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화장품 상식④] 로션 흔들어 쓰기

자누리
2019-05-26 10:23
339

로션 흔들어 쓰기

 

1. 구체성의 경제


처음 생산을 할 때 걸렸던 문제 중 하나가 제품이 망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곰팡이가 생기거나 로션의 점성이 풀어지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방부제를 늘려야 하나 엄청 고민을 했습니다. 한 여름에는 조금 더 넣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방부효과가 더 좋은 화학방부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들기도 했고요. 그런 고민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풀렸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망가진 제품을 들고 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기에 우리 기술이 좋아졌나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느티나무가 말하더군요. 친구들이 로션이 망가져도 그냥 쓴다는 겁니다. 제가 수작을 할 때 강조하는 말이 있는데, 로션은 혼합물이다, 우유를 응고시켜 치즈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연왁스를 녹여서 넣으면 식으면서 로션의 점성이 생기는데, 이게 간혹 풀려서 정말 우유처럼 되어버리는 게 그간의 문제였습니다. 수작을 해본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점성이 풀린 로션을 그냥 흔들어서 쓰는 것이었습니다. 느티나무의 한 마디, “흔들어 써도 되는 거 맞지?”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지식의 힘은 크구나, 알면 저렇게 응용이 되는구나’, ‘이게 여차하면 <불만제로>에 나올 일인데도 저 친구들은 참 태연하구나’, 등등. 그 후 방부제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의논해서 풀기도 하고, 공유된 지식을 기반으로 각자 알아서 풀기도 하니 굳이 양을 늘리거나 더 좋은 방부효과에 기댈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smxl.jpg


뿐만 아니라 어디에나 적용되는 더 좋은 방부효과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 일도 있습니다. 여러 명이 수작을 하면 각자 자기 것만 만들지는 않습니다. 제품을 나누어서 만들므로 로션이든 스킨이든, 한 팀이 여러 개를 만들어서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똑같이 만들어 가도 유독 그 친구 로션에서만 곰팡이가 잘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데도 말입니다. 어쩌면 그 집에 로션을 둔 장소가 문제였을 수도 있습니다. 습기 많은 곳에서는 보관하지 말아야 하는데, 보통 욕실에 두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또는 다른 이유일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다양한 경우에도 똑같은 효과를 보려고 하면 방부제의 강도는 얼마나 커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방부효과를 방부제로 높이기보다는 적절한 보관환경을 찾는 게 더 좋은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2. 메티스


제게는 이런 경험이 특별했습니다. 저는 이과생이어서인지 몰라도 추론이 가능하고 분명한 수학적 사실을 좋아했습니다. 또 한 때 철학을 재전공할까 생각할 정도로 보편적 원리를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다르고, 다양하게 응용가능한 일들이 현실에서 더 유용하다는 경험들은 저를 유연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 이런 감각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지 고민하다 보니,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를 공부하면서 메티스라는 말에 꽂혔습니다. 메티스는 영어로 잔꾀, 교활한 지식으로 번역된다는데, 우리말로는 상황에 유연한 전술개념에 가까운 듯합니다. 스콧은 국지적이며 구체적인 민간의 지혜를 일컫는 말로 사용합니다. 국가적, 자본주의적인 보편성의 과학, 기술(이것은 테크네라 합니다)은 더 이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며, 그 대안으로 메티스를 검토해보자고 합니다. 저는 쉽게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완벽한 방부제를 만드는 데만 너무 기대지 말고 규모의 경제, 소규모의 경제 방식을 만드는 실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완벽한 과학에 기대면서 불완전함의 공포에 떠는 것은 우리를 너무 무기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rnrrk.jpg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메티스는 우습게 보고 완벽한 과학에 기대게 된 것일까요? 환경운동연합에서 나온 자료에도 이런 언급이 있더군요. 인류는 지역마다 식품을 오래 저장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식품이 상품이 되면서 보존기간을 턱없이 늘이려고 했고, 방부제에 의존하게 되었다고요. 예전에도 소금에 절이기, 연기에 그을리기, 햇볕에 말리기 등의 방식으로 여름 식품을 겨울에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식품과 지역의 특성에 맞추어 각기 다른 보존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화학방부제와는 다릅니다. 또 보존 기간도 턱없이 길지 않습니다.  탈자본주의, 탈상품성을 고민한다면, 무리하지 않기, 진시황의 불로초를 과학의 힘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지 않기, 이런 다짐을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애매모호' - 대중지성


메티스의 기예는 말 할 수 있는 정확한지식이 아니라 애매모호한지혜를 따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감지하거나 느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차이를 구별해내는 실질적인 역량을 말합니다. 사냥꾼이 풀이 누운 방향과 냄새, 새들의 배치 등으로 사냥감을 뒤쫓는 기예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기예의 역량은 차이들에 대한 기민한 감응력에 좌우됩니다. 그런 점에서 구체적이면서도, 또 구체적이어서 풍부한, 그런 실험을 요구합니다. 이런 실험은 실험실의 실험과는 달리 사용자들이 실험의 혜택을 누릴 뿐만 아니라 직접 실험의 대상이 됩니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의 실험 대상이 엄마 자신과 그 자식들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메티스는 아무래도 친밀한 관계들에서 잘 통할 것 같습니다. 쓰는 사람들이 실험 대상인 한 동물실험같은 애꿎은 피해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저 마을까지의 거리가 얼마지?’-‘밥 할 시간정도 될 거요라는 문답에 실려 있는 의미들을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메티스의 애매모호함은 판매자-소비자의 권리-의무 관계를 흐리게 만드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저는 이것이야말로 대중지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책임을 묻기에는 너무 가깝고, 내 의견을 말하지 않기에는 너무 잘 알아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맞대는 자리를 함께하는 삶, 아마 이런 대중지성의 기예에 제가 꽂힌 것이라 생각됩니다. 마을경제는 구체성의 경제이며, 친밀한 삶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실험을 더 재미있고 지속할 수 있을까요?

댓글 5
  • 2019-05-27 08:59

    하루에 두 번 갈등합니다. 스킨을 쓸 때 마다.

    이게 얼마 전부터 뭔가 이상한 것이야요. 뭔과 물과 다른 성분이 분리되어 있는 것 같고,  약간의 띠 같은 게 있기도 하고...

    그러니 잠시, 아주 잠시... 음...이거 써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버뜨...

    그냥 흔들어 써요.

    그리고 아무 문제가 없시유^^

    자누리잖아유~~ ㅋ

  • 2019-05-28 00:42

    우리가 그냥 흔들고 문질러 쓰는 이유는

    친구들이 만들어준 화장품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자누리에의 작업은 소외된 노동과는 다릅니다.

    제가 자누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같은 일을했다면 

    이런 마음은 아니었을것 같습니다.

    여러 재료들이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모양,색상, 질감이 정말

    재미나지만  그렇게 생산된 것이 친구들에게로 가서

    자기 역할을 할 것을 생각하면 여간 보람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게 마을경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2019-05-28 12:26

    메티스, 애매모호~

    이런 말 좋아요~~

    전 보관 용기, 발효 용기 등에 'LOVE' 또는 '사랑해~'라고 써놔요.

    그럼 발효도 잘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오래 보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ㅋ

    로션 라벨에 좋은 말을 살짝 써넣는 건 어때요? ㅎㅎㅎ

  • 2019-05-29 09:45

    <퇴근길 대중지성> 수작을 통해 접한 자누리쌤 스킨과 로션..잘 쓰고 있습니다.

    스킨 먼저 쓰고 있는데...저는..층이 생기는게...당연하다 생각해서..(천연이니까..) 

    쓸때마다 정성스레~! 퐉퐉~!! 흔들어 쓰고 있어요. 

    아토피 민감성 피부라...예민의 끝..뽀쬭뾰쪽인데..

    정말 정말 너무 좋아요..지금 무척 매끈해졌답니다..

    단점은...좋은 맘에~ 너무 뿌려댄다는거...벌써 거의 다 썼다는거..ㅎㅎ

    곧 또 부탁드려야겠습니다.^^

  • 2019-05-30 16:50

    그렇지 않아도, 퇴근길대중지성에서 함께 만든 '로션'에 층이 생겨서

    우리가 뭘 잘못 만들었나 고민했었는데...ㅎㅎ 그냥 흔들어 쓰면 되는 거였군여. ^^

    그리고,  "책임을 묻기에는 너무 가깝고내 의견을 말하지 않기에는 너무 잘 알아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맞대는 자리를 함께하는 삶 - 대중지성의 기예" 이 말 너무 좋아요. 역시 자누리샘이셔. ㅎㅎ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924
에코프로젝트 l, 루신3주차 후기 (3)
봉옥이 | 2023.09.10 | 조회 270
봉옥이 2023.09.10 270
923
<부분적인 연결들> 두번째 시간 발제 올립니다 (3)
띠우 | 2023.09.08 | 조회 134
띠우 2023.09.08 134
922
시즌2 첫시간 <부분적인 연결들>1차시 후기 (2)
뚜버기 | 2023.09.06 | 조회 153
뚜버기 2023.09.06 153
921
시즌 3 <루쉰, 혁명의 문학> 3회차 공지입니다 (7)
토토로 | 2023.09.04 | 조회 315
토토로 2023.09.04 315
920
시즌 3 <루쉰 혁명의 문학> 2회차 후기 (5)
| 2023.09.03 | 조회 275
2023.09.03 275
919
<부분적인 연결들> 메모 올립니다. (7)
곰곰 | 2023.09.01 | 조회 160
곰곰 2023.09.01 160
918
시즌 3 <루쉰, 혁명의 문학> 2회차 공지입니다 (7)
노라 | 2023.08.28 | 조회 369
노라 2023.08.28 369
917
에코Ⅰ시즌 3 <루쉰, 혁명의 문학>1회차 후기 (4)
느티나무 | 2023.08.26 | 조회 276
느티나무 2023.08.26 276
916
시즌 3 <루쉰, 혁명의 문학> 1회차 공지입니다 (8)
토토로 | 2023.08.16 | 조회 343
토토로 2023.08.16 343
915
2023 에코프로젝트 Ⅱ-2 문명 너머를 사유하다 (8)
뚜버기 | 2023.08.15 | 조회 961
뚜버기 2023.08.15 961
914
시즌2 마지막 후기 "마무리는 거리에서~~" (6)
띠우 | 2023.08.14 | 조회 309
띠우 2023.08.14 309
913
시즌 1 기후위기와 생태담론을 마치며 (6)
느티나무 | 2023.08.01 | 조회 219
느티나무 2023.08.01 219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