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주역> 23. 산지 박(剝) - 석과불식(碩果不食)

향기
2018-11-01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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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바리 주역>은 고전공방 학인들의 주역 괘 글쓰기 연재물의 제목입니다.


그대로 어리바리한 학인들이 어리바리한 내용으로 글쓰기를 합니다형식도 내용도 문체도 제 각각인 채 말입니다.



하지만 압니까언젠가는 <주역>, 그 심오한 우주의 비의그 단 한 자락이라도 훔칠 수 있을지^^ 




산지박.png 



석과불식(碩果不食) - 씨과일은 먹지 않는다




소인들의 전성시대


 박은 떨어지다(落), 깎아낸다(削)는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박피를 생각하면 쉽다. 괘를 보면 맨 위의 효만 양(⚊)이고 나머지는 모두 음(⚋)이다. 음이 양을 깎아내서 양이 달랑 하나만 남은 것으로 본다. 음이 아래부터 자라서 남은 하나의 양까지도 위협하는 형세이다. 주역에서 대개 양은 군자로 음은 소인으로 설명한다. 소인이 군자를 몰아내는 형상이다. 괘의 상(象)을 보면 땅(☷)위에 산(☶)이 있는 모양이라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산이 땅에 붙어 있다고 설명한다. 높이 솟아야 할 산이 땅에 붙어서 아래가 깎이고 무너진 형상.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들은 살기 어렵다. 역경과 절망의 시대이다.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소인들이 만연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다. 이때에는 무엇을 하려고 하면 금방 소인들의 눈에 띄어 박해를 받기 마련이다. 괘의 곳곳에 주역에서 보기 드문 흉(凶)하다는 글자가 있다. 소인들의 시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멈추어 기다리는 것이 박(剝)의 시대를 사는 방법이다. 본래 천도(天道)는 사라지면 다시 자라나고, 꽉 차면 다시 비워진다는 것을 군자는 알기 때문이다. (順而止之 觀象也 君子 尙消息盈虛 天行也)



침상의 깎임


 음이 점점 자라서 흉함이 다가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박괘의 효사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음이 계속 자라 양을 깎아가는 상황을 침상을 깎는 것에 비유했다. 처음에는 침상의 다리가 깎이기 시작한다. 침상이 약간씩 흔들거린다. 침상은 조금씩 조금씩 깎여서 다리가 다 깎여나가면, 침상을 받치고 있는 판이 깎인다. 침상의 본체까지 깎이게 되니 침상은 점점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판까지 다 깎이고 나면 누워있는 사람의 살갗이 깎이게 되니 몸이 깎이게 되는 상황이 된다. 사람의 몸이 깎이면 극심한 아픔을 느끼게 되고, 이미 재앙은 아주 근접해 있는 것이다. 마치 호러영화에서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점점 다가오는 장면처럼 두렵고 끔찍하게 느껴진다. 박(剝)의 시대에는 음이 계속 자라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음이 다가오는 두려움과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시대이다. 몸이 다 깎여나가는 아픔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석과불식.jpg



석과불식의 희망


 음이 점점 자라나 흉함이 이를 데 없지만 가장 위에 있는 하나의 양이 희망의 씨앗이 된다. 신영복 선생님의 해석으로 유명한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나무의 가지 끝에 마지막 남아 있는 과일을 씨과일(碩果)이라 한다. 보통 씨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어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라게 하고 숲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역경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몫이라고 설명하셨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나무는 뼈대만 남고 위태롭게 과일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것을 절망으로만 보지 않으셨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거품과 환상을 거둬내는 것으로 보셨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나무의 근본을 아주 잘 볼 수 있다. 그것을 직시하고 뿌리에 거름을 주어서 튼튼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뿌리가 곧 사람이며, 사람을 키우는 일이 바로 역경을 극복하는 길임을 강조하셨다. 



절망 속의 희망, 희망 속에 절망


 가을이다. 맑은 하늘과 따뜻한 가을 빛 사이로 울긋불긋 나뭇잎들이 아름답다. 여러 가지 열매들이 우리의 식욕을 더욱 돋운다. 이 따스함과 풍요로움은 금방 찬바람에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겨울이 올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움츠린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몸으로 느낄 수 있고 경험으로 누구나 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인생에서도 역시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가 있고 또 다시 봄여름가을겨울이 이어진다는 것은 잘 깨닫지 못한다. 소식영허(消息盈虛)의 변화와 역동 속에서의 연결 지워진 존재라는 것을 잊고 개인의 시점에서 보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그러하듯이 삶 또한 그러하다. 박의 시대는 어려운 시대이지만 극복할 방법이 있고, 절망 속에 희망이 있다. 그리고 박의 시대는 지속되지 않는다. 맨 끝에 양은 변하지 않는 도(道)로 희망의 씨앗으로 변해서 다시 양이 자라나는 복(復)의 시대로 변화한다. 소인들의 시대라고 해서 절망할 필요도 없고, 군자들의 시대라고 해서 마냥 기뻐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계속되는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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