 물건은 그냥 공유지에 있는 물건으로만 보인다. 집에 있는 냉장고도 내 것이 아니라 여기는 나이니, 그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그래서 평상시 성애가 잔뜩 낀 냉동고를 보면서도 손가락으로 살살 성애를 피해서 삐그덕거리는 서랍을 열어 얼음을 넣어두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성애가 잔뜩 끼어있는 냉동고를 연 순간, 마치 냉동고와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주저함도 생각도 없이, 자동적으로 ‘성애제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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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으로 그 버튼을 누른 나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자못 흥미진진하게 냉동고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지구온난화로 녹아내리고 있다는 빙하보다도 훨씬 더 두꺼워 보이는, 몇년간 전기로 얼린 성애‘빙하’는 아무런 미동도 없다. 이번에는 성애와 한 몸이 되어 부동자세로 선 내게, 사람들이 지나가며 한마디씩 던진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녹지 않을까요?”

“조금 있으면 바닥에 물이 줄줄 흘러 내릴 거야.”


사람이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혼자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 누가 말했다. 그런 면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100명 쯤 되는 이들이 모여있어서 한시도 혼자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우리 공동체는, 물론 듣고자 하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너무나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즉시 이성적 사고를 시작하여 냉동고 앞 바닥에 걸레와 수건을 대기시키고, 냉동고 서랍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냉동고 서랍 한 간에는 백만 년쯤 묵은 언 우유통 여섯 개와 그만큼 오래된 과일퓨레가 간직되어 있었다. 내가 공유지관리를 시작한지 어언 1년인데, 그 동안에 집어 넣은 것은 아니다. 회의 때마다 성애제거를 해야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일을 미룬 것도 다 이 녀석들 때문이었다. 유통기한이 다 되었지만 버리기 아까워서 얼려놓은 것이니만큼 게다가 지금까지 보관되어 온 것이니만큼, 쉐이크를 만들어서 공유지 식구들을 배터지게  먹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여섯통이 넘는 천미리 우유로 대용량의 쉐이크를 만들어 내지 못했고, 녀석들은 잊혀져 갔다. 그러는 사이 성애는 성큼성큼 두꺼워지고, 쉐이크를 먹기엔 너무 을씨년한 한겨울이 되고 말았던 거시었따. 흠, 그 녀석들을 다시 본 순간 나는 이성적 사고를 망각했다. 아니 거부했다! 오늘이야말로 너희들을 없애버리고 말겠어!! 아무죄도 없는 그들이 마치 내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양 달려들었다. 그런 나의 비이성적 사고를 말릴 이가 그 순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신이 나서 꽁꽁 언 우유팩을 뜨거운 물에 담가서 살짝 녹인 후 사정없이 우유 팩을 뜯어 버렸다. 아~ 얼마나 상쾌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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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팩은 뜨거운 물에 담글 수 있지만, 성애가 낀 냉동고를 담글 수는 없는 노릇. 대체 이 빙하는 언제쯤 녹을까 궁금해하는 내게 또 이성적인 사고의 목소리들이 들린다.

“뜨거운 물을 받아서 냉동고 서랍 칸에 넣어보면 어떨까요?”

“뜨거운 물을 적신 수건으로 닦아봐!”

오호라~ 전기를 팍팍써서 뜨거운 물을 끊여대는 내 마음도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이성적인 사고를 따르자 부분부분 성애의 빙하가 얇아지고 희미하게 냉동고의 본질이 드러나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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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로 얼린 얼음을, 전기로 끊인 물로 녹이려는 시도! 나는 정녕! 전기중독자인가!!)


그 본질에 더 빨리 다가가고 싶은 나는 한 손에는 식칼을 한 손에는 쟁반을 들고 얼음 조각 예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몰두했다. 인간이 어떤 일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명감? 야망? 아니다! 그건 그 속에서만 느껴지는 묘한 “쾌감” 때문이다. 물론 각자 왜 서로 다른 곳에서 쾌감을 느끼는가는 모를 일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말했다. “좋다고 생각해서 원하는게 아니라, 원하기에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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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즐거워 보였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초희가 잠시 나를 따라했다.)



어쨌거나, 그 날 나는 내가 할 수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냉동고 성애제거를 3시간여에 걸쳐서 완벽하게 해냈다. 역시 스피노자 선생의 말은 옳다. “우리는 자기의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날 나는 몸져 누워서 그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세미나에 못갔다. 스피노자 선생은 이것도 알았을까? “우리는 자기의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도 정말~ 모른다.”

인간의 체력은 각자 고유한 한계점이 있고 쉽게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한계를 늘리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는 인간의 불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한계 때문에 새로운 것과 결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기존의 익숙한 것과 이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한계가 어느정도는 일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과의 결합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것과의 해체를 가져온다. 지금 뭔가와 이별하고 싶은 이들이여! 우선 새로운 쾌감을 발견하시라, 거기에 몰두하시라, 그리하면, 지금 싫은 그것과의 이별은 저절로 이루어질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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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제거 Before & After)

댓글 6
  • 2018-12-27 11:58

    animate_emoticon%20(27).gifanimate_emoticon%20(48).gif

  • 2018-12-27 12:23

    인간이 어떤 일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명감? 야망? 아니다! 그건 그 속에서만 느껴지는 묘한 “쾌감” 때문이다. 

    : 백퍼 공감!!!

    그럼 나는 주방에서 어떤 일에 '몰두'할 때 쾌감을 느낄까? 궁금해? 궁금하면 오백원~~~~ ㅋㅋㅋ

  • 2018-12-27 13:13

    히말 선생, 매년 성애제거는 했었어요~~

    올해도 여름인가에 한 번 한 것 같은데??

    암튼 고생 많았수~

  • 2018-12-27 22:46

    헐 수고하셨습니다!

  • 2018-12-31 23:17

    파지 매니저 할 적 나도 냉동고 성에 제거 작업 쫌 해봐서 아는데 .... 

    흠.... 쾌감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

    뻑 뻑 소리 안나고 부드럽게 열리는 서랍의 쾌감도 짜릿하궁^^

    히말의  이런 글이 그리웠는데 간만에 재밌게 읽었네요.

    사진 속 히말표정 보고 빵 터짐.!^^

  • 2019-01-01 17:20

    히말, 결국 해냈구나! 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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