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주역>33.천산둔괘-은둔에서 배우다

2019-04-1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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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어리바리 주역>은 이문서당 학인들의 주역 괘 글쓰기 연재물의 제목입니다.

그대로 어리바리한 학인들이 어리바리한 내용으로 글쓰기를 합니다형식도 내용도 문체도 제 각각인 채 말입니다.

하지만 압니까언젠가는 <주역>, 그 심오한 우주의 비의그 단 한 자락이라도 훔칠 수 있을지^^ 

은둔에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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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산둔은 은둔의 괘이다. 둔괘는 물러감이요 피함이니, 떠나감을 이른다. 둔괘에서는 물러나 숨는 도리를 이야기 한다. 세상 만물과 모든 일이 어느 한 곳에만 영원히 머무를 수 없으며 그렇다고 앞으로만 영원히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아감이 있으면 물러섬도 있으며 이것이 하늘의 도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둔괘를 보며 독박 육아가 떠오른다. 그리고 또다시 나에게 둔의 시기가 온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앞선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아이를 양육하며 기쁨보다 왜 두려운 마음이 앞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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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주위에는 소위 경단녀들(경력 단절 여성들)’이 많이 있다. 자기 분야에서 한 때 잘나가던 여성들이 결혼과 육아로 집에 들어앉게 된다. 그러면서 많은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다. 물론 독박 육아라는 시기에 둔의 프레임이 아닌 공동육아, 육아 품앗이 혹은 워킹 맘 등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혜롭게 보내는 여성들도 많다. 그러므로 임신과 육아가 삶의 장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둔괘가 떠오르며 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는 것은 왜일까?


 나는 잘나가던 여성은 아니었어도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고 사욕 (私慾)을 맘껏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두 아이 육아를 하며 지냈던 5-6, 이제는 육아의 동굴에서 나아가고자 마음을 먹으려던 참에 셋째를 또 임신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상황이 더 악화되어 남편은 주말에만 볼 수 있는 주말부부, 친정과 시댁은 멀리 있으므로 두 아이와 뱃속 태아의 육아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문탁에 다니며 공부와 활동을 시작하고 재미를(물론 어려움도 있지만) 붙이려던 참에 나의 활동에 제약이 왔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셋째는 발로 키운다던데... 나이는 더 들었고, 세 아이의 온전한 독박 육아로 체력은 모자한다. 나의 욕심과는 달리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게 되고, 이대로 집에서 은둔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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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四 好遯 君子 吉 小人 否

구사는 기쁘게 운둔함이니, 군자는 길하고 소인은 그렇지 않다.

九五 嘉遯 貞 吉

구오는 아름답게 물러남이니, 바르게 해서 길하니라.


  천산둔괘의 구사의 효사를 보면 기쁘게 은둔함이니 군자는 길하고 소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군자는 은둔할 때 조금도 번민하지 않고 마음을 기쁘게 먹는다. 하지만 소인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 모르므로 물러나야 할 때가 되어도 기꺼이 물러나려 하지 않는다. 임신과 육아는 생명을 낳고 기르는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싹이 피고 햇볕과 공기, 물과 흙으로 식물이 자라듯, 아이는 엄마의 젖과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자랄 것이다. 이렇게 바른 도를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함에 기쁘고 감사한데, 두렵고 외로운 마음이 앞서고 육아의 운둔을 꺼리게 된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기쁜 마음은 잊은 채 내 사욕이 앞서니 번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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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을 공부하다 보니 삶의 한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내는 것인가에 삶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고, 지금 나에게는 물러나는 도리에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한 발짝 물러나 보니 물러나 은둔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의 경우도 임신을 계기로 지금까지의 습속에서 조금 물러나 여유롭게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최대한 활동들을 줄이고 몸을 사리니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그러다 보니 나와 나의 몸을 돌아보게 되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문탁을 다니며 공부와 활동에 욕심만 앞서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공부를 통한 깊은 성찰로 나에 삶에 변화가 오기보다는 그동안의 습관처럼 마음만 앞서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럼 집에서는 바른 도를 행하고 있었나? 만물은 저절로 길러진다며 엄마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엄마로서의 내 역할을 이런 저런 핑계로 회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름답게 물러나 지금 이 시기를 자연스럽고 기쁘게 받아들이고 따라가 보기로 한다. 한발 물러나서 운둔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또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둔괘에서 말하는 물러남은 원칙이 없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물러남으로써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지혜일 수 있다. 상황은 또 변할 수 있다. 나아감의 이면에 있는 물러섬의 지혜를 기억하고 맹목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려기보다 이 시기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용기 있고 지혜롭게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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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2019-04-16 02:16

    와~~~~ 유님!!!

    둔괘를 독박육아로 풀어내다니.... 잼있어요.

    그리고....

    편지가 아니니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잘읽었습니다. 

    • 2019-04-17 19:32

      ㅎㅎㅎㅎ 편지이야기는 문탁다니는 동안 들어야하는거죠??!!!ㅎㅎㅎ

  • 2019-04-16 07:42

    유의 고민이 전달되어 오네요. 은둔에도 방법이 있겠지요. 그저 조바심내지 말고 건강한게 우선인거같아요..잘 읽었습니다^^

    • 2019-04-17 19:34

      네~ 다 사는 방법이 있겠지요??!ㅎㅎ 주역 글쓰기 참 어렵지만..

      글 읽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고 ~ 친절한 자누리쌤 감사해요~^^

  • 2019-04-16 16:44

    물러남으로써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지혜~ 한 수 배우고 갑니다.

    늘 궁금한데 얼굴을 볼 수 없어 아쉬워용

    힘내세요~

    • 2019-04-17 19:35

      저도 보고싶어요~^^

      금요일에 함 놀러갈게요 ~

      벌써 8개월... 배가 남산만합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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