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 주역> 기쁘다고 다 기쁜 건 아니다. -뇌지예괘

자작나무
2018-09-05 23:35
709

 

<어리바리 주역>은 고전공방 학인들의 주역 괘글쓰기 연재물의 제목입니다.

말 그대로 어리바리한 학인들이 어리바리한 내용으로 글쓰기를 합니다. 형식도 내용도 문체도 제 각각인 채 말입니다.

하지만 압니까? 언젠가는 <주역>, 그 심오한 우주의 비의, 그 단 한 자락이라도 훔칠 수 있을지^^



 

기쁘다고 다 기쁜 건 아니다.

 

  leidiyu(3).jpg

 *뇌지예(雷地豫)

 

 

<역전>과 <주자본의>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는 책은 <주역전의周易傳義>다. 정이천 <역전>의 ‘傳’과 주자의 <주역본의>의 ‘義’를 따서 책이름으로 삼았다. <주역>을 읽는데 둘 다의 해석이 필요한 걸까. 주자는 체계화에 능한 학자다. 기존의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의 해석에 불만을 표시하고, 나아가서는 ‘경’과 ‘전’을 구분하고 장구章句를 만들어서 나름의 해석을 달았던 주자다. 오경의 하나인 <주역>에도 분명 주자는 나름의 정리작업을 했을 것인데, 그럴 때 스승 정이천의 해석에 대해서 주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게다가 그는 다른 전들과는 달리 자신의 주역 해석에 ‘본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데, ‘본래의 의미’는 무슨 의미인가.

 

주자의 <주역> 해석상의 특징

금요일 ‘송명유학’ 세미나 시간에는 주자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한 개인의 삶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주자가 어려서부터 정이천의 이학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스승에게도 가르침을 구해왔음을 안다. 그중에서 그는 정이천의 <역전>을 궁구하는 쪽에서 점차 다른 스승들로부터 배운 상수학이나 술수학으로 방향을 확대해간다. 그리하여 그가 완성한 주역학의 모습은, 의리역학+상수역학+술수역학의 통일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슬로건이 바로 “역은 복서의 책”이라는 것이다.

 

북송부터 이어져온 학문의 큰 방향은 ‘회의정신’이다. 기존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의심하고, 그것을 뒤집어보고, 털어보고, 자신의 힘으로 읽어내겠다는 사조다. 그 결과로 주자는 성인이 하신 말씀이라 문헌의 한 글자도 의심치 않아 손조차 대지 않는 ‘경經’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러고는 경의 반열에까지 오른 ‘전’을 자기 자리로 위치시키고, “전으로써 경을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경을 해석하자”고 제시했다. <주역>에서 보자면, <단전彖傳>과 <대상전大象傳> 또는 <계사전繫辭傳>은 그저 경=괘사를 해석한 학자들의 일설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들로 원전을 해석하지 말자는 것이다. “상象으로써 이치를 유추하자.”

 

<주역>의 본래적 의미를 찾자는 것. 그러기 위해서 지팡이가 되어줄 것은 바로 ‘괘상卦象’이다. 복희씨가 땅에 그었다는 여섯 작대기. 그것을 이름 하길 ‘복희의 역’이라고 했고, 문왕과 공자의 역보다 먼저이고, 또 <주역> ‘본래의 뜻’을 가졌다고 봤다. 그렇기에 ‘본의’를 찾는 주희에게서 중요한 것은 ‘복희의 역’이고 그것은 ‘괘상’과 관련해 있다. 그럼 괘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게 드러나는 방식을 뇌지예괘를 통해서 보자.

 

豫, 利建候行師.

<傳>예는 순하고 동함이니, 예의 뜻은 이로움이 후를 세우고 군대를 출동함에 있다. 후를 세워 번병을 심음은 천하를 함께 편안히 하기 위한 것이니, 제후가 화순하면 만민이 기뻐하여 복종하고, 군대를 출동할 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화열和悅하면 순종하여 공功이 있다. 그러므로 예열悅豫의 도는 후를 세우고 군대를 출동함이 이로운 것이다. 또 위가 동함에 아래가 순함은 제후가 왕을 따르고 군사들이 명령을 순종하는 상이니, 만방에 군주노릇하고 대중을 모음엔 화열이 아니면 복종시킬 수 없다.

<本義>예는 화락함이니, 인심이 화락하여 그 위에 응하는 것이다. 구사 한 양효를 상하가 응하여 그 뜻이 행해지고 또 곤坤으로 진震을 만나니, 순하고 동함이 된다. 그러므로 괘는 예가 되고, 점은 군주를 세우고 군대를 출동함이 이로운 것이다.(<주역전의>, 성백효 번역, 415쪽)

 

leidiyu(7).jpg

*화가 아니카 허의 64괘 <역화> 시리즈의 하나인 <뇌지예괘>

*괘를 읽어내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그중 코끼리를 통해 예괘를 그리는 상상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전>은 정이천의 <역전>이고, <본의>는 주자의 해석을 가져온 것이다. 정이천은 제후를 세우고 군대를 출동하는 것은 사람들의 기쁜 삶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들이 마음으로 위를 따라줄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서괘전序卦傳>을 끌어와 “큰 것을 소유하고 또 겸손하니 반드시 즐겁기” 마련이다. 즉 예괘는 대유大有괘와 겸謙괘 다음에 오는 괘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후를 세우고 군대를 출동하면 그 일에 공이 있을 것이니 이롭다고 논리를 펴는데, 어찌 보면 인간사의 상식선에서 말하는 삶의 ‘이치’로 보인다. 봉건을 한다거나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국내의 경제상황이나 민심이 여유로워야 가능하다. 정이천이 말한 것처럼 백성을 포함한 나라 전체의 분위기가 ‘안화열락安和悅樂’한 상황이라면, 정치적 변혁도 전쟁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leidiyu(1).jpg

 *위의 "뇌분대지"라는 글귀는 뇌지예괘 <대상전>에 나온다.
우레가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상을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건의 기미를 발견한다. 

 

 

그런데 주자가 이 괘를 설명하는 풀이는 괘가 인간사에 어떻고 저떻고가 많지 않다. 여섯 효가 배열된 순서, 음양이 상호 갖는 관계, 또한 그것이 서로 간에 맺는 관계, 그리고 그것이 우레고 땅이라는 데서 추상화되어 나온 성질(가령 동動과 순順)을 서로 연결 지어 설명할 뿐이다. 물론 위에서처럼 화락함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덧붙기도 한다. 주자는 의리역의 설명은 정이천의 것에 따르고(그는 정이천의 <역전>을 ‘의리역의 거봉’으로 평가한다), 간혹 모자란다거나 적절치 않아 보이면 몇 글자 거드는 정도이다. 그가 보기에 정이천에게서 부족한 것, 그것은 바로 점복의 요소다. 그래서 해석상에서 점복의 글귀로 보이는 것에 주자는 설명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의리로 해석하는 방법을 버리고 상수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혹은 술수나 점을 포함해)까지도 포함해서 역학을 사고하고자 했다. 즉 주희가 행하고자 한 것은 ‘리理-수數-점占’이 통일된 하나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수-점의 통일된 체제는 세 성인의 역의 통일이라든가 소옹의 상수학과 정이천의 의리학의 통일이라든가 선천도와 태극도의 통일 문제를 담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당시의 기득권자를 지탱하는 철학이라든가 세계관과 닿아있었으므로 거대한 역학에서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학술적인 논쟁을 벗어나 정치적인 사건으로도 연계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자평전(하)>를 요즘 읽고 있는 ‘송명유학’ 세미나팀에게 문의하기 바란다^^.

 

주자평전.jpg

*송명유학 세미나팀이 열심히 읽고 있는 <주자평전>, 수징난, 역사비평사. 책값-엄청 비싸고, 책-정말 두껍다. 

 

 

뇌지예, 자기를 지키며 기뻐하기.

아직 역학의 깊은 세계를 맛보지 못해서 일까, 그나마 쉽게 다가오는 것은 ‘의리’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냥 ‘소설’인 것처럼 여겨지고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것처럼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정이가 만든 ‘소설’은 2효와 5효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풀고 그것의 ‘의리=이치(君臣有義)’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펼친다. 다만 군신간의 관계는 복잡해져 다양한 케이스에 대한 소개를 주로 보여준다. 예괘에서도 그렇다. 구사(=대신大臣의 자리)와 육오(=군주君主의 자리)에 대한 설명이 다른 효에 비해서 대단히 길다. 그만큼 북송 정이천의 시대에 군신간의 관계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담론화 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예괘의 구사의 효사는 “由豫, 大有得. 勿疑, 朋盍簪”인데, 앞부분은 “그 자신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므로 크게 얻음이 있다.”고 풀이된다. 정이천은 구사를 대신의 자리에 배당한 바, 육오의 군주가 대신에게 순종하는 상황으로 읽어냈다. 즉 벼슬길에 나아간 지식인이 군주로부터 인정받아서 일을 맡아 보게 되었으니, 그 즐거움이 재부를 취하고 감각적인 즐거움에 빠지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위험한 자리이기도 하니, 구사는 오직 지성至誠으로 하고 의심하지 않아야 동료를 얻을 수 있다고 경계의 말을 남기고 있다.

 

주자의 설명은 정이천의 설명에 반도 안 된다. 그는 ‘유예, 대유득’을 앞은 상象, 뒤는 점괘로 푼다. 즉 “구사는 괘가 말미암아 예가 된 원인이다. 그러므로 그 상이 이와 같고, 그 점괘는 크게 얻음이 있음이 된다.” 점괘가 이렇게 나왔다면 점치는 자가 어떠하면 이 환란을 극복할 수 있다느니 하면서 효사를 점사로 푼다.

 

leidiyu(5).jpg

 

주희가 본의를 찾으려 애썼던 것처럼, 경인 괘사와 효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주목해보자.

예괘는 세상이 핑크빛이다. 즐겁고 기쁘다. 화락의 시대에 풀들도 기뻐하고 날씨도 기뻐하고 인간들의 마음도 기쁘다. 사람들은 위에서 무언가를 하자고 하면 언제든지 기꺼이 혹은 기쁘게 응하려고 한다. 봉건제를 한다고 해도, 전쟁을 한다고 해도 그 뜻에도 응하여 따를 정도로, 즐겁다. 이 정도가 되었을 때, ‘건후행사’를 하는 것이 이롭지, 다른 시절이라면 어림도 없다.

 

images[5].png

 

 전체 상황은 전쟁을 해도 괜찮을 판인데, 개별적인 상황으로 들어가면 즐거워하는 양상이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가령 ‘명예鳴豫’(초육)라거나 ‘우예盱豫’(육삼)라거나 ‘명예冥豫’(상육)가 있다. 전체적으로 즐거운 상황과는 다르게 각 효들은 각자의 자질이나 처한 위치나 행동에 따라서 다르게 기쁨에 동참한다.

 

‘명예鳴豫’는 남들이 다 기쁨에 들떠 있자 자기도 덩달아 기쁨에 공명하는 상황을 이른다. 기쁨의 정서는 감염된다고 하지만, 초육이 공명하여 울어대며 기뻐하는 것은 흉하다. 초육은 자기를 좋아해주는 구사를 ‘빽’으로 삼아, 때를 얻어 일을 주관할 수 있다며 기뻐한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소리까지 낸다. 이러면, ... 흉하다.

 

‘盱豫’도 그렇다. 그는 위로 구사를 올려 보면서 아래로는 즐김에 빠지는 자다. 음이 양의 자리인 삼에 있으니, 그 자리를 감당할 힘이 모자랄 뿐만 아니라 적임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예괘의 주체가 되는 구사를 올려다보면서 즐거움에 빠져있어 자기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해서 위험천만한 자다. 육오의 군주는 유약하여 쉽게 즐거움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육오는 ‘예’자도 갖지 못하고 병이 든 것으로 효사에 쓰여 있다. 즐거움이 지극한 때에 상육은 두려워하고 경계해도 모자랄 판에 즐거움에 혼미해서 어둠에 빠져있다. 그래서 ‘冥育’이라고 한다. 잘못된 기쁨의 예로 언급된 효들의 특징을 보면,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정중正中하지 않다.

 

그러면 즐거움이 넘쳐나는 시기에 어떤 식으로 기뻐해야 하는가. <주역>이 제시하는 답은 육이효의 ‘개우석介于石’과 구사효의 ‘유예由豫’이다.

 

leiyu(6).jpg
 

*위는 장개석에 대한 간단한 설명글이다. 위의 이름 설명에서 '개석' 이름 두 자가 <주역> 예괘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육이의 효사는 “介于石, 不終日, 貞, 吉”이다. 다른 괘와 달리 육이효는 중정한 자리에 처하고 또 자기를 기쁘게 해주거나 흔드는 자가 없어서 ‘스스로 지키는 상’이다. “예의 때를 당하여 홀로 중정으로 스스로 지키니, 특립하는 지조라고 이를 만하니, 이는 그 절개가 돌과 같이 견고한 것이다.”(정이천, 421) 육이는 홀로 중정으로 스스로를 지킬 뿐만 아니라, 사려가 밝고 상세하여 하루가 가기 전에 일의 기미를 알아차리는 자다. 즐거운 상황에 즐거워하면서도 일의 기미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지키라, 자기의 중정을 지키라는 메시지.

 

 

 

댓글 2
  • 2018-09-06 08:22

    주자가 전으로 해석하지 말자고 한건 이미 아는 사실이고 왜 그랬는지가 궁금했는데 정작 그 배경은 쏙빼버렸네요. 송명유학팀에 물어봐야겠군요....

    그리고 제가 확인한바로는 주자의 괘사 해석은 독창적이지 않고 거의 단전을 갖고 풀더라구요. 전으로 해석하지 말자면서 이건 뭔지...거기에 점사의 해석을 덧붙이는 정도구요. 더 궁금해졌네요 ㅋㅋ

  • 2018-09-06 09:33

    사람들은 화락의 시대에도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군요.

    샘이 드러내신 예괘를 읽어보니 괘사에서 보면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서...효사를 보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네요

    오히려 인생 꼬이게 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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