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집중세미나 후기

오영
2019-04-13 12:44
325

자기 질문으로서의 공부는 어떻게 가능할까?

 

우여곡절 끝에 들뢰즈 집중 세미나를 마쳤다. 첫 분기에 천 개의 고원중 네 개의 고원을 읽었다.

한편으로는 무지 많이 읽은 것 같은데 고작 네 개야? -.-;;’ 라는 마음과 우와, 정신없는 와중에도 네 개씩이나 읽었다니...

대단한 걸.^^’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다.

도대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냐는 문탁샘의 경미한 수준의 염려증 (심증은 있으나 결정적 물증은 없어 대놓고 추궁하시기에

약간 애매한 상태) 덕분에 우리는 논술형과 개념형, 씨앗문장 글쓰기 등의 선택을 강요받고 결국, 목요일 밤 10시까지 각자

자발적 선택(이라 쓰고 할당이라고 읽는다)한 개념을 자기 식으로 풀어쓴 메모를 올리라는 정언명령을 받았다.


명령이 내내 뒤통수에 딱 따라붙어서 어찌나 마음이 바쁘던지.

그런데 막상 개념 정리를 하려니 내가 아는 게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맞는 건지 틀린 건지도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우선은 숨을 고르는 작업이 필요하다.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며, 릴렉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책을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며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야속한 시간만 잘도 간다.

 드디어 메모를 올려야 하는 목요일,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떼고 책을 펼쳐둔 채, 된장 가르러 인디언샘 댁으로 갔다.

가서 간장 속에서 건져된 된장덩어리를 부수고 으깨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온통 들뢰즈, 메모, 10시 마감, 개념 정리, 집중,

세미나가 맴돌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일에 집중하지만 어느새 된장, 간장, 집중, 젠장, 아니, 된장...”하는 나를 발견한다.

서둘러 작업을 마친 후 집중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향초를 피우고 부드러운 보이차를 연거푸 들이켠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은 왜 또 그리 더딘지

 

결국 느낌적인 느낌만 가지고 책의 구절들을 이리저리 꿰어 작성한 메모를 마감 시간을 살짝 넘긴 후에야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곧이어 10시 마감을 알리는 문탁 샘의 붉은 악마의 형상을 한 이모티콘이 내 뒤로 붙는 게 아닌가!

내 메모까지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이었다.


집중 세미나 당일, 언제나 그렇듯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으나 다루어야 할 내용들은 넘치는 상황이다 보니

짧지 않은 시간임에도 쫓기듯 다소 산만하게 세미나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나마 각자가 글로 표현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게는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그것은 내가 공부하는 개념들(들뢰즈이든, 장자이든, 스피노자나 푸코든)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사실 그동안에도 몰랐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저 머리로 아는 척하는 것과 손에 잡힐 듯 확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이 달라진

지점이라고 할까.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모르던 것들에 대한 지적 열망이 너무나 강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이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는 삶을 바꾸는 공부가 지식을 쌓는 공부와 다르다는 여러 샘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지에서 벗어나 새롭게

아는 것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것이 자연스레 내게 체화되면서 삶을 바꾸어가는 것이 아닌가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은

열심히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그렇게 단계별 난이도를 올라가며 깊이 있는 텍스트를 만나는 경험, 지적 욕망을 채우는 것이

어느 수준까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푸코를 읽으면서 자기 인식이 그 자체만으로 필연적으로 자기 미학, 자기 윤리를 구축하는 데까지 이행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과 진리 사이의 간극이 생각보다 크며 전환을 위한 자기 변혁, 질적 도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가의 개념에 따르면 상대적 탈영토화의 가속이 곧 절대적 영토화로 이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지식이 단지 지식이나 정보의 축적 차원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구성하는 질적 변환, 자기 변혁의 순간, 계기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각자의 메모에 대해 문탁샘이 하신 조언의 핵심이 그것이 아닐까 싶다.

각자가 글을 통해 드러내야 하는 것은 개념을 얼마나 정확하게 정리, 파악했느냐라기 보다는 그 개념을 통해 자신이 밀고나가고 싶은

질문이라는 것. 그것을 얼마나 구체화할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개념들을 도구삼아 풀어갈 것인지를 깊이 고민해보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선언적 명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손에 잡힐 듯

그려냄으로써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질문거리가 표현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네 개의 고원을 읽은 지난 6 주간의 시간, 들뢰즈 세미나에 주어진 시간이 1시간 반 정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시간에 비해 난이도가 높은 텍스트를 읽어내느라 허둥지둥하면서 새롭게 만난 세미나 구성원들 사이에 합을 맞추는 데도 알게 모르게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 시간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간의 경험이 각자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며 다음 시즌에 더욱 변화할 수 있도록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댓글 6
  • 2019-04-15 14:31

     저는 들뢰즈의 철학이 세상을 보는 저의 시선이나 삶에 대한 태도 등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해보면 저도 스무 살에 들뢰즈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딱히 그런 느낌이 없이 개념을 쫓느라 바빴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후 차차 현장에서 맞닥뜨린 경험들이 쌓이고 그것들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들뢰즈 철학의 파편들(당시나 지금이나 온전히 그 개념들을 다 이해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비록 들뢰즈의 개념들은 여전히 난해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지점들과 분명히 맞닿아 있는 부분들이 있다고 느낍니다. 설령 우리가 천의고원 전체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두에게 그 지점들을 첨예하게 가다듬을 수 있는 세미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9-04-15 16:29

    집중세미나 끝나고 문탁샘이 옆자리에서 밥을 먹으면서 "공부 재밌지?"하고 물으셨는데, 차마 "재밌어요~"라고 답을 못했어요. ㅎㅎㅎㅎ
    그간 들뢰즈 읽느라 머리 깨지던 순간들을 재밌다, 라고 압축하기에는 뭔가 억울해서... ㅋㅋㅋ
    근데 실은 재밌어요!

    시즌1이 끝나가는 지금, 저는 제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건지 헷갈려요.
    여전히 개념은 저 멀리에 있고, 저는 그 개념들을 제가 알고 있는 코딱지만한 앎들이랑 이리저리 붙여보며 퍼즐 맞추기 놀이를 하고 있는 듯해요. 그렇게라도 손에 뭔가 잡히길 염원하는데 그게 참.... 어렵네요.
    사실 뭔가를 알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어요. 그저 올 한 해 잘 버텨보자.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는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읽어도 읽어도 오를 수 없는 고원들에 분통이 나곤 했어요.

    그래도 재밌어요. 하나도 모르다가 하나를 알아가는 기쁨이 있어요. 그렇다고 시즌2가 더 쉬울 것 같지도 않아요. 올해가 끝날 때까지 이럴 것 같아요.ㅋㅋㅋㅋ
    그래도 그 때쯤이면 올해가 다 가 있겠죠~ㅎ

    • 2019-04-19 16:23

      항상 정신을 깨우는 타라샘의 낭랑한 목소리, 반짝반짝한 메모, 그리고 땅에 붙어 있는 질문에 

      들뢰즈/장자를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

  • 2019-04-15 17:37

     나는 오래전에 들뢰즈의 개념을 술술 읽어 내려간 선배와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땐 들뢰즈가 최신 이론이었고, 책꽂이에 들뢰즈 책이 있어야만 사람들과 교류가 되었다.  나에게 들뢰즈의 사유는 혁명과도 같았다.  현재  나는 연구를 위한 도구로써 들뢰즈의 개념을 다시 보고 있다. 여전히, 들뢰즈의 리좀적인 사유는 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 방식으로 지금의 나를 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한다. 



  • 2019-04-15 18:53

    참으로 빠르게 한 시즌이 지나가네요.

    뭐가 뭔지 모르지만 대충 감이 왔던< 리좀>,

    들뢰즈가 어렵다더니 뭐 별거 아니구먼 하고 읽었던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그런데.... 두둥!!!  <도덕의 지질학>이 딱 하니 버티고 있었으니...당혹과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중 세미나를 준비하며 다시 <리좀>과 <늑대는...>을 읽었는데,

    전에 쉽게 읽혔던 것은 설렁설렁 보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ㅠㅠ

    읽어 갈수록 쉬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는 [천 개의 고원].

    집중 세미나를 준비하며....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단 쓰기가 이토록 어려웠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쓰고 지우고, 다시 읽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쓰고... 

    그러면서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른 것이 무엇인지가 조금씩 명확해지고,

    앞으로 어떤 점을 좀 더 살펴봐야겠구나 하는 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번 시즌은 들/가를 앞으로 어떻게 읽을지에 대한 방향이

    이렇게나마 조금 잡힌 것에 만족하고 싶습니다. ^^ 

    다음 시즌에 읽을 부분을 보니...

    약간의 한숨이 나오기는 하지만,

    또 어찌어찌 읽어나가겠지요.

    어렵게 읽는 만큼 앎의 기쁨도 큰 것!

    우리 이런 재미, 요런 재미들을 느끼며 [천 개의 고원]을 다 같이 넘어보아요~~

  • 2019-04-17 23:37

    정말 빠르게 한 시즌이 지나갔네요. 보통 한 시즌하면 '그래 내가 이 사람을 읽고 있지.'하는 생각이 들법도 한데...

    책을 피면 '아 재밌다!' 덮으면 '음.. 뭐라고 했지?' 다시 피면 '아 역시 재밌다!' 덮으면 '흠....?' ㅋㅋㅋ

    재밌어서 손 사이로 쉭쉭 빠져나가기 더 쉬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이상하게 낯을 많이 가려서? 혹은 눈치가 없어서? 뭐든 적응하는 시간이 좀 필요해요.

    책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단편 소설 읽기 힘들어하는 이유도, 리듬 좀 탈려고 하면 그 소설이 끝나고 또 다음 소설이 와서예요.

    이 책은 이제 조금 리듬을 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역시 세밀하게 좁혀보기는 아직 어려워요.

    두번째 시즌에서는 조금 더 세밀하게, 저자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어보고 싶습니다.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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