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논어 2회] 자기배려하는 인간, 君子

관리쟈
2020-04-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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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논어]  딩동!~ 리플레이 논어가 편지처럼 왔습니다. 문탁의 고전답게 다양하게 변주된 <논어>, 친구들은 예전에 어떻게 읽었을까요? 몇 년전 부쳤던 편지를 받는 기분으로,  리플레이되는 논어를 천천히 읽어봅니다.

 

 리플레이 2회는  <2012년 축제> 주제발표 글입니다. 축제 주제는 "데모스, 너의 정치를 발명하라"였습니다.

글쓴이 : 문탁쌤 / 발표일: 2012-11-09 


자기배려하는 인간, 君子

 

  1. 오래된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겠다. 20대 내내 나를 키운 것은 세미나와 거리였다. 수많은 책이 금서이던 시절, 우리가 볼 수 있는 책은 일본어로 중역된 맑스, 레닌 책 몇 권, 그것도 출판사도 없이 지하에서 유통되던 제본 책들이었지만 괜찮았다. 그 지식은 강렬했고 나는 빠르게 맑시스트가 되어 갔다. 그리고 ‘거리에서의 삶’. 가족과 만날 수 없었고, 갓 결혼한 남편과도 5년 넘게 떨어져 살았지만, 역시 상관없었다. 무릇 혁명가의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정치이고 나의 윤리였다. 정치적 파토스와 윤리적 에토스가 나란히 갔던 시절이었다.

 

30대 초반, 하나의 앎이 끝났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인 구 소련이 망하고, 나는 길(道)을 잃었다. 앎이 끝나자 삶의 길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옛 동지들은 각개격파 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갔다. 먹기 살기 위해서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이든 많은 동지들이 대학원을 거쳐 교수가 되거나 사법고시 등을 거쳐 판사, 변호사가 되었다. 변리사, 한의사, 감정평가사, 회계사…… 수많은 士들이 줄줄이 탄생하였다. 내 눈에 동지들은 둘로 나뉘는 것 같았다. ‘잘 나가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궁금해졌다. 우리의 20대의 앎은 무엇이었을까? 그 앎은 이후 각자의 삶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나는 ‘어깨 힘 빼고’, ‘눈에 힘 풀고’ 살자고 생각했다. 견실하지만 평범한 생활인의 삶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앎에 대한 파토스가 없는 삶은 지리멸렬했다. 길(道)을 다시 찾고 싶었다. 그래서 두드린 <수유너머>의 문. 10여년이 넘는 <수유너머> ‘코뮨’의 활동 경험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고 배움이었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의 지식의 총량은 공동체 내의 작은 위기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들뢰즈나 니체에 대한 차고 넘치는 지식은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시시비비와 미묘한 감정의 균열을 결코 해결하지 못했다.

 

최근 나는 또 다시 ‘깜짝 놀라는’ 경험을 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8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 두 명이 각각 문재인과 안철수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중 한 명은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낸 사람이고, 또 한 명은 ‘민주노총’의 오랜 정책통이었다.

한마디로 오랫동안 나는 정치적 주체는 왜 윤리적 주체와 분리되는가, 혁명과 구원은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는가의 화두를 붙들고 살아왔다. ‘정치’로 달려가거나(세상을 바꾸자!), ‘구원’의 문제에 침잠하는(나라도 제대로 살자!) 사이를 횡단하는 길은 없는가?

 

푸코는 말년에 자신이 탐구해왔던 문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였다고 말한다. (“나의 문제는 언제나 주체와 진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어떻게 주체가 특정한 ‘진리게임’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가?” “나의 목표는 우리 문화에서 인간이 주체로 되는 방식인, 상이한 양식들의 역사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그것은 홉스나 루소 이래의 정치적 주체는 그 근원에서 법적 주체인데, 이 법적 주체로 정립되는 과정이 바로 이 법적 주체가 저항하는 사법적 권력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근대적 사유의 관성을 넘기 위해 푸코는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의 근대는, 주체는 그 자체로 진실의 능력이 있지만 진실은 그 자체로 주체를 구원할 수 없다고 우리가 가정하는 순간 시작” 되는 게 아닐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글은 위의 오래된 화두를 붙들고 이러한 푸코의 문제의식을 품은 채 <논어>를 읽어나가면서 펼친 내 사유의 궤적에 대한 아직은 어설픈 시론이다.

 

2. 道를 어떻게 求할 것인가?

 

道가 이미 실현되었다는 것, 그래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기축시대 중국 고대 사상의 공통된 믿음이었다. 유가를 비판하며 자신을 정립했던, 합리적 담론(辯)의 창시자인 묵가의 경우조차 담론의 옳고 그름(是非)을 판단하는 세 가지 기준의 하나로 근본(本)이라는 고대 성왕의 실천을 들고 있다.

공자 역시 진리가 고대에 이미 실현되었다고 생각했다. “先王之道”(0112), “文武之道”(1922) “古之道”(0316) “三代之所以直道”(1524)라는 표현은 예악이 찬란했던 하, 은, 주 삼대에 대한 공자의 동경을 드러낸다. 심지어 공자는 문왕의 道를 이어받은 이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라 불리는 공자의 시대는 주나라의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봉건적 질서가 이미 해체되어 소위 ‘覇’라고 부르는 ‘힘의 정치’가 도래한 시대였다. 세습적 신분제를 비롯해 기존의 질서는 와해되고, 전 사회적 유동성은 커져갔다. 과거의 찬란한 진리는 사라졌다. 공자는 이런 현실을 道가 사라진 ‘天下無道’의 세상으로 인식하였다.

공자의 탄식, “道가 행해지지 않는구나, 뗏목을 타고 바다를 향해하려 하노니……” 세상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을까?

이런 세상을 사는 공자의 원칙은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세상에 道가 있으면 나아가고, 道가 없으면 숨는다: 0813)이다. 문제는 ‘숨는다’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논어>에서 공자가 仁者라고 꼭 짚어 언급한 은나라 시대의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은 모두 ‘邦無道’의 세상의 ‘숨은 자’, 즉 ‘逸民’ 들이었다. 그리고 공자는 逸民을 다음 세 가지로 유형화한다.

 

첫째, 백이, 숙제처럼 굶어죽을지언정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사람들,

둘째, 유하혜나 소련처럼 몸이 욕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현실을 바꾸려 노력한 사람들,

셋째, 우중과 이일처럼 ‘더러운 정치판’에서 물러나 표표히 ‘독선(獨善)’하는 사람들.

 

그런데 주자는 주석을 통해 우중은 “吳지방에 살 때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하고 벌거벗는 것으로 꾸밈을 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공자가 ‘저항’의 유형으로 언급한 위의 방법들은 ‘죽거나’, ‘나쁘거나’, 아니면 ‘미쳐야’ 가능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공자는 “나는 이와 달라서 可한 것도 없고, 不可한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 유명한 「미자」편의 하나의 에피소드. 나루를 묻는 공자의 제자, 자로에게 걸익(桀溺)이 말한다. “(탁류가) 도도한 것이 천하가 모두 이러하니, 누구와 더불어 바꾸겠는가?(易)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避人之士)를 따르기보다 세상을 피하는 선비(避世之士)를 따르는 것이 어떻겠는가?” 공자가 말한다. “새나 짐승하고만 세상을 살 수는 없다. 사람들과 함께 살 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 천하에 道가 없으니 내가 바꾸려(易)하는 것이다.”

 

易! 근본적 단절과 전환이 일어난다. 어떤 권력도 특정한 ‘진리게임’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자가 이상화했던 주나라의 권력은 ‘天命’이라는 진리를 창출하면서 탄생하였다. 그러나 ‘無道’한 세상에서 진리는 더 이상 하늘의 로고스가 아니다. 道는 이제 그것에 뜻을 두고(“志於道”, 0409/0706), 도모해야 하는 것(“謀道”, 1531), 신실하게 믿어야 하는 것(“信道”, 1902),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學道”, 1704), 능숙해져야 하는 것(“善道”, 0813), 함께 나아가는 것(“適道”, 0929)이 된다.

고로 “人能弘道, 非道弘人”! (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道를 넓혀야 하는 것이다 : 1528)라는 언명은 ‘진리게임’의 규칙이 바뀌는 순간을 드러낸다. 즉 道는 天命의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실존 속에서 생성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실천 속에서 검증해야 하는 것이다.

 

푸코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 질의하는 게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질의하고,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거나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사유의 형식을 ‘철학’이라 명명”하고 이에 대비하여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spirituality'”이라 불렀다. 즉 ‘영성’은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말한다.

 

공자 역시 질문을 바꾼다. ‘文武之道’는 어디에 있는가? 에서 ‘君子之道’를 어떻게 求할까? 라는 질문으로. 그리고 ‘求道’ 혹은 ‘영성’을 위해 나의 존재를 걸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道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 0408)

 

 

3. 자기배려하는 인간, 君子

 

알키비아데스는 가문 좋고, 인물 좋고, 운동도 잘 하고, 게다가 젊기까지 한 BC 5세기의 그리스 ‘엄친아’였다. 젊은 그는 조만간 ‘연단에 올라’ 아테네 시민들에게 ‘조언’을 하려고 하는 정치적 포부로 가득 차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알키비아데스에게 너는 네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지 알고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배려해야 한다(epimeleia heautou)”고 충고한다.

 

알키비아데스 만큼이나 정치에 대한 포부가 남달랐던 자장이 어느 날 스승인 공자에게 묻는다. “정치에 입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돌아온 대답은 “많이 듣고 보되, 말을 삼가고 행동에 조심스러움이 있어야 한다”이다. 자장은 또 이런 질문도 한다. “어떻게 하면 達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 역시 “네가 생각하는 達은 유명해지는 건데, 진정한 達이란 질박하고 정직하고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살피고 기색을 잘 관찰하여 신중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였다. 공자 역시 같은 대답을 한 셈이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려면 너 자신부터 가꾸라고.

 

이와 비슷한 문장은 <논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지위에 설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걱정하며,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알려질 만한 사람이 되기를 구하라 : 0414)라는 문장도 그것들 중 하나이다. <논어>에서 일관되게 반복하여 출현하는 ‘己’ - “求諸己”, “能近取譬”, “克己”, “修己”등 -라는 언표, 나중에 맹자에 의해 ‘反求諸己’로 수렴된 하나의 명제는 공자의 관심이 무엇보다 ‘시선의 전환’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 않으니,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 0101)라는 논어 첫 문장의 한 구절은 이런 ‘시선의 전환’이 가능한 인간, 무엇보다 자신을 먼저 돌보는 새로운 인간을 ‘군자’라 명명한다.

 

그렇다면 ‘反求諸己’의 ‘反’, 즉 시선을 자기에게로 구부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바른생활’에 대한 도덕적 명령일까? 아니면 ‘너나 잘 하세요’라는 냉소적 시선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대한 권유일까? 그러나 군자라는 인간은 도덕적 주체도 냉소적 주체도 심리적 주체도 아니다.

군자가 구부리는 것은 무엇보다 힘, 자기(己)를 관통하는 힘이다. 들뢰즈는 푸코가 그리스로 돌아간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문제는 “숨 쉴 수 없는 공백, 죽음 속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어디까지 선을 펼쳐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선을 접어야 그 선과의 접촉을 놓치지 않고, 외부와 공존하며 외부에 적용할 수 있는 내부를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주체화’를 새로운 선긋기라고 언급하였다. 그리스인들은 “힘이 스스로를 향해 구부러지게 하고 힘을 스스로와 관계 맺게 함으로써” ‘주체화’를 창출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화’, “외부의 선을 굴곡 짓는 작업”은 “단순히 자신을 보호하고 은폐하는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선과 대면하고 선에 올라타는 유일한 방법”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절대적 진리인 ‘文武之道’에서 생성해야 하는 진리로 변환된 ‘君子之道’는 <논어>에서 세 가지, 혹은 네 가지가 있다는 식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공야장」편에서는 군자의 네 가지 道를 “자신의 몸가짐에 겸손하고, 윗사람을 섬기는데 공경을 다하고, 백성을 사랑으로 대하고, 마땅한 방식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태백」편에서는 군자의 세 가지 道를 행동거지, 안색, 말하는 방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숫자나 종류의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一以貫之”, 힘을 구부려 자기 자신을 관통하게 하는 것, 즉 “忠”이라는 ‘자기전념’의 문제이다. <논어>라는 텍스트 안에는 어떻게 ‘자기(己)’를 저항의 거점으로 삼고 부단히 자기를 생성하는 끝없는 ‘주체화 과정’을 밟을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이 가득 차 있다.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道는 멀기 때문이다.)

 

4. 君子의 기술, 求道의 테크네

 

군자는 어떻게 군자가 되는가? 즉 “정체 없는 주체”(un sujet sans identité)는 어떤 형식과 절차에 따라 만들어지는가? 군자가 자기를 군자로 구축하고 설립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人은 어떻게 仁한 자가 되는가?

 

<논어>에서 仁은 정의(定義)되지 않는 개념이다. 仁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공자는 “겸손하고 너그럽고 신실하고 민첩하고 은혜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거나 “강하고 의연하고 질박하고 어눌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늘 겸손하되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라는 언급도 있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仁에 대해 “克己復禮”,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仁은 한마디로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자는 仁이 규범화되는 것을 피하는 방식으로, 仁을 각자가 맺는 진실의 관계, 그것에 따라 발휘되어야 하는 주체성의 효과 (집안에서도 나라에서도 원망을 받지 않는다 :1202, 비굴해지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다 :1706) 라는 차원에서 언급한다. 仁은 모든 인간들이 지켜야 하는 보편적 규범이 아니라 각자가 군자가 되기 위해 자기를 변형시켜야 하는 주체화양식의 총칭이다.

그리고 이 자기변형의 방법이 ‘切磋琢磨’이다. 마치 工人이 그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연장을 예리하게 만들듯이 군자는 자기를 갈고 닦아야 한다.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묻는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만은 못하다.” 이에 자공이 시경을 인용하면서 말한다. “시경에서 이야기하는 ‘如切 如磋 如琢 如磨’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대학>에서는 <시경>의 원문이 인용되어 있다. “詩云 瞻彼淇澳 菉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빛나는 군자는 ‘자르고’, ‘갈고’, ‘쪼고’, 또 ‘간’ 듯이 한다는 뜻이다. 이어 切과 嗟는 學을 말함이고, 琢과 磨는 자신을 닦는 것(自修)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따라서 자기변형을 위한 주된 테크네의 첫 번째는 學이다. 學이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키워드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공자가 스스로를 ‘好學者’로 부를 만큼 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흔히 <논어>의 學의 대상은 文, 즉 육예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새삼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공자가 자신은 “述而不作”(0701)했다는 대목이다. 창작하지 않고 조술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의 성인이 무엇보다 作者, 즉 예악문물의 창시자였던 점, 공자가 자신은 그런 성인(‘生而知之者’)이 아니고 다만 ‘學而知之者’라고 칭했던 것을 떠올릴 때, <논어>에서의 學은 무엇보다 ‘述‘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절대적 진리를 발견하거나 혹은 말해지지 않는 비밀을 해독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말해진 것 중 위험한 것을 빼고 다시 모으는 것이며, 듣거나 읽을 수 있는 것 중에 역시 부적절한 것을 제외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好學者’가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고”, “일을 민첩하게 하고 말에 신의가 있고”, “아랫사람에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리석음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 가듯,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두 번째 테크네, 쪼고 가는 일. 스스로를 닦는 것(自修)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논어>의「향당」편에는 공자의 일거수 일거투가 묘사되어 있다. 그 내용은 말하는 방법, 손님을 맞이하는 방법, 걷는 법, 수레 타는 법, 서 있는 법, 나아가 어떤 옷을 입는 지,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심지어 잠자는 법까지 아우른다. 군자는 무엇보다 그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품행과 처신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이 때 지식은 이런 일상에서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구축된다.

 

이런 점에서 삶의 테크네는 무절제와 과도함을 제어하는 기술이다. 힘이 지배하는 시대, 그 힘에 지배되지 않고, 혹은 그 힘으로 타인을 지배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힘을 “겨냥하지 않고 적중시키고”, “적중시키되 뚫어버리지 않는”(“射不主皮”, 0316) 미학적, 윤리적 실천의 방법은 없는가? 푸코식으로 말한다면 “윤리시학적이라고 지칭한 진실, 요컨대 의식의 비밀 속에서 해독되는 것도 아니며 직업적인 철학자들의 집무실에서 구상되는 것도 아니고 수행된 행동과 신체적 자태의 틀 속에서 해독되는 진실의 기술”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예술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미학적 존재, 그가 군자이다.

 

5. 자기통치와 타자의 통치

 

자기통치는 어떻게 타자의 통치로 이어지는가?

무엇보다 자기통치의 기술, 즉 자기를 형성하기 위해 쓰이는 모든 切磋琢磨의 기술들, 학습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테크네들의 절차와 규칙은 타인을 요청한다. 학습을 위해서는 스승과 동료가 필요하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다.

 

그리고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은 군자는 자기원인적인 존재, 즉 타자와의 관계에서 예속되지 않는 존재라는 점이다. 예속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도한 힘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남용된 권력으로부터 어떻게 거리를 유지할 것인가? 그것은 ‘隱’의 테마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것인가? 그것은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1323)의 문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와 맺는 관계에서의 ‘거리두기’이다. 어떻게 나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罔”, 혹은 “殆” ; 0215, 0617, 0624, 1510, 1805 ) 모든 과도한 힘들에 예속되지 않고 그 힘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매번 적절하게 “允執其中” (2001)할 수 있을까?

 

매번 진실로 적중하는 것(中), 혹은 적절한 것(義=宜)을 깨닫는 것(喩)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몸이 기우뚱할 때마다 곧바로 중심을 잡아가는 것과 같은 감각과 능력의 문제이다. 이 점에서 군자의 자유는 군자의 능력이다.

자유를 능력으로 이해할 때, 군자의 자기통치는 타자의 통치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힘의 남용을 경계하여 자신을 적절하게 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힘의 과도한 사용을 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향하는 기술은 자기가 타인을 향해 행사하는 기술과 동일한 기술이고, 자기를 윤리적으로 실존시킬 수 있는 능력은 타자 역시 미학적으로 실존시킬 수 있는 능력과 동일한 능력이다. 자기통치가 가능한 자만이 타자의 통치에 대한 자격이 있다. “君子不器”(0212)라는 표현은 자기통치와 타자통치를 하나의 원리로 작동시키는 군자의 잠재적 능력을 일컫는다.

 

또한 자기통치의 기술은 담론의 기호가 아니라 실천과 표현의 기호로써 타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논어>에는 군자를 표상하는 ‘泰’, ‘威’, ‘莊’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군자는 태연하고 위엄 있으며 장엄한 존재다. 군자는 자신의 신체를 기호로 삼는 존재이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윗사람에게 공경하고 충성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 중 첫 번째가 “백성을 대하기를 장엄하게 하면 백성들이 공경합니다.” 순 임금도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그는 다만 몸을 공손히 하고 南面하였을 뿐인데도 저절로(無爲) 다스려졌다.”

 

초월적 진리를 요청하거나 사법적 명령에 따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신체적 ‘감응 affecttion’ 을 통해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한 바처럼 ‘정서적 모방’은 계약 이전에 작동하는 사회성의 토대이다.

윤리적 주체들의 사려깊은 실천의 형식, 자기변용의 능력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들이 서로에 대해 정서적인 감응을 주고받는 관계의 질서가 <논어>의 “禮”, 아닐까? 핑거렛은 <논어>의 禮가 관습적이고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자체의 ‘magic’을 통해 인간과 인간관계를 생동적으로 살려내는 인간의 고유한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克己復禮”! (1201) 자기를 이겨서 예를 실천한다는 것은, 자기통치와 타자의 통치가 교차하는 곳에서 서로가 함께 변형을 지속시켜나는 집합적인 기술을 통해 매번 새롭게 구성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새로운 정치적 실천양식이다.

 

6. 어디에서 저항할 것인가?

 

권력에서 주체로 문제의식을 전화하면서 그리스로 간 푸코에게 물었다. 그리스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이에 대해 푸코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른 순간에 제기되었던 문제의 해결책 속에서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해결들의 역사가 아니며, 이것이 바로 내가 ‘대안’이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나는 문제들의 즉 의심스러운 일들의 계보학을 행하고 싶습니다. 나의 요점은 모든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모든 것이 위험하다면, 우리는 언제나 해야 할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고대 중국의 사유 역시 우리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논어>나 공자에 대한 열풍은 살짝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가, ‘求道者’로서의 ‘군자’라는 존재의 실천양식이 매력적인 것은 그것이 “개별화하면서 전체화하는” 근대 권력의 ‘이중구속’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통찰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경험적으로 (이것, 역시 ‘위험’하긴 하다^^)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앎이 의외로 허약하고, 권력에 ‘저항’하는 실천이 의외로 부실한 것이라고 느낀다. 그렇다고 지배에 대항하는 실천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지배에 대항할 때조차 우리가 어떻게 ‘정치적 실천’을 ‘윤리적 실천’과 포갤 수 있는가, 더 정확하게는 새로운 ‘윤리적 실천’을 통해 어떻게 기존의 ‘정치’를 변형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푸코에게 사유가 이론의 문제였던 적이 없듯이 나에게도 공부나 사유가 이론의 문제였던 적은 없다. 나에게 사유한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항상 실험한다는 것이고 매번 내 생각을, 내 삶을 새로운 것으로 갱신하는 것이다. 풀이로서가 아니라 실험으로서의 <논어>읽기, 가능할까?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 그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나의 신체, 삶 자체를 저항의 거점으로 삼을 수 있을까?

다시 그 화두를 붙들고 나의 <논어 읽기>는 계속될 것이다.

 


 

댓글 2
  • 2020-04-12 14:53

    1. "내가 나와 맺는 관계에서의 ‘거리두기’"

    나에게 작동하는 힘(권력)들을 인식이 아닌 방식으로, 감각으로 거리두기를 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까요?
    인식이 선행되지 않고 가능할까요? 자유가 인식없이 얻어질까요?
    저는 이 거리두기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2. "자기통치의 기술은 담론의 기호가 아니라 실천과 표현의 기호로써 타자에게 영향을 끼친다"
    "나의 신체, 삶 자체를 저항의 거점"

    인식이 아니라면 위의 말처럼
    자기통치, 저항의 거점은 '나의 신체'이라는데.. 어쨌든 이 말에는 공감이 갑니다.
    요사이 전 저의 온갖 생각들과 싸우며
    그저 단순히 내 신체에 반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해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 2020-04-12 15:47

    모든 것이 위험하다면 해야 할 일도 많다!
    는 푸코의 말이 콕 와닿네요!!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는 표를 안 찍는 일을 해볼랍니다.
    상황은 안 좋지만 차선의 선택을 하자는 그 말을
    이번엔 안 듣기로...
    차선과 차악과 최악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그래서 너 때문에 현실정치가 이 꼬라지라는 비판을
    감수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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