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부루쓰 6] 비전이고 나발이고

히말라야
2019-07-11 20:22
540

1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듯 하늘이 너무 쨍한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어느 바닷가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한 목소리를 들었다.


“선생님! 파지사유 냉장고 안이 너무 뜨거워요!”


 냉장고 안이 뜨겁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나는 꿈 속에서 이건 꿈이라 확신 했고, 꿈 속의 나는 목소리가 잘 안 나와 말하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간신히 소리를 내어 답했다.


“다른 냉장고로 옮겨 놔!”


 썰물이던 바다가 밀물로 변해 파도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나는 잠에서 깨어 났고, 시간을 확인하려 머리맡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을 열었다. 그런데... 


“선생님! 파지사유 냉장고 안에 있던 것들 김치냉장고랑 주방냉장고에 나누어 넣어 놓았어요.”


 오잉? 냉장고가 뜨겁다던 목소리가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게다가 일요일 오후, 공유지의 냉장고가 뜨거운 기현상이 일어났을 때,  ‘나 같은 사람’을 찾는 것이 정녕 꿈이 아니란 말인가?



2

  뭐, 그래, 나도 소싯적에 ‘수위(守衛)아저씨’를 흠모했던 적이 있다. 책상이 삐걱거려서 수업시간에 편안히 졸기 힘들다 여겨질 때면, 그는 어김없이 작은 연장통을 들고 나타나 잠깐의 망치질로 다시 탄탄한 책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무더운 여름 날 교실 천장에 매달린 유일한 선풍기는 곧잘 고장났다. 그럴 때도 그는 어김없이 나타나 신성한(?) 책상을 성큼 밟고 올라 천장까지 긴 팔을 뻗어 구원의 바람을 되살려 놓고는 연장통을 들고 유유히 사라져 갔다. 

 나와 친구들은 그를 ‘수위’나 ‘소사’가 아니라 당시 우리가 열광하던 과학액션 미드의 주인공이었던 ‘맥가이버’라 불렀다. 그가 밟고 올라가 선풍기를 고치는 책상 앞에 앉아, 꼬박꼬박 과학수업을 받아도 우리는 그가 하는 것처럼 할 수는 없었다. 그가 고쳐준 마이크를 부여잡고 조회시간마다 길고 지겨운 훈화말씀을 늘어놓는 교장보다, 선풍기도 고장난 더운 여름 날 어려운 말로 우리를 더 덥게 만들기만 했던 과학선생보다, 지와 기술을 겸비한 우리들의 ‘맥가이버’가 내 눈에는 훨씬 더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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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파지사유의 청소기가 고장났을 때, 함께 회의하던 K가 “우리는 ‘소사’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얼마나 깜짝 놀랐던가? 내 뇌리에 새겨진 소사는 그 멋진 ‘맥가이버’같은 사람이지 결코 나 같은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난 그저 ‘큐레이터’일 뿐 절대로 ‘소사’는 아니라고 K의 말을 (마음 속으로) 부정했었다. 그러나 일요일 오후 냉장고가 고장났을 때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라면, 그는 ‘소사’가 아니고 누구랴. 

 그러나 지금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청소기와 세탁기의 전원 버튼만 누를 줄 아는 사람이다. 내게 냉장고란 늘 켜져 있어 전원 버튼조차 누를 필요가 없는 그런 녀석이기에, 그저 문을 여닫기만 할 줄 알면 되는 물건이 아닌가! 그 밖에 내가 그 녀석과 대면하는 건, 가끔 김치 국물이 흘러서 행주로 닦아 내는 시간 정도? 그런 내가 어쩌다가 공유지의 냉장고가 고장났을 때, 가장 먼저 호출되는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이건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닌가?



3

 사실 바닷가에서 꿈결같은 전화를 받기 전날 오후에도 나는 한 양동이의 땀을 흘렸다. 토요일 당번을 마감하려 할 즈음 불길하게 생긴 커다란 박스가 파지사유에 배달되었다. 나는 뭔가 짚이는 데가 있어 내 손으로는 열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 함께 있던 Y가 ‘너가 큐레이터 잖아?’라는 눈빛으로 박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고 나 혼자 느꼈)던 것이다. 

 그 눈빛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박스를 개봉하니, 아니나다를까, 지난 주 ‘소사’ 운운하던 K와 회의하다 AS를 보냈던 고장난 청소기의 일부였다. 슬쩍 창고에 넣어놓고 빨리 마감을 하고 싶지만, 아직도 집에 안 간 Y가 또다시, ‘너가 큐레이터잖아?’하는 눈빛으로 박스에서 나온 청소기의 일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고 또 나 혼자 느꼈)었던 것이다. 비지땀을 흘리며 이렇게 저렇게 청소기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어디선가 졸린 눈을 하고 ㄸ가 나타나 나를 거들기 시작했다. Y는 그제야 안심한 듯 “덥다, 더워!”하며 총총히 사라져갔다. 

 그 뿐 만이 아니다. 몇 주 전부터 화장실 세면대의 배수 파이프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새어나온다는 민원도 빗발쳤다. 오래된 배수관이 삭아서 갈아 넣은지 두 달도 채 안되었는데 말이다. “기계공학 출신” ㅃ와 함께 배수 파이프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여러가지 실험을 해봤다. 그 결과 우리 둘은 물을 살살 틀어 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걸레를 깨끗이 빨고 싶은 친구들은 자꾸만 물을 세게 틀었고, 그 때 마다 옛 것과 새 배수관 이음매에서는 계속 물이 새어 나와, 그 틈을 더 크게 갈라놓았다. 또 다시 민원이 빗발쳤다. 어쩐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테이프로 칭칭 동여 매는 일 뿐이었다. 아직은 괜찮지만, 몇 달 뒤엔 과연 어떻게 되어있을지 자못 궁금하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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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뜨거운 바람을 내뿜는 냉장고 앞에서는 제아무리 기계공학 출신의 ㅃ도 그저 AS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 맥가이버처럼 냉장고를 뜯어 꼼꼼히 살펴보던 AS기사님은 가장 중요한 기관인 모터가 회생불능 상태라고 판정했다. 파지사유 오픈 시에 중고로 들여놓은 그 냉장고의 모터는 자그마치 15년이나 하루도 쉬지않고 일해왔고 이제 그 수명을 다한 것이었다. 

 자그마치 15년!이라는 말에 나는, 내가 15년 동안 사용하고 있는 물건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나는 거다. 늘 전세 난민인 까닭에 몇 년 마다 가장 커다란 물건인 집도 바뀌고, 그럴 때마다 안 쓰는 물건을 버리고 안 쓸 물건들을 또 새로 들여놓는다. 잘 안 쓰는 물건들은 물론이고, 잘 쓰는 물건들도 그저 쓰기만 할 뿐이지 매만지고 닦으며 정을 붙이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은 커녕, 물건을 쓸 때마다 거기에 낀 먼지를 닦고 그 물건 자체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아무 잘못 없는 물건에게 화를 낼 때도 많다.

 요즘 문탁에서는 ‘사물과의 동맹’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같은 극심한 기계치로서 사물에게 자주 화를 내는 유형의 인간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사물과 동맹을 잘 맺는 이들은 아마도 사물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사물의 성질을 파악하려하고 그것을 오히려 잘 활용하는 능력을 갖고 있겠지. 이렇게 생각해보니, 사물과 동맹을 잘 못 맺는 나는, 어쩌면, 사람과도 동맹을 잘 맺기 힘들겠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이르러 기분이 좀 나빠지려 했다.

 그 때 열 여섯 살 된 큰 딸이 다가 와, 내가 버리려고 내 놓은 이불을 꼭 끌어안고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한다. 큰 딸이 태어날 때부터 쓰던 작은 아기용 이불인데, 너무 작아서 잘 쓰지 않고, 오래되다 보니 찢어지기도 해서 버리려고 문간에 내 놓았던 것이다. 내 의식은 ‘사물과의 동맹? 사람과의 동맹? 이불과의 동맹?...’ 따위로 두서없이 흘러가고 그러는 사이에 내 손은 그 작은 이불의 찢어진 곳을 꿰매고 있었다. 그런데…

 상처를 어루만지며 꿰매다보니, 그 이불을 아주 자세히 가까이서 들여다 보아야만 했다. 그냥 동물 무늬지 했었는데 엄마개와 아빠개 그리고 아기강아지가 반복되고 있었다. 앞 면에서 엄마개의 코를 꿰매고, 뒷면에서 아빠개의 눈을 꿰맸다. 그러다가 퍼뜩, 이 작은 이불이야말로 15년 넘게, 나와 함께 살아 온 '사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 정말! 15년 만에 나는, 엄마 개의 코 뒤에는 아빠 개의 눈이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버릴 뻔 했던 그 이불은 그 순간 내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었고, 그 날부터 내겐 ‘세상 소중한’ 이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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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천동을 둘러싼 우주의 기운에 뭔일이 생긴건지 아니면 연초에 ‘지신밟기’를 해서 그동안 자던 토지신들이 다 깨어났는지, 그도 아니라면 요일마다 파지사유를 지키는 큐레이터들이 모두 마이너스의 손인건지, 연이어 일어나는 이러한 사물들의 반란으로 인해 기계치인 나는 요즘 약간 얼이 나간 상태다.

 얼마전 누군가 이런 내게 큐레이터로서의 비전이 뭐냐고 물었다. 그렇지, ‘소사’도 아니고 ‘수위’도 아닌 모름지기 ‘큐레이터’라면, 멋지고 감동적인 비전을 세워야지. 그런데 내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파지사유의 냉장고와 청소기와 화장실 배수파이프가 어른거릴 뿐이다. 아~~ 대체 나의 맥가이버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잠자리에 들며, 상처를 꿰맨 작고 낡은 이불을 꼭 쥐고 중얼중얼 주문을 왼다.


 ‘내가 큐레이터인 동안에는, 더 이상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기계들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혹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파지사유 당번이 아닌 날이기를!’

 ‘만약 당번이 없는 일요일 오후라면, 기계가 무서운 나말고 제발 제발 “기계공학 출신”의 ㅃ에게 연락하기를!’ ^^


댓글 6
  • 2019-07-12 07:04

    으하하~ 히말라야님 더운 고생이 많습니다.

    우리의 냉장고가 그렇게 사망하셨다니 이거 큰 일이네요...

    • 2019-07-12 11:30

      27만원에 기사회생하셨어요. 앞으로 15년간 더 쓸 수 있을 거에요~ 

  • 2019-07-12 09:45

    적절한 때, 적절한 장소,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발동한 히말라야의 관심법!! ㅋㅋㅋ

  • 2019-07-12 12:28

    재밌다. ㅎㅎ '사물과의 동맹'이라...물건을 곧잘 버리는 나로써는 반성해야 할 대목.

    이제는 슬슬 내가 가진 사물들에 정을 좀 붙여야 할듯...^^

  • 2019-07-12 14:21

    너무 웃겨요ㅎㅎ

    빵터짐ㅎㅎㅎ

    ㅎㅎㅎㅎ

  • 2019-07-13 09:59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시간도 왔다가고...

    사물들도 늙어가는거죠. 

    손가는 게 많은 곳임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 사물들의 속사정을 모르니...

    큐들의 첫번째 임무는 ‘소사’ 일런지도...

    큐들 모두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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