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고원>후기 : 엉거주춤 책 읽기

고은
2019-05-21 17:38
278


글쓰기 강학원 <천 개의 고원> 후기
김고은




엉거주춤 책 읽기
1. 불친절한 저자
  저번시간의 언어학에 이어 이번시간에는 기호학에 대한 고원을 읽었습니다. 3고원인 지층화 고원에서 저자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몇 주를 고생하고 났더니, 이제 조금 저자들의 이야기하는 방식을 알 것 같습니다. 적어도 3, 4, 5고원에서는 –제 멋대로- 레파토리를 발견 할 수도 있었습니다. 
  ① 저자들은 초반에 어떤 개념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개 그것은 글의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을 알면 백전백승’같은 느낌으로, 저자들은 비판하고 싶은 개념을 전복시키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는 것 같습니다.
  ② 글 중간 중간에 아무리 저자들이 집중해서 설명하는 것처럼 보여도 함부로 혹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길고 긴 몇 단락의 내용이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전에, 사람들이 오역할까봐 노파심에 엄청나게 긴 유의사항을 늘어놓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③ 같은 단어라고 해서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충분히 해주지 않지만, 때때로 같은 단어를 비판하고 싶은 맥락으로 쓰기도 하고 옹호하고 싶은 맥락으로 쓰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이번 고원에서는 ‘신’이나 ‘안면성’이 그러하였습니다.
  전혀 친절하지 않은 저자들은 온갖 곳에 함정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따라서 중간 중간에 재미있는 부분들을 끊어서 읽을 경우, 함정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저자들의 말투나 전개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아무래도 세미나가 고전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히 저희끼리 하는 세미나 시간(1교시)에는 더듬더듬 함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2. 기호 개념 재점유하기

  저자들은 꼭 비판하고 싶은 개념을 가지고 와서 다시 재점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저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그 다음의 길을 내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당신들은 A라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게 아니라 B이다. 그렇기 때문에 A인 경우 A’의 문제가 생기지만, B로 볼 경우 우리는 여기서 무수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와 같은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저자들에게서 놀라운 점은 비판하고 있는 그 개념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가지고 와서, 잠재성을 발굴해낸다는 겁니다. 이번 고원에서는 기호, 특히 기표 개념을 이런 방식으로 새롭게 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보통 내용인 기의와 그것의 표현인 기표가 합쳐지면 그것을 기호라고 부릅니다. 문탁쌤은 이 책에 라캉과 소쉬르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잘 모르기 때문에 아주 평이하게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딱 맞는 기의가 항상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기호는 기의의 품을 벗어났다고 표현하는데요, 이로써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기호 혹은 기표와 결별하게 됩니다. 기호 자체는 이미 탈영토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러한가? 기호가 탈영토화되었다면, 왜 기호에는 영토가 동반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에서 저자들은 기호가 가진 역설적인 성격을 설명하고, 거기에서 가능성을 발견해냅니다.
3.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저자들이 설명하는 모순, 즉 기만은 세 가지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첫 번째 기만을 가장 흥미롭게 보았고, 저자들의 레퍼토리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본적으로 기호는 자기기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호는 기본적으로 도약하는 탈영토화의 속도를 갖습니다. 하지만 원들의 차이를 유지시키는 연속체의 기운 안에 있기 때문에 영토를 동방하게 되는 것이지요. 영토화에서 탈영토화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묻지 않고, 이미 탈영토화는 계속 일어나는 틈에서 영토화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다, 즉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잠재성을 저자들은 “주체라는 히스테리적 조작이, 근본적인 기만”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기호 작동의 근본에서 잠재성을 찾아낸 것입니다.
  두 번째 모순은 정신분석학자들을 상대로 합니다. 사제들은 계속해서 해석해냅니다. 탈영토화하는 기호를 원 안에 붙들고, 탈영토화를 막기보단 원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나선을 그릴 수 있게) 확장하도록 해주고, 또 방출되는 이놈들의 구심점이 될 기표를 제공해줘야 합니다. 마치 사방팔당으로 뛰어다니는 어린이들을 가둬두지는 못하고 땀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수업을 진행하려고 하는 저의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여하튼 해석하는 사제들에게 기의가 중요한 건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사제들은 모든 것을 해석하려 들고, 오히려 기표를 생산하는 것이 해석의 소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기만입니다. 기표와 기의는 서로를 제시해야만 하는, 때에 따라 새롭게 서로를 가져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모순은 학교가 문제아를 대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탈영토화하는 기호 중에는 원 안에 있는 게 불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아는 주어진 기간 동안 나쁜 것 전체를 떠맡습니다. 문제아는 순환성을 벗어나고, 중심에 기표를 재장전하지 못하고, 가장 밖에 있는 원마저도 넘어서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체계를 도주시킬 위험이 있는” 이런 문제아를 “살해하거나 쫓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아는 학교가 만들어낸 것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문제아는 희생양이 되고, 이 폭력에 노출된 희생양은 다음 길을 열 수 있는 키를 갖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드디어 저자들이 말하고 싶어 했던 주체화와 후-기표작용적 기호계에 대해 다루어봅니다. 기호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주체화와 연결되는지에 대해 다음 세미나 시간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듯 하군요.
  저는 정말 주체화를 저자들이 어떻게 다룰지 너무 궁금합니다. 저자들이 자주 그러하듯 주체화에도 엄청나게 문제제기를 할 것만 같더니만, 막상 다룰 때가 되니까 비판하고 틀면서 또 자신들의 개념으로 가지고 오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저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기 앉으려고 했더니 새똥이 보이고, 여기 앉으려고 했더니 먼지가 잔뜩 쌓여있고…. ‘나는 뭘 해야 하는 거지?’ 섣부르게 앉을 수가 없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아니 적어도 앉는 것에 대한 의미라도 알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계속 제 말을 저자들의 말로 바꿔치기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의 레퍼토리에 이제야 익숙해졌으니, 저 애매한 자세에 대한 저자들의 답변도 조만간 찾게 되지는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댓글 2
  • 2019-05-23 20:35

    텍스트의 내용 분석 위주로 방향성을 잡고서 한 첫번째 세미나였습니다. 주로 들뢰즈/가타리가 '기호체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대결하려 한 것들과,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었는데요. 이것저것 여러가지 예시들을 홀로 떠올리면서 할 수 있어서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 2019-05-23 22:06

    강의실조에서 제일 오랫동안 논의되었던 것은

    "<천의 고원>에서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들/가는 전체의 어떤 맥락에서 5장을 말하는 것인가,

    기호체제를 말하는 것은 세 개의 지층에서 어떤 것인지,

    기호는 내용의 형식, 표현의 형식과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서로 서로가 전제하고 있는 것들이 다르다는 점이 많이 부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또 다른 사람은 왜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갖는지를

    서로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5장에 나온 개념들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서로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자~알' 말해보자.

    표현해보자는 논의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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