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강학원> 2회차 - '진실의 색' 후기(3)

정원기
2020-04-03 22:14
302

 

어려운 책이 끝났습니다! 소감을 짧게 적어보자면..이번 분량에서는 영상/작품을 인용한 설명들이 지난 주보다 훨씬 줄었습니다. 저자가 그동안 이리저리 전개했던 이야기들을 드디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려나보다!, 하고 열심히 밑줄을 그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제가 준비한 발제임에도 불구하고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어서 조금 슬펐습니다 ㅎㅎ.. 뭔가 책임지지 못한 기분. 대충하고 싶지 않았는데 잘 안되서 속상했답니다 ㅠ_ㅠ

 

그래서(?) 저는 책 내용 보다는 함께 나눈 이야기를 중심으로 후기를 써볼까 합니다.

 

진실의 색

 

히토 슈타이얼은 요즘의 공론장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민족 국가는 공적인 이미지와 소리에 대한 독점권을 상실'하고, 독점적 권위를 누렸던 기존의 미디어가 민간 중심의 새로운 미디어-플랫폼과 경쟁하게되어 (...) '국민의 일정 부분은 정치적 대표성에서 제외' 된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공론장이 시장이 되버렸다고 표현합니다. 그 결과  '공공성 없는 공론장'은 세계를 서로 연결시키는 동시에 고립시킨다고 말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분은 국가가 보증하는 진실이 이미 여러번 파괴되었고 언제든지 거짓을 의도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면서도, 생활양식의 작은 차이에 따라 생존 가능성이 달라질 수도 있는 작금의 위태로운 상황에선 아이러니하게도 메이저 언론사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은 정치적 의제나 이슈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여전히 기성 미디어를 불신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게 언제나 의심스럽고 그들이 다루는 정보마저 뉴미디어에 비추어 볼 때 허접하게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무엇이 팩트/진실인지에 대해 정교하게 판단하기 보단 오히려 남이 작성한 칼럼에 눈이 가는 것 같습니다. 읽기 쉽기 때문입니다. '탈진실'의 시대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내는 작업은 너무 피곤한 일인데 반해, 칼럼은 글쓴이의 입장이 명백히 담겨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수용하기도 간편하고 비판하기도 용이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취향에 따라 정보를 취사하기 시작하면서 공론장 역시 '사적으로' 변화하는 중입니다.

 

이러한 '사적 공론장'은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을까요?...첫 번째 시간에 무엇이 정치적인 행동이며 유의미한 변화인지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스펙타클한 경험은 과연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는가', 개인이 어떤 행동(예컨대 후원이나 기부)을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정치행위인지는 더 고민해봐야 한다', 등 '정치화'에 대한 기준을 두고 열심히 토론했습니다.

 

저는 규혜님 발제를 듣고 '자기 성찰'이 어쩌면 정치화의 핵심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찰 없는 구호가 남발하는 사회. 성찰하지 않는 인간은 사물이 될 위험이 있고 그러므로 타인을 여전히 사물로 취급할 위험이 있습니다(저자가 말한 '사물-인간의언어'를 제대로 은유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만..).

'올바른' 변화의 담론이 거대해진들 자기 성찰이 비어있다면 부유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시적인 변화와 가시적인 성과도 중요합니다만 성찰한 개인은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아무도 몰래 눈물 흘리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기껏 댓글 몇 개 적어보고 해쉬태그 달아보는게 전부여서 지금 당장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개인의 역사 속에선 그 힘이 꽤 쎄게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찰한 개인'의 자기표현은 그 양상이 투박할 지라도 의미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내 주변의 작은 변화를 잘 관찰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작은 위로와 작은 응원을 잘 감지할 수 있다면 일상의 우울감을 왠지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일단, 건강해야하니까요.

 

세계에 관하여 무엇이 진실인지 규명하기는 어려워도, 그 세계 속에 살고있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끊임없이 감시하되 내 입장이 곧 진실이라고 단정해서도 안됩니다. 욕심은 위험합니다. 자신의 입장이 완벽하다 여기면 권력을 '역사의 도마위로~♪ ' 올려도 결국 '운동권에서 정권의 노른자위로~♪ '('버벌진트 - 1219 epiphany'♬ 中 )

 

노래 추천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세상이 천천히 바뀐다고 단정한 뒤 자족부터 하자는 건 오늘 하루가 간절한 사람들한테는 너무 절망적으로 들릴 테지요...

그래도 희망을 담아.

 

이상 다소 순진한 후기 였습니다. 아직 공부할게 몇 주 남아서 다행이에요^0^

댓글 3
  • 2020-04-04 13:50

    저도 '성찰한 개인'과 함께 '성찰한 공동체'가 나타나길 바라요. 그들이 다양한 담론들이 출현할 토대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다시 사적인것부터, 사적인 공론장에서부터 '성찰적으로'를 토대로 무엇인가 '함께-나타나기'가 존재하리라는 상상도 해보고요..ㅎ저는 이런 이야기들이 정말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일단, 건강해야하니까요. 후기 잘 읽었어요.

    응답으로, 저는 책 '작은 것들의 신-아룬다티 로이'를 추천하며 댓글을 마치겠습니다.^6^

  • 2020-04-04 17:16

    원기님의 잘 정리된 발제와, 2부 토론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능력에 감탄했어요.. 다른 조에서 나온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성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규혜가 짚어준 텍스트의 맥락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주류 미디어들의 사적 공론장은 종종 '사적 영역'에서 생겨나서 새로운 종류의 네트워킹을 만드는 다양한 소규모 공론장들에도 반영된다. 이 네트워크들에서 '프라이버시'는, 아마 과거 페미니즘의 구호였던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의 반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기능을 수행한다. 정동의 영역들을 피해가지 않고, 성찰적으로 정치화하는 것은 이러한 다큐멘터리 제작이 직면한 역설적인 과제이다."(241p.)

    "정동의 영역들을 피해가지 않"는 것이 성찰적 정치화의 핵심이라 보여집니다. 그렇담 이것은 어떤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 하면, "새로운 종류의 네트워킹을 만드는 다양한 소규모 공론장들"일 것입니다.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진실의 기반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던 주류미디어 마저 사적 공론장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규모의 전통적인 공적 공론장이 파괴된 지금, 주류 정치마저 얼마나 사적으로 변해가는지를 우리는 매우 빈번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조국사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철학이나 신념보다는 그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품행'입니다. 이것은 과거에는 공론장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사적인 정동의 영역(2002년 진보정당에서 여성운동을 향해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껍데기를 줍고있다"던 유시민의 발언은 오늘날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이 그 자리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기엔 양가성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정동은 조회수 몰이의 대상이 되어 선정적이고 휘발성 강한 컨텐츠를 생산하고,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적 공론장의 시장화입니다. 다른 한편, 이런 조건 덕에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다양한 종류의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공론화하고, 정치화 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n번방의 해시태그 운동 처럼요. 이때 미국의 6-70년대 제2세대 페미니즘의 요구-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가 현실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이들 양쪽 모두는 이미 무너진 공적 공론장을 향한 외침이 됩니다. 사적인 것들이 정치화 될 때에는, 정치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류 정치에 호소합니다. 오늘날의 정치는 포퓰리즘이다, 라는 지식인들의 주장은 이런 바탕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포퓰리즘 자체가 공적 공론장에서의 정동을 비이성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논리가 아니었던가요? 이처럼 정치에 대한 논의가 부재할 때, 제도는 앞서가는 정동을 뒤따라 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차이, 우리가 가진 감수성과 국가 행정의 거리 혹은 시간 차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이것이 언제나, 앞으로도, 우리를 계속해서 분노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곳이 "다양한 소규모 공론장"이라는 새로운 조건이 아닐까 싶어요. 사사키 아타루의 책 제목처럼,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만드는 것. 사실상 공적인 것에서의 사적인 것으로의 전환 뿐 아니라, 정치의 주체와 형식을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이것이 성찰적 정치화이며, 이러한 정치화의 본질은 아마도 끊임없는 성찰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때 성찰이란 원기의 말처럼, "주변의 작은 변화를 잘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불확실성 속에서 "내 입장이 곧 진실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그러나 믿고 한 걸음 내어 볼 수 있는 그런 공론장을 만드는 것.

    그러나 물론, 여전히, 추상적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느끼는 상상력의 한계, 여기에 답답함이 있지 않나 싶어요. 성찰은 아마도, 규혜가 세미나 시간에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어떤 '반성'과는 다른, 특별하고 구체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텍스트를 읽으며 함께 더 상상해보아요.

    횡설수설이 또 길어졌네요. 후기 감사해용~ *

  • 2020-04-05 01:42

    원기가 조별 토론을 잘 정리해준 덕에 우리 조에서 나누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제가 기사를 접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방송 미디어와 최근 미디어를 다르게 대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정리 고마워요!

    그러면서 한 가지 저도 경험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저는 자료를 찾을 때 아니면 유튜브를 잘 보지 않는데, 이는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썸네일과 광고들이 많은 것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사건을 JTBC에서 터뜨렸던 그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매일 저녁 8시인지 9시인지, 그 시간이 되면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그 사실들을 둘러싼 사건들을 다루는 뉴스를 대중들은 많이 기다렸던 게 말이죠. 마치 예능이나 수목드라마를 기다리는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영화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 하’는 새로운 픽션 속에 살게 된 것 같아요. 영화보다 현실이 더 ‘재밌어’지는 상황을 즐기게 된 것 같아요. 서구 사회의 테러가 자극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정치 분야에서 이런 자극적인 상황을 즐기게 되는 것 같아요.
    길어지는데, 그 사건 이후로 몇 년 지나지 않은 요즘에는 굳이 8시, 9시를 기다리지 않게 되어졌어요. 뉴스를 놓쳐도 아쉽지 않아졌죠. 굵직굵직한 국내 정치뉴스를 지나 국외 뉴스로 가서 날씨로 마무리되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보지 않더라도, 유튜브에서 단신들을 클립으로 뉴스가 끝난 뒤에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아마 JTBC 뉴스룸도 당시에 클립으로 제공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이건 제가 유튜브에 친숙하지 않아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긴 해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요. 이제는 브라운관보다 손바닥 안의 핸드폰에서 보는 뉴스가 더 익숙해지게 된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아직 뉴스를 믿는 편이에요. 자정이 되면 YTN 뉴스속보를 항상 틀어놓고 있어요. 매일 같은 시간에 그 날의 뉴스를 정리해주면서 왜 뉴스‘속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쓰다보니 요즘에는 코로나때문인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더 이상 인터넷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지 않게 되었어요. 정보를 제공하는 주최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요. 유튜브도 마찬가지로요.
    무엇이 진실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믿게 만드는 게 무엇이냐가 저는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저를 믿게 만드는 건 개인이 아닌 전통적인 매스 미디어인 것 같아요. 아마도 저자가 말한 전통적인 공론장에 해당되겠지요. 민영화된 매스 미디어에 ‘그래도 어느 방송은 그나마 믿을만 하잖아’ 혹은 ‘아냐. 요즘에 완전 걔네도 못 믿겠던데’ 따위의 얘기를 계속 하면서도 말이죠. 결국 그들은 그들의 논리를 사실인 것 마냥 전달하게 되겠죠.
    매스 미디어의 진실 정치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텔레비전의 전원을 켜지 않고, 그들의 클립을 터치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주 ‘그것이 알고 싶다’는 차마 볼 수가 없겠더라고요. 우리의 알권리는 누군가 단 한 명이 악마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악마에게 먹이를 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악마와의 공생을 유지하게 만든 우리(cage)가 무엇인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제 알권리를 추구할 수 있는 방식은 그것을 보지 않는다는 부정(negative)의 방식으로만 가능했던 것 같아요. 개개인이 일일이 조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개개인이 조사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 공론장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어느 공론장을 만들어가고 있는 걸까요.

    원기 후기 고마워요! 남은 우리 공부도 화이팅!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90
농밀한 세미나 5회차 발제 (1)
송우현 | 2022.03.18 | 조회 191
송우현 2022.03.18 191
489
<한문이 예술 2022> 봄시즌 첫번째 시간 후기 (1)
동은 | 2022.03.17 | 조회 226
동은 2022.03.17 226
488
한문이 예술, 겨울특강에 대한 반응은 어땠을까? (1)
고은 | 2022.03.10 | 조회 1225
고은 2022.03.10 1225
487
농밀한 세미나 4주차 후기 (2)
송우현 | 2022.03.09 | 조회 212
송우현 2022.03.09 212
486
농밀한 세미나 4주차 발제 (1)
송우현 | 2022.03.04 | 조회 175
송우현 2022.03.04 175
485
농밀한 세미나 3주차 후기 (2)
만복 | 2022.02.27 | 조회 203
만복 2022.02.27 203
484
농밀한 세미나 3주차 발제 (1)
만복 | 2022.02.26 | 조회 178
만복 2022.02.26 178
483
농밀한 세미나 2주차 후기 (2)
경덕 | 2022.02.22 | 조회 245
경덕 2022.02.22 245
482
한문이 예술 2022 봄시즌 <봄과 봄의 절기> (3/11 개강) (21)
고은 | 2022.02.22 | 조회 1924
고은 2022.02.22 1924
481
농밀한 세미나 2주차 발제 (1)
송우현 | 2022.02.19 | 조회 169
송우현 2022.02.19 169
480
농밀한 세미나 1주차 후기 (1)
송우현 | 2022.02.14 | 조회 207
송우현 2022.02.14 207
479
농밀한 세미나 1회차 OT 및 발제 (1)
송우현 | 2022.02.12 | 조회 154
송우현 2022.02.12 154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