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자본론 해설

요요
2018-11-18 10:43
313

녹색자본론 해설 221~223

 

矢田部 和彦やたべ かずひこ

 

2002년에 발표된 나카자와 신이치씨의 녹색자본론의 문고본 출판에 즈음하여 해설을 써달라고 의뢰하는 메일을 치쿠마서방의 편집자로부터 갑자기 받았다. 사상도 민속학도 이슬람도 문외한인 나에게 해설이라니 무모한 의뢰이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발표 당시 녹색자본론을 읽고 분명 깊은 감명을 받았다. 2001911일 세계를 흔들었던 폭력을 배경으로, 곧바로 일신교와 다신교를 둘러싸고 이만한 통찰이 일본에서 제시되는구나라는 생각은, 트윈타워에 들이닥친 제트기의 영상과 세트가 되어 나 자신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 한사람만의 것은 아니었다. 많은 독자가 같은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감동과 해설은 별개이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마음이 감동되었다고 자동적으로 해설을 쓸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본디 나카자와 신이치씨도 출판사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굳이 나에게 의뢰가 온 것은, 내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 세계에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으면 이슬람 문화는 확실히 먼 존재이고, 일상에서는 거의 접점이 없어서, 대다수 일본인은 실감하지 못한다. 역으로 유럽에서는 아랍문화와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각 나라의 존재 방식, 역사적 맥락에 따라 접하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평소의 생활에서 이슬람 문화권의 사람들과 관계없이 사는 것은, 집에 틀어박혀 있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다. 집에 있더라도 TV를 켜면 뉴스의 형태로 곧 날아 들어온다. 프랑스에서는 중동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시각각의 상황이 그대로 교실이나 지역사회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각지에서 사람이 이주해 오고 있는 파리 같은 도시공간에서는 그것은 당연하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하바드·루바비치파라는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유대인 가족이 살고 있고 (샤밧트의 날에는 전기기구를 사용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토요일은 자주 대신 건물의 도어를 열어준다거나 전기를 켜 주거나 한다), 집 앞 거리에는 마로닛토라고 불리는 기독교 계통의 레바논 가족이 경영하는 레바논 요리점이 있다. 그 근처에는 마리사람인지, 이슬람계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모이는 미용실이 2, 3년 전에 가게를 열었다. 그 앞에는 밤늦게까지 열려 있어서 요긴하게 이용하는, 모로코 사람이 경영하는 작은 식료품점이 있다. 하나 앞의 거리에는 알레키산토리아 출신의 유대계 이집트인이 자랑하는 쿠스쿠스를 파는 가게가 있고, 모로헤이야가 먹고 싶을 때 자주 찾는 이집트 식료품점도 있다. 이들 가게는 모두 집에서 걸어서 3분 이내에 있다. 마찬가지로 3분 이내에 미니 중국거리가 펼쳐지는 거리도 있다. 예를 들자면 한도 없지만 파리의 거리에는 이처럼 서구·중동·아프리카·아시아가 뒤섞여 있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 문화, 역사와의 관계를 지키면서, ‘공화제라는 정치원리가 강고하게 지배하는 공공공간에서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댓글 7
  • 2018-11-18 12:07

    녹색자본론 전체편집본입니다.(에휴~ 돌연, 이걸 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혀서...) 

    • 2018-11-18 15:58

      오늘 밤에 하려했는데  ㅋㅋ (속으로 미리 누가 할지도 모른다는 잔머리를 굴리면서)

  • 2018-11-18 14:38

    p.230~232 해석

     

    원리로서의 이슬람은 상징계에서 반짝이는 다양한 기호와 이미지를 경계하고, 영원의 동일성을 추구한다. 자칫하면 거기에서 살고 있는 강인한 정신은 편협한 것으로써 우리들의 눈에 비치기 쉽다. 실제로 9·11 이후 일본에서는 이슬람을 원리주의와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원리주의는 그 본질에서 배타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제의 사상이란 연고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원리로서의 이슬람은 <녹색>이다. 꾸란에서 에덴의 동산에 대한 언급이 있는 구절에 <녹색>이라는 색이 사용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녹색은 완전한 상태, 유일신이 최후의 심판을 할 때에 정의의 심판을 내린 후에 찾는, 천상의 문자 그대로 녹색이 넘쳐흐르는 풍요로운 세계가 약속하는 지복의 날들을 표상하고 있다(따라서 꾸란의 표지와 장정 이외에는 특별한 색인 녹색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녹색>이 어둠에서 의미하는 것의 하나는 이슬람의 본질적인 양성긍정성이다.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원죄의 사상을 싫어한다. 나카자와 신이치씨가 지적하듯이 원리로서의 이슬람은, 윤리는 말하지만 금욕을 말하지않는다.

    우상숭배는 엄하게 금지하고, () 자체를 싫어한다. 계율은 적지만 엄격하다. 그러나 이것은 지복의 부정으로는 결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첨탑에서 높이 흐르는 기도로의 권유’. 하루에 5번 행해지는 이 권유는 엄숙하지만 어디까지나 부드럽다. 사막에 오아시스에 마음에 낭랑하게 울리는, 노래라고도 기도라고도 할 수 없는 소리는 듣는 자를 매우 매료시킨다. 어딘가 쓸쓸하고, 그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혹은 결코 없는 소리. ‘매혹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소리가 예언자 무하마드의 대리로서 유일신 알라의 계시가 있었음을 위에서 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수피즘의 신도단체인 터키나 이란의 다르빗슈들의 춤은 아래에서 신을 희구하는 움직임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일단 춤추기 시작하면 (그들의 춤은 스스로의 몸을 축으로 해서 그저 회전하기만 한다), 길고 흰 제례복이 꽃처럼 열리고, 춤추는 손들은 아로새긴 몇 개의 혹성처럼 유연히 자전하고, 이윽고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 신과 일체화한다. 댄서들의 불가사의한 가련함, 황홀에 빠진 얼굴, 회전하는 신체의 심플한 움직임, 그리고 댄서 전체가 집단으로서 빚어내는 색다를 정도의 섬세함, 그 어느 것이나 다 현실의 부풀림감소도 되지 않는 정직한 존재유일신을 향한 직접적인 연결을 보여준다. 그러나 춤추는 공간은 분명히 열락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 열락은 이집트의 위대한 여성가수 움므 쿨숨의 연주회에서도 청중과 공유된다. 가난한 어린 시절에 꾸란을 암송하면서 연마한 음악적 센스를 가지고 그녀가 사랑과 국가를 노래하고, 아랍·이슬람 음악의 오랜 전통이 길러온 복잡한 리듬과 선율을 구사하면서 즉흥연주에 흥겨워하고 장식음을 교묘하게 다루면, 사람들은 곡중의 도처에서 떠들고, 일어서고, 박수를 바친다. 한 시간을 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곡 중에 파도처럼 유쾌하고 기쁜 때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찾아온다.

    원리로서의 일신교는 차갑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다. 광신적이지도 않다. 진실된 완전함은 신이 종말에 약속하고 있지만, 이 현실세계로부터 그 완전함에 진지하게 다가가려는 사람이 시험하는 바야흐로 그 때에, 유일신의 뜻의 구현으로서 풍요로운 <녹색>이 눈앞에 나타난다.

  • 2018-11-18 16:27
    p. 223-224 해석
      또 일단 이러한 일상의 수준을 벗어나, 서구라는 것에 생각에 잠기면 그리스철학이 이슬람의 지식인들을 경유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예를 끌어내오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이슬람의 세계 없이는 서구근대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고 하는 사실에 곧 직면한다. 근대는 어느 특정 문화 ・민족・사회가 독자의 재능을 발휘하는 것에 의해 달성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장기에 걸쳐 지중해 세계를 중심으로 축적되고, 이슬람 문명이 숙성시켜온 것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의 끝(이민족의 내습에서 비교적 지킬수 있었던 이른바 문명의 ‘외부’)에서 지금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형태를 가지고 수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정은 복잡하고 문제는 여러 갈래에 걸쳐져 있지만 여기서는 『녹색 자본론』의 매력에 대해서 내가 느낀 것을 몇개인가 말하고 싶다. 
      수록된 네개의 텍스트 중 제일 길고 단행본인 그래서 이번 문고판의 표제도 된 ‘녹색 자본론’으로 제목지어진 논고이다. ‘녹색 자본론’, 이 <녹색>이라는 표현의 사용법이 절묘한데, 나카자와 신이치라는 사상가의 독창성이라고, 이렇게 써버리면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자세로서의 세계에 대한 한없는 ‘다정한(상냥함)’을 나타내고 있다 처럼 생각되면 안 된다. 보통이라면 제목은 ‘이슬람과 자본주의’ 언저리로 귀결되지 않을까? 적어도 그쪽이 훨씬 알기 쉽다. 또는 M・베버의 어조를 흉내내서 ‘이슬람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이라는 방향을 가지고 가는 방법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것대로 아주 이해하기 쉽다. 왜 <녹색>일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본문에서도 <녹색>이라는 표현은 최후의 결론 부분의 “원리로서의 이슬람은 거대한 한 권의 살아있는 ‘녹색의 자본론’이다” 라는 한 구절에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이 논고가 읽고난 후에 특별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바로 이 최후의 부분에 수수께끼처럼 <녹색>이 돌연 출연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 <녹색>이 암시하는 것에 닿기 전에 ‘녹색 자본론’의 내용을 간단하게 확인해두자.

  • 2018-11-18 20:04

    P226~228해석 띠우

    많음이라는 이항대립을 도입하는 것에 의해, 생성하고 변화하고 증식하는 것(‘모노’)에 대한 인간의 흔들림(유동?)이라는 모티브가 일어났다. ‘운동하는 전체성으로써의 이 불확정하고 게다가 매혹으로 가득찬 현실세계--그리고 그 불확정성 때문에 발생하는 불안을 누르기 때문에 이윽고 시동하는 것이 될 이윤·이자·자본의 세계--에 대해서, 순수한 의 실존을 느끼게 되었던 인류는 어떻게 대항해야만 할 것인가. 인간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을 생각할 경우, 행복은 모노의 존재, 모노의 교환과 그것이 초래하는 다양한 마술적 효과와 어떻게 관계 맺어야만 할 것인가.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대답을 모색해왔던 인간의 행위가, 원리로서의 일신교. 그리고 이 원리까지 내려감에 의해, 존재의 철학과 교환의 철학을 동시에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또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을 같은 일신교로서 공통적으로 논하고, 다양한 세계가 초래하는 흔들림에의 각각의 대항법의 차이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하는 경우의 일신교의 초기조건의 차이가 명확하게 된 것이다.

    유대교는 내부(유대인 커뮤니티)과 외부를 구별하고, 자기증식을 초래하는 이익장치(금융경제)를 밖으로 향해서만 적용하는 방법을 채용한다. 그리스도교는 매우 복잡한 삼위일체의 사고방식을 고안해낸 것에 의해, 유동적인 지성이 활약할 수 있는 장을 일신교의 핵심부분에 준비하고,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가 전개할 수 있는 듯한 현실과 잉여를 사고하기 위한 길(화폐론)을 부단하게 창출해왔다. 신과 그리스도의 관계의 도입은, ‘유한 세계에 무한이 차례로 들어가고 있다터무니없는사태의 발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무한은, 화폐의 수학적 무한으로 통함과 동시에, 그 무한성을 사고가능하게 한다. 또 자유로 사랑으로 흘러넘치는 정령을 상정하는 것에 의해서,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하고, 타자에 대해 열려졌던, 증여와 사랑으로 보이는, 발출의 관계를 구조 내에서 거둬들이게 된다. 그 결과, ‘생명적인 프로세스’-- 증식의 과정--이 그리스도교의 신의 구조내부에서 조절되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아버지-아들-정령이라는 삼위일체의 구조로부터 한 편으로는 마르크스 자본론으로, 또 한편으로는 근대를 거쳐 후기근대와 글로벌리즘으로, 라는 이중의 흐름이다. 원리부터 읽는 이 접근은, 칼뱅파의 예정설이라는 분석틀, M·베버의 말하자면 속박에서 해방되었던 자본주의론으로써, 특이한 빛을 풀어놓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작동하는 인류학적 사고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만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류학적 사고가 단지 제정신이 들었던 방법론만 있다면, 2001911일을 받아서, ‘사고의 방향이 나를 몰아대서라고 나카자와 신이치씨가 서문에서 쓴 것과 같은 압도적인 내적 필연으로는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의해야하는 것은, 인류학적 사고가 방법이기 전에 하나의 윤리로써 작동하고 있는 점이다. 사람은 우연히 어떤 시대 · 어떤 지역에서 태어나지만, 그 우연성이 강요하는 사유에로의 제약을 초월하려고, ‘인류라는 수준에서 사고하려고 하는 앎의 움직임 그 것이, 하나의 작법으로서 매우 강하게 의식되고 있다(이것이 나카자와 신이치씨가 말하는 사상가의 상냥함의 내실이다). 지향하는 것은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의 획득이 아니다. ‘인류라는 시점에 입각하는 것에 의해서, 우연성이 초래하는 자의적인 여러 가지 범주로부터 사유를 자유롭게 하려고 했던 움직임 그것의 획득이다(따라서 여기에서 제창되었던 것은 포스트모던적인 상대주의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학적 사고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글로벌리즘과 그것이 만들어낸 것(2008년 가을 이후의 세계 동시 공황은 물론, 2001911일의 테러와 알 카에다의 원리주의가 글로벌리즘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테두리안에서 일어난 것은 명백하다)으로부터의 탈출을 가능하게 하는 구명장치로써의 역할도 다하려고 한다. ‘서구근대에서 인류에로--‘비대칭성에서 대칭성으로---라고 우리들의 사고와 행동의 준거점을 옮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처음으로 우리들의 시계에 그 윤곽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한편에서는 풍요로운 있음의 철학으로 지지되었던 인류가 몇만년 살아왔던 많음의 세계이고, 다른 쪽은 의 발견이라는 인지혁명으로 비로소 인류가 손에 넣게 되는, 의미가 의미를 잃는 것 없는 상태라는, 그것을 계속 지켜왔던 이슬람인 것이다

  • 2018-11-18 22:34

    228-230 해석 (인디언)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증식성과 타협하고, 후자의 경우 교의 안에 적극적으로 도입, ‘소화’하여, 자본주의를 예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초기조건’의 단계로부터 원리에 내포시켰던 것인데, 그것에 대(비)하여 이슬람은, 상상계에 군림하는 유일신과의 직접적인 일체감에 어디까지나 심혈을 기울여, 유동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하게 배재한다. 중요한 것은 유일신의 은총 하에 확실한 의미로 가득 찬 현실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하나된 신의 의사의 지배하에 둔다는 것, 상징계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상태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미신---‘생성을 이루고 자기증식을 이루어온 강도를 발하는 물질의 매혹에 이끌려’ 그것을 우러러 받들어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싫어하는, 그 때문에 기호를 알 수 없는 가운데 혼자 걸음을 시작하고, 변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 귀결로서 코란은 화폐가 화폐를 낳는 이자 시스템을 악으로 정의한다. 이자가 금지되는 까닭이다. 이슬람이 의거하는 유일신의 단일성이라는 원리에서 조명해보면, 그리스도교의 교의 변천은 일탈의 역사이고, 자본주의 경제는 인류의 ‘1’의 획득에 대한 배신으로 비친다. 반대로 그리스도교와 자본주의 쪽에 서면, 존재 자체가 ‘경제학비판’인 원리로서의 이슬람은 ‘타자’인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울’로서 부상해온 것이다.

      거기에 <녹색>이 있다.

    우선은 ‘녹색 자본론’의 최후에 ‘타자’와 ‘거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 또 한번 유의하고 싶다. 당연한 일이지만, 거울에 비쳐 나타나는 타자는 그리스도교와 그 연장선상에 출현하는 근대, 후기근대를 북돋아주는 역할로서의 그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세계의 ‘타자’이기 전에(혹은 그 같은 ‘타자’인 동시에) 그것 자체가 자율적인 존재인 듯한 ‘자기’로서의 이슬람, 그리스도교나 자본주의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정의되는 ‘우리들의 타자’로서의 이슬람과는 다른, 적극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정의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슬람을 위한 이슬람’이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주장하고, 광대한 문화권을 만들어낸 자기긍정적인 이슬람을, 나카자와 신이치씨는 <녹색>이라는 표현으로 부르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 2018-11-19 02:21

    221-233 해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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