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자본론]사물과의 동맹(4)

뚜버기
2018-11-1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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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늦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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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도 피지스와 같이 나타난다.’ 그런데 모노에게는 피지스가 자신의 본질로 하고 있는 것 같은 탈은폐성이 없다. 일본어의 근원어인 모노에게, 데카르트-후설-하이데거적인 현상학적 해석을 입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노는 빛의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에는 어떻게 해도 융합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영혼을 둘러싼 오리구치 시노부의 사고에서 훌륭하게 나타나 있는 것처럼, 모노라는 말은 타마-타마시히가 가리키는 자발적인(spontaneous) 성장과 증식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나타남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타마는 주변을 밀봉시킨 카히와 같은 공간의 내부에서 성장을 해 나가는 것이기에, 이것을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장소에 덮어져서 숨겨진 상태에서 내포적 강도가 충실해져서 터질 정도의 성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충실해진 타마는 카히의 덮개를 부수고 밖으로 나타나는것이므로, 이것을 은닉된 상태로부터 밝음 속으로 적나라하게 열리는 피지스의 드러남과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피지스가 어둠 속으로부터 밝음(열림) 속으로 드러나오는 것은, 스스로의 빛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빛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태를 자신의 본성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 스스로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덮어지고 감춰져 있던 것을 부수고 넒음 속으로 자신을 풀어놓는 것이다. 하지만 모노의 경우는 다르다. 타마가 자신을 덮고 숨기는 카히의 내부에서 성장을 이루는 것은, 식물의 뿌리가 땅 속에서 늘어나는 것처럼 자신을 분열시킴으로써 스스로에게 넘치는 강도의 팽창을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모노에게는 숨겨진 것, 은닉된 것은 없다. 내포공간에서의 강도의 팽창(왜 그것이 일어나는지는 사고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사고의 외부으므로 내포성으로부터는 사고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은 아닐까)에 의해, 타마는 분열을 거듭하여 엄청나게 증식을 이루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내포공간에서의 긴장을 견딜 수가 없어진 타마강도가, ‘카히를 찢고 외기(外氣) 속으로 나타난다.’ 그 순간 타마의 조성에는 근본적인 변용이 일어나고 존재의 알 안으로부터 병아리가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존재의 병아리가 빛에는 없다는 것에 주의하자. 자신을 불투명하게 하는 피부와 외기 속에서의 생활에 견디기 위한 체모로 덮여서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그야말로 온갖 색이 섞인 빛과 어둠의 호성계로서 하나의 있음이 출현한다.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이것은 빛의 철학인 현상학이 취하려고 한 있음의 기원은 아니다.

그리스어의 근원어인 피지스가 빛의 철학에 의해 인식되었을 때, 피지스의 탈은폐성이 거론되었다. 즉 피지스라는 말로 고대의 그리스인이 사유하려 했던 것과 하이데거에 의해 해석된 피지스가 같다고 확실하게 보장할 수는 없지만, 그 후의 서구세계의 역사적인 전개과정은 분명히 피지스의 현상학적 이해와 같은 방향으로 향한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최초의 서구인 그리스에서의 있다는 것을 둘러싼 사유가, 빛으로 향하는 탈은폐성의 본질을 갖추었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거기에서부터 현상학은 인간의 경험의 기원을 깊이 사고했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도 은폐된 상태로부터 덮개가 제거된 열린 상태로 향하는 의식의 운동으로써 카오스 상태에 있었던 표상이 사리가 분별된, 이성적인 것으로 명료함을 늘려가서 진리를 지향하는 부단한 운동으로 밝혀왔다.

하지만 일본어의 근원어인 모노는 있다는 것의 의미를 그와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였다. 타마의 성장과 증식이 존재의 사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어두움을 밀어 헤치고 본원의 빛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 현상학(과 그것을 필연적으로 출현시킨 서구의 존재사고)은 의식의 작동을 빛의 바탕으로부터 생각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진리의 결합이 일어나고 어둠 속에서 그와 같은 빛이 드러나는 것과 일체가 되어 어둠이 빛으로부터 분리되어가는 과정이 사고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 모노의 사고는, 결코 경험의 내부에서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분리를 진행시키거나 빛을 순수화해서 물질성의 어둠과 대립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모노의 사고에서는 있는것이란 빛과 어둠의 혼성계이고, 그곳으로 열린 인간의 경험도 하나의 혼성계이며 빛과 어둠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 모든 존재는 불투명한 피부로 뒤덮이고 음예(陰翳,그늘)를 잉태한 것으로써 생각되었다.

이러한 모노의 존재적 사고에 대한, 근대시대의 가장 훌륭한 표현을 우리는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음예예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니자키는 일본어의 근원어의 심오한 감각에 흠뻑 젖으며 이 글을 서술하였다.

 

우리 동양인들은 손쉽게 그늘을 만들어서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긁어모아 묶으면 보랏빛 오두막이 되고 풀면 들판이 되었단다라는 옛 노래가 있는데, 우리들의 사색 방식은 그런 모습으로, 아름다움은 물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드는 그늘의 무늬, 명암에 있다고 생각된다. 야광 구슬도 어둠 속에 놓아두면 광채를 내뿜지만 밝은 햇빛 아래에 내놓으면 보석의 매력을 잃듯이, 그늘의 작용에서 벗어나면 아름다움은 없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 선조는 여자를 마키에와 나전이 된 그릇과 똑같이 여겨, 어둠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으로서 가능하다면 전체를 그늘에 가라앉혀 버리고 긴 소매와 긴 치맛자락으로 손발을 구석 안으로 감추고, 어느 한 곳, 머리만을 두드러지게 한 것이다. (음예예찬)

 

다니자키의 문장이 멋지게 나타내고 있듯이, 모노를 둘러싼 근원적인 사고는 모름지기 에로틱한 것이다. 유대교의 미드라시에서 설명되어 있듯이, 빛을 나타내는 Or(אור)가 피부를 나타내는 ‘Or(עוֹר)에서 변화했을 때, 젠더의 원초적인 분열이 일어나서, 거기에서 여성이라는 존재가 생겨났다. 이 여성은 그늘을 찬양하며, 그리스적인 투명한 진리에 대항하는 에로티시즘의 존재로서 세계에 나타난 것이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Or(עוֹר)야말로 일본어의 근원어인 모노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모노와 타마도, 의식의 현상을 산출하는 근원적인 힘을 나타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 근원적인 힘은 후설과 하이데거가 말하는 이 아니라, 이른바 처음부터 부드러운 피부에 감싸인 여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피부 표면은 빛과 어둠과의 혼성계를 이루고, 그늘 속에서 에로티시즘을 끊임없이 발산시킨다.

이렇게 모노와 접하는 것에 의해, 피지스적인 사고권에서 태어난 현상학은, 에로틱화의 변용을 겪게 될 것이다. ‘있음의 사태가 에로티시즘과 함께 사고되는 것이다(다니자키의 문장이 그렇듯이). 그랬을 때, 피지스의 사고에 깊게 연결된 서구 기술을 둘러싼 사고에는 과연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될까. 모노와 타마가 호흡하고 있는 그늘에 가득 찬 어두운 빛이 어떤 기술의 사고를 생겨나게 할까라는, 아직 누구도 대답하지 않은 질문이다

*

유대적인 사고의 전통에서부터 많은 것을 얻으면서 사색했던 레비나스는 ‘현상학의 에로틱화를 계획하고 있다그리스적인 ‘빛의 철학의 자기장에 강하게 묶여있던 현상학을 ‘피부의 철학으로 다시 만드는 것에 의해서감춰진 것과 드러나는 것의 교착하는 사이에 체험되어지는 의식의 현상을 기술하는, ‘에로틱한 현상학을 만드는 것을 그는 실천했던 것이다.

거기에서 배워서우리들은 ‘기술론의 에로틱화를 향하려고 생각한다그것이 오늘날의 필수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기술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의 앎의 방식이지만 서구에서 발달했던 기술은그곳에서의 앎의 방식을 규제했던 ‘알레테이아(사물을 밝음 속으로 데리고 오는 일감춰져있는 것의 덮개를 제거해서 드러내는 일)’를 통해서 사고되고동시에 스스로의 성격을 결정지어왔다그리고 그곳에 발달한 기술은 이제 행성을 뒤덮을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고마침내는 생명에까지 그 위력은 행사되기 시작했고인류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주려고 하고 있다마침 ‘세계의 유럽화가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는데그 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휘둘렀던 것이 알레테이아적인 피지스론이고, 그곳에서부터 발생한 탈은폐성을 지향하는 피지스적 기술인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강한 위기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썼다(이 문장은 그의 저서 기술론 ‘일본의 친구에게라고 제목 붙여진 일본어판 서문에 붙여져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이 전 지구적 규모에서 지배라는 관점으로부터 ‘유럽적인 것을 생각하려고 하는 한 다음과 같이 물어야만 합니다이러한 지배는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인가어디서부터 이 지배는 까닭모를 무서운 힘을 받아들인 것인가그 힘에서 지배적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우리들이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유의하는 한 가장 명백한 특징으로써 근대기술을 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그 결실로써 근대산업사회가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 기술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어의 ‘테크네’(techne) 안에서 의미지어졌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기술이란 끌어내서 세우는 것에 정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테크네는 하나의 앎의 방식입니다그리고 끌어내서 세운다고 하는 것은 세우기 전에는 아직 거기에 현존하고 있지 않았던 것을공공연한, 다가갈 수 있는처치할 수 있는 것으로 끌어내어 세우는 것입니다이러한 끌어내어 세운다는 것즉 기술에서 고유한 특질이 유럽적 서구의 역사 내부에서 근대의 수학적 자연과학의 전개를 통해서 비교할 바 없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 피하는 것도 제지하는 것도 불가능한 힘은그 지배를 전지구상으로 이의 없이 확대해 갈 뿐입니다게다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그때마다 달성되었던 어떤 단계도 끊임없이 극복해가는 것이 이 힘의 타고난 성질입니다과학적 인식과 기술적 발명의 전진은 이 끌어내어 세운다는 것의 법칙성에 속하고 있습니다......

끌어내어 세우는 힘은 잘 사유해보면만일 온갖 질문들 가운데 가장 질문할 가치가 있는 질문에 참을성 있게 머무를 각오를 유지한다면, 반드시 인간 자신의 사명에 어울리는 것에 도달할 것이라는 약속을 그 안에 감추고 있습니다. 그 질문이란서구적·유럽적인 사유가 종래 ‘존재라고 하는 이름 하에 앞세우지(vorstellen)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의 본래의 특질이어디에 숨어있는지, 어디에 스스로를 은폐하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기술론)

 

우리는 그러한 반성을 서양적·유럽적 기술의 사유와는 다른 지점으로부터 행하고 싶다. 일본어의 근원어 모노를 둘러싼 사고를, 우리들은 그러한 반성의 발판으로 선택했다. 인간이 행하는 기술적 행위 일체가 알레테이아적인 자장 속에서 사고되어 온 것이 아니고, 만약 기술에 관련된 것의 본질이 알레테이아적 탈은폐성과 그것으로부터 파생하는 끌어내어 세우고’ ‘도발하는근대기술이라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 사고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되는가를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한 그러한 반성의 최선의 재료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모노는 알레테이아(탈은폐성)를 본질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포공간으로서 (‘카히의 비유를 가져와서) 이미지 되는 내재성의 강도가 자발성에 따라서 분열하고, 내포공간을 극한까지 팽창시켜 마침내 카히의 틈 같은 특이점을 통해서, 실재 속으로 뛰쳐나가는 과정 전체를 감싸고 있는 전()-철학적인 개념이다. 기술(기예)는 그러한 모노의 운동 전체 과정에 연관하여 변화의 속도를 재촉하기도 하고, 방향을 통제하기도 하지만, 피지스의 경우처럼 밝게 드러나는 빛을 향해 방향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타마=영력의 강도가 카히의 밖으로 뛰쳐나가 외기(外氣)에 접촉하는 것을 욕망했다고 해도, 그 속에는 진리(확실한 이치과 확실한 표상)’가 빛을 향하려는 동기 따위는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타마는 이성 따위에는 따르지 않는다.

모노는 그늘로 가득 찬, 이질적인 형성력의 혼성계로 만들어진, 어두운 빛의 운동자이다. 모노란 철저하게 비인격적인 그러한 힘의 혼성체를 지향하고, 그러한 모노를 다루는 기술(기예)이 종교의 영역에서 가지각색의 형태를 이루어 왔다. 모노를 둘러싼 사고는 게다가 민족적인 문화의 경계를 넘어, 많은 문화 속에서 유사한 심화와 발달을 이루어 왔다. 그 의미에서는 지금도 행성적 규모의 표준이 된 서구적인 알레테이아의 자장에 놓인 존재사고보다도, 모노적인 존재사고 쪽이 훨씬 보편성을 가진 사고법이다. 거기에서부터 음예의 기술로도 부를만한 에로틱한 다른 종류의 기술 원리를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기술의 영역에서 우리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에게 배워 음예의 예찬을 쓸 수 있다. 그것은 아마 기술론뿐만 아니라 종교사의 이해도 바꿀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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